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라 긴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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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무라 긴이치는 메이지 시대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 외교관, 귀족원 후작 의원, 척무 차관 등을 역임했다. 도쿄 제국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외교관보로 청나라에 부임했으며, 영국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했다. 1911년 부친 사망 후 후작을 습작하고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외무성에서 여러 직책을 거쳐 척무성 차관을 지냈다. 연극을 좋아하고 문화계 인사들과 교류했으며, 미국 신외교에 호응하여 정책 입안에 기여했다. 1930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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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라 긴이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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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고무라 긴이치는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긴이치가 태어나기 직전 조부의 사업 도산으로 집안이 빚을 지게 되어, 아버지 고무라 주타로가 외무성 번역국장의 직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무라 가의 생활은 어려웠다.[1] 어린 긴이치는 영양 부족으로 야맹증을 앓기도 했다.[1]
일본 중학교, 제1고교를 거쳐 1907년 도쿄 제국 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보가 되어 청나라로 부임했고, 이듬해 영국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다.[2]
1911년 아버지의 위독으로 귀국, 아버지 사후 후작 작위를 잇고 귀족원 후작 의원이 되었다.[3] 외무성에서 정무국 제1과장, 정보부 차장, 정보부장 등을 역임했고, 1929년 척무성 설치 후 조선부장, 차관에 취임했다.[4] 나카노 세이고의 동방회(1917년, 1936년 결성된 동방회와는 별개)와 동아 동문회에서 활동했고, 국민 문예회(1919년)에 가입하여 국립 극장 설치 운동을 추진했으나 관동 대지진으로 실현되지 못했다.[5]
아버지와 달리 제국주의 외교가 아닌 미국의 "신외교" 정책 입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 1930년 12월 29일 47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2. 1. 유년 시절과 교육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막신 아사히나 코이치의 딸 마치(마치코)이다.[1] 긴이치가 태어나기 조금 전, 조부(주타로의 아버지)인 히로시가 미야자키현에서 경영하던 오비 상사가 도산하여, 고무라 일가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1] 그 때문에 아버지 주타로가 외무성 번역국장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고무라 가의 생활은 어려웠고, 어린 긴이치는 영양 부족으로 야맹증에 걸렸다고 한다.[1]긴이치는 일본 중학교, 제1고교를 거쳐, 1907년(메이지 40년) 7월 도쿄 제국 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도쿄대에서는 성적이 우수하여 은시계를 받았다. 같은 해 11월,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보가 되어 청나라로 부임했다. 이듬해 영국의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다.[2]
2. 2. 외교관 경력
메이지 시대의 외교관 고무라 주타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07년(메이지 40년) 7월, 도쿄 제국 대학 법과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11월,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에 합격하여 외교관보가 되어 청나라로 부임했다. 이듬해 영국의 일본 대사관에 부임했다[2]。1911년, 아버지가 위독해져 귀국했다. 아버지 사후, 외무성에서 정무국 제1과장, 정보부 차장, 정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척무성이 설치되자 조선부장, 차관에 취임했다(당초의 척무 대신은 다나카 기이치 수상 겸임). 다음 하마구치내각에서도 척무 차관으로 유임되었다[4]。
해외 경험이 풍부하고 열렬한 투지로 일에 전념했던 아버지 주타로와 비교해, 다재다능한 긴이치는 외국 근무를 싫어하기도 해서, 아버지만큼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행한 제국주의 외교가 아닌 미국이 주창한 "신외교"에 일본 외무성이 호응하고, 이를 위한 정책 입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
2. 3. 정치 활동
1911년 아버지가 위독해져 귀국했다. 같은 해 12월 22일 후작을 잇고 귀족원 후작 의원이 되었다.[3] 외무성에서는 정무국 제1과장, 정보부 차장, 정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척무성이 설치되자 조선부장, 차관에 취임했다(당초 척무 대신은 다나카 기이치 수상 겸임). 하마구치 내각에서도 척무 차관으로 유임되었다.[4]이 기간 동안 나카노 세이고의 동방회(1917년, 1936년 결성된 동방회와는 별개)에 참가했고, 동아 동문회 이사를 맡았다. 연극이 취미여서 국민 문예회(1919년)에 가입하여 국립 극장 설치 운동을 추진했지만,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5] 연극계, 문예계, 미술계 등에 아는 사람이 많아 "외무성 최고의 명물 남자"라고 불렸다.[7]
해외 경험이 풍부하고 열렬한 투지로 일에 전념했던 아버지 고무라 주타로와 비교해, 다재다능한 긴이치는 외국 근무를 싫어하기도 해서 아버지 만큼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행한 제국주의 외교가 아닌 미국이 주창한 "신외교"에 일본 외무성이 호응하고, 이를 위한 정책 입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
2. 4. 기타 활동 및 사망
1911년 아버지가 위독해져 귀국하였다. 아버지 고무라 주타로 사후 같은 해 12월 22일에 후작을 잇고 귀족원 후작 의원이 되었다.[3] 외무성에서는 정무국 제1과장, 정보부 차장, 정보부장 등을 역임했다. 1929년 척무성이 설치되자 조선부장, 차관에 취임했다(당초의 척무 대신은 다나카 기이치 수상 겸임). 다음 하마구치내각에서도 척무 차관으로 유임되었다.[4]이 기간 동안 나카노 세이고의 동방회(1917년, 1936년 결성된 동방회와는 별개)에 참가했으며, 동아 동문회 이사를 맡았다. 연극이 취미여서 국민 문예회(1919년)에 가입하여 국립 극장 설치 운동을 추진했지만, 관동 대지진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5] 연극계, 문예계, 미술계 등에 아는 사람이 많아 "외무성 최고의 명물 남자"라고 불렸다.[7]
해외 경험이 풍부하고 열렬한 투지로 일에 전념했던 아버지 주타로와 비교해, 다재다능한 긴이치는 외국 근무를 싫어하기도 해서 아버지만큼 출세하지는 못했지만, 아버지가 행한 제국주의 외교가 아닌 미국이 주창한 "신외교"에 일본 외무성이 호응하고 이를 위한 정책 입안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8]
1930년 12월 29일 급사했다. 향년 47세. 묘소는 아오야마 영원(1로 12-1~6)이다.
3. 영전
고무라 긴이치는 1911년에 정5위에 올랐으며, 훈6등 단광욱일장, 욱일소수장, 훈2등 서보장 등을 받았다.
3. 1. 위계
3. 2. 훈장 등
4. 가족
참조
[1]
서적
片山(2011)pp.26-28
[2]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3]
간행물
官報 第8555号
1911-12-25
[4]
뉴스
読売新聞
1930-12-30
[5]
웹사이트
木村敦夫「文化政策としての「国民文芸会」の活動」
http://www.lib.geida[...]
[6]
서적
半藤(1983)p.75
[7]
뉴스
読売新聞
1923-05-10
[8]
서적
片山(2011)p.239
[9]
간행물
官報 第8398号「叙任及辞令」
1911-06-21
[10]
간행물
官報 第8454号「叙任及辞令」
1911-08-25
[11]
간행물
官報 第1674号「叙任及辞令」
19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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