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카나 요시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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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와카나 요시하루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1971년 니시테쓰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포수로 활약했다. 한신 타이거스,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를 거쳐 닛폰햄 파이터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1979년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올스타전에 여러 차례 출전했다. 은퇴 후에는 코치와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특히 다이에 호크스 배터리 코치 시절 조지마 겐지를 육성했다. 2001년 타피 로즈의 홈런 기록 경신과 관련하여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는 야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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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카나 요시하루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원어명 | 若菜 嘉晴 |
로마자 표기 | Yoshiharu Wakana |
가나 표기 | わかな よしはる |
한자 표기 | 若菜 嘉晴 |
한국어 음독 | 와카나 요시하루 |
국적 | 일본 |
출생지 | 후쿠오카현 야메군 하이누즈카정 (현: 지쿠고시) |
생년월일 | 1953년 12월 5일 |
신장 | 185cm |
체중 | 89kg |
수비 위치 | 포수 |
투구 | 우 |
타석 | 우 |
프로 입단 연도 | 1971년 |
드래프트 순위 | 4순위 |
첫 출장 | 1974년 4월 10일 |
마지막 경기 | 1991년 9월 29일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니시테쓰 라이온스 (1972) 로다이 라이온스 (1973)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1974~1978)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1974~1978) 한신 타이거스 (1979~1982)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1983~1988) 닛폰햄 파이터스 (1989~1991) |
코치 경력 | |
소속 구단 | 타이드워터 타이즈 (1982)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997~2001) |
2. 선수 경력
1971년 드래프트 4순위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니시테쓰와 후쿠오카 야구가 경영하는 로다이 라이온스(1973년),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 및 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1974년~1978년)를 거쳐, 1979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한신에서는 고바야시 시게루와 배터리를 이루는 등 주력 선수로 활약하며 1979년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고, 타율 3할 3리(리그 10위)를 기록했다. 1982년까지 4년 연속 올스타에 출장했으나, 배우 시라카와 가즈코와의 불륜 문제로 출전 기회가 줄어 오프에 자유 계약으로 퇴단했다.
1983년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 1985년에는 전 경기 출장을 달성하고 올스타전에서 야마우치 가즈히로에 이어 사상 두 번째 양대 리그 홈런을 기록했다. 실용 영어 기능 검정 1급 소지자로, 외국인 선수들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1987년 8월 4일 후지 TV 『프로 야구 진 플레이·호 플레이 대상』에서 "와카나의 헛터치" 플레이로 화제가 되었다. 1989년 닛폰햄 파이터스로 이적하여 1991년 은퇴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초등학교 6학년까지 배웠던 서예에서는 전국 대회에서 입선하여 문부대신상을 수상했다. 야나가와 상고에서는 1970년 춘계 규슈 대회에서 후쿠오카현 예선 남부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오호리고에 패했다.[4] 그 후에도 현 예선에서 패하여, 재학 중에 고시엔에 출전하는 일은 없었다.[4] 야나가와 상업고등학교 시절부터 한신 시대까지 팀 동료였던 마유미 아키노부와는 '납파', '조'라고 부르는 등, 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4]2. 2. 니시테쓰·다이헤이요·크라운라이터 라이온스 시절 (1972년 ~ 1978년)
1971년 드래프트 4순위로 니시테쓰 라이온스에 입단했다. 계약금 700만엔, 연봉 168만엔[1]。 같은 해 입단 선수 중 와카나가 최상위였다[2]。1973년에는 라이온즈는 후쿠오카 야구가 경영하는 체제가 되었고, 당시 나카무라 나가요시 오너가 소유했던 미국 1A의 로다이 라이온즈로 야구 유학을 가는 등 장래를 촉망받았지만, 1군에는 좀처럼 정착하지 못했다. 로다이 재적 시절의 팀 동료로, 나중에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활약하는 래리 할로우가 있었다.
1974년에는 빈혈로 인해 한 달 정도 입원했고, 퇴원 후 와다 히로미 2군 감독이 그의 창백한 얼굴과 야윈 몸을 "시들시들한 채소 같다"라고 평가한 데서 "낫파"라는 애칭을 얻었다[3]。
1975년 가을에는 전력 구상에서 벗어날 뻔했지만,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오픈전에서 상대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평가한 것으로 계약 갱신으로 이어졌다고 한다[4]。
에이스 히가시오 오사무에게는 노 사인을 받고 투구 구성의 기초를 배웠다[5]。
1977년에는 니시자와 마사지, 쿠스기 토오루 등을 제치고 포수 자리를 확보했다. 같은 해 올스타전에도 처음 출전해, 7월 23일의 제1전(헤이와다이)에서는 7회말에 스즈키 타카마사로부터 솔로 홈런을 쳤다. 같은 해에는 규정 타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타율 2할 9푼 2리로 활약했다.
1978년에도 주전 포수로 활약했지만, 타격 면에서 부진했다.
1979년에 타부치 코이치・후루사와 켄지와의 대형 트레이드로, 마유미・타케노우치 마사시・타케다 카즈시와 함께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2.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79년 ~ 1982년)
한신 이적 첫 해 고바야시 시게루와 배터리를 이루며, 고바야시와 평소에도 함께 지내며 "오 씨가 올린 오른쪽 무릎을 노려 슬라이더를 던지자"고 이야기하기도 했다.[5] 강견 포수였지만, 이적 첫 해인 1979년에는 노무라 가쓰야와 일본 타이기록인 시즌 17개의 패스볼을 기록했다. 그 중 14개가 에모토 다케노리가 던진 에모볼이었으며[6], 스파이 대책을 위해 노 사인을 주고 에모토의 공을 받은 것에 의한 것이다.[7][8]같은 해, 선수 경력 유일의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으며, 타격 면에서도 처음으로 규정 타석을 채우며 타율 3할 3리(리그 10위)를 기록하는 등, 한신의 주력 선수로 활약하며 올스타에 4년 연속(1979년 ~ 1982년) 출장했다. 그러나 이적 4년째인 1982년에는, 배우 시라카와 가즈코와의 불륜 관계가 거론되어 수뇌부와 충돌,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고, 오프에 자유 계약으로 퇴단했다.
1979년 5월 29일에는 1경기에서 5개의 삼진을 당하는 최악의 기록을 세웠다.[9]
2. 4.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시절 (1983년 ~ 1988년)
1983년 시즌 도중에 귀국하여 6월 말 간논 준조 감독이 이끄는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에 입단했다. 당시 다이요는 쓰지 야스히코, 가토 도시유키, 후쿠시마 히사아키 등을 포수로 기용하고 있었지만, 모두 나이가 많아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고, 쓰지가 골절로 이탈하는 등의 상황에서 젊은 선수로의 전환을 꾀하고자 영입을 결정했다. 3A 시절 감독이었던 존슨과 간논은 거인 시절 코치와 선수로 함께 했던 것도 입단의 계기가 되었다.1985년에는 곤도 사다오 감독 체제 하에서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본인 유일의 전 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같은 해 3년 만에 올스타전에 출전, 7월 21일 제2차전(가와사키 구장)에서 2회 초 사토 요시노리를 상대로 선제 2점 홈런을 날려 야마우치 가즈히로에 이어 사상 두 번째 양대 리그 홈런을 기록했다.
1986년에는 타율 .288(리그 11위)를 기록했다.
실용 영어 기능 검정 1급 소지자로, 미국 코치 경험을 바탕으로 어학 능력을 활용하여 다이요 시절 거인의 레지 스미스나 워렌 크로마티를 자주 도발했다. 스미스와는 빈볼을 주고받는 악순환을 겪기도 했지만, 1980년대 후반에는 크로마티와의 신경전으로 유명해져 타석에서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엔도 가즈히코가 크로마티를 삼진 처리했을 때, 엔도와 와카나는 머리를 검지로 가리키며 "머리 차이"라고 어필해 크로마티의 분노를 샀지만, "견원지간"은 아니어서 OB 올스타전에서 함께 플레이하기도 했다.
1987년 8월 4일 거인전(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는 홈으로 송구된 공이 바운드되어 와카나의 왼쪽 옆구리에 끼었고, 그대로 포구 자세를 취하며 주자 나카하타 기요시와 크로스 플레이를 펼쳐 자살을 잡아냈다. 이 "와카나의 헛터치"는 후지 TV 『프로 야구 진 플레이·호 플레이 대상』에서 다루어지며 와카나를 상징하는 플레이가 되었다.
같은 해 고바 다케시 감독 취임 후 출전 기회가 감소했고, 1988년 오프에는 구단 비판을 전개하며 수뇌진 및 팀 동료들과 충돌했다.
2. 5. 닛폰햄 파이터스 시절 (1989년 ~ 1991년)
다무라 후지오의 백업 포수로 재적했지만, 콘도는 와카나를 "찬스에 강한 타격. 팀 분위기를 확 바꾸는 캐릭터. 다무라는 초일류 포수지만, 나이를 감안하더라도, 와카나는 일류 포수"라고 평가했다.[13]이적 2년차인 1990년에는 수뇌진으로부터 "사카이 코지로우를 잡아줘"라는 부탁을 받고, 왼팔 투수로 커브가 좋은 사카이를 다이요 시절의 신우라 히사오에 대한 투구 설계를 떠올리며 리드했고, 사카이는 10승을 거두며 신인왕을 다퉜다.[5]
1991년 시즌 종료 후 현역에서 은퇴했다.
3. 지도자 경력
1997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다이에 호크스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아 롯데에서 FA로 입단한 다무라와 함께 조지마 겐지를 지도했다.[5] 1999년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나, 2001년 긴테쓰전에서 타피 로즈와의 승부를 피하라는 지시를 내려 물의를 빚고[20][21][22] 그 해 시즌을 끝으로 코치에서 물러났다.[24]
3. 1.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군 배터리 코치 (1997년 ~ 2001년)
1997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다이에 호크스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았다. 코치 시절에는 롯데에서 FA로 입단한 다무라와 함께 젊은 조지마 겐지를 지도했다.[5]오 사다하루 감독은 조지마의 리드와 포구 미숙을 질책하며 1루수나 3루수로의 포지션 변경을 시사했지만, 와카나는 이에 반론하며 구단에 사임을 신청하기도 했다. 와카나는 도쿄의 자택으로 돌아간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은 오 사다하루 감독의 부인은 "주인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업무에 참견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지금 당신과 주인 사이에서 곤란한 것은 조지마 군이 아닐까요."라며 중재했다. 오 사다하루 감독에게도 와카나가 사과하고 있다고 전했고, 이로 인해 양자는 화해했으며 조지마는 포수로서 성장했다.[18]
2년 연속 리그 우승 및 1999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지만, 2001년 9월 30일 긴테쓰전(후쿠오카 D)[19] 전 배터리 미팅에서, 오 사다하루 감독의 시즌 홈런 기록(55개)과 동률을 이루고 있던 타피 로즈에 대해 "긴테쓰에게 우승을 빼앗기고, 감독의 기록까지 깨지면 면목이 없다. 외국인에게 기록을 빼앗기는 것은 싫다. 오 사다하루 감독은 기록에 남아야 할 사람이다. 로즈에게 적극적으로 승부하지 마라"라고 발언하여 물의를 일으켰다.[20][21][22] 호크스 배터리는 로즈에게 18구 중 단 2구만 스트라이크를 던졌고[23] 제대로 승부하지 않았다(경기 자체는 긴테쓰가 12-4로 승리).[20][21] 10월 1일 NPB 커미셔너가 페어플레이를 요구하는 이례적인 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일 퍼시픽 리그 회장이 호크스에 엄중 주의 처분을 내렸다.[24] 와카나는 그 해 시즌을 끝으로 코치에서 물러났다.
4. 은퇴 후 활동
요시모토 흥업과 매니지먼트 계약을 맺고[14] 라디오 간사이의 골든 나이트 해설자(1992년~1996년)로 활동했다. 해설 외에도 1992년에는 복싱 트레이너 면허를 취득하여 오사카시 요도가와구의 아폴로짐에서 지도했다.[15][16]
1997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전신인 다이에 호크스 1군 배터리 코치를 맡으며 요시모토 흥업, 라디오 간사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코치 시절 롯데에서 FA로 입단한 다무라 히토시와 함께 젊은 조지마 겐지를 지도했고,[5] 조지마를 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17]
조지마의 기량 향상이 더디자 오 사다하루 감독과 자주 충돌했다. 1997년 올스타 기간 중, 오 사다하루 감독은 조지마의 리드와 포구 미숙을 질책하며 1루수나 3루수로의 포지션 변경을 시사했다. 와카나는 반론했지만, 구단에 사임을 신청하기도 했다. 와카나는 오 사다하루 감독의 부인으로부터 "주인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업무에 참견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지금 당신과 주인 사이에서 곤란한 것은 조지마 군이 아닐까요."라는 중재를 받고 오 사다하루 감독과 화해했으며, 조지마도 포수로서 성장해 갔다.[18]
2년 연속 리그 우승과 1999년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지만, 2001년 9월 30일 긴테쓰전(후쿠오카 돔)[19] 배터리 미팅에서 타피 로즈에 대한 발언이 물의를 일으켰다.[20][21][22] "긴테쓰에게 우승을 빼앗기고, 감독(오 사다하루)의 기록(시즌 홈런 55개)까지 깨지면 면목이 없다. 외국인에게 기록을 빼앗기는 것은 싫다. 오 사다하루 감독은 기록에 남아야 할 사람이다. 로즈에게 적극적으로 승부하지 마라"는 내용이었다. 로즈는 1번 타자로 출전했지만, 호크스 배터리는 로즈에게 18구 중 단 2구만 스트라이크를 던졌고[23] 제대로 승부하지 않았다(경기는 긴테쓰가 12-4로 승리).[20][21] 10월 1일 NPB 커미셔너가 페어플레이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10월 2일 퍼시픽 리그 회장이 호크스에 엄중 주의 처분을 내렸다.[24] 와카나는 그 해 시즌을 끝으로 코치를 퇴임했다.
프로 야구 마스터스 리그·후쿠오카 돈타쿠스에 내야수로 참가했다. 2002년부터 2007년까지는 TVQ 규슈 방송, 2009년부터는 후쿠오카 방송에서 야구 해설자가 되었다. 호크스 구단 제작 중계(J SPORTS→니혼 TV PLUS→FOX 스포츠 & 엔터테인먼트→스포츠 라이브+)에도 해설을 하며, FBS의 『멘타이 와이드』와 『바리 하얏! ZIP!』에도 코멘테이터로 출연하고, 2003년부터 스포츠 닛폰 서부 본사→도쿄 본사 서부 총국평론가도 맡고 있다. 니혼햄 OB이기도 하여, 2007년에는 1년 동안 STV 라디오 야구 해설자도 맡았다.
2020년 10월부터 이케다 치카오의 YouTube 채널 「이케다 치카오의 치카 채널!」에 이케다의 파트너 역할로 출연하고 있다.
현재 출연 프로그램은 다음과 같다.
- 바리하얏!ZIP!(후쿠오카 방송) - 화요일 코멘테이터
- 멘타이 와이드(후쿠오카 방송) - 수요일 코멘테이터
- 유메 쿠칸 스포츠(후쿠오카 방송)
- HAWKS 프로 야구 중계(스포츠 라이브+) - 해설
- DRAMATIC BASEBALL(후쿠오카 방송 제작, 소프트뱅크가 관여하는 비지터 게임에서는 요미우리 TV・히로시마 TV등 계열국 제작의 중계에도 출연하는 경우가 있다) - 해설
- 나이트 셔플(후쿠오카 방송, 부정기 출연)
- VIVA! SPORTAS (TVQ 큐슈 방송)
- 이제 밤인가(KBC 라디오, 야구 시즌 오프)
- 부기우기 라디오(KBC 라디오, 부정기 출연)
- J SPORTS STADIUM(J SPORTS, 야구 시즌)
- STV 라디오 파이터즈 스타디움(STV 라디오)
5. 수상 및 기록
若菜嘉晴|와카나 요시하루일본어는 1979년에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4]
5. 1. 수상
若菜嘉晴|와카나 요시하루일본어는 1979년에 다이아몬드 글러브상을 수상했다.5. 2. 주요 기록
구분 | 내용 |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 1회(1979년) |
첫 기록 | |
첫 출장 | 1974년 4월 10일, 대 난카이 호크스 1차전(오사카 구장), 7회말에 포수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 1976년 4월 17일, 대 롯데 오리온스 전기 4차전(미야기 구장), 8회초에 구라모치 아키라로부터 |
첫 선발 출장 | 1976년 4월 25일, 대 긴테쓰 버펄로스 전기 6차전(헤이와다이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
첫 홈런 | 1976년 8월 1일, 대 난카이 호크스 후기 3차전(헤이와다이 구장), 8회말에 사사키 고이치로로부터 솔로 홈런 |
이정표 기록 | |
통산 1000경기 출장 | 1986년 6월 15일,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 11차전(고라쿠엔 구장), 8번·포수로 선발 출장 ※역대 265번째 |
통산 1000안타 | 1990년 7월 22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17차전(세이부 라이온스 구장), 2회초에 이시이 다케히로로부터 좌전 안타 |
기타 기록 | |
연간 최다 포일 | 1979년 17개 ※1960년 노무라 가쓰야와 타이 기록 |
한 경기 5삼진 | 1979년 5월 29일, 대 요코하마 다이요 웨일스 6차전(미야기 구장) ※사상 최초 |
올스타전 출장 | 6회(1977년, 1979년~1982년, 1985년) |
6. 논란
2001년 9월 30일 킨테츠전에서 왕정치의 시즌 홈런 기록(55개)과 동률을 이룬 로즈에게 고의 사구를 지시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와카나는 인터뷰에서 "코치 한 명이 '걸러라'라는 지시를 할 수는 없습니다. 결정권은 감독에게만 있습니다"라고 부인하면서도, "분위기는 있었다"고 언급하며 "방향성"의 존재를 암시했다.[25] 당시 킨테츠 코치들 사이에서는 "만루에서 로즈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질문에 "그래도 승부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고, 선발 투수였던 타노우에 케이자로는 최고 승률 타이틀이 걸려 있어 "맞을 각오로 승부하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25][26]
약 12년 후인 2013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소속 블라디미르 발렌틴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 경신에 대해서는 "빨리 왕정치의 저주를 풀어야죠"라며 기록 경신을 바란다는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25] 발렌틴은 2013년 9월 15일 한신 타이거스전에서 일본 프로 야구 시즌 홈런 신기록(56호)을 달성하며 기록을 경신했다.[27]
참조
[1]
Youtube
大卒で4万円の時代に!!若菜さんがもらった契約金は? - YouTube
https://www.youtube.[...]
[2]
Youtube
1軍と2軍の格差は昔は酷かった! - YouTube
https://www.youtube.[...]
[3]
서적
ベースボールアルバムNo.15 若菜嘉晴
恒文社
1980
[4]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逆転野球人生 阪神を追われ29歳で米3A日本人初のコーチ就任後、大洋で電撃復帰…流浪の生涯一捕手・若菜嘉晴【逆転野球人生】
https://column.sp.ba[...]
[5]
웹사이트
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野球コラム 若菜嘉晴 筋金入りの気の強さを誇る強肩強打の捕手/プロ野球1980年代の名選手
https://column-sp-ba[...]
[6]
문서
読む野球−9回勝負−No.7_82頁
主婦の友社編集
[7]
서적
プロ野球「最強捕手」伝説
洋泉社
2009
[8]
Youtube
【プロ野球OBに会いに行く】キャッチャー目線から見た「江夏の21球」若菜さんが解説!【未公開動画】【若菜嘉晴】【高橋慶彦】【プロ野球OB】 - YouTube
https://www.youtube.[...]
[9]
웹사이트
【阪神】佐藤輝明セ新人野手初の1試合5三振、プロ野球19人目
https://hochi.news/a[...]
[10]
Youtube
【プロ野球OBに会いに行く】伝説の珍プレー「空タッチ」若菜さん本人が解説【若菜嘉晴】【高橋慶彦】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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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간행물
週刊ベースボール別冊PART5 1989年編
週刊ベースボール
2020-03-31
[12]
Youtube
小久保無償トレード、工藤退団、ダイエー時代の闇とは? - YouTube
https://www.youtube.[...]
[13]
간행물
セ・パ誕生70年記念特別企画】よみがえる1980年代のプロ野球 Part.5 [1989年編]
週刊ベースボール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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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刊ゲンダイ 2013年11月9日発行号
日刊ゲンダイ
2013-11-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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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ポロジ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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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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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人名事典 新訂第3版
日外アソシエー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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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根本陸夫伝】主力を放出してまで田淵幸一の獲得にこだわった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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スポーツナ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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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プロ野球 最後のサムライ
コアマガジ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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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めくりプロ野球 9月【9月30日】2001年(平13)“バースの悲劇”再び…ローズ、苛立ちの2打数無安打2四球
https://www.sponichi[...]
200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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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プロ野球デキゴトロジー/9月30日 55本塁打タフィ・ローズとホークスバッテリーは勝負せず【2001年9月30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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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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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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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日本プロ野球事件史1934-2013
ベースボールマガジン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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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今だから明かす“記録阻止”の闇真実(2)ローズ「やっぱり俺は外国人なんだ」と思い知った
https://www.asagei.c[...]
201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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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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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バレンティン60号本塁打!ついに大台 ルースに並んだ!宮本引退に花
https://www.sponichi[...]
スポーツニッポン
201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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