괵튀르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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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괵튀르크족은 6세기부터 8세기까지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활동한 튀르크계 유목 민족이다. 스스로를 '튀르크'라고 불렀으며, 중국 기록에서는 '돌궐'로 알려졌다. 흉노의 후예로 추정되며, 알타이 산맥에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웠다. 552년 부민 카간이 유연을 격파하고 돌궐 카간국을 건국하여 동서로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나, 583년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후 수나라, 당나라와의 갈등을 겪으며 멸망했고, 제2 제국을 건설했지만 위구르족에 의해 멸망했다. 텡그리 신앙을 믿었으며, 돌궐 문자를 사용하고, 동서 교역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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괵튀르크족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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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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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 고대 튀르크어 |
종교 | 텡그리교, 불교 |
관련 민족 | 튀르게시족, 토쿠즈 오구즈족, 예니세이 키르기스족, 설연타족, 사타족 |
멸칭 | 突厥(Tūjué) |
옛 튀르크어 | 𐱅𐰇𐰼𐰰 |
튀르키예어 | Göktürk |
역사 | |
건국 시기 | 546년 |
멸망 시기 | 582년 |
이전 국가 | 정령, 유연, 에프탈 |
계승 국가 | 동돌궐, 서돌궐 |
주요 사건 | 건국 (552년), 동서 분열 (582년) |
지리 | |
수도 | 오튀켄산 |
면적 | 6,000,000 km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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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 |
정치 체제 | 가한 |
주요 지도자 | 이리 가한 (546년 ~ 552년) 무한 가한 (553년 ~ 572년) 도람 가한 (587년 ~ 599년) |
기타 | |
사용 언어 | 소그드어, 고대 튀르크어 (튀르크어족의 하나) |
2. 명칭
괵튀르크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튀르크족 스스로 남긴 기록이 부족하여 명확히 알기 어렵다. 주로 주서, 북사, 수서 등 중국 측 사서 기록에 의존하여 그 기원을 추정한다.
괵튀르크족은 스스로를 '''튀르크'''(𐱅𐰇𐰼𐰜|Türük|튀뤼크otk[5][6] 또는 𐱅𐰇𐰼𐰚|Türk|튀르크otk)[7]라고 불렀다. 이 민족명은 소그드어 ''Türkit ~ Türküt'', ''tr'wkt'', ''trwkt'', ''turkt'' > ''trwkc'', ''trukč'', 사카어 ''Ttūrka''/''Ttrūka'', 유연어 ''to̤ro̤x''/''türǖg'', 한국어 돌궐(Dolgwol), 고대 티베트어 ''Drugu'' 등 다양한 중앙아시아 언어에도 기록되었다.
'튀르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고대 튀르크어로 "강력하다"는 뜻[15][74]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제라드 클로슨은 '튀르크'가 '강하다'는 일반적인 의미로 쓰인 적이 없으며, 원래는 '성장의 절정', '막 익은', '젊고 활기찬' 등의 의미였다고 주장했다.[16][75] 다른 학설로는 '창조된, 태어난'을 의미하는 𐱅𐰇𐰼𐰜|Türük/Törük|튀뤼크/퇴뤽otk에서 유래했다는 설[8][9]이나, "모인, 연합된"을 의미하는 원시 튀르크어 동사 '*türü-'에서 파생되었다는 설[17]도 있다.
일반적으로 "괵튀르크"라는 이름은 지배 씨족인 아시나를 뜻하는 단어와 '튀르크'가 결합된 𐰚𐰇𐰜:𐱅𐰇𐰼𐰜|Kök Türük|쾨크 튀뤼크otk[5][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괵'(Kök)은 "하늘" 또는 "푸른색"을 의미하여 "하늘의 튀르크" 또는 "푸른 튀르크"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하늘색이 천상의 영역과 관련되고, "하늘이 정한 통치 숭배"라는 알타이 정치 문화와도 일치한다.[14] 또한 중앙아시아의 방위 체계에서 푸른색이 동쪽을 상징하므로 "동쪽의 튀르크인"을 의미한다는 해석도 있다. 지배 씨족인 아시나(阿史那)의 이름 자체가 "짙은 푸른색"을 의미하는 코탄 사카어 'āššɪna'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중국 역사서에서는 괵튀르크족을 '''돌궐'''(突厥, 중세 중국어 발음 추정: *''dwət-kuɑt'' > ''tɦut-kyat'', 현대 표준 중국어 발음: ''Tūjué'')로 기록했다. 이 표기는 '튀르크(Türk)' 또는 '튀뤼크(Türük)'의 음을 한자로 옮긴 것(음차)이라는 설이 유력하다.[77] 과거에는 튀르크에 몽골어 복수 접미사 '-üd/-üt'가 붙은 '튀르퀴트(Türküt)'를 음차한 것이라는 설[76]도 있었으나, 최근에는 '튀르크/튀뤼크' 자체를 음차했다는 설이 더 지지를 받고 있다.[77]
한편, 중국 사서인 주서 이역전과 수서 북적전에는 돌궐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다른 설명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그들이 살았던 금산(알타이 산맥)의 모양이 투구(兜鍪, Dōumóu)와 비슷하여, 그들의 언어로 투구를 의미하는 '돌궐'을 부족명으로 삼았다고 한다.[10][11][12] 안드라스 로나-타스는 이 설의 가능한 출처로 '뚜껑'을 뜻하는 사카어 단어 'tturakä'를 지적하기도 했으나,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다.[13]
'튀르크'라는 명칭은 괵튀르크 자신들과 그들이 세운 괵튀르크 칸국, 그리고 그 휘하의 신민들에게만 적용되었다. 오르혼 비문에서도 토쿠즈 오구즈나 예니세이 키르기스 등 다른 튀르크계 집단은 '튀르크'로 불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위구르인들도 스스로를 위구르라고 칭했으며, '튀르크'는 적으로 간주했던 괵튀르크를 지칭할 때만 사용했다. 괵튀르크 제국 내의 여러 부족과 부족 연합은 정치적으로는 '튀르크'라는 명칭 아래 통합되었지만, 각자의 이름과 정체성, 사회 구조는 유지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괵튀르크와 아시나 씨족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고, 후대의 카라한 왕조, 고창 위구르, 셀주크 등은 괵튀르크의 후예임을 주장하지 않았다.[18][19][20]
3. 기원
주서와 북사는 괵튀르크족이 흉노의 별종(別種)이며, 지배 씨족은 아사나씨(阿史那氏)라고 기록했다.[10][12] 수서는 이들의 선조가 원래 중국 북서부 간쑤성의 평량(平涼)에 살던 잡호(雜胡)였으며, 성씨는 아사나씨라고 전한다. 아사나씨 500여 가구가 유연(茹茹)으로 이주하여 금산(金山) 남쪽에 정착하여 유연을 위해 철을 다루는 일(鐵作, 제철)에 종사했다고 한다.[87][11]
일반적으로 '괵튀르크'라는 이름은 지배 씨족인 아시나를 뜻하는 고대 튀르크어 단어 'Kök'(푸른, 하늘의)과 민족명 'Türük'이 합쳐진 𐱅𐰇𐰼𐰜|Türükotk[5][6] 𐰚𐰇𐰜:𐱅𐰇𐰼𐰜|Kök Türükotk,[5][6] 또는 𐱅𐰇𐰼𐰚|Türkotk[7]에서 유래한 것으로 본다. 'Türk'는 '창조된, 태어난' 또는 '강력한'을 의미하는 고대 튀르크어 𐱅𐰇𐰼𐰜|Türük/Törükotk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진다.[8][9] 중국 사서에서는 돌궐(突厥, 중고 한어 발음 추정: *''dwət-kuɑt'' > ''tɦut-kyat'')로 기록되었다. 이 명칭은 소그드어 *''Türkit ~ Türküt'', 사카어 ''Ttūrka''/''Ttrūka'', 유연어 ''to̤ro̤x''/''türǖg'', 한국어 ''돌궐'', 고대 티베트어 ''Drugu'' 등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에도 기록이 남아있다.
괵튀르크 지배층인 아시나 씨족의 직접적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수서 기록에 따르면, 439년 10월 18일 선비족 북위의 북위 태무제가 간쑤성 동부의 북량을 멸망시키자,[24][25][26] 아시나 씨족 500가구가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고창 부근의 유연 카간국에 의탁했다고 한다.[11] 주서와 북사는 아사나 씨족이 흉노 연맹의 일부, 구체적으로는 북흉노 부족[27][28] 또는 남흉노의 후예라고 기록했으나,[10][12] 이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아시나족이 흉노와 혈연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텔레 연맹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11][32][33] 중국 기록에서 아시나가 텔레 연맹에 속했다는 직접적인 언급은 찾기 어렵다는 반론도 있다.[34] 또한 흉노 북쪽에 위치했던 소국(索國)이나[30][10][12] 간쑤성 평량(平涼) 출신의 '잡호'(雜胡)에서 기원했다는 기록도 존재한다.[11][31]
초기 괵튀르크족은 다소 이질적인 집단이었으며, 통치자들의 이름 중 일부는 튀르크어가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오르혼 비문에는 우랄어족이나 예니세이어족 계통으로 추정되는 비튀르크어 어휘가 발견되기도 한다.[36] 아시나 지배층은 이란계나 토하라어(비알타이어족) 칭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나 씨족과 그들이 지배했던 사람들은 점차 튀르크어를 사용하며 공통의 문화를 형성해 나갔다.[38] 알타이 산맥 북쪽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거주하며 유연 카간국을 위해 철을 생산하는 기술을 발전시켰는데,[11][35] 이는 괵튀르크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의 원주지를 철광석이 풍부한 예니세이강 상류 지역으로 보기도 하며, 이곳에서 제철 기술을 습득하고 발전시켰다고 추정한다.
3. 1. 전설
괵튀르크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튀르크족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기 어렵다. 다만, 중국 측 기록인 주서, 북사, 수서 등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다. 『주서』에는 괵튀르크족이 흉노의 한 갈래이며 성씨는 아사나씨(阿史那氏)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사』의 기록은 대부분 『주서』의 내용을 따른다. 『수서』 역시 『주서』와 『북사』의 내용을 옮기면서, 괵튀르크족의 선조가 평량(平涼)에 살던 잡호(雜胡) 출신이며 성씨는 아사나씨라고 전한다. 이 아사나씨 500여 가구가 유연(茹茹)으로 이주하여 금산(알타이 산맥)에 살면서 제철업에 종사했다고 한다.[87]
중국 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기원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주서(周書)』 기록
『수서(隋書)』 기록
이러한 늑대 관련 설화는 괵튀르크족의 토테미즘 신앙, 특히 늑대를 신성시하는 믿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4. 역사
괵튀르크족의 역사는 6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시작되었다. 본래 유연 카간국의 지배 아래 있던 아시나 부족은 552년 부민 카간의 지도 아래 독립하여 돌궐 제1 제국을 세웠다. 이는 튀르크 민족이 세운 최초의 유목 제국으로, 동쪽의 만주 지역부터 서쪽의 흑해 연안까지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중요한 축으로 부상하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과 수나라의 등장으로 583년경 제국은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었다. 동돌궐은 630년 당나라에 의해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682년, 일테리쉬 카간은 당나라의 지배에 맞서 봉기하여 돌궐 제2 제국을 재건하였다. 제2 제국은 빌게 카간과 그의 동생 퀼 테긴, 현명한 재상 톤유쿠크의 활약으로 다시금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고유 문자인 돌궐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비문을 남겼다. 하지만 내부 갈등과 주변 부족들의 도전으로 쇠퇴하여 745년 위구르 카간국에 의해 멸망하였다.
한편, 583년 분열된 서돌궐은 독자적인 역사를 이어갔다.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비단길 무역을 통제하기도 했으나, 역시 내부 분열과 당나라의 간섭으로 점차 약화되었다. 657년 당나라에 의해 일시적으로 정복당하기도 했으며, 8세기 중반 이후에는 튀르기시, 카를루크 등 새로운 튀르크계 부족 연맹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었다.
괵튀르크족의 역사는 비록 두 차례의 제국 건설과 멸망, 분열을 겪었지만,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등장하는 여러 튀르크계 민족과 국가의 형성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각 시대별 상세한 역사는 아래 하위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4. 1. 돌궐 제1 제국 (552년 ~ 630년)

괵튀르크족의 지배층인 아시나 씨족은 본래 유연 카간국의 지배 아래 알타이 산맥 북쪽에서 살며 제철 기술자로 일했다.[11][35] 이들은 뛰어난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세력을 키웠으며, 6세기 초에는 서위와 교역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546년, 아시나 씨족의 수장 토문(Bumïn qaγan)은 철륵의 반란을 진압하며 세력을 과시하였다. 그는 유연에게 공주와의 혼인을 요청했으나, 유연의 아나괴 카간은 토문이 자신들의 '단철 노예(쇠를 다루는 노예)'였다는 이유로 모욕하며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토문은 유연과의 관계를 끊고 서위에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고 혼인을 요청하였다. 551년, 토문은 서위의 장락공주와 혼인하며 서위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였다.
552년, 토문은 마침내 유연을 공격하여 회황 북쪽에서 크게 격파하였다. 아나괴 카간은 자살했고, 그의 아들 암라진은 북제로 도망쳤다. 토문은 스스로 일리 카간(Il-qaγan)이라 칭하며 독립하여 돌궐 제1 제국을 건국하였다. 이로써 튀르크 민족 최초의 유목 제국이 탄생하였다.
일리 카간이 건국 직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을식기 카간(553년)이 잠시 뒤를 이었으나 곧 사망했고, 동생인 목한 카간(Muqan qaγan, 553년-572년)이 즉위하였다. 목한 카간 시대에 돌궐 제국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유연의 잔존 세력을 완전히 소탕하고, 서쪽으로는 에프탈을 격파했으며, 동쪽으로는 거란을 몰아내고 북쪽의 키르기스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돌궐의 영토는 동쪽으로 요하 서쪽부터 서쪽으로 아랄 해, 남쪽으로 고비 사막 이북부터 북쪽으로 바이칼 호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아우르게 되었다. 목한 카간은 북주, 북제와 같은 중국 왕조들과 관계를 맺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주요 행위자로 부상했고, 특히 북주와는 혼인 동맹을 맺고 북제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목한 카간 사후 동생인 타발 카간(Taspar qaγan, 572년-581년)이 즉위하였다. 그는 불교에 귀의하기도 했으나, 멸망한 북제의 잔당을 받아들이며 북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 타발 카간이 581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암라가 잠시 즉위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목한 카간의 아들 대라변과 을식기 카간의 아들 섭도 사이에서 계승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섭도가 사발략 카간(Ïšbara qaγan, 581년-587년)으로 즉위하였다.
사발략 카간의 즉위는 돌궐 내부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그는 경쟁자였던 대라변에게 '아파 카간'이라는 칭호를 주었으나, 곧 그의 세력을 두려워하여 습격하고 어머니를 살해하였다. 이에 아파 카간은 서쪽의 달두 카간(Tardu qaγan, 목한 카간의 동생이자 서방을 통치하던 실점밀의 아들)에게 망명하였다. 달두 카간은 아파 카간을 지원하여 사발략 카간을 공격하게 했고, 다른 부족들도 사발략 카간에게 등을 돌리면서 돌궐 제국은 583년경 사실상 동돌궐과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동쪽은 사발략 카간이, 서쪽은 달두 카간과 아파 카간이 통치하는 형세가 되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건국(581년)되어 통일 왕조를 이루었다. 내부 분열과 수나라의 압박에 시달리던 사발략 카간은 결국 수나라에 복속하여 지원을 받으며 아파 카간 등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였다. 사발략 카간 사후 그의 동생 엽호 카간(587년)과 아들 도람 카간(587년-599년)이 차례로 동돌궐의 카간이 되었으나, 수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러나 수나라가 말기 혼란에 빠지자, 시비 카간(609년-619년)은 다시 세력을 키워 수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10만 기병을 이끌고 산시성의 안문에서 수 양제를 포위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39] 수나라 멸망 후 당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도 돌궐은 유흑타와 같은 반란 세력을 지원하며 당나라와 대립하였다.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당 태종은 돌궐과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하였다. 동돌궐의 일리그 카간(620년-630년)은 여러 차례 당나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수도 장안 근처까지 진격하기도 했으나, 630년 음산 전투에서 당나라 군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하였다. 일리그 카간은 사로잡혔고, 동돌궐의 주요 부족들이 당나라에 항복하면서 돌궐 제1 제국은 사실상 멸망하고 당나라에 복속되었다.[40]
당 태종은 항복한 돌궐 귀족들을 회유하려 했으나[41], 639년 아시나 지에세수아이 등이 당 태종 암살을 시도하다 실패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42][43] 이후 당나라는 킬리비 칸을 내세워 돌궐 유민들을 황하 북쪽에 재정착시키려 했으나[45], 돌궐의 완전한 복속은 이후 돌궐 제2제국의 건국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다.
카간 | 재위 기간 | 비고 |
---|---|---|
일리 카간 (토문) | 552년 ~ 553년 | 돌궐 제1 제국 건국 |
을식기 카간 | 553년 | 부민 카간의 아들 (또는 동생) |
목한 카간 | 553년 ~ 572년 | 제국 전성기, 최대 영토 확장 |
타발 카간 | 572년 ~ 581년 | 목한 카간의 동생 |
암라 | 581년 | 타발 카간의 아들, 짧은 재위 |
사발략 카간 (섭도) | 581년 ~ 587년 | 동서 분열 시작 (동돌궐) |
엽호 카간 (처라후) | 587년 | 사발략 카간의 동생 |
도람 카간 (옹우려) | 587년 ~ 599년 | 사발략 카간의 아들 |
... | ... | (이후 동돌궐 카간 계승) |
일리그 카간 | 620년 ~ 630년 | 동돌궐 마지막 카간, 당에 의해 멸망 |
4. 2. 돌궐 제2 제국 (682년 ~ 745년)
679년, 당나라의 단우대도호부(單于大都護府) 아래에 있던 돌궐 지도자 아시데 웬푸와 아시데 펑즈는 아시나 니슈푸를 카간으로 내세우며 당나라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46] 그러나 680년, 당나라 장수 배행검에게 격파당했고 아시나 니슈푸는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46] 아시데 웬푸는 다시 아시나 푸니안을 카간으로 추대하고 반란을 이어갔으나,[46] 결국 아시데 웬푸와 아시나 푸니안 모두 배행검에게 항복했다. 681년 12월 5일,[47] 이들을 포함한 54명의 괵튀르크족 지도자들이 장안의 동쪽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았다.[46]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682년 일테리쉬 카간(아사나 골돌록)과 그의 현명한 조언자 톤유쿠크는 아시나 푸니안의 남은 세력을 규합하여 다시 봉기했다. 그들은 흑사성(현재 내몽골 자치구 후허하오터 북서쪽)을 점령하고 마침내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돌궐 제2 제국을 성공적으로 재건했다.[48] 새롭게 부활한 괵튀르크 카간국은 이후 당나라와 거란 부족 간의 전쟁에 개입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49]
제2 제국은 카프간 카간 시기를 거쳐 빌게 카간 시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했다. 특히 이 시기에는 고유 문자인 돌궐 문자를 사용하여 여러 비문을 남기는 등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다. 대표적인 비문으로는 톤유쿠크 비문, 퀼 테긴 비문, 빌게 카간 비문 등이 있으며, 이는 당시 튀르크의 언어와 역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그러나 빌게 카간이 사망한 후, 괵튀르크족은 내부적인 문제와 주변 부족들의 도전에 직면하며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전처럼 초원의 다른 투르크 부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744년,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위구르 카간국의 공격을 받아 마지막 괵튀르크 카간국은 패배했고, 몽골 고원의 지배권은 위구르에게 넘어갔다.[50] 745년, 백미 카간이 살해되면서 돌궐 제2 제국은 완전히 멸망하였다.
=== 제2 제국 카간 목록 ===
대수 | 카간 이름 | 휘 | 재위 기간 | 비고 |
---|---|---|---|---|
1 | 일테리쉬 카간 (Ilterish Qaghan) | 아사나 골돌록(阿史那骨篤祿, Qutluγ|쿠틀루그otk) | 682년 ~ 690년경 | 힐리가한의 옛 소속, 당에서 독립하여 제국 재건 |
2 | 카프간 카간 (Qapaghan Qaghan) | 아사나 묵철(阿史那默啜, Qapγan|카프간otk) | 690년경 ~ 716년 | 일테리쉬 카간의 동생, 원정 중 피살 |
3 | 빌게 카간 (Bilge Qaghan) | 아사나 묵극련(阿史那默棘連, Bilgä|빌게otk) | 716년 ~ 734년 | 일테리쉬 카간의 아들, 독살됨 |
4 | 이연 카간 (Yiran Qaghan) | Inäl|이넬otk | 734년 | 빌게 카간의 아들 |
5 | 등리 카간 (Tengri Qaghan) | Täŋri|텡그리otk | 734년 ~ 741년 | 이연 카간의 동생, 피살됨 |
6 | 쿠투 야브구 (Kut Yabgu) | 아사나 골돌(阿史那骨咄) | 741년 ~ 742년 | 피살됨 |
* | 힐질이시 카간 (Iltirish Qaghan) | 742년 ~ 744년 | 바스밀 부족의 추장, 카간을 자칭 | |
7 | 오즈미쉬 카간 (Ozmysh Qaghan) | 아사나 오즈미쉬(阿史那烏蘇米施) | 742년경 ~ 744년 | 판퀼 테긴의 아들, 피살됨 |
8 | 백미 카간 (Bomei Tegin Qaghan) | 아사나 골롱복(阿史那鶻隴匐) | 744년 ~ 745년 | 오즈미쉬 카간의 동생, 위구르에 의해 피살, 제국 멸망 |
4. 3. 서돌궐 (583년 ~ 659년/742년)
(노실필부, 곤륜도호부)(돌륙부, 몽지 도호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