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통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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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통교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에 있었던 다리로, 조선 시대에 처음 건설되었다. 1410년 큰 비로 유실된 후 정릉의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로 개축되었으며, 조선 시대 어가 행렬과 사신 행렬이 지나다니는 중요한 다리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훼손되기 시작하여 청계천 복개 공사로 인해 난간석이 사라졌고, 현재는 신장석과 무덤돌 일부가 남아 있다. 현재 조흥은행 앞에 광통교 축소 복원 모형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하철역을 통해 접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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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통교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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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과 중구 수표동 사이 청계천 |
종류 | 다리 |
용도 | 교통 (보행) |
길이 | 12.9m |
폭 | 15.5m |
역사 | |
원래 위치 | 태종 때 수표교 - 현재의 종로구 관철동과 중구 장교동 사이 청계천 |
이전 재료 | 흙다리 |
재건 | 1410년 |
재건 재료 | 돌다리 |
다리 이름 유래 | 개성 출신인 왕비의 능인 정릉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어 '크게 통한다'는 의미 또는 '사방팔방으로 통한다'는 의미 |
철거 |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 때 |
복원 | 2005년 |
현재 위치로 이전 | 한국전쟁 이후 |
현재 다리 재료 | 화강석 |
특징 | |
다리돌 | 옛 광통교의 다리돌 일부 사용 돌에 새겨진 다양한 조각상 (용, 봉황, 도깨비) 정릉 석물 일부 사용 추정 |
문화재 지정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호 (1973년 3월 12일 지정) |
2. 위치
광통교는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 124번지 부근에 있었다.[1] 보신각이 있는 종로 네거리에서 을지로 방향으로 가다가 청계로와 만나는 길목에 놓여 있던 다리이다.[1]
2. 1. 주변 상권
광통교 주변은 서울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1] 다리 주위에는 다양한 물품을 취급하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었다. 예를 들어, 닭과 계란을 파는 가게, 갓을 만드는 데 쓰는 대나무나 완성된 갓을 파는 가게, 비녀, 떨잠 등 부인의 머리 장식이나 패물, 가락지 등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1] 또한 신발, 물감, 중국 과실, 칠 목기와 장롱, 잔치 때 쓰는 그릇을 빌려주는 가게, 채소, 솜, 말총, 가죽, 초, 실, 휴지, 책 등 각종 잡화를 파는 가게도 있었다.[1] 말안장, 등자, 굴레와 같은 마구를 파는 가게나 서화와 책을 파는 가게들도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1] 이처럼 다양한 상점이 모여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항상 광통교 주변에 모여들어 생필품을 사고팔았다.[1]3. 역사
광통교는 조선 초기에 처음 축조된 다리로, 처음에는 흙으로 만들어진 토교(土橋)였다. 1410년(태종 10년) 홍수로 유실된 후, 태종의 명에 따라 정릉의 석물을 가져와 석교(石橋)로 다시 건설되었다. 이 과정에는 태종과 계비 신덕왕후 사이의 정치적 배경이 얽혀 있으며, 이후 광통교는 조선 시대 동안 도성 내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다리 주변으로는 시장이 형성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 서울 시내 전차 노선 부설과 다리 확장 공사 등으로 인해 원형이 훼손되기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가 진행되면서 광통교는 지표면 아래로 완전히 묻히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난간석 등 많은 부재가 유실되었다. 현재 옛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건물 앞에 광통교를 축소 복원한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1]
3. 1. 조선 시대

광통교는 조선 초 도성을 건설할 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이때는 흙으로 만든 토교(土橋)였다. 1410년(태종 10년) 8월에 큰 비가 내려 다리가 떠내려가고 인명 피해까지 발생하자, 석교(石橋)로 다시 만들게 되었다. 이때 사용된 석재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던 옛 정릉(貞陵, 신덕왕후의 능)의 석물이었다.[3][4]
광통교를 정릉의 석물로 다시 만든 배경에는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훗날 태종)과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의 정치적 갈등이 있었다. 1392년(태조 1년), 신덕왕후 강씨는 정도전 등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이방원은 신덕왕후에게 깊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1396년(태조 5년) 세상을 떠났고, 세자 이방석 역시 1398년(태조 7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과 함께 이방원에게 제거되었다.[4]

한편, 태조 이성계는 생전에 신덕왕후를 매우 아껴, 그녀가 죽자 자주 찾을 수 있도록 도성 안인 중부 취현방(聚賢坊, 지금의 중구 정동 일대) 북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이름 붙였다. 태조는 정릉을 조성할 때 제주목사 여의손(呂義孫)에게 당대 최고의 석공을 동원하여 최고 수준의 석물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완성 후에도 여러 차례 능을 찾아 신덕왕후를 그리워했다.[4]
그러나 1408년(태종 8년) 태조가 승하하자, 이듬해인 1409년(태종 9년) 조정에서는 역대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 도성 안에 있는 것은 옳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능을 지금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4]
이후 1410년 큰 비로 광통교가 무너지자, 태종은 정릉을 옮기고 남은 석물들을 가져다가 다리를 만들도록 명했다. 이는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이 자신과 대립했던 신덕왕후의 무덤 돌을 모든 백성이 밟고 지나가게 함으로써 과거의 원한을 풀고자 했던 의도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다시 지어진 광통교는 이후 조선 시대 500여 년 동안 왕의 행차(어가 행렬)나 외국 사신 행렬이 지나다니는 도성에서 가장 중요한 다리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4]
현재 광통교 남북 양측 교대(다리 양쪽 끝의 구조물)에는 당시 정릉에 사용되었던 신장석(神將石)과 구름 및 당초 문양이 새겨진 돌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태조가 정릉 조성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하게 한다.[4]
또한, 광통교 주변으로는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태종 대에는 이곳을 수도의 중심 시장인 대시(大市)의 중부(中部)로 지정하기도 했다.[5]
3. 2. 일제강점기
광통교가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부터이다. 1900년대 초 서울에 전차 노선이 건설되면서 먼저 광통교 동편에 전차길이 놓였다. 또한 1918년 이전에 다리를 확장하면서 양편을 철근 콘크리트로 보강하였는데, 이때 다리의 난간석이 원래 위치에서 확장된 다리 양편으로 옮겨졌다. 1923년에는 청계천에 암거 공사를 하면서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로 된 큰 하수관을 설치했으며, 남쪽 교대에도 역시 하수 배출을 위한 토관을 박았다.[4]3. 3. 해방 이후

1954년 청계천 복개 때 서쪽 난간석이 사라졌고, 1958년 청계천 복개 공사가 시작되면서 동쪽 난간석도 사라졌다. 현재 창덕궁에 광통교의 난간석 일부가 남아 있는데, 하나의 높이가 약 150cm 정도 되는 것으로 보아 광통교가 매우 큰 다리였음을 알 수 있다.[4]
1958년 광통교를 복개한 이후 다리의 돌에 새겨진 문양을 직접 볼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복개 이전에는 매우 정교한 구름무늬와 당초(唐草)무늬, 그리고 한가운데 두 손을 합장하고 머리에 관을 쓴 신장상(神將像)을 돋을새김한 돌들이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양이 새겨진 돌들은 복개된 청계천 내부로 들어가면 아직도 일부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다. 현재는 옛 조흥은행(현 신한은행) 건물 앞에 광통교를 축소 복원한 모형이 설치되어 있다.[1]
4. 교통
광통교는 다음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노선 | 역 | 출구 | 도보 시간 |
---|---|---|---|
서울 지하철 1호선 | 종각역 | 5번 출구 | 약 6분 |
서울 지하철 2호선 | 을지로입구역 | 3번 출구 | 약 8분 |
수도권 전철 5호선 | 광화문역 | 5번 출구 | 약 9분 |
5. 갤러리
참조
[1]
웹인용
청계천>청계천즐기기>편의시설안내>종합안내도
https://www.sisul.or[...]
2021-06-03
[2]
웹인용
옛다리들 청계천>청계천 소개>문화유적>유적
https://www.sisul.or[...]
2020-06-20
[3]
간행물
기사
http://sillok.histor[...]
태종실록
1410-08-08
[4]
웹인용
도성제일의다리광통교
https://www.sisul.or[...]
2021-06-03
[5]
간행물
8번째기사
http://sillok.histor[...]
태종실록
141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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