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도 세이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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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도 세이쿄는 일본의 사상가로, 구루메 번에서 태어났다. 그는 국학을 연구하며, 흑룡회 활동을 통해 아시아주의를 추구했다. 곤도는 자치학회를 설립하고 농본주의 운동을 펼쳤으며, 국가자본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사상은 사직자치론과 대동사상을 중심으로 하며, 국가주의자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 곤도는 저서로 『황민자치본의』, 『남연서』, 『자치민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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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세이쿄 | |
---|---|
지도 | |
기본 정보 | |
이름 | 곤도 세이쿄 |
로마자 표기 | Kondō Seikyō |
한자 표기 | 権藤 成卿 |
출생 | |
출생일 | 1851년 |
사망일 | 1913년 |
출생지 | 일본 히젠국 |
정치 활동 | |
직업 | 정치인 |
주요 활동 | 대동단결운동 참여 국민협회 창립 메이지 유신 관련 활동 |
학문 | |
연구 분야 | 사상가 |
주요 사상 | 국수주의 대아시아주의 |
기타 | |
관련 인물 | 도야마 미쓰루 우치다 료헤이 |
2. 생애
구루메번 출신의 국학자이자 유의(儒醫)였던 곤도 나오시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젠타로(善太郞)이고, 세이쿄(成卿)는 호이다. 이케지리 갓탄에게 수학하고 열혈 지사들과 친분이 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1874년 아버지를 따라 오사카로 가서 뎃치에서 상업을 배우고 니쇼갓샤에서 한학을 배우기도 했다. 14살에 집에 있는 한적(漢籍)의 대부분을 독파하여 신동 소리를 들었다.[7]
24살에 결혼하였는데, 이 무렵 친구인 다케다 한시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자극을 받아 조선에 건너가 어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우치다 료헤이가 흑룡회를 결성할 때 이에 참여하였고, 이후 흑룡회에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으면서 대아시아주의와 아시아 연구에 뜻을 두게 되었다.[4]
1914년, 우치다 료헤이, 오자와 다교, 다루이 도키치, 오이 겐타로 등과 '곤도 서클'을 형성하였고, 1918년 곤도 서클은 로소카이(老壯會)에 대거 참여하였다. 로소카이를 통해 미쓰카와 가메타로와 같은 아시아주의자들과 교류하였는데, 로소카이가 훗날 미쓰카와 가메타로, 오카와 슈메이, 기타 잇키 등에 의해 점차 국가주의적 성향의 단체로 변모하게 되면서 1920년 자치학회를 설립하였다.
1927년 긴케이가꾸인(金鶏学院일본어)에 출강하여 유교, 국체, 제도학 등을 강의하였다. 1932년 《농민본위론》을 저술했다.
혈맹단 사건, 5·15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미쳤다는 혐의로 투옥되었으나, 관계없음이 밝혀져 석방되었다.[4]
2. 1. 가계 및 유년 시절
곤도 가문은 대대로 구루메번의 번의(藩医)였다.[7] 증조부 곤도 스다쓰(権藤寿達), 조부 곤도 노부타카(権藤延陵)는 모두 의술로 이름을 알렸다.[2] 특히 조부 노부타카는 히타(日田)의 히로세 단소(広瀬淡窓), 지쿠고(筑後)의 가사 다이쿄(笠大匡)와 함께 '지쿠고 3수재(筑後の三秀才)' 중 한 명으로 불렸으며, 가메이 난메이(亀井南冥)의 제자였다.[4] 1842년(덴포 13년)에는 하나오카 세이슈(華岡青洲)에게 의술을 배웠다.[2] 노부타카의 제자로는 고라산(高良山) 주지 방추가(坊厨家) 출신인 추준부(厨順夫)가 있다.[2]아버지 곤도 나오시(権藤直)는 근황파(勤皇派)의 영수인 이케지리 갓탄(池尻葛覃)에게 배웠으며, 마키 야스오미(真木保臣)·기무라 아카마쓰(木村赤松)와 동창이었다.[4] 나오시는 시나가와 야지로(品川弥二郎), 다카야마 히코쿠로(高山彦九郎), 히라노 구니오미(平野国臣)와도 친분이 있었고, 다카야마 히코쿠로는 곤도 가(家) 친족의 집에서 자결했다.[4]
1868년 후쿠오카현 미이군 야마카와무라(현재의 구루메시)에서 곤도 나오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 1874년 6살 때 아버지를 따라 오사카로 가서 뎃치에서 상업을 배우고, 니쇼갓샤에서 한학을 배웠다. 14세에 집에 있던 한적(漢籍)을 거의 모두 읽을 정도로 신동으로 불렸다.[7]
2. 2. 청년 시절과 조선과의 인연
구루메번 출신의 국학자이자 유의(儒醫)였던 곤도 나오시(権藤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케지리 갓탄에게 수학하고 열혈 지사들과 교류했다. 1874년 아버지를 따라 오사카로 가서 상업과 한학을 배웠고, 14세에 이미 한적(漢籍)을 대부분 독파하는 등 신동으로 불렸다.1892년 24세에 결혼했지만, 아버지의 친구였던 다케다 한시가 조선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조선으로 건너가 어업 사업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1895년 처자를 두고 가출하여 나가사키에서 독학을 계속했다. 다케다는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기도 했지만, 곤도는 다케다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다.[4]
1900년 상경하여 황민일성회와 성장학원을 설립하고, 1902년 우치다 료헤이의 흑룡회에 참여하여 대러시아 개전과 일한합방론을 주장했다.[1] 흑룡회 활동을 통해 이용구 (일진회) 등과 아시아 혁명을 위해 연계하고 교류했다.[1][4]
1904년 일진회와 흑룡회는 일한합방 후 만주로 이주하여 "대고려국"[9] 건설 계획을 세웠으나, 1910년 대한제국 병합으로 일진회가 해산되면서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4][8]
2. 3. 흑룡회 활동과 아시아주의
우치다 료헤이가 흑룡회를 결성할 때 곤도 세이쿄도 참여하여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며 대아시아주의와 아시아 연구에 관심을 가졌다.[4]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오스기 사카에가 살해된 사건에 대해 우치다 료헤이와 충돌하기도 했다.[4]2. 4. 자치학회 설립과 농본주의 운동
1914년, 곤도 세이쿄는 우치다 료헤이, 다루이 도키치, 오이 겐타로 등과 함께 '곤도 서클'을 만들었고, 1918년에는 이 서클이 노장회(老壯會)에 참여했다.[4] 1917년 러시아 혁명을 계기로 활동을 재개했다.[4] 1920년 자치학회(自治學會)를 설립하고, 『황민자치본의(皇民自治本義)』를 발표하며 자신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4]1927년, 야스오카 마사히로가 설립한 금계학원(金鶏学院)에서 유교, 국체, 제도학 등을 강의했다.[4]
1929년 쇼와 대공황으로 농촌의 빈곤이 심각해지자, 농본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1] 1931년 시모나카 야사부로, 나가노 아키라, 다치바나 고자부로 등과 함께 '일본촌치파 동맹(日本村治派同盟)'을 결성하고, '반(反)도시', '반자본주의', '반근대'를 기치로 내걸었다.[12] 1932년 『농촌자구론(農村自救論)』 등을 발표하며 농촌 구제 운동을 펼쳤다.[12]
같은 해, 혈맹단 사건과 5.15 사건에 사상적 영향을 주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4] 이후 자치농민협의회(自治農民協議会)를 결성하고 농가 부채 3년 유예 등을 요구하는 청원 운동을 전개했다.[12]
2. 5. 만년
1934년 '제도학잡지(制度学雑誌)'를 창간하고 제도학연구회(制度学研究会)를 발족했으며, 1935년에는 기관지 '제도와 연구(制度と研究)'를 발행했다. 1936년 전력 국가 관리 법안을 '파쇼적 통제안'으로 비판하고, 일제의 중국 침략을 비판했다. 1937년 사망.3. 사상
곤도 세이쿄는 중세 향촌처럼 자치 기능을 가지며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생각했다.[17] 그는 '사직(社稷)'의 '사(社)'는 땅, '직(稷)'은 식량을 의미하며, '사직'이 '사회(社會)'와 같은 의미라고 보았다.[17]
곤도는 정치의 실체가 군주가 아니라 백성(민인, 사직)이라고 주장하며, 이상이 실현되면 '천하를 공유한다'고 하여 사직이 구현한 공공성이 국가의 공공성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그는 메이지 범벌 정부의 프로이센식 국가주의를 비판하며, "사직을 떠난 나라는 자기를 존중하고 남을 얕보며, 백성은 권력자의 노예가 된다"고 말했다.[19] 그는 일본의 국가주의가 약육강식과 "유럽식 사유재산 제도"를 강압적으로 채택하여 농민이 "조세 생산 기계"로 취급되고 있다고 비판하며, 모든 백성이 서로 돕는 "국민 공존의 대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곤도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대동(大同)'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는데,[21] 이는 캉유웨이(康有為)와 남연청안(南淵請安)의 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22]
또한, 곤도는 국가사회주의와 자신의 사상이 다르지만, 체신성의 전력 국가 관리 법안은 엉터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관료 통제와 결합된 자본가 보호는 국가자본주의이며, ‘파시즘’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하며 일본 정부의 법안을 국가자본주의 또는 파시즘으로 비판했다.[25]
하지만 곤도의 사상은 국체주의자들로부터 고대 중국 학문에 기반하며 일본 국체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23] 혈맹단 사건 관련자들과 쓰쿠이 다쓰오, 오카와 슈메이 등이 이러한 비판을 제기했다.[23] 곤도는 "응용과 적용은 모방과 다르다"고 반박했다.[23]
야마카와 히토시는 곤도 사상의 핵심을 "아나키즘"으로 평가했고, 쓰치다 교손은 곤도의 아나키즘을 대동설과 노장사상에서 찾았다.[26] 마쓰모토 겐이치는 안도 쇼에키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27]
3. 1. 사직자치론(社稷自治論)
곤도 세이쿄는 마을 공동체나 당시의 농촌(민)을 그대로 긍정한 것이 아니라, 자치 기능을 가진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었던 중세의 향촌을 이상으로 여겼다.[17] 사직(社稷)의 "사(社)"는 "땅을 신으로 하는 이치"이며 대지를 의미하고, "직(稷)"은 오곡(五穀)의 으뜸인 조를 의미하여 식량을 의미한다. 곤도는 사직을 "사회(社會)"와 같은 의미라고도 말한다.[17]곤도는 "토지가 있어야 비로소 민인(民人)이 있고, 민인이 있어야 비로소 군장이 있다"고 하여 정치의 실체는 군주가 아니라 민인(사직)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만만세 후, 이상이 실현되면 '천하를 공으로 한다'"라고 논하며, 사직이 "천하"가 되고, 사직이 구현한 공공성이 국가의 공공성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8]
곤도는 메이지 범벌 정부의 프로이센식 국가주의를 배격하고, "사직을 떠난 나라는 반드시 자기를 존중하고 남을 얕보는 나라이며, 그 백성은 권력자의 노예가 된다"고 하였다.[19] 메이지 이후 일본의 국가주의는 "소떼와 말떼가 날뛰는 지옥도"와 같은 약육강식과 "유럽식 사유재산 제도"를 강압적으로 채택한 결과, 일국의 주력이 되어야 할 농민은 "들판에서 말라 죽는" 것 같은 "조세 생산 기계"로 취급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모든 백성이 서로 돕고 함께 즐기며, "국민 공존의 대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사직 자치론은 농업 입국론이나 피상적인 반도시·반상공 관념과는 달리, 곤도는 그것들을 비판했다.[20]
3. 2. 대동사상(大同思想)
곤도 세이쿄는 예기(禮記)에 나오는 '대동(大同)' 사회를 이상으로 삼았다.[21] 예기에서는 대동 사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를 공유하며, 현명하고 능력 있는 사람을 선출하고, 신의와 화친을 중시한다. 사람들은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노인은 천수를 다하고, 장정은 직업을 가지며, 유아는 양육을 받고, 과부, 고아, 의지할 곳 없는 자, 폐질자들은 모두 보호를 받는다. 남자는 자신의 몫이 있고, 여자는 자신이 돌아갈 곳이 있다.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지 않고, 힘을 쓰지 않는 것을 싫어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음모는 그치고 일어나지 않으며, 절도와 난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닫지 않는다. 이것을 대동이라고 한다." 이러한 대동의 세상은 사적 가치가 추구되어 전란이 일어나는 "소강(小康)의 세상"과 대비된다.[21]이러한 대동 사상은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의 춘추공양학파(春秋公羊學派), 캉유웨이(康有為)의 대동삼세설(大同三世說)과 대동서(大同書)에서 발전되었다.[21] 곤도 세이쿄의 대동론에는 캉유웨이의 영향도 있었다.[22] 그는 또한 다이카 개신(大化改新)에 영향을 준 남연청안(南淵請安)의 사상에도 대동설이 있다고 해석했다.[21]
3. 3. 국가자본주의 비판
곤도는 국가사회주의는 학리적으로 자신과 전혀 다르지만, 체신성의 전력 국가 관리 법안과 같은 엉터리 법안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관료 통제와 결합된 궁극적인 자본가 보호는 국가자본주의이며, ‘파시즘’이라고 불리는 것은 거기에 그 이유가 있다고 하며 일본 정부의 국가 관리 법안을 국가자본주의 또는 파시즘으로 비판했다.[25]3. 4. 비판과 평가
곤도 세이쿄는 국체주의자들로부터 그의 사상이 고대 중국의 학문에 기반하며,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국체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23]혈맹단 사건의 소누마 마사시는 공판에서 곤도의 학문이 "중국식"이며 "수평적 대립적인 사상"이라고 비판했다. 쓰쿠이 다쓰오 또한 "곤도 씨의 주장 중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를 매우 왜곡하여 해석하고, 국체의 정수로서 신념하고 있는 것을 없애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라고 비판했다.[23] 하야시 기미오 등 국가사회주의자들은 곤도의 무정부주의적 경향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24]
오카와 슈메이는 곤도가 다이카 개신을 이상적으로 여긴 것에 대해, 다이카 개신은 귀화인 유학자 미나부치노 쇼안의 유교 사상의 산물이며, 덴지 천황의 "군민공치" 제도도 "순전히 중국식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전례가 없다"고 비판했다.[23]
곤도는 이러한 비판에 대해 1932년 문예춘추사에서 간행한 『군민공치론』에 수록된 1919년 11월 10일의 대담에서 "응용과 적용이라는 것과 모방이라는 것은 그 근본 취지가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는 세이무 천황 시대의 자치제도보다 오진 천황 시대의 왕인 박사 초빙에 의한 통치에는 주나라와 한나라의 제도도 응용되었지만 모방은 아니었고, 반전제도 당나라 제도를 응용한 것이지 모방은 아니라고 주장했다.[23]
곤도의 사상에서 국가를 국민 상호 간의 공동 계약에 기초한 공동체로 보는 견해는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17] 토머스 페인의, 자연에 기반한 사회에 대해 정부는 인위적인 존재라는 사상과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다.
야마카와 히토시는 곤도 사상의 핵심을 "가장 단순한 형태의 아나키즘"으로 평가했고, 쓰치다 교손은 곤도의 아나키즘을 대동설과 노장사상에서 찾았다.[26] 마쓰모토 겐이치는 안도 쇼에키와의 유사성을 지적했다.[27]
4. 저작
- 皇民自治本義일본어, 도미야마보, 1920년
- 오자와 우오, 곤도 세이쿄 교주 南淵書일본어 상중하권, 곤도 세이쿄, 1922년
- 自治民範일본어, 헤이본샤, 1927년
- 야마가타 다이니 저, 곤도 세이쿄 훈역, 스도 무네지로 편 柳子新論일본어, 고분샤, 1928년
- 이즈카 오사무 저, 곤도 세이쿄 편 西湖四十字詩일본어, 마쓰키타가시, 1930년
- 日本農制史談일본어, 준신샤, 1931년
- 君民共治論일본어, 분게이슌주샤, 1932년
- 日本震災凶饉攷일본어, 분게이슌주샤, 1932년
- 農村自救論일본어, 분게이슌주샤, 1932년
- 八隣通聘攷일본어 상하권, 히라노쇼보, 1933년
- 間々子詩일본어 전편·후편, 곤도 시로스케, 1933년
- 農村の困弊と食糧問題일본어, 자치학회, 1935년
- 自治民政理일본어, 가쿠게이샤, 1936년
- 其後に来るもの : 血盟団事件 五・一五事件 二・二六事件일본어, 히라노쇼보, 1936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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