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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화경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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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륜화경공주는 건륭제의 첫 번째 황후인 효현순황후 부찰씨의 딸로, 1731년에 태어났다. 건륭제의 총애를 받아 몽골 왕족에게 시집갔지만, 북경에 머물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세프텡 발주르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1775년 남편이 사망한 후 재혼하지 않고 1792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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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륜화경공주
개요
이름고륜화경공주
로마자 표기Gulun Hejing Gongzhu
정보
출생1731년 7월 31일
출생 장소베이징 보친왕부
사망1792년 9월 30일
배우자색포등파륵주이
자녀액륵극특목이이파파이
딸 넷
가문
왕조애신각라 (출생)
씨족코르친 박이제길특 (결혼)
부친건륭제
모친효현순황후
종교금강승 불교

2. 생애

청나라 건륭제효현순황후 부찰씨의 딸로, 옹정 9년(1731년)에 태어나[2] 건륭 초년에 고륜공주로 책봉되었다.

건륭 12년(1747년), 몽골 코르친 보르지긴 가문의 왕공 색포등파륵주이(세프텡 발주르)와 혼인하였다.[2] 건륭제는 딸을 매우 아껴, 몽골로 보내지 않고 베이징에 머물며 살도록 특별히 배려하였다. 이는 당시 몽골 왕공과 혼인한 공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황귀비에 준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생활했다.[3]

화경공주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두었다.[4] 특히 외아들 악륵철특목이액극파배는 외할아버지인 건륭제가 직접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딸들 역시 유력 가문과 혼인하였다.

1775년 남편 색포등파륵주이가 사망한 후 재혼하지 않고 과부로 지냈으며, 1792년에 사망하여 베이징 차오양구의 묘역에 안장되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옹정 9년 (1731년) 5월 24일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당시 황자였던 홍력(훗날 건륭제)이고 어머니는 그의 적복진인 효현순황후 부찰씨이다.[2] 영수궁의 근태비가 양육을 맡기도 했다. 건륭제 초년에 '고륜공주'로 책봉되었고, 이후 건륭제가 즉위하면서 "고륜화경공주"(固倫和敬公主)라는 칭호를 받았다. '화경(和敬)'은 "화합하고 존경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2]

건륭제 11년 (1746년), 청나라 내무부에서는 공주의 혼수를 준비했는데, 상자, 장막, 가구 등을 포함하여 그 비용이 은 2,500냥에 달했다.[3] 건륭제 12년 (1747년) 3월, 공주는 몽골 코르친 보르지긴 씨족의 보국공 색포등파륵주이에게 하가했다. 결혼식 연회는 자금성의 보화전에서 열렸으며, 건륭제가 직접 주관하였다. 또한 공주의 어머니인 효현순황후장춘궁에서 별도의 연회를 열었다. 결혼식에는 장리(長理), 호위(護衛), 전위(典衛) 등 총 8명의 수행원과 12호(戶)의 인원이 함께 보내졌다.

건륭제는 딸인 화경공주를 매우 아껴, 몽골 왕공에게 시집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몽골로 가서 살게 하지 않고 베이징에 머물도록 특별히 허락했다. 결혼 후에도 공주는 궁궐에서 음식을 제공받는 등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이는 당시 황제의 후궁 중 가장 높은 지위인 황귀비와 동등한 수준이었으며, 황후보다는 조금 낮은 급이었다. 이러한 대우는 기존의 화석공주에게 적용되던 규정을 참고하여 정해진 것으로, 이후 건륭제의 다른 딸들인 화효공주나 화정공주조차도 화경공주만큼의 대우를 받지는 못했다.[3] 화정공주의 경우, 결혼식 연회 규모가 화경공주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2. 2. 혼인

건륭 초년에 고륜공주로 책봉되었다.

건륭 11년 (1746년), 내무부는 공주의 혼수를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상자, 장막 등을 추가로 마련하는 데 2,500냥이 들었다. 건륭 12년 (1747년) 3월, 공주는 코르친 보르지긴 가문의 보국공 색포등파륵주이(세프텡 발주르)에게 시집갔다.[2] 건륭제는 딸을 매우 아껴 몽골로 보내지 않고 베이징의 저택에 머물게 하였다.

결혼식 연회는 자금성의 보화전에서 건륭제가 직접 주관하여 열렸으며, 이는 몽골 왕공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이례적인 대우였다. 공주의 어머니인 효현순황후 역시 장춘궁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공주에게는 장리(長理), 호위(護衛), 전위(典衛) 등 총 8명의 수행원과 12호(戶)가 함께 보내졌다.

하가하기 전, 내무부는 공주가 매일 먹는 식사의 기준을 정했는데, 화석공주의 예규를 참고하여 고륜공주의 정식 기준으로 삼았다. 이는 황귀비보다 높고 황후보다 조금 낮은 수준의 파격적인 대우였으며, 훗날 화정공주화효공주조차 이를 넘지 못했다.[3] 건륭제가 "유래공주격하혼의례(有來公主席下婚儀例)"라는 상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후대의 고륜공주들은 이러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결혼 후 공주는 베이징에서 사치스러운 생활을 이어갔다. 연간 지출은 15,000냥에 달했고, 수당은 80,000냥이었다. 공주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딸 넷과 아들 하나(엘레케 테무르 바바이)를 낳았다.[4] 첫째 딸은 영황의 아들 면덕과 결혼했고, 넷째 딸은 가공주의 아들 펑선훌룬과 결혼했다.

1775년 남편 색포등파륵주이가 사망하여 과부가 되었으나 재혼하지 않았다. 고륜화경공주는 1792년 9월 30일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유해는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묘에 안장되었다.

2. 3. 혼인 후의 삶

1747년 4월, 화경공주는 보르지긴 가문의 몽골 왕자 세프텡 발주르와 결혼했다. 결혼 당시 내무부는 지참금으로 은 2,500냥을 준비했으며, 결혼 연회는 자금성의 보화전에서 열렸다.

화경공주는 몽골 왕자와 결혼했지만 경성에 계속 거주한 최초의 공주였다. 그녀를 위해 마련된 공주부(公主府)는 당시 친왕(親王)이나 패륵(貝勒)의 저택과 이웃했으며, 청나라 역사상 유일하게 고륜공주(固倫公主)의 격에 맞는 공주부를 소유한 인물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몽골 등 멀리 시집간 공주는 최대 1,000냥, 경성에 머문 공주는 최대 400냥의 연봉을 받았으나, 화경공주는 이보다 훨씬 높은 대우를 받았다. 결혼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궁궐에서 식사를 제공받았는데, 이는 황귀비와 동등한 수준의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러한 특별 대우는 훗날 그녀의 이복 여동생들인 화경공주와 화효공주가 누리게 될 총애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3]

화경공주는 부마 세프텡 발주르와의 사이에서 아들 1명과 딸 4명, 총 5명의 자녀를 두었다.[4] 외아들의 이름은 악륵철특목이액극파배(額勒哲特穆爾額爾克巴拜, 엘레케 테무르 바바이)로, 건륭제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이는 '어린 시절 복이 많고 장수하며, 철처럼 튼튼하고 보배처럼 귀하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몽골어로는 '복이 있다'는 의미이다. 야오위안즈(姚元之)의 《죽엽정잡기(竹葉亭雜記)》에 따르면, 이름 중 '철의(哲依)' 두 글자를 빨리 읽으면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었다고 한다. 건륭제가 이 외손자를 얼마나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딸들에 대한 기록으로는 건륭 54년 문서에 셋째 딸(고륜화정공주)이 출가할 때 은 3,500냥, 넷째 딸(화석화각공주)이 출가할 때 은 1,300냥을 받았다는 내용이 남아있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첫째 딸은 영황의 아들 면덕과 결혼했고, 넷째 딸은 가공주의 아들 펑선훌룬(豐紳濟倫)과 결혼했다고 한다.

화경공주는 결혼 후에도 사치스러운 생활을 유지했다. 그녀의 연간 지출은 은 15,000냥에 달했고, 연봉(수당)은 은 80,000냥이었다.

건륭 14년(1749년), 시아버지인 다르칸친왕 나복장곤포(羅卜藏袞布)가 병에 걸리자, 건륭제는 화경공주에게 몽골로 가서 문병하고 시아버지 간호를 도우라고 명했다. 건륭 16년(1751년), 나복장곤포가 병사하자 건륭제는 다시 명을 내려 속히 돌아와 시아버지에게 효를 다하라고 하였다. 《청실록》에는 건륭제가 사돈인 나복장곤포뿐 아니라 부마 세프텡 발주르의 건강에도 관심을 보여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1775년, 남편 세프텡 발주르가 사망하면서 화경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으며, 1792년 9월 30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유해는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다.

2. 4. 자녀

화경공주는 남편 셉텡 발주르(色布騰巴爾珠爾)와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와 딸 넷, 총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4]

장남인 '''얼러저터무얼 어얼크바바이'''(鄂勒哲特穆尔额尔克巴拜, 1747년 ~ 1793년)는 외할아버지인 건륭제로부터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건륭제는 직접 이 외손자의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는 '복이 많고 장수하며 철처럼 튼튼하고 보배처럼 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몽골어 발음으로는 복이 있다는 뜻이며, '철의(哲依)' 두 글자를 빨리 읽으면 장수한다는 의미가 있다고도 전해진다. 청나라 문인 야오위안즈(姚元之)의 《죽엽정잡기》(竹葉亭雜記)에는 건륭제가 이 이름을 지어준 것이 외손자를 얼마나 아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딸들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구분이름배우자비고
장녀보르지긴 부인면덕(綿德) (영황의 장남, 아이신 교로 씨족)자녀 없음
차녀보르지긴 부인정보 없음
삼녀보르지긴 부인아오한 친왕 (홍타이지의 장녀 후손)건륭 54년 기록에 따르면 결혼 비용(출재)으로 은 3500냥이 사용됨.
사녀보르지긴 부인펑선후룬(丰绅济伦) (가혜공주의 장남, 부찰씨)슬하 4남 1녀. 건륭 54년 기록에 따르면 결혼 비용(출재)으로 은 1300냥이 사용됨.



건륭 54년(1789년)의 기록물에는 "3격격 출재는 은 3500냥, 4격격 출재는 은 1300냥"이라는 내용이 있어, 셋째 딸과 넷째 딸의 결혼 비용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있다.

2. 5. 사망

남편 세프텡 발주르는 1775년에 사망하여 화경공주는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았으며 1792년 9월 30일에 사망했다. 그녀의 관은 베이징 차오양구에 있는 묘에 안장되었다.

3. 가족 관계

'''부모'''


  • '''아버지''': 건륭제(乾隆帝) 아이신 교로 홍리(愛新覺羅 弘曆)
  • '''어머니''': 효현순황후(孝賢純皇后) 부찰(富察) 씨족 (1712년 3월 28일 – 1748년 4월 8일)


'''배우자 및 자녀'''

  • '''남편''': 셉텡 발주르(色布騰巴爾珠爾, 1731년 6월 28일 – 1792년 8월 15일)
  • * 호르친 보르지기트(博爾濟吉特) 씨족
  • * '''장남''': 얼러저터무얼 어얼크바바이(鄂勒哲特穆尔额尔克巴拜, 1747년 – 1793년)
  • * '''장녀''': 보르지긴 부인
  • ** 아이신 교로(愛新覺羅) 씨족 옹황(永璜)의 장남 면덕(綿德)과 혼인, 자녀 없음
  • * '''차녀''': 보르지긴 부인
  • * '''삼녀''': 보르지긴 부인
  • ** 홍타이지의 장녀 고륜오한공주(固倫敖漢公主)의 후손인 아오한부 군왕(郡王)과 혼인
  • * '''사녀''': 보르지긴 부인
  • ** 부찰(富察) 씨족 펑선지룬(豐紳濟倫)(가혜공주(和碩和嘉公主)의 장남)과 혼인,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둠

참조

[1] 서적 Daily Life in the Forbidden City: The Qing Dynasty, 1644-2013 Viking 1988
[2] 서적 《清宮內務府奏銷檔》
[3] 서적 《固倫和敬公主吃食份例照依和碩公主例得給事》
[4] 서적 《竹叶亭杂记》/"Records of Pavillion of Bamboo Lea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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