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시 시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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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바야시 시게루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197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1983년 한신 타이거스에서 은퇴할 때까지 투수로 활약했다. 요미우리 시절에는 1976년과 1977년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1977년에는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79년에는 한신으로 이적하여 다승왕과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다시 수상했다. 은퇴 후에는 TBS 야구 해설가와 SK 와이번스,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등에서 지도자로 활동했다. 2010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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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 시게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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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고바야시 시게루 |
로마자 표기 | Shigeru Kobayashi |
출생일 | 1952년 11월 14일 |
사망일 | 2010년 1월 17일 (향년 57세) |
국적 | 일본 |
출신지 | 돗토리현 도하쿠군 아카사키정(현: 고토우라정) |
신장 | 178cm |
체중 | 68kg |
포지션 | 투수 |
투구/타석 | 우투/우타 |
선수 경력 | |
아마추어 | 젠다이마루 |
프로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73 ~ 1978) 한신 타이거스 (1979 ~ 1983) |
드래프트 | 1971년 6순위 |
첫 출장 | 1973년 9월 26일 |
마지막 경기 | 1983년 10월 22일 |
코치 경력 | |
코치 | 긴테쓰 버펄로스/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997 ~ 2001) SK 와이번스 (2007)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009) |
수상 | |
주요 수상 | 2x 사와무라 에이지상 (1977, 1979) 1973년 일본 시리즈 우승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
통계 (NPB) | |
승패 | 139승 95패 |
평균자책점 | 3.18 |
탈삼진 | 1,273 |
2. 인물
고바야시 시게루는 8살 때 아버지에게 글러브를 받아 캐치볼을 하며 야구를 시작했다.[3] 초등학교에서 소프트볼 선수로,[156] 중학교 때 야구부원으로 활동했다.[5] 유라이쿠에이 고등학교(현 돗토리 현립 돗토리추오이쿠에이 고등학교)에서 사이드암 투구폼과 슈토를 익혔다.[10]
간사이 대학 진학 좌절 후 다이마루에 입사, 젠다이마루에서 뛰었다.[159] 언더핸드에 가깝게 투구 폼을 수정하며 커브를 가다듬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트의 주목을 받았으나, 체력 문제와 젠다이마루에 대한 의리로 프로 입단을 포기했다.[160]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후 혹독한 훈련을 통해 성장했다. 1975년 스기시타 시게루 투수 코치와의 갈등으로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지만, 팀 동료의 설득으로 마음을 다잡았다. 1976년과 1977년 팀의 리그 2연패에 기여했다.
1978년 '에가와 사건'으로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한신에서 1979년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이후 오른쪽 팔꿈치 부상과 에가와 사건의 후유증, 팀에 대한 불만 등으로 1983년 은퇴했다.
은퇴 후 TBS 야구 해설자(~1991년),[90] 스포츠 캐스터, 아사히 방송 TV, 아사히 방송 라디오, 선 텔레비전 야구 해설자(1995~1996년)로 활동했다.
2. 1. 어린 시절
8살 때 아버지로부터 야구 글러브를 건네받아 캐치볼을 일과로 삼게 되었다.[3] 초등학교 시절에 소프트볼 선수로 활약했고,[156] 중학교 시절에는 야구부에 소속되었다.[5] 당시에는 위장이 좋지 않아 신장 170cm에 비해 체중이 50kg 정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157]2. 2. 고등학교 시절
1968년, 유라이쿠에이 고등학교(현 돗토리 현립 돗토리추오이쿠에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야구부에 들어갔다. 당시 감독이었던 마키노 노리후미는 고바야시에 대해 "공이 특별히 빠르진 않았지만 컨트롤은 나쁘지 않았고, 커브를 섞어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투구 기술은 중학생 수준이 아니었다"고 평가했다.[8]2학년 때 오버핸드에서 사이드암으로 투구폼을 바꾸면서 구속과 구위가 모두 향상되었고, 슈토를 습득했다.[10] 3학년 때는 에이스로 활약했지만, 그해 춘계 주고쿠 대회 돗토리현 예선 결승에서 요나고히가시 고등학교에게 패했고, 하계 고시엔 대회 돗토리현 예선에서는 준결승에서 요나고 고등학교에게 패하며 고시엔 대회 진출에는 실패했다.[13]
2. 3. 젠다이마루 시절
간사이 대학 야구부 입학이 좌절된 후, 1971년에 다이마루에 입사하여 고베점 포목 매장에서 근무하며 젠다이마루에서 활약했다.[159] 이 시기에 구종을 늘리기 위해 투구 폼을 언더핸드에 가깝게 수정하여 커브의 위력을 높였다.1971년 5월,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트였던 이토 기쿠오는 닛폰 석유와의 연습 경기에 등판한 고바야시를 주목했다. 도시 대항 야구 대회 교토 예선 후 긴테쓰와 난카이도 고바야시를 주목했다. 하지만 고바야시는 체력적인 문제와 젠다이마루에 대한 보답을 이유로 프로 입단을 포기했다.[160] 요미우리는 1년간 협상권을 확보하기 위해 그해 드래프트 회의에서 고바야시를 6순위로 지명했고, 고바야시는 입단을 포기했다.
1972년, 고바야시는 교토 사회인 춘계 대회에서 역대 두 번째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고, 교토시장배 쟁탈 사회인 야구 대회 준결승전과 결승전에서 완봉승을 거두는 등 활약했다. 젠다이마루는 3년 만에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출전을 결정지었고, 고바야시는 결승 리그에서 닛폰 신약을 상대로 완투승을 거뒀다. 제43회 도시 대항 야구 대회 1차전에서 덴덴도호쿠를 상대로 선발 등판해 5이닝 1실점으로 막았지만 팀은 패했다. 이후 고바야시는 요미우리에 입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2. 4. 프로 야구 선수 시절
입단 전에는 프로 구단 연습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습은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고 근육통을 참아내며 연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춘계 스프링 캠프 중 5일간은 1군에서 보냈다. 처음 1군에서 연습했던 날 고바야시는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등과 같은 주력 선수들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무슨 연습을 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날 정도”라고 긴장하면서 “여기가 프로구나, 여기가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장소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32] 후에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에모토 다케노리는 고바야시의 신체를 “3개의 와이어를 1개 묶음으로 만들어서 더 나아가 그 와이어를 묶어서 만든 것 같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평가했지만 고바야시에 의하면 프로에 입단한 해의 연습으로 다져진 거라고 말했다.[33]1973년에는 2군(이스턴 리그)에서 7승 5패 10세이브, 평균 자책점 2.43의 성적을 기록했고[34] 시즌 종반이던 9월 26일에 주니치 드래건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 1군 첫 등판, 구원 등판해 좋은 결과를 남겼다.[35] 10월 11일 한신 타이거스전(고라쿠엔 구장)에서 팀의 6번째 투수로 등판해 1이닝을 던져 무실점으로 막았다. 이 경기는 요미우리의 센트럴 리그 우승을 좌우하는 경기라고 불릴 정도로 닛폰 TV 계열에 방송 예정 범위를 넘어서 방송되는 등 야구 팬들의 주목을 끌어 고바야시의 존재가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36] 시즌 종료 후 고바야시는 은사였던 마키노 노리후미에게 “아마 프로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37]
1974년 1월, 고바야시는 다이마루에서 근무할 당시의 예전 동료였던 여성과 교제한 끝에 결혼했다[37](그 후에 이혼[38]). 고바야시는 입단과 동시에 결혼할 생각이었지만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으로부터 ‘결혼을 1년 늦추고 야구에만 전념하라’는 설득을 받아 결혼을 연기했다.[39] 그 해부터 등번호 40번을 19번으로 바꾸면서 1군에 정착하게 됐다.[40]
1975년, 가와카미에 뒤를 이어 나가시마가 감독으로 취임한 요미우리는 구단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 성적(6위)을 기록했다. 시즌 종료 후 고바야시는 1군 투수 코치였던 스기시타 시게루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을 가지면서 은퇴를 결심했고 한때 프로 골퍼 전향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마가와 그라운드에서 실시한 추계 연습에서 고바야시가 긴장을 풀기 위해 니우라 히사오와 실내 연습장에서 서로 장난치던 중 스기시타가 “장난치지 마, 이 멍청한 자식아! 내가 좋다고 할 때까지 밖에서 뛰어!”라고 크게 호통쳤고, 빗속을 3시간에 걸쳐 러닝을 강요당했다.[41] ‘이젠 용서받을 수 있겠지’라고 생각한 두 사람이 러닝을 마쳤을 때에는 연습은 이미 끝났고 고바야시·니우라를 제외한 선수들과 스기시타를 비롯한 코칭 스태프들도 그라운드에서 철수했다. 이에 반발한 고바야시는 2군 투수 코치 미야타 유키노리에게 전화를 걸어 현역 은퇴에 관한 입장을 전한 뒤 골프채를 구입하는 등 연습을 쉬면서 프로 골퍼 전향을 위한 준비를 진행했지만[41] 팀 동료 다카하시 요시마사로부터 전화로 설득을 받고 스기시타에게 사죄하고 연습에 다시 복귀했다.[42][43]
1976년에는 하리모토 이사오와 가토 하지메 등을 트레이드로 영입하여 전력 보강을 단행한 요미우리는 2년 만에 센트럴 리그 우승을 제패했고 고바야시는 그해 18승과 평균 자책점 2.99의 성적으로 모두 리그 2위의 성적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10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구원 등판했다.[44] 한큐 브레이브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체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1977년에는 팀이 2년 연속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고바야시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18승(평균 자책점 2.92)을 올렸다. 다승왕과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을 차지할 수는 없었지만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 에이지상을 수상했고 베스트 나인에도 선정(투수 부문)됐다.[45] 같은 해 한큐 브레이브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체 5경기 중 4경기에 등판했는데 1차전에서 일본 시리즈 첫 선발 등판을 이뤄 야마다 히사시와 투수전을 펼쳤지만 제구력 난조로 실점을 연발하는 등 2이닝만에 조기 강판돼 패전 투수가 됐다.
2. 4. 1.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고바야시는 입단 초기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지만, 요미우리에서의 연습은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고 근육통을 참으며 훈련을 따라갔다. 춘계 스프링 캠프 동안 5일간 1군에서 훈련하며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등 주력 선수들의 분위기에 압도당하기도 했다.[32] 훗날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에모토 다케노리는 고바야시의 근육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고바야시는 프로 입단 후 연습으로 다져진 결과라고 말했다.[33]1973년 2군에서 7승 5패 10세이브, 평균 자책점 2.43을 기록하며 가능성을 보였다.[34] 9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1군에 데뷔하여 좋은 투구를 보였고,[35] 10월 11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는 팀의 리그 우승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서 1이닝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주목받았다.[36]
1974년에는 등번호를 19번으로 변경하고 1군에 정착했다.[40]
1975년 팀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를 기록했고, 고바야시는 스기시타 시게루 투수 코치와의 갈등으로 은퇴를 결심하기도 했다. 스기시타 코치는 고바야시에게 빗속에서 3시간 동안 달리기를 강요했고, 이에 반발한 고바야시는 은퇴 의사를 밝혔지만,[41] 팀 동료 다카하시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스기시타 코치에게 사과하고 복귀했다.[42][43]
1976년과 1977년, 요미우리는 리그 2연패를 달성했고, 고바야시는 팀의 핵심 투수로 활약했다. 1976년에는 18승과 평균 자책점 2.99로 리그 2위를 기록했고,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6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1977년에는 18승(평균 자책점 2.92)을 기록,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45] 1977년 일본 시리즈 1차전에서는 야마다 히사시와 선발 맞대결을 펼쳤으나, 제구력 난조로 2이닝 만에 강판당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78년 11월, 요미우리는 에가와 스구루와 드래프트 전날 입단 계약을 맺는 이른바 '에가와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바야시는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는 등 큰 파장을 겪었다.
2. 4. 2. 에가와 사건에 의한 전격 트레이드
1978년 11월 20일,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야구 협약의 허점을 이용하여 전년도 드래프트 회의에서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에게 1순위 지명을 받은 에가와 스구루와 드래프트 회의 전날에 드래프트 외 입단 계약을 체결했다. (에가와 사건)[46]그러나 센트럴 리그 회장인 스즈키 류지는 에가와와 요미우리 간의 입단 계약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에 반발한 요미우리는 드래프트 회의를 거부했다. 드래프트 회의에서 한신 타이거스가 에가와와의 협상권을 획득했지만, 요미우리는 "전 구단이 출석하지 않은 드래프트 회의는 무효"라고 주장하며 에가와의 지위 보전을 요구하는 가처분 신청을 도쿄 지방 법원에 제기함과 동시에 일본 야구 기구를 탈퇴하고 새로운 리그 설립을 시도했다.[47]
12월 21일, 일본 야구 기구 커미셔너인 가네코 사토시는 "드래프트 회의는 유효"하며 "타이거스가 에가와에 대한 교섭권을 가진다"는 결정을 내렸지만, 다음 날 "에가와는 일단 한신과 입단 계약을 맺고, 그 후 바로 요미우리로 트레이드시키는 형태로 해결을 원한다"는 "강력한 요청"을 표명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여론은 반발했고, 에가와의 트레이드 상대가 누가 될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48]
트레이드 기한은 1979년 1월 31일로 정해졌고, 아라우라 히사오, 다카다 시게루, 아와구치 겐지, 니시모토 세이 등과 함께 고바야시의 이름도 거론되었다.[49] 당초 에가와와 요미우리 사이에서는 금전 트레이드로 합의가 되어 있었다.[51]
요미우리의 캠프는 2월 1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 전날인 1월 31일 오전, 고바야시는 캠프지인 미야자키로 가기 위해 하네다 공항에 도착하여 팀 동료와 합류하려 했지만, 구단 관계자들에게 이끌려 호텔 뉴 오타니로 연행되었다.[53] 구단 사장인 하세가와는 고바야시에게 "자네가 승낙하지 않으면 자이언츠는 센트럴 리그를 나가야 해"라며 트레이드를 종용했다.[52] 고바야시는 몇 시간 동안 생각한 끝에 트레이드에 동의했고, 2월 1일 오전 0시에 도쿄 시내 구단 사무소에서 기자 회견을 열었다.[58]
회견에서 고바야시는 한신으로의 이적에 동의한 취지를 발표하고 "희생되었다는 기분은 없습니다. 저 자신, 지금도 요미우리를 좋아합니다. 에가와 군은 이야기가 잘 풀렸으니까, 앞으로 힘들겠지만, 요미우리의 일원으로서 힘내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61] 그러나 속으로는 "이제 빨리 해방시켜 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63]
2월 8일에 열린 프로야구 실행위원회에서 요미우리의 행동은 타 구단으로부터 강하게 비난받았고, 고바야시와 에가와의 트레이드는 백지화되어,
- 고바야시는 다시 한신으로 트레이드한다.
- 에가와의 요미우리 이적은 개막일까지 인정하지 않는다.
- 요미우리는 6월까지 에가와의 선수 등록을 자제한다.
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한, 가네코는 커미셔너를 사임했다.[65]
1979년 2월 10일, 고바야시는 오사카시에서 기자 회견을 열고 한신 입단을 공식 발표했다.[68] 등번호는 고바야시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요미우리 시절과 같은 '19'번으로 정해졌다.[69] 기자회견을 마친 고바야시는 곧바로 한신의 캠프지인 고치현 아키시로 향했고[70], 이튿날 2월 11일에는 '비극의 영웅'을 보기 위해 당시 아키시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000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71]
2. 4.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79년 2월 10일, 오사카시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신 타이거스 입단을 공식 발표했다.[68] 등번호는 고바야시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과 같은 '19'번으로 정해졌다. 기자회견을 마친 고바야시는 곧바로 한신의 캠프지인 고치현 아키시로 향했고, 고치현의 라디오 방송국은 고바야시가 도착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이튿날 2월 11일에는 '비극의 영웅'을 보기 위해 당시 아키시의 인구 절반에 해당하는 1만 2,000명의 사람들이 몰려와 스프링 캠프 주변에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한신의 주력 선수였던 가케후 마사유키에 의하면 스프링 캠프에서의 첫 미팅 때, 고바야시는 인사하면서 ‘요미우리에게는 전통이 있지만 한신에는 전통이 없다’라고 발언했다고 한다. 가케후는 이 발언에 대해 ‘분했다’, ‘대체 뭘 말하는거야’라는 인상을 가졌지만 훗날엔 고바야시의 진심은 ‘승리에 대한 집념의 차이를 지적한 것은 아닐까’ 라고 밝혔다.고바야시는 요미우리에 대한 미련이 있으면서도 “요미우리에게만은 지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면서 요미우리전에 맞춰 자신의 로테이션을 짜기 위해 돈 블레이저 감독에게도 말했다. 개막 2경기째가 되는 4월 10일 한신 고시엔 구장에서의 경기를 시작으로 요미우리전에서의 8연승을 장식해 ‘요미우리 에이스의 무서움’을 과시했다. 트레이드 전, 고바야시에겐 “자신은 요미우리의 필요한 투수다”라는 자부심이 있었지만 에가와 스구루와의 트레이드 상대가 됐을 때는 “고바야시를 내서라도 에가와를 잡고 싶다”, “고바야시보다 에가와 쪽이 전력이 된다”라고 구단측이 판단한 것이라고 생각해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요미우리전에 등판했을 때의 고바야시는 평상시에 보인 쿨한 태도를 버리고 벤치 뒤에서 목소리를 내며 기합을 불어넣는 등의 행동으로 투지를 노출했다. 또 요미우리전에 등판하는 날은 팽팽한 분위기를 감돌게 해 신문기자는 구장에 들어간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고바야시가 그날 경기에 선발로 등판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하였다.
그 해에 고바야시는 22승, 2.89의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는 성적을 남겨 2년 만에 사와무라 에이지상(역대 두 번째로 복수 구단에서의 사와무라상 달성)과 베스트 나인을 연거푸 수상했다. 가케후 마사유키는 고바야시가 이적 첫 해에 이러한 성적을 남겼던 것에 대해 ‘요미우리에 대한 이기려는 고집과 같은 것을 보였다’라고 말했고 ‘토박이’로 4번 타자인 자신에 대해 ‘이런 사람에게 질 수 없다’라는 중압감을 느끼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고바야시 자신은 훗날 1979년 시즌에 대한 아래와 같은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적 2년째인 1980년 8월 16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요미우리전에서 처음으로 에가와와 투수전을 펼쳤다. 3실점으로 완투한 에가와에 비해 고바야시는 5이닝 동안 4실점을 기록하면서 강판됐고 경기는 요미우리가 승리하여 에가와는 승리 투수가 됐다. 경기 종료 후 에가와가 흥분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바야시는 “작년에 맞붙었는데 우리가 이겼었다. 하지만 무엇인가 요미우리에 대한 의식이 나 자신 속에서 너무 바뀌어버렸다”라고 말했다. 곤도 다카오에 의하면 실제로 고바야시는 이때쯤부터 요미우리전을 치르기 전에도 이전과 같이 긴장하는 분위기를 풍기지 않게 됐다. 곤도는 “고바야시가 마음속에서부터 불타올라 마운드에 설 수 있었던 건 실제로 이적 1년째인 79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하고 있다. 1980년 이후에도 고바야시는 매년 두 자릿수의 승수를 올렸지만 유독 요미우리와의 전적에서 5승 15패라는 최악의 성적을 남겨 패전 수가 더 많아졌다. 고바야시에 따르면 1980년 이후 요미우리에서 신인 선수가 두각을 나타내며 ‘같은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다른 팀’이 돼버린 것도 애당초의 “넘치는 듯한 마음”이 옅어진 것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1982년 시즌 종료 후, 고바야시는 "다음 시즌에 15승을 올리지 못하면 유니폼을 벗겠다"라고 선언했는데, 이 발언은 다음 시즌으로 향하는 자세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고바야시는 정말로 은퇴를 의식하고 있었다. 원인 중 하나는 오른쪽 팔꿈치에 있었다. 고바야시의 오른쪽 팔꿈치는 1978년경부터 제대로 뻗을 수가 없게되면서 1982년에는 안쪽으로 강하게 굽힐 수가 없게 됐다. 게다가 1981년경부터 하반신의 밟고 당김이 말을 듣지 않게돼 어깨의 힘에 의지하고 전력투구를 계속하였지만 오른쪽 팔꿈치 상태는 더 악화됐다. 또, 연봉이 오르지 않아서 요미우리 시절에 경험한 ‘팀으로서 이기기 위한 야구’를 경험할 수 없는 가운데 에가와 사건 이후 꼬리표처럼 붙어다녔던 ‘비극의 영웅’이라는 이미지에도 싫증이 나서 ‘좋아하는 야구를 하고 있다’라고 감각을 느끼는 등 야구에 대한 정열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한 이때쯤 되면 다부치 고이치의 방출로 상징되는 한신 선수에 대한 냉정한 취급이나 승급에 있어서도 소극적인 자세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예전 팀 동료에게 ‘요미우리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토로했던 사실이 스포츠 닛폰에 의해 보도됐다. 1983년 7월에는 오사카 기타신치에 음식점을 개업하는 등 현역 은퇴 후를 대비해서 사업에도 뛰어들었다.[165]
1983년 시즌 개막 후, 고바야시는 15승을 기록할 수 있을지가 불투명한 상황 속에서 은퇴를 결심하게 됐다. 6월 25일 주니치 드래건스전에서 그동안 ‘오리’로 삼았던 오시마 야스노리에게 ‘자신 있게 던지는’ 안쪽의 슈토를 공략했지만 홈런을 얻어맞았다. 이때 고바야시는 프로 야구 선수가 된 뒤 처음으로 ‘무릎이 쑥 빠지는 듯한 허탈감’에 시달렸다고 한다. 직후인 7월 초 고바야시는 당시 닛칸 스포츠 기자였던 이사카 요시유키에게 “나, 그만둘게”라며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다.[165] 그 후에도 고바야시는 오시마에게 당하는 등 결국 8월에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은퇴할 당시의 심경에 대해 고바야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은퇴의 진짜 이유가 오른팔 혈행 장애였음을, 고바야시는 팀 동료 가와토 고조에게만 털어놓았다.[166] 10월 29일에 현역 은퇴를 표명했다.
2. 5. 은퇴 후
현역 은퇴 후 고바야시 시게루는 TBS 야구 해설자(~1991년)를 맡았다.[90] 텔레비전에서는 『JNN 스포츠 채널』, 『쓰쿠시 테쓰야 NEWS23』 등에서 스포츠 캐스터로 활동했다. 고바야시는 야구 해설에서 사용하는 "보여주기 공", "꽂아 넣다"와 같은 표현을 자신이 고안했다고 밝혔다.[91] 탤런트, 배우로도 활동하며 프로 야구 선수 시절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기도 했다.[92]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아사히 방송 TV, 아사히 방송 라디오, 선 텔레비전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방송 활동 외에도 사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는데, 1983년 7월에는 오사카 기타신치에 음식점을 개업하기도 했다.[87] 그러나 1995년 제17회 참의원 선거에 상쾌 신당 비례대표 1위로 입후보했지만 낙선했고, 이로 인해 큰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96] 버블 경제 붕괴로 인해 현역 시절부터 운영하던 음식, 부동산 사업 등이 경영난에 빠져 빚을 지기도 했다.[97]
1997년 긴테쓰 1군 투수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98] 1999년에는 2군 배터리 종합 코치로 강등되기도 했지만,[99] 나시다 마사타카 감독 부임 이후 1군 투수 코치로 복귀했다.[101] 2001년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나, 빚 문제 등으로 인해[98] 같은 해 코치직에서 물러났다.
긴테쓰 코치 퇴임 후에는 후쿠이현아와라시의 골프장 지배인을 맡으며[105] J SKY SPORTS 야구 해설자로 활동하기도 했다.[106][107] 이후 자기 파산을 신청하고[109], 도쿄 스포츠 전속 평론가로 활동하며[110] 야구 칼럼을 연재했다.
2007년 한국 SK 와이번스 2군 투수 인스트럭터로 취임하여[113] [153] [154] [114] 아시아 시리즈 한국 대표팀의 토대가 된 강력한 투수진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115] 2008년에는 SK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다.[110]
2009년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군 투수 코치로 부임하여[154] 젊은 투수 육성에 힘썼다. 에지리 신타로, 이토카즈 게이사쿠 등을 사이드스로 투수로 전향시키는 등[119] 선수 개개인에 맞는 지도를 했다.
2. 5. 1. 에가와와의 화해
2007년 가을, 하쿠호도가 기자쿠라의 광고를 통해 에가와 스구루와 고바야시 시게루 두 사람이 일본주를 마시며 대담을 나누는 기획이 시작되었다. 당초 고바야시는 "이제 와서 광고에 출연할 생각은 없다", "내가 한다고 해도 에가와는 어떨까? 아마 거절할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으나, 에가와는 "고바야시가 좋다면 하고 싶다"라는 의향을 밝혀 출연을 승낙했다.[123] 광고의 주제는 '두 사람의 화해'였다.[124]사전 협의 없이 대담 녹화가 진행되었다. 고바야시와 에가와는 그 전까지 거의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에가와는 '사죄'를 주제로 녹화에 임하며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죄송했습니다"라고 건배 전에 사죄했다. 이에 대해 고바야시는 "사과할 필요 없어!"라고 답하며, "힘들었겠지. 나도 힘들었지만 말이야. 둘 다 힘들었어"라고 에가와에게 말했다. 또한 고바야시는 본편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이번 광고 출연으로) 안심할 시간을 만들어 주셨다. 남은 인생이 조금 달라질 것 같아"라고 말했다.
고바야시는 대담 후 에가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2. 5. 2. 갑작스런 사망
2010년, 닛폰햄의 1군 투수 코치로 승격되어 스프링 캠프를 2주일 앞둔 1월 17일, 후쿠이현 자택에서 "등이 아프다"고 통증을 호소하여 후쿠이 현립 병원에 긴급 이송되었다.[185] 병원으로 이송될 당시에는 심정지 상태였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오전 11시경 심근 경색에 의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향년 57세).[187] 사망 전날에는 닛폰햄 본사 주최로 열린 이벤트에 참석하여 평소와 다름없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고바야시의 갑작스러운 사망은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186]영결식은 1월 20일에 거행되었고, 다음 날인 21일 후쿠이시내에서 고별식이 열려 요미우리 시절 팀 동료였던 니우라 히사오를 비롯한 구단 관계자와 고바야시의 친구 등 약 500명이 참석했다. 상주는 내연 관계였던 여성(고바야시에게는 사실상 세 번째 아내)이 맡았다. 법명은 ‘球愛院釋静繁|큐우아이인샤쿠세이한일본어’이다.
3월 3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닛폰햄과 한신의 경기는 ‘고바야시 시게루 추도 경기’로 열렸으며, 같은 달 3월에는 돗토리현 구라요시시에 위치한 쇼핑몰 ‘퍼플 타운’에서 ‘고마워요 고바야시 시게루 투수’라는 이름의 추도전이 열렸다.
유골의 일부는 후쿠이현 요시다군 에이헤이지정에 있는 혼가쿠지에 있으며, 2016년 1월에는 7주기에 맞춰 자신이 총감독을 맡았던 올스타 후쿠이에 의해 혼가쿠지에 기념비가 건립됐다.[188]
3. 플레이 스타일
고바야시 시게루는 한신 이적 당시 일본 프로 야구계에 도입된 스피드 건으로 측정했을 때 최고 구속이 130km/h 후반에 불과했다.[131] 스스로도 "야구 선수로서의 원래 능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몸이 좋은 투수는 80%의 힘만으로도 나보다 10km 이상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지만, 나는 그 속도밖에 낼 수 없지만 투구 하나하나를 항상 120%의 힘을 내면서 던졌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131]
고바야시의 투구폼은 오 사다하루(왕정치)의 한 발 타법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몸을 가라앉히듯이 하여 외다리 상태에서 한번 깊게 모아두어 거기서부터 모으는 시간을 조절하여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도록" 던지는 것이 특징이었다.[132] 고바야시는 "세계 제일의 타자인 사다하루를 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라고 생각한 끝에 이 폼을 고안했기 때문에, 오히려 오 사다하루에게는 "가장 던지기 쉬운 상대"였다고 말했다.[133] 요미우리 시절 고바야시는 한신의 언더핸드 투수였던 우에다 지로를 가정한 타격 연습에서 투수 역할을 맡았는데,[134] 오 사다하루는 고바야시가 던지는 공에 타이밍이 맞지 않아 타격 연습 후 컨디션이 나빠지는 경우도 있었다.[132] 한신 이적 후에도 오 사다하루와의 상성이 좋아, 오 사다하루는 고바야시를 공략하기 위해 외다리 타법을 봉인하고 두 발로 타석에 서기도 했다.[135]
와카나 요시하루는 고바야시가 견제구를 잘 던지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고바야시는 스냅 스로(손목을 사용하여 던지는 것)가 서툴러, 1982년 4월 3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다카기 요시카즈에게 고의사구를 던지려다 공이 3루 쪽으로 빠져 폭투가 되었고, 결국 사요나라 패배를 당했다.[136] 이는 1952년 가네다 마사이치 이후 두 번째 '고의사구 폭투에 의한 끝내기 패배'였으며,[137] 개막전에서는 사상 최초의 기록이었다.
가케후 마사유키에 따르면, 고바야시는 위기 상황에서도 내야수들이 마운드에 모이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이 나의 미학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2]
4. 상세 정보
고바야시는 입단 전 프로 선수들의 연습을 따라갈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연습은 상상 이상으로 엄격하여 근육통을 참으며 겨우 따라갔다. 스프링 캠프 중 5일은 1군에서 보냈는데,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등 1군 선수들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긴장감을 느꼈다고 한다.[32] 에모토 타케노리는 고바야시의 근육을 쇠로 만든 것 같다고 평가했지만, 이는 입단 첫 해 연습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33]
1973년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후, 9월 26일 주니치 드래곤스전에서 1군에 첫 등판했다.[35] 10월 11일 한신전에서는 팀의 리그 우승이 걸린 중요한 경기에 등판하여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36]
1974년 1월,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조언에 따라 1년간 미뤘던 결혼을 했다.[37] 그해부터 등번호를 40번에서 19번으로 바꾸고 1군에 정착했다.[40]
1975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체제에서 팀은 최하위를 기록했고, 고바야시는 스기시타 시게루 투수 코치에게 반발하여 은퇴 후 프로 골퍼 전향을 고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카하시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꿔 야구에 전념하게 되었다.[42][43]
1976년, 하리모토 이사오 등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한 요미우리는 2년 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고바야시는 18승, 평균자책점 2.99로 리그 2위를 기록했고, 10월 1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에서 구원승을 거두며 우승 투수가 되었다.[44] 1976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1977년에도 요미우리는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고바야시는 18승(평균자책점 2.92)을 거두며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45] 1977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선발 등판했지만, 2회에 강판당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78년 11월 20일, 에가와 사건이 발생했고, 고바야시는 이 사건으로 인해 1979년 1월 31일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고바야시의 투구 폼은 오 사다하루의 한 발 타법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몸을 가라앉히듯 한 발로 깊이 모으고, 그 시간을 조절하여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방식이었다.[132] 고바야시는 이 폼으로 오 사다하루를 상대하기 쉬웠다고 한다.[133]
와카나 요시하루는 고바야시가 견제구를 잘 던지지 못했다고 말했다. 1982년 4월 3일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전에서는 고의사구를 던지려다 폭투를 범해 사요나라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136]
고바야시는 위기 상황에서도 내야수들이 마운드에 모이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이 나의 미학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72]
은퇴 후에는 TBS 야구 해설자(1984년~1991년)를 맡았고,[90]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스포츠 캐스터로도 활동했다. 1992년에는 요리 연구가와 재혼했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는 아사히 방송, 선 텔레비전 야구 해설자를 맡았다. 1995년 7월에는 상쾌 신당 후보로 제17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1997년부터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군 투수 코치를 맡아 14년 만에 유니폼을 입었다.[98] 2001년에는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빚 문제 등으로 인해 퇴단했다.
긴테쓰 퇴단 후에는 골프장 지배인을 맡기도 했고,[105] J SKY SPORTS 야구 해설자를 맡기도 했다.[106][107] 2003년에는 자기 파산을 신청했다.[109]
2006년에는 도쿄 스포츠 전속 평론가를 맡았다. 2007년에는 한국 KBO·SK 와이번스 2군 투수 인스트럭터로 취임했다.[113] [153] [154] [114]
2008년에는 SK 임시 투수 코치를 맡았고, 소년 야구팀 '올스타 후쿠이'의 총감독으로 취임했다.[116][117] 2009년부터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154]
고바야시 시게루가 한신으로 이적했을 무렵 일본 프로 야구계에 스피드건이 도입되었는데, 고바야시가 던지는 공의 최고 구속은 130km대 후반이었다.[131] 고바야시는 자신에 대해 "야구 선수로서의 원래 능력은 그렇게 높지 않다"라고 평가했다. "몸 좋은 투수는 80%의 힘만으로도 나보다 10km 이상 빠른 공을 던질 수 있지만, 나는 그 속도밖에 안 나오지만 한 공 한 공을 항상 120%의 힘을 내서 던졌다"라고 말했다.[131]
'''연도별 투수 성적'''
연도 |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1973 | 요미우리 | 6 | 0 | 0 | 0 | 0 | 0 | 0 | 0 | -- | -- | 40 | 11.1 | 5 | 0 | 2 | 0 | 0 | 6 | 1 | 0 | 0 | 0 | 0.00 | 0.62 |
1974 | 44 | 9 | 2 | 1 | 0 | 8 | 5 | 2 | -- | .615 | 538 | 130.1 | 125 | 10 | 29 | 5 | 4 | 72 | 2 | 0 | 48 | 35 | 2.42 | 1.18 | |
1975 | 28 | 12 | 3 | 1 | 1 | 5 | 6 | 0 | -- | .455 | 456 | 106.1 | 103 | 8 | 32 | 5 | 14 | 42 | 0 | 0 | 50 | 39 | 3.31 | 1.27 | |
1976 | 43 | 29 | 7 | 1 | 1 | 18 | 8 | 2 | -- | .692 | 868 | 217.1 | 192 | 30 | 47 | 5 | 9 | 129 | 0 | 0 | 77 | 72 | 2.99 | 1.10 | |
1977 | 42 | 30 | 11 | 3 | 0 | 18 | 8 | 7 | -- | .692 | 897 | 216.1 | 197 | 25 | 65 | 9 | 4 | 155 | 0 | 2 | 89 | 70 | 2.92 | 1.21 | |
1978 | 43 | 31 | 5 | 0 | 2 | 13 | 12 | 2 | -- | .520 | 805 | 191.1 | 176 | 23 | 73 | 11 | 12 | 130 | 3 | 1 | 97 | 87 | 4.10 | 1.30 | |
1979 | 한신 | 37 | 36 | 17 | 5 | 2 | 22 | 9 | 1 | -- | .710 | 1129 | 273.2 | 227 | 23 | 75 | 7 | 15 | 200 | 4 | 0 | 101 | 88 | 2.89 | 1.10 |
1980 | 37 | 34 | 21 | 1 | 0 | 15 | 14 | 0 | -- | .517 | 1127 | 280.1 | 241 | 36 | 57 | 3 | 20 | 179 | 1 | 0 | 104 | 94 | 3.02 | 1.06 | |
1981 | 32 | 30 | 17 | 2 | 2 | 16 | 10 | 2 | -- | .615 | 937 | 230.0 | 202 | 15 | 53 | 7 | 14 | 156 | 0 | 1 | 82 | 77 | 3.01 | 1.11 | |
1982 | 27 | 25 | 4 | 2 | 1 | 11 | 9 | 0 | -- | .550 | 688 | 163.1 | 154 | 17 | 47 | 3 | 8 | 95 | 1 | 0 | 72 | 62 | 3.42 | 1.23 | |
1983 | 35 | 32 | 9 | 3 | 2 | 13 | 14 | 1 | -- | .481 | 890 | 209.0 | 202 | 31 | 60 | 3 | 11 | 109 | 0 | 0 | 116 | 94 | 4.05 | 1.25 | |
통산: 11년 | 374 | 268 | 96 | 19 | 11 | 139 | 95 | 17 | -- | .594 | 8375 | 2029.1 | 1824 | 218 | 540 | 58 | 111 | 1273 | 12 | 4 | 836 | 718 | 3.18 | 1.16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4. 1. 출신 학교
- 돗토리 현립 돗토리 중앙 육영 고등학교(당시 유라이쿠에이 고등학교)
- 간사이 대학 (스포츠 추천 입학이 확실시 되었으나, 대학 측의 스포츠 추천 틀 폐지로 입학 무산[14])
- 다이마루 (고베점 근무[16])
4. 2. 선수 경력
간사이 대학 야구부 주장이었던 기지마 잇코의 권유로 야구부 선발에 참여했으나, 스포츠 추천 범위가 폐지되면서 입학이 무산되었다. 이후 다이마루에 입사하여 사회인 야구팀 ‘젠다이마루’에서 활약했다.1971년, 요미우리 자이언츠 스카우트 이토 기쿠오의 주목을 받았다. 여러 구단의 관심을 받았으나, 프로에 대한 불안감과 젠다이마루에 대한 보답을 위해 프로 입단을 포기했다. 요미우리는 6순위로 지명하여 협상권을 확보했다.
1972년, 사회인 야구 대회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등 활약 후, 요미우리에 입단했다. 계약금은 900만 엔이었고, 1년 차에 1승 달성 시 100만 엔을 추가로 받는 조건이었다.
요미우리의 연습은 매우 엄격했지만, 춘계 스프링 캠프에서 1군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프로의 세계를 경험했다.
1973년, 2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시즌 종반 1군에 데뷔했다. 팀의 센트럴 리그 우승이 걸린 경기에도 등판하여 존재감을 알렸다.
1974년, 결혼 후 등번호를 19번으로 바꾸고 1군에 정착했다.
1975년, 팀은 최하위로 부진했고, 고바야시는 투수 코치와의 불화로 은퇴를 결심하기도 했다. 동료 선수 다카하시 요시마사의 설득으로 복귀했다.[162]
1976년, 18승을 거두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도 6경기에 등판했다.
1977년, 18승을 기록하며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을 수상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 선발로 나섰으나 부진했다.
1978년, 에가와 사건으로 인해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한신에서 활약했다.
4. 3. 지도자·기타 경력
; 지도자-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군 투수 코치(1997년 ~ 1998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2군 투수 코치(1999년)
-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 1군 투수 코치(2000년 ~ 2001년)
- SK 와이번스 2군 투수 인스트럭터(2007년)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스 2군 투수 코치(2009년)
; 해설자
4. 4. 수상·타이틀 경력
고바야시 시게루는 1976년 한큐 브레이브스와 맞붙은 일본 시리즈에서 7경기 중 6경기에 등판하여 2승 1패 1세이브를 기록했다. 1977년에는 팀의 2년 연속 리그 우승에 기여하며 사와무라 에이지상과 베스트 나인(투수 부문)을 수상했다.[45]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5경기 중 4경기에 등판했으나, 1차전에서 야마다 히사시와의 투수전에서 제구력 난조로 2이닝 만에 조기 강판되어 패전 투수가 되었다. 다승왕과 최우수 평균 자책점 타이틀은 획득하지 못했다.4. 4. 1. 타이틀
4. 4. 2. 수상
- 사와무라 에이지상 : 2회 (1977년, 1979년)
- 베스트 나인 : 2회 (1977년, 1979년)
- 최우수 투수 : 2회 (1977년, 1979년)
- 월간 MVP : 1회 (1979년 6월)
- 최다 승리 : 1회 (1979년)
4. 5. 개인 기록
- 올스타 게임 7회 출장(1976년 ~ 1981년, 1983년)
- 일본 시리즈 6경기 등판(1976년 일본 시리즈) ※시리즈 타이 기록[131]
- 일본 시리즈 연속 23타자 무주자(1976년 제3차전 도중~제7차전) ※당시 시리즈 기록(2007년 제5차전 야마이 다이스케가 24타자로 갱신)[131]
4. 5. 1. 첫 기록
- 첫 등판: 1973년 9월 26일, 주니치 드래건스 24차전(고라쿠엔 구장), 7회초에 3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3이닝 무실점[35]
- 첫 탈삼진: 상동, 7회초에 에토 쇼조로부터
- 첫 승리: 1974년 4월 20일, 주니치 드래건스 1차전(고라쿠엔 구장), 4회초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6이닝 무실점
- 첫 선발·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74년 5월 26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 9차전(히로시마 시민 구장)
- 첫 세이브: 1974년 6월 2일, 야쿠르트 스왈로스 9차전(고라쿠엔 구장), 9회초에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완료, 1이닝 무실점
4. 5. 2. 기록 달성 경력
달성 기록 | 날짜 | 상대팀 | 구장 | 비고 |
---|---|---|---|---|
통산 1000투구 이닝 | 1979년 7월 3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한신 고시엔 구장 | 9회초 2사에 달성 |
통산 100승 | 1981년 4월 28일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10이닝 2실점 완투 승리, 역대 79번째 |
통산 1500투구 이닝 | 1981년 5월 29일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9회말 1사에 달성 |
통산 1000탈삼진 | 1981년 8월 4일 |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 요코하마 스타디움 | 4회말에 야시키 가나메로부터, 역대 62번째 |
통산 2000투구 이닝 | 1983년 9월 4일 | 야쿠르트 스왈로스 | 삿포로시 마루야마 구장 | 4회말 2사에 달성 |
4. 5. 3. 기타
- 입단 전에는 프로 구단의 연습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요미우리의 연습은 상상 이상으로 엄격했고 근육통을 참으며 연습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춘계 스프링 캠프 중 5일간은 1군에서 보냈다. 처음 1군에서 연습했던 날 고바야시는 나가시마 시게오나 오 사다하루 등과 같은 주력 선수들의 분위기에 압도당해서 “무슨 연습을 했는지 조차도 기억이 안날 정도”라고 긴장하면서 “여기가 프로구나, 여기가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장소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32] 후에 한신 타이거스에서 팀 동료가 되는 에모토 다케노리는 고바야시의 신체를 “3개의 와이어를 1개 묶음으로 만들어서 더 나아가 그 와이어를 묶어서 만든 것 같은 근육으로 만들어져 있었다”라고 평가했지만 고바야시에 의하면 프로에 입단한 해에 연습으로 다져진 거라고 말했다.[33]
- 고바야시의 투구 폼은 왕정치의 한 발 타법을 참고하여 구축된 것으로, "몸을 가라앉히는 듯이 한 발로 한 번 깊이 모으고, 거기서 모으는 시간을 조정하여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방식으로" 던진다는 것이었다.[132] 고바야시 왈 "세계 최고의 타자인 왕정치 씨를 어떻게 억제할까"라고 생각한 결과 고안한 폼이었기 때문에 왕정치는 "가장 던지기 쉬운 상대"였다.[133]
- 한신 시절에 고바야시와 배터리를 이룬 와카나 요시하루는 고바야시에 대해 "견제구를 잘 던지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1982년 4월 3일의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즈전에서는 고의사구를 던지려다가 공이 3루 측으로 벗어나 폭투가 되어, 사요나라 패배를 당했다.[136] "고의사구 폭투로 인한 사요나라 패배"는 가네다 마사이치가 기록한 이후 2번째 사례였으며, 개막전에서는 사상 처음이었다.
- 올스타 게임 출장: 7회(1976년 - 1981년, 1983년)
- 일본 시리즈 등판 경기: 6경기(1976년) ※시리즈 타이 기록
- 일본 시리즈 연속 무주자: 23(1976년 제3차전 도중~제7차전) ※당시 시리즈 기록(2007년 제5차전 야마이 다이스케가 24로 갱신)
4. 6. 등번호
- '''40''' (1973년)
- '''19''' (1974년 - 1983년)
- '''70''' (1997년 - 2001년)
- '''79''' (2009년)
4. 7. 연도별 투수 성적
wikitext연도 | 팀 | 경기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투구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
---|---|---|---|---|---|---|---|---|---|---|---|---|---|---|---|---|---|---|---|---|---|---|---|---|---|
style="text-align: center;"| | 요미우리 | 6 | 0 | 0 | 0 | 0 | 0 | 0 | 0 | -- | -- | 40 | 11.1 | 5 | 0 | 2 | 0 | 0 | 6 | 1 | 0 | 0 | 0 | 0.00 | 0.62 |
style="text-align: center;"| | 44 | 9 | 2 | 1 | 0 | 8 | 5 | 2 | -- | .615 | 538 | 130.1 | 125 | 10 | 29 | 5 | 4 | 72 | 2 | 0 | 48 | 35 | 2.42 | 1.18 | |
style="text-align: center;"| | 28 | 12 | 3 | 1 | 1 | 5 | 6 | 0 | -- | .455 | 456 | 106.1 | 103 | 8 | 32 | 5 | 14 | 42 | 0 | 0 | 50 | 39 | 3.31 | 1.27 | |
style="text-align: center;"| | 43 | 29 | 7 | 1 | 1 | 18 | 8 | 2 | -- | .692 | 868 | 217.1 | 192 | 30 | 47 | 5 | 9 | 129 | 0 | 0 | 77 | 72 | 2.99 | 1.10 | |
style="text-align: center;"| | 42 | 30 | 11 | 3 | 0 | 18 | 8 | 7 | -- | .692 | 897 | 216.1 | 197 | 25 | 65 | 9 | 4 | 155 | 0 | 2 | 89 | 70 | 2.92 | 1.21 | |
style="text-align: center;"| | 43 | 31 | 5 | 0 | 2 | 13 | 12 | 2 | -- | .520 | 805 | 191.1 | 176 | 23 | 73 | 11 | 12 | 130 | 3 | 1 | 97 | 87 | 4.10 | 1.30 | |
style="text-align: center;"| | 한신 | 37 | 36 | 17 | 5 | 2 | 22 | 9 | 1 | -- | .710 | 1129 | 273.2 | 227 | 23 | 75 | 7 | 15 | 200 | 4 | 0 | 101 | 88 | 2.89 | 1.10 |
style="text-align: center;"| | 37 | 34 | 21 | 1 | 0 | 15 | 14 | 0 | -- | .517 | 1127 | 280.1 | 241 | 36 | 57 | 3 | 20 | 179 | 1 | 0 | 104 | 94 | 3.02 | 1.06 | |
style="text-align: center;"| | 32 | 30 | 17 | 2 | 2 | 16 | 10 | 2 | -- | .615 | 937 | 230.0 | 202 | 15 | 53 | 7 | 14 | 156 | 0 | 1 | 82 | 77 | 3.01 | 1.11 | |
style="text-align: center;"| | 27 | 25 | 4 | 2 | 1 | 11 | 9 | 0 | -- | .550 | 688 | 163.1 | 154 | 17 | 47 | 3 | 8 | 95 | 1 | 0 | 72 | 62 | 3.42 | 1.23 | |
style="text-align: center;"| | 35 | 32 | 9 | 3 | 2 | 13 | 14 | 1 | -- | .481 | 890 | 209.0 | 202 | 31 | 60 | 3 | 11 | 109 | 0 | 0 | 116 | 94 | 4.05 | 1.25 | |
통산: 11년 | 374 | 268 | 96 | 19 | 11 | 139 | 95 | 17 | -- | .594 | 8375 | 2029.1 | 1824 | 218 | 540 | 58 | 111 | 1273 | 12 | 4 | 836 | 718 | 3.18 | 1.16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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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勝投手、電撃引退のナゾ 虎番疾風録其の四(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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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신문
2022-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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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川藤ひとりだけに打ち明けていた引退の真相。(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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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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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BS5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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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프로 야구 12구단 전 선수 컬러 백과 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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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프로 야구 12구단 전 선수 컬러 백과 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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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神様は返事を書かない スポーツノンフィクション傑作選
文藝春秋
202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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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ボクは生き急ぎ過ぎていた」 さまざまな挑戦、借金…これも人生、波乱の半生に悔いなし虎番疾風録其の四 小林繁伝(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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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케이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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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ボクは生き急ぎ過ぎていた」 さまざまな挑戦、借金…これも人生、波乱の半生に悔いなし 虎番疾風録其の四 小林繁伝(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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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小林さん抜けるような投手に…岩隈タイトル宣言
https://www.sponichi[...]
Sponi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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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球団最後の優勝を経験した唯一の現役選手、岩隈久志が近鉄時代に学んだ大切な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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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구단 전 선수 컬러 백과 명감 2003
일본 스포츠 출판사
2003-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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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12구단 전 선수 컬러 백과 명감 2004
일본 스포츠 출판사
200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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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スカイスタジアム2002 ヤクルト vs 中日(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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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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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神様は返事を書かない スポーツノンフィクション傑作選
文藝春秋
202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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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繁さんの言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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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スポWEB
2017-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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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様は返事を書か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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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ハム小林繁コーチ、方針は「シカト育成」
https://www.nikkansp[...]
닛칸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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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総監督永眠
http://www.phoenixs.[...]
オールスター福井
201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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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元阪神・小林繁が遺した「ノート」 MVP左腕が"夢追う野球人"へ伝える若き日の財産
https://full-count.j[...]
Full-Co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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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様は返事を書か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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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ハム小林繁投手コーチ突然死…57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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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繁さん急死=57歳 巨人、阪神の元投手
마이니치 신문
2010-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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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小林繁さん功績たたえ記念碑建立 山田修義や平沼翔太を指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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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 신문
201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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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tube
【プロ野球OBに会いに行く】王さんに1本足打法させなかった小林繁投手を語る【若菜嘉晴】【高橋慶彦】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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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林繁さんが語った江川事件(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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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スポ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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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곤도 아키히토 부고
도쿄 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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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桜CMで、小林繁さん・江川卓さんが初共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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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쿠라
200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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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마사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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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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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마사 공식 홈페이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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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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