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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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유덕은 산둥성 출신으로, 명나라 말기 군벌 모문룡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반란을 일으켜 청나라에 투항한 인물이다. 그는 오교병변을 일으키고 등주성을 함락시킨 후 청에 귀순하여 공순왕에 봉해졌으며, 청나라의 여러 정복 전쟁에 참여했다. 특히 천우병이라는 사병 집단을 이끌고 활약했으나, 남명군과의 전투 중 계림에서 이정국의 계략에 빠져 자결했다. 그의 아들 공정훈은 처형되었고, 딸 공사정은 삼번의 난에 연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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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유덕 | |
---|---|
기본 정보 | |
![]() | |
한어 병음 | Kǒng Yǒudé |
자(字) | 원장(元章) |
시호 | 정충(定忠) |
생애 | |
출생 | 1599년 |
사망 | 1652년 |
사망 장소 | 지난(濟南) |
향년 | 53세 |
활동 | |
활동 시기 | 명나라 말기 ~ 청나라 초기 |
주요 활동 | 무장 |
소속 | |
명나라 | 동강진(東江鎮) |
청나라 | 평남왕(平南王) 삼번(三藩) |
가족 | |
아버지 | 공국보(孔國寶) |
아들 | 공정기(孔庭訓) |
2. 생애
공유덕은 산둥성에서 요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이다. 청 태조 누르하치가 요동으로 진출하자, 고향 사람 갱중명과 함께 피도(皮島)로 가서 모문룡의 부하가 되었다. 그러나 원숭환에게 모문룡이 죽고 진계성이 뒤를 이었을 때, 이를 싫어하여 산둥성 등주로 달아나 손원화 휘하에 들어갔다.[1]
1631년, 청 태종 홍타이지의 대릉하성 공격 당시 구원 명령을 받았으나,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여러 고을을 약탈하고, 거짓으로 명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반란을 일으켜 등주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여순의 부장 진유시 등 여러 장수들도 반란에 합류하여 세력이 커졌다. 공유덕은 스스로 도원수를 자칭하고 래주를 포위하여 손원화의 서양식 대포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두 장수를 잃고 결국 갱중명과 함께 청군에 항복하였다.[1] 홍타이지는 그를 후하게 맞이하여 공순왕(恭順王)에 봉했다.[1]
이후 공유덕은 청나라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화기를 보유한 사병 집단인 천우병(abkai aisilaha cooha)을 이끌고 주요 원정에 참가했다. 1636년 홍타이지의 조선 정벌, 진주·송산(진주시태화구송산가도)·행산(태화구행산가도) 등 여러 성을 함락시켰고, 1644년에는 예친왕 돌곤을 따라 관내로 진입하여 이자성을 추격, 산시·섬서를 거쳐 강남으로 전선을 옮겼다. 1642년 팔기 제도가 한족에게까지 확대되면서 정홍기에 소속되었다.
2. 1. 초기 생애
공유덕은 요동 출신으로, 어린 시절 글을 배우지 못하고 광부나 해적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뛰어난 무예를 바탕으로 점차 두각을 나타냈으며, 요동 지역의 유력 군벌이었던 모문룡의 휘하에서 복무하였다. 1629년,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형하면서 요동 지역의 군사력 재편이 이루어졌다. 공유덕은 원숭환의 명군 편입 제안을 거절하고, 갱중명과 함께 등주로 이동하여 손원화의 휘하에 들어갔다. 등주에서 공유덕과 갱중명은 마카오에서 도입된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 운용법을 익혔다.[1]2. 2. 오교병변과 투항
1631년, 후금이 대릉하를 공격하자, 손원화는 공유덕에게 명나라 장수 조대수를 지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유덕은 명령 대신 오교병변을 일으켜 오교(吳橋) 일대를 약탈했다.[1] 1632년, 공유덕은 경중명과 함께 등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군대를 훈련시키던 포르투갈 출신 화포 전문가들이 사망했고, 공유덕은 서양 대포를 노획했다. 손원화는 탈출했으나, 이후 북경에서 처형되었다.[1]등주 함락 이후, 공유덕은 내주를 포위했으나 명나라 군대의 반격에 직면했다. 1633년, 공유덕과 경중명은 바닷길을 통해 산둥성을 탈출, 요동으로 이동하여 후금에 투항했다. 이들은 홍타이지에게 등주에서 노획한 대포를 바쳤고, 이후 모문룡의 부하였던 상가희도 이들에게 합류했다.[1]
2. 3. 청나라에서의 활약
1634년, 공유덕은 산서 침공에 참여하였다.[1] 경중명, 상가희와 함께 병자호란에 참전하였고, 송금 전투에서 조대수를 상대로 금주(錦州) 포위전에 참전하였다.[1] 이자성의 대순 공격에도 참여하였으며, 1640년대에는 청의 남명 정벌에 참여하여 호남과 광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1]2. 4. 최후
1646년, 평남왕에 봉해진 공유덕은 명나라 계왕 주유랑을 추격하여 호남에서 광서, 귀주로 이동했고, 그 공으로 정남왕에 봉해졌다. 이후 광서 평정에 종사하며 계왕을 남녕으로 몰아냈으나, 호남에서 여러 군현이 봉기하였다. 수장 장수의 요청으로 계림으로 돌아왔지만, 명나라 장수 이정국에게 길이 끊겨 고립되었다. 결국 계림성이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자결하였다.[1]3. 가족
공유덕은 공자의 후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청나라 시대 그의 전기에 반복되지만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산둥성의 공자 후손들은 그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고, 공유덕이 공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아들 공정훈(孔庭訓)은 이정국에게 처형당했다.[3] 유일하게 생존한 딸 공사정(孔四貞)은 장수 손연령(孫延齡)과 결혼하였으며, 삼번의 난에 가담하였다. 이후 공사정은 효장황후(孝莊皇后)의 수양딸이 되었다.
4. 평가 및 영향
공유덕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서양식 화포 운용 능력을 바탕으로 청나라의 중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군사력은 청나라 초기 군사력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자신의 화기를 보유한 사병 집단인 천우병(abkai aisilaha cooha)을 이끌고 청나라의 주요 원정에 참여했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고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 멸망에 일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1631년 청 태종 홍타이지의 대릉하성 공격 당시 구원 명령을 받았으나,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여러 고을을 약탈했으며, 오교병변 당시 민간인 약탈을 자행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다.[1]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에서 한국과의 관계는 부정적이다.[1]
4. 1. 긍정적 평가
공유덕은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서양식 화포 운용 능력을 바탕으로 청나라의 중국 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의 군사력은 청나라 초기 군사력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 그는 천우병(abkai aisilaha cooha)이라 불리는, 자신의 화기를 보유한 사병 집단을 이끌고 청나라의 주요 원정에 참여했다. 주요 참전 사례는 다음과 같다.- 1636년 홍타이지의 조선 정벌
- 진주, 송산(진주시태화구송산가도), 행산(태화구행산가도) 등 여러 성 함락
- 1644년 예친왕 돌곤을 따라 관내로 진입하여 이자성을 추격하고 강남으로 전선을 옮김
4. 2. 부정적 평가
공유덕은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리고 청나라에 투항하여 명나라 멸망에 일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631년 청 태종 홍타이지의 대릉하성 공격 당시 구원 명령을 받았으나, 도중에 반란을 일으켜 산둥성 여러 고을을 약탈했으며, 오교병변 당시 민간인 약탈을 자행한 점도 비판받는다.[1]4. 3. 한국과의 관계
공유덕은 병자호란에 참전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데 앞장섰다.[1] 1634년 산서 침공에 참전하였고, 송금 전투에서는 조대수를 상대로 금주(錦州) 포위전에 참전하였다.[1] 또한 이자성의 대순 공격과 청의 호남, 광서 등지 지배, 남명 정벌에도 참여하였다.[1]1652년 광서에서 남명군을 토벌하던 중 이정국의 계략에 빠져 계림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참조
[1]
서적
清朝皇帝と三藩
[2]
실록
대청세조장황제실록(大淸世祖章皇帝實錄)
1654-06-03 # 순치 11년 6월 3일을 1654년 6월 3일로 변환. 순치 연호의 시작연도를 고려해야 정확한 서력 연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3]
실록
청세조실록(淸世祖實錄)
1658-12-16 # 순치 15년 12월 16일을 1658년 12월 16일로 변환. 순치 연호의 시작연도를 고려해야 정확한 서력 연도를 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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