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다 하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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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다 하쿠보는 1832년 구루메 번에서 태어난 일본의 유학자이자 정한론자이다. 본명은 나오히로, 통칭은 소이치로이며, 호는 하쿠보이다. 에도에서 학문을 배우고 구루메 번에서 활동하다가 존왕양이 운동에 가담하여 유폐되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외무성 관리가 되어 조선과의 외교에 관여하였으며, 조선과의 관계에서 강경한 입장을 취하며 정한론을 주장했다. 부산의 초량왜관에 파견되어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위한 예비 교섭을 진행했으나, 조선 측의 태도에 분개하여 귀국 후 정한론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후 외무대록을 거쳐 관직을 버리고 저술 활동을 하며 정한론을 지속적으로 주장했다. 1916년 정5위를 추증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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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 하쿠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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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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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다 타다시 |
별칭 | 하쿠요 |
직업 | 시인, 미술 평론가, 작가 |
출생 | 1892년 6월 24일 |
사망 | 1964년 12월 26일 (72세) |
출생지 | 일본 미에현 |
국적 | 일본 |
학력 | 와세다대학 문학부 철학과 졸업 |
배우자 | 사다 구니코 |
경력 | |
주요 활동 | 《미타 문학》 동인 자유미술가협회 창립 |
문학 활동 | |
장르 | 시, 평론 |
주요 작품 | 《기념사진》 《출범》 《윤무》 《사다 하쿠요 시집》 |
미술 평론 활동 | |
주요 저서 | 《근대 미술사》 《예술과 진실》 《앙리 루소》 |
2. 생애
사다 하쿠보는 1832년 구루메 번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나오히로(直寛), 통칭은 소이치로(素一郎), 호는 하쿠보(白茅) 또는 간포(間放)이다.[1]
그의 생애는 초기 생애 및 존왕양이 운동, 외무성 출사와 조선 파견, 정한론 주장과 사직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 참조)
다이쇼 5년(1916년), 정5위가 추증되었다.[5]
2. 1. 초기 생애 및 존왕양이 운동
구루메 번의 유학자였던 사다 지쿠스이(佐田竹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 1852년(가에이 5년) 에도의 쇼헤이자카 학문소에서 수학하였고, 1856년(안세이 3년)에는 하구라 칸도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3] 1857년(안세이 4년) 구루메로 돌아와 공자 반독(半読)의 직책을 맡았으며, 1859년(안세이 6년)에는 번교(藩校)인 메이젠도(明善堂)의 료장(寮長)이 되었다.[3]그러나 마키 야스오미를 따라 존왕양이 운동에 가담한 것이 문제가 되어, 1863년(분큐 3년) 가문의 대에서 제명된 후 5년간 유폐되었다.[3][1] 1868년(메이지 원년) 2월 유폐에서 풀려 번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가되었고, 8월에는 군무관 판사 시보(軍務官判事試補)가 되었다. 또한 징사(徴士) 및 오사카 만 방어 참모로 임명되었다.[3]
2. 2. 외무성 출사와 조선 파견
1869년(메이지 2년),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교제사의(朝鮮交際私議)'를 태정관에 제출하고 외무성 관리가 되었다.[1] 1870년(메이지 3년) 3월, 모리야마 시게루와 함께 부산 초량왜관에 파견되어 조선과의 국교 수립을 위한 예비 교섭을 진행하였다.[4]이 과정에서 서계 문제를 둘러싸고 조선과 갈등을 겪었으며, 조선 측의 태도에 격분한 사다는 같은 해 4월에 귀국한 후 정부에 정한론을 주장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4] 그러나 외무성은 사다 등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대조선 정책 3개조"를 태정관에 제출하였는데, 여기에는 "단교 상태 유지", "국사 파견 후 거부 시 무력 공격", "대청 조약 선행"의 세 가지 선택지가 제시되었다.[4]
정부는 두 번째와 세 번째 안의 절충안을 채택하여 요시오카 고키를 부산에 파견, 정식 국교 수립 교섭을 진행하는 한편, 1871년(메이지 4년) 9월 청과 청일수호조규 및 통상장정을 체결하였다.[4]
2. 3. 정한론 주장과 사직
1871년 (메이지 4년) 귀국 후 사다 하쿠보는 외무대록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사이고 다카모리 등 정한파에 동조하여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1] 이후 저술 활동을 하며 정한론을 계속 주장하였다.3. 저서
위 두 저서는 《메이지 문화 전집》 제22권(잡사편)에 수록되어 있다.
4. 평가
김병동에 따르면, 메이지 유신 이후 정권의 중추에서 정한론을 주장한 것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기도 다카요시였지만, 이를 풀뿌리로 확산시켜 일본 열도를 열광시킨 것이 사다 하쿠보였다. 메이지 초년에는 "조선은 응신 천황 이래 (조공)의 의무가 있는 나라이므로, 유신의 기세를 타고 재빨리 손을 쓰는 것이 좋다"는 건백서를 정부에 제출했다.[6] 이후 3차례에 걸쳐 건백서를 제출하여, 사토 노부히로를 따라 조선 정복은 "30개 대대면 충분하다"고 말했으며, 김병동은 "조선 종속을 일찍부터 제창한 사다 하쿠보의 조선 멸시의 뿌리는 깊다"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西南記伝』下巻一
[2]
사전
デジタル版 日本人名大辞典+Plus
https://kotobank.jp/[...]
[3]
사전
朝日日本歴史人物事典
https://kotobank.jp/[...]
[4]
서적
韓国併合
[5]
서적
贈位諸賢伝 増補版 上
近藤出版社
1975
[6]
서적
日本人の朝鮮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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