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 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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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토 어소는 일본 천황의 거처로 사용된 궁궐로, 과거에는 즉위식이 거행되던 곳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이 도쿄로 천도하면서 즉위식 장소는 도쿄로 변경되었지만, 고어좌와 어장대는 교토 어소에 상설되어 있다. 교토 어소는 다양한 건물과 정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재는 무료로 일반에 공개되어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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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어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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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교토 어소 |
일본어 이름 | 교토고쇼 |
옛 이름 | 도미카도히가시도인도노 (土御門東洞院殿) 궁중 (宮中) 내리 (内裏) 금중 (禁中) 궁중 (宮中) 교토 황궁 (京都皇宮) |
용도 | 천황과 황후의 교토 여행 시의 숙박 장소 |
옛 용도 | 고묘 천황부터 메이지 천황까지의 역대 천황의 정청 및 어소 |
관리 운영 | 궁내청 |
부지 면적 | 3만 3400평 (110,413.2㎡) |
상태 | 현역 (어소로 사용 가능) |
준공 | 1855년 (안세이 2년) 11월 23일 (안세이도 내리) |
개관 개소 | 1337년 (겐무 4년) 남북조 시대 |
개축 | 1866년 (게이오 2년) 2월 (어소 부지 확장) |
우편번호 | 602-0881 |
위치 | 일본 교토부 교토시 가미교구 교토 어원 3 |
문화재 | 문화재보호법 대상 외 (황실 재산이기 때문) |
비고 | 부지에 들어가서 건물 외부를 참관할 수 있지만, 건물 내부는 비공개임.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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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 |
덧붙이는 말 | 안세이도 내리는 간세이도 내리를 거의 그대로 재건한 것으로, 이것이 현재의 교토 어소임. |
2. 역사
헤이안 천도( 엔랴쿠 13년, 794년) 당시의 내리(궁궐)는 현재의 교토 어소에서 서쪽으로 1.7km 떨어진 센본도리에 있었다. 현재의 교토 어소는 원래 사토내리(내리가 화재로 소실되었을 경우 등에 설치된 임시 궁궐) 중 하나였던 도고몬 히가시노토인덴 자리이다. 남북조 시대(14세기 중반)부터 북조 측 내리의 위치로 자리 잡았고, 메이지 2년(1869년) 메이지 천황의 도쿄 행행 때까지 존속했다.[11][12]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고 가마쿠라 막부가 옹립했던 고곤 천황이 이곳을 사토다이리(임시 거처)로 삼은 이래,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갈 때까지 550년 동안 사용되었다. 지금의 교토 어소는 쓰치미카도 도도인 다이리 자체가 아니라 이곳을 바탕으로 확충된 것으로, 처음에는 1개 정(町) 정도에 불과했던 영역이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확대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정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1869년(메이지 유신) 메이지 천황이 도쿄의 고쿄(皇居일본어, 옛 에도성)로 이동하면서, 교토 어소는 '''교토 황궁'''(京都皇宮|교토코구일본어)으로 불리게 되었다.[11][12] 1877년 메이지 천황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황폐해진 어소 주변을 안타까워하며 "교토 어소를 보존하여 옛 모습으로 유지하라"는 명을 궁내청에 내렸다.[16]
1945년에는 폭격 피해를 막기 위해 궁궐 건축물 절반가량을 보존 목적으로 해체했다. 교토 어소는 국유재산으로 일본 궁내청이 관할하는 황실용 재산으로 분류되어 오미야 어소(大宮御所), 센토 어소와 함께 궁내청이 관리하고, 그 주위의 국민공원인 교토 어원(京都御苑)은 환경부가 관리한다.
교토 시민들은 교토 어소와 교토 어원을 묶어 '어소(御所)'라고 부른다. 이전에는 참관 예약이 필요했으나, 2016년 7월 26일부터는 월요일, 공휴일, 연말연시, 황실 행사 등을 제외하고 무료로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다.[166]
2. 1.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출력할 내용이 없습니다. (주어진 섹션 제목은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인데, 원본 소스에는 이 시대와 관련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2. 2.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1331년 고다이고 천황이 교토를 탈출하고 가마쿠라 막부가 옹립했던 고곤 천황이 이곳을 사토다이리(임시 거처)로 삼은 이래,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갈 때까지 550년 동안 사용되었다. 지금의 교토 어소는 쓰치미카도 도도인 다이리 자체가 아니라 이곳을 바탕으로 확충된 것으로, 처음에는 1개 정(町) 정도에 불과했던 영역이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에 의해 확대되었고,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정비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에도 시대에는 게이초(慶長) 연간(1613년), 간에이(寛永) 연간, 조오(承応) 연간, 간분(寛文) 연간, 엔포(延宝) 연간, 호에이(宝永) 연간(1709년), 간세이(寛政) 연간(1790년), 안세이(安政) 연간(1855년)에 걸쳐 여덟 번 재건되었는데, 옛 궁을 헐고 재건축한 게이초 연간과 간에이 연간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화재로 소실된 뒤 재건된 것이다.[14] 가장 마지막으로 재건된 현재 모습의 다이리는 에도 말기인 안세이 2년(1855년)에 헤이안 양식에 따라 재건된 것으로 '''안정내리(安政内裏)'''로도 불리며, 지금의 면적도 에도 말기에 확보된 것이다. 현재 넓이는 약 20.2ha이다.2. 3.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메이지 유신) 메이지 천황이 도쿄의 고쿄(皇居일본어, 옛 에도성)로 이동하면서, 교토 어소는 '''교토 황궁'''(京都皇宮|교토코구일본어)으로 불리게 되었다.[11][12] 1877년 메이지 천황이 교토를 방문했을 때, 황폐해진 어소 주변을 안타까워하며 "교토 어소를 보존하여 옛 모습으로 유지하라"는 명을 궁내청에 내렸다.[16]1945년에는 폭격 피해를 막기 위해 궁궐 건축물 절반가량을 보존 목적으로 해체했다. 교토 어소는 국유재산으로 일본 궁내청이 관할하는 황실용 재산으로 분류되어 오미야 어소(大宮御所), 센토 어소와 함께 궁내청이 관리하고, 그 주위의 국민공원인 교토 어원(京都御苑)은 환경부가 관리한다.
교토 시민들은 교토 어소와 교토 어원을 묶어 '어소(御所)'라고 부른다. 이전에는 참관 예약이 필요했으나, 2016년 7월 26일부터는 월요일, 공휴일, 연말연시, 황실 행사 등을 제외하고 무료로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다.[166]
3. 주요 건물
교토 어소의 주요 건물은 다음과 같다.
- '''시신덴(紫宸殿)''': 국가 의식 전용 건물로, 즉위식 등 중요한 의식이 거행되었다. 1868년 오조의 칙서가 발표된 곳이기도 하다.[32]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의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건물 정면에는 사콘의 벚꽃과 우콘의 귤나무가 심어져 있다.
- '''세이료덴(清涼殿)''': 원래 천황의 거주 공간이었으나, 고쇼고텐이 지어진 후에는 천황의 집무 및 의식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내부에는 천황의 휴식 공간인 "미초다이"와 공식 업무를 처리하던 "주간어좌(晝御座)" 등이 있다.
- '''고고쇼(小御所)''': 도쿠가와 쇼군 직할 무사들이 천황을 알현하던 장소이자 일부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1867년 고고쇼 회의가 열린 곳으로, 메이지 유신의 왕정복고가 선포되었다. 1954년 소실되었다가 1958년 재건되었다.
- '''오가쿠몬조(御学問所)''': 천황이 귀족들을 접견하고 의례를 읽거나 시 낭송을 하던 곳이다. 쇼인즈쿠리 양식으로 지어졌다.
- '''고쇼고텐(御常御殿)''': 천황의 일상생활 공간으로,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갈 때까지 거주했던 곳이다. 1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겐지노마에는 삼종신기 중 검과 곡옥이 놓여 있었다.
- '''오미마(御三間)''': 열반회, 초륜, 칠석, 우란분회 등의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이 외에도 오스즈미쇼(御涼所), 고슌(迎春), 황후고쇼고텐(皇后御常御殿) 등 다양한 용도의 건물들이 있다.
3. 1. 외조(外朝)
- 어차기(御車寄일본어) - 제후들이 황궁을 드나들 때 사용한 현관이다.
- 신어차기(新御車寄일본어) - 천황이 황궁을 드나들 때 사용한 현관으로, 다이쇼 천황 즉위식 때 만들어졌다.[53]
- 제대부간(諸大夫間일본어) - 제후들이 천황을 알현하기 전에 거치는 대기실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3개의 방이 있으며, 각각 “공경의 방”(호랑이 방), “전상인의 방”(학 방), “여러 대부의 방”(벚꽃 방)이라고 불린다. 방 이름은 각 방의 칸막이 그림 주제에서 따온 것으로, 기시다이, 가노 에이가쿠, 하라 자이쇼 등이 그렸다.[53][54][55]
- 춘흥전(春興殿일본어) -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식 때 건립되었으며, 헤이안쿄 궁궐 17개 건물 중 하나이다. 다이쇼 천황 즉위령 때 건립되었다. 다이쇼·쇼와 두 천황의 즉위식에서 삼종신기를 교토 고쇼로 옮길 때 임시 보관 장소로 사용되었다.[104]

고위 관리들은 편백나무 지붕을 얹고 칠하지 않은 네 개의 나무 기둥으로 지탱되는 건례문을 통해 입장했다. 건례문을 지나면 주홍색으로 칠해지고 기와지붕을 얹은 내문인 ''Jomeimon''이 보이며, Shishin-den으로 이어진다. ''Gekkamon''은 주 마당 서쪽에 있는 작은 문이다.
매년 5월에 열리는 葵祭 (아오이 마쓰리) 행렬은 건례문 앞에서 시작된다.
외곽 마당에 있는 또 다른 문은 건례문과 비슷한 건축 양식을 가진 건춘문이다. 건춘문 옆에는 전통적인 공놀이인 蹴鞠 (케마리)가 행해지는 광장이 있다.
3. 2. 정전(正殿) 권역

교토고쇼(京都御所) 부지 남쪽에 남향으로 서 있는, 옛 내궁의 정전이다. 천황의 즉위, 원복, 입태자, 절회 등 가장 중요한 공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던 건물이다. 1868년(메이지 원년) 3월 14일, '''오조의 칙서'''가 紫宸殿에서 발표되었다. 紫宸殿에 마련된 제단 앞에서 당시에는 "오조의 칙서"라는 명칭이 아니라 "천신지기고서제"라는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칙서의 내용은 산조 사네토미가 신전에서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32]

건축은 지붕이 입모야조, 히와다부키이다. 신사(모야, 「모야」라고도 씀)의 동서남북에 쪽마루를 두르고, 그 바깥에 수노코엔을 두른다. 평면 규모는 수노코엔을 제외하고 간구가 33미터 남짓, 오쿠후쿠가 23미터 미만이다. 수노코엔 주위에는 높은 난간을 두르고, 건물 정면에는 18단의 계단을 설치한다. 신사 내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지 않고 넓은 1실로 하고, 기둥은 원주, 바닥은 다다미를 깔지 않고 닦은 판자를 깔고, 천장판을 붙이지 않는 화장 지붕 밑으로 한다. 정면의 기둥 사이 장치는 셔터문(시토미)이다.[33][34][35][36]
이 건물은 에도 시대 말기의 재건이지만, 기둥을 모두 원주로 하는 점, 기둥 사이 장치에 셔터문을 사용하고 이것을 건물 안쪽으로 들어올리는 점, 내부에 다다미를 깔지 않고 판자를 깐 넓은 방으로 하는 점 등 복고적인 건물이며, 양식은 헤이안 시대의 침전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침전조는 나라 시대에 전래된 중국 당나라의 건축 양식을 기원으로 하면서도, 담백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감성에 맞는 간소한 양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紫宸殿과 청량전은 내궁의 중심적인 건물이면서도 화려한 장식이나 위압적인 자세가 없고, 기둥 등의 부재는 원목 마감, 셔터문의 틀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단, 장압, 셔터문, 높은 난간 등 요소 요소에 박힌 장식 금구를 주칠로 하고, 정면 계단의 나무 끝을 흰색으로 칠하여 간소함 속에서도 색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사 내부에는 중앙에 천황의 자리인 고미자, 그 오른쪽에 황후의 자리인 御帳台(미쵸다이)가 있다. 현재의 고미자와 御帳台는 다이쇼 4년(1915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 대례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다. 紫宸殿의 남쪽 정면은 한쪽에 흰 모래를 깔아 만든 남쪽 정원이고, 건물 정면 좌우에는 사콘의 벚꽃과 우콘의 귤나무가 있다. 남쪽 정원은 회랑으로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고, 회랑의 남쪽 정면에 쇼메이몬, 동쪽에 니쓰케몬, 서쪽에 게쓰케몬이 있다. 쇼메이몬의 동쪽과 서쪽 측문을 각각 초락문, 영안문, 니쓰케몬의 남쪽과 게쓰케몬의 남쪽에 있는 것을 각각 좌측문(사에키몬), 우측문(우에키몬)이라고 한다. 기요덴(ぎようでん)은 紫宸殿에서 동쪽 정면에 고식에 따라 안세이도 조영부터 재건되고 있다. 건물로서의 역할은 천황의 역대 어물·보물을 보관하는 납전으로 사용되었다. 紫宸殿이 히와다부키로 원목 마감인 것에 비해, 회랑과 거기에 열린 문은 기와지붕이고, 축부와 문을 주칠로 한다. 쇼메이몬의 남쪽은 고쇼의 정문인 켄레이몬이다.[37][38][39]

- 승명문(承明問일본어)- 자신전의 정문
- 자신전(紫宸殿일본어) - 황궁의 정전(正殿)
- 일화문(日華門일본어) - 자신전 좌측에 있는 문
- 월화문(月華門일본어) - 자신전 우측에 있는 문
- 의양전(宜陽殿일본어) - 황실의 어물(御物)을 보관하는 전각
시신덴(紫宸殿)은 고쿄(皇居) 경내에서 가장 중요한 의식용 건물이다.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의 즉위식이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이 건물은 33by 크기이며, 맞배지붕과 팔작지붕이 특징인 전통 건축 양식을 갖추고 있다. 정면 계단 양쪽에는 매우 유명하고 신성시되는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는데, 동쪽 왼편에는 벚나무(''사쿠라''), 서쪽 오른편에는 타치바나 오렌지 나무가 있었다. 흰 자갈 정원은 의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신덴(紫宸殿) 중앙은 庇|hisashi일본어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것은 전통 헤이안 시대 건축에서 귀족 저택의 본관을 둘러싼 길고 얇은 복도이다. 그 안에는 널빤지로 덮인 구간이 교차하는 넓은 공간이 있으며, 중앙 즉위실로 이어진다.
高御座|Takamikura일본어는 황실의 즉위식에서 사용되는 황좌이다. 707년 원명 천황 시대부터 즉위식에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황좌는 1913년, 다이쇼 천황 즉위 2년 전에 원래 디자인을 본떠 제작된 것이다. 실제 황좌는 검은 칠을 한 의자로, 검은 칠을 하고 주홍색 난간이 있는 3단의 단상 위에 팔각형 천개가 놓여져 있다. 황좌 양쪽에는 두 개의 작은 탁자가 있는데, 이곳에는 일본의 삼종신기 중 칼과 구슬, 그리고 관인과 국새가 놓여진다. 천개 위에는 ''hō-ō''라고 불리는 큰 봉황상이 있고, 천개 주변에는 작은 봉황 여덟 마리, 보석과 거울이 장식되어 있다. 천개에는 금속 장식과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천황을 시야에서 가리는 미닫이 문은 賢聖障子|賢聖障子일본어라고 불리며, 32명의 천상의 성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헤이안 시대 회화의 주요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
御帳台|Michodai일본어는 황후의 좌석(어좌)이다. 현재의 어좌는 1913년에 건설되었다. 색상과 형태는 高御座|Takamikura일본어와 같지만, 크기는 약간 작고 디자인이 더 단순하다. 천개에는 전설 속의 새인 ''란초''(鸞鳥)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황실의 어좌는 항상 중앙홀 중앙에 놓이고, ''미초다이''는 그 오른쪽에 위치한다. 두 어좌 모두 ''미수''(御簾)라고 불리는 발(簾)로 일반인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
교토 고쇼는 헤이안 시대의 내리와 위치가 다르고 건물도 에도 시대 후기에 재건되었지만, 건축, 정원, 장벽화가 하나가 되어 일본 전통 문화의 정수를 지금에 전하고 있다.[28][29]
교토고쇼(京都御所) 부지를 둘러싼 높은 처마의 토담은 다섯 줄의 선이 들어간 筋塀이라는 명칭으로, 가장 격식 높은 집에 사용되는 담장이며, 총 6곳의 문(황거육문)이 설치되어 있다. 남쪽의 건례문(建禮門, 정문), 북쪽의 삭평문(朔平門, 북문), 동쪽 남쪽에 있는 건춘문(建春門, 동문), 서쪽 남쪽에 있는 의추문(宜秋門, 서문)이 사방의 정문이며, 서쪽에는 의추문 북쪽에 청소문(清所門, 청소어문), 그 북쪽에 황후문(皇后門, 황후궁어문)이 있다. 이들 육문 외에 "아나몬"(穴門, 도키문(道喜門), 액문(掖門))이라고 하는 지붕이 없는 입구가 12곳(남쪽에 1, 동쪽에 5, 서쪽에 4, 북쪽에 2) 있다.
귀문에 해당하는 부지의 북동쪽 모서리에서는, 토담이 그곳만 오목하게 들어가 있으며, "원숭이辻"(猿ヶ辻)라고 불린다. 명칭의 유래는, 여기에 악귀를 막기 위해 히요시산왕사의 신사로 여겨지는 원숭이를 모신 데서 유래한다.[30][31]
교토 고쇼에서는 건물이 겉으로 드러나는 의식용 건물과 안쪽의 거주용 건물로 나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원도 의식용 공간과 안쪽 공간에서는 그 모습이 완전히 다르다.[108]
자신전 남쪽의 정원은 '''남정'''이라 칭하며, 온통 흰 모래만 깔린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한 빈터가 아니라, 자신전 건물과 하나가 된 의식을 위한 공간이었다. 자신전 앞에는 「좌경의 벚나무」와 「우경의 귤」이 있다(「좌」「우」는 천황을 보고 하는 말이며, 동쪽이 벚나무, 서쪽이 귤나무이다). 벚나무와 귤나무는 각각 꽃나무와 과수를 대표하는 것이다. 다만, 좌경의 벚나무는 헤이안 천도 당시에는 벚나무가 아니라 매화였다. 이것이 벚나무로 바뀐 것은 닌묘 천황 때이다. 『만엽집』 시대에는 일본 꽃나무의 대표는 매화였지만, 헤이안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어 벚나무가 대표적인 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매화에서 벚나무로의 변경은 그것을 반영한 것이다. 좌경의 벚나무는 1855년( 안세이 연간), 1930년(쇼와 5년), 1998년(헤이세이 10년)에 심어졌으며, 현존하는 나무는 오오시마 벚나무의 특징을 일부 지닌 야마자쿠라 계열의 벚나무이다. 우경의 귤나무는 안세이 6년(1859년)에 심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109][110][111][112]
3. 3. 편전(便殿) 권역

세이료덴(清涼殿)은 원래 천황의 침전(寢殿)이었으나, 후에 편전(便殿)으로 역할이 변경되었다. 시신덴(紫宸殿)의 서쪽에 위치하며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 건물 역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주로 편백나무로 지어졌다. 원래 천황이 개인적인 일을 처리하는 장소였으나, 나중에 여러 모임과 회합에도 사용되었다.[5] 중앙에는 천황이 휴식을 취하는 공간이 있었고, 홀의 동쪽에는 2장의 다다미를 깔아 고관대작들이 앉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천황은 이곳에서 공식적인 업무를 처리했다. 홀의 북쪽에는 천황이 밤에 잠자던 폐쇄된 공간이 있었는데, 후대 천황들은 공식 거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서쪽은 천황의 아침 식사를 위한 공간이었고, 화장실도 있었으며, 남쪽은 황실 문헌 보관소 관리인이 사용했다. 이 지역에는 토사파(土佐派) 거장들의 그림이 있었고, 바로 밖에는 여러 희귀한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최초의 건물은 8세기 말 천황의 거처로 지어져 11세기까지 사용되었다. 1790년에 원래 건물보다 규모는 작지만 원래 구조를 보존하여 이곳에 재건되었다.
小御所일본어는 도쿠가와 쇼군의 직할 무사(武家(ぶけ))들이 천황을 알현하던 장소였다. 또한 일부 의식에도 사용되었다.
이 독특한 건물은 신전 즈쿠리(寝殿造)와 쇼인 즈쿠리(書院造) 양식의 건축 요소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1867년 12월 9일 밤, 이곳에서 고쇼 회의(小御所会議)가 열렸고, 이 회의에서 왕정복고(왕정복고(御世復古))가 선포되었다. 건물은 1954년에 소실되어 1958년에 재건되었다.
어학문소(御学問所)는 의례를 읽고 매달 시 낭송을 하는 곳이었으며, 또한 천황이 귀족들을 접견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이 건물은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으로 이리모야 히와다부키(入母屋檜皮葺) 지붕을 가지고 있다.
3. 4. 연조(燕朝) 권역
고쇼 부지 남쪽에 남향으로 서 있는 옛 내궁의 정전이다. 천황의 즉위, 원복, 입태자, 절회 등 가장 중요한 공적인 의식이 거행되었던 건물이다. 1868년(메이지 원년) 3월 14일, '''오조의 칙서'''가 교토 고쇼 정전인 자신전에서 발표되었다. 자신전에 마련된 제단 앞에서 당시에는 "오조의 칙서"라는 명칭이 아니라 "천신지기고서제"라는 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칙서 내용은 산조 사네토미가 신전에서 낭독하는 형식으로 발표되었다. 참고로, 의식 전에는 천황의 서간인 어신한(억조안부국위선양의 어신한)이 발표되어 국민에게 전달되었다.[32]
건축은 지붕이 입모야조, 히와다부키이다. 경행(간구) 9칸, 량간(오쿠후쿠) 3칸의 신사(모야, 「모야」라고도 씀)의 동서남북에 쪽마루를 두르고, 그 바깥에 수노코엔을 두른다(여기서 말하는 "칸"은 길이의 단위가 아니라 기둥 사이의 수를 의미한다. 이하 동일). 평면 규모는 수노코엔을 제외하고 간구가 33미터 남짓, 오쿠후쿠가 23미터 미만이다. 량간의 3칸은 등간이 아니고, 안쪽(북쪽)의 1칸만 기둥 간격이 매우 좁다. 수노코엔 주위에는 높은 난간을 두르고, 건물 정면에는 18단의 계단을 설치한다. 신사 내부는 칸막이를 설치하지 않고 넓은 1실로 하고, 기둥은 원주, 바닥은 다다미를 깔지 않고 닦은 판자를 깔고, 천장판을 붙이지 않는 화장 지붕 밑으로 한다. 정면의 기둥 사이 장치는 셔터문(시토미)이다. 교토 고쇼의 자신전과 세료덴에서는 일반적으로 "셔터문"이라고 불리는 기둥 사이 장치를 전통적인 명칭으로 "미코우시"(御格子)라고 부른다.[33][34][35][36]
이 건물은 에도 시대 말기의 재건이지만, 기둥을 모두 원주로 하는 점, 기둥 사이 장치에 셔터문을 사용하고 이것을 건물 안쪽으로 들어올리는 점, 내부에 다다미를 깔지 않고 판자를 깐 넓은 방으로 하는 점 등 복고적인 건물이며, 양식은 헤이안 시대의 침전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침전조는 나라 시대에 전래된 중국 당나라의 건축 양식을 기원으로 하면서도, 담백한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감성에 맞는 간소한 양식으로 변화한 것이다. 자신전과 세료덴은 내궁의 중심적인 건물이면서도 화려한 장식이나 위압적인 자세가 없고, 기둥 등의 부재는 원목 마감, 셔터문(미코우시)의 틀은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단, 장압, 셔터문, 높은 난간 등 요소 요소에 박힌 장식 금구를 주칠로 하고, 정면 계단의 나무 끝을 흰색으로 칠하여 간소함 속에서도 색채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신사 내부에는 중앙에 천황의 자리인 고미자, 그 오른쪽에 황후의 자리인 미초다이가 있다. 현재의 고미자와 미초다이는 다이쇼 4년(1915년) 다이쇼 천황의 즉위 대례에 맞춰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전의 남쪽 정면은 한쪽에 흰 모래를 깔아 만든 남쪽 정원이고, 건물 정면 좌우에는 사콘의 벚꽃과 우콘의 귤나무가 있다. 남쪽 정원은 회랑으로 사각형으로 둘러싸여 있고, 회랑의 남쪽 정면에 쇼메이몬, 동쪽에 니쓰케몬, 서쪽에 게쓰케몬이 있다. 이러한 문 외에도 회랑에는 4곳에 측문(에키몬)이 있다. 쇼메이몬의 동쪽과 서쪽 측문을 각각 초락문, 영안문, 니쓰케몬의 남쪽과 게쓰케몬의 남쪽에 있는 것을 각각 좌측문(사에키몬), 우측문(우에키몬)이라고 한다. 기요덴은 자신전에서 동쪽 정면에 고식에 따라 안세이도 조영부터 재건되고 있다. 건물로서의 역할은 천황의 역대 어물·보물을 보관하는 납전으로 사용되었다. 자신전이 히와다부키로 원목 마감인 것에 비해, 회랑과 거기에 열린 문은 기와지붕이고, 축부와 문을 주칠로 한다. 쇼메이몬의 남쪽은 고쇼의 정문인 켄레이몬이다.[37][38][39]
교토 고쇼의 건물은 근세를 통해 여러 번 소실과 재건을 반복했지만, 자신전과 세료덴이 헤이안 시대풍의 복고적인 양식으로 재건된 것은 간세이도 조영 때이며, 다음 안세이도 조영에서도 그것이 계승되었다. 간세이도 조영의 봉행(총책임자)을 맡은 것은 로쥬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이다. 당시 일본은 막부의 재정난과 흉작에 시달리고 있었고, 헤이안 시대풍의 복고 양식으로 재건하는 데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다노부는 처음에는 반대 입장이었지만, 결국 자신전과 세료덴에 한정하여 옛 양식으로 재건하기로 했다.[40] 침전조 양식의 재현에는 공가 고실가의 우라마쓰 미쓰요(우라마쓰 고젠)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 결과, 평면 구성, 건구, 원주, 판자 바닥 등은 헤이안 시대의 것이 재현되고 있지만, 지붕 구조까지는 재현할 수 없어 지붕의 형태와 구조는 에도 시대 목수의 기술에 의한 근세풍의 것이 되고 있다. 자신전의 지붕은 크고 경사가 가파르며, 상부의 박공 부분과 하부의 팔작지붕 부분 사이에 단차를 두고 지은 가부리부키(시코로부키)가 되어 있다. 헤이안 시대의 침전조 건물에는 이렇게 크고 가파른 지붕은 없었다. 자신전의 처마를 지탱하는 복잡한 조물은 사찰 건축에 사용되는 양식으로 침전조와는 다르다. 기둥 기부에 사용되는 초반도 중세 이후의 선종 양 건축에 사용된 형식이다. 그러나, 현대와 같은 건축사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에도 시대에 문헌 조사만으로 헤이안 시대의 양식을 재현한 것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41]
자신전의 신사 부분에는 칸막이가 없고, 신사와 동쪽 쪽마루 및 남쪽 쪽마루와의 경계에도 칸막이가 없지만, 서쪽 쪽마루 및 북쪽 쪽마루와의 경계는 벽으로 막혀 있고, 후자에는 유명한 겐조쇼지가 있다. 겐조쇼지란 자신전의 고미자 뒤, 신사와 북쪽 쪽마루와의 경계의 장벽으로 중국의 전설 시대부터 고대에 이르는 충신 공신 중에서 선택된 32명의 인물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에서 이 이름이 있다. 이러한 초상화는 천자의 어좌소를 장식하기에 적합한 그림 제목으로 여겨졌고, 헤이안 시대 초부터 계승되어 온 유서 깊은 그림 제목이다. 신사와 북쪽 쪽마루의 경계의 기둥 사이는 9칸이지만, 그 중 중앙의 칸은 문이 되어 있고, 사자·고마이누·부문거북을 그리고, 나머지 8개의 기둥 사이에 각 4명씩 총 32명의 인물이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 장지 그림은 탈착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에이 7년(1854년)의 화재 때에는 꺼내어 화를 면했고, 안세이도 재건 때에는 상술한 화재에 타지 않은 간세이도 제작의 장지 그림이 수리되어 재사용되었다. 현존하는 겐조쇼지의 그림은 간세이도에 스미요시 히로유키가 그린 것을 스미요시 히로카네가 수리하고, 각 그림 상부의 색지 형태의 글씨는 오카모토 야스타카의 필적이다. 건물 정면 중앙에 걸린 "자신전"의 현판도 간세이도 조영 당시의 것을 재사용하고 있으며, 글씨는 겐조쇼지의 색지 형태와 마찬가지로 오카모토 야스타카의 필적이다.[42][43]
세이료덴은 자신전의 북서쪽에 있으며, 동쪽을 정면으로 한 남북으로 긴 건물이다. 헤이안 시대의 내리에서는 세이료덴이 천황의 거처였지만, 덴쇼 시대에 고쇼고텐이 지어진 이후로는 천황의 일상생활 공간이 그곳으로 옮겨가고, 세이료덴은 천황의 집무 및 의식 공간이 되었다. 여기에서는 정월의 시호하이 등의 행사가 거행되었다. 건물은 이리모야즈쿠리, 히와다부키이며, 자신전과 마찬가지로 침전조를 기본으로 하지만, 거의 칸막이가 없는 자신전과는 달리, 원래 거주 공간이었던 세이료덴의 내부는 많은 방으로 나뉘어 있다. 구조적으로는 신샤, 쇼, 손쇼로 구성된다. 신샤는 게타코우(폭) 9칸, 료칸(깊이) 2칸으로 가늘고 길며, 이 동서남북에 각각 쇼가 있고, 동쇼의 바깥쪽(동쪽)에는 바닥 높이를 한 단 낮춘 손쇼(히로쇼라고도 함)가 붙어 있으며, 또한 건물 외곽에는 남쪽을 제외한 삼면에 스스코엔을 두른다. 원주를 사용하고, 바닥은 판자 바닥이며, 천장은 천장판을 붙이지 않고 화장 지붕 밑으로 하고, 문은 시토미를 사용하는 등 복고적인 양식을 사용하는 점은 자신전과 공통적이다.[44][45]
신샤의 남쪽, 기둥 사이 5칸 분과 그 동쪽 쇼 부분을 넓은 1실로 한다. 이곳은 천황이 일상적인 공무를 수행했던 곳이다. 신샤 중앙에는 천황의 휴식 공간이었던 "미초다이"가 있으며, 한 쌍의 사자상이 그 앞을 지키고 있다. 미초다이 앞, 동쇼 중앙에 해당하는 부분에는 "주간어좌"(히노오마시)가 있다. "주간어좌"는 천황의 자리로, 판자 바닥 위에 운겐베리의 아쓰조 2장을 나란히 깔고, 그 위에 야마토니시키의 시토네를 놓는다. 미초다이를 향해 왼쪽(남쪽)에는 "다이쇼지"라고 하는 의자와, "다이반"이라고 하는 주칠의 식탁이 있다. 이들은 하레 행사 때 의식적인 식사 시에 천황이 사용했던 것이다. 동쇼 남쪽 끝에는 "석회단"(이시바이단)이라고 하는 장소가 있다. 이곳만 바닥이 판자 바닥이 아니라 회반죽으로 굳혀져 있으며, 천황은 여기서 이세 신궁 등에 대한 요하이를 행했다. 석회단 안에는 "진호"라고 하는 원형의 구멍이 있다. 이것은 말 그대로 먼지를 버린 곳이라고도 하지만, 겨울에는 여기에 불을 지펴 따뜻하게 했다고 한다. 신샤의 북쪽에는 "야궁전"(욘노오토도)이라고 하는 방이 있다. 이곳은, 방 이름 그대로, 원래 용도는 천황의 침실이었지만, 고쇼고텐에 천황의 생활 공간이 옮겨간 이후로는 형식적인 것이 되었다. 실내에는 아쓰조 2장을 나란히 깔고 그 위에 아쓰조 1장을 더 놓는다. 아쓰조 주위에는 "다이송병풍"이라고 하는 육곡일쌍의 병풍을 둘러친다. 이 병풍에 그려져 있는 것은 타구의 지팡이를 든, 기마 또는 서있는 모습의 중국・송나라 사람들이다. 야궁전의 동쪽에는 "니칸"이라는 작은 방이 있다. 옛날에는, 폭 1칸, 깊이 1칸의 기둥 사이로 둘러싸인 공간의 넓이를 "칸"이라고 하였고, 이 방은 폭 2칸, 깊이 1칸이기 때문에 "니칸"이라고 불린다. 니칸의 북쪽에는 "고키덴노카미노미쓰보네", 야궁전의 북쪽에는 동쪽에 "하기토", 서쪽에 "후지쓰보노카미노미쓰보네"라는 작은 방이 있다. 서쇼에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귀신의 방", "다이반쇼", "아사가레이노마", "오데미즈노마", "오유덴"이 있다.
고대부터 일본에 전해 내려오는 건축 배치에서는 귀문(북동쪽)을 꺼리는 전설이 있다. 한편, 쓰키지베이의 "사루가쓰지"는 귀문에 있으며, 세이료덴 내부에는 귀신의 방이 존재했다. 세이료덴의 남서쪽 구석, 즉 궁궐의 뒷귀문 위치에 있다. 아스카베 쓰네노리가 간포 원년(964년)에 귀를 물리치는 백택왕상을 그렸다고 한다.[46] 벽에 그려진 왕은 홀로 칼을 들고 귀를 쫓는 용맹한 모습이며, 그것을 백택왕이라고 하며, 고대 인도 파라나국의 왕으로 귀를 사로잡은 강용한 무장이라는 설이 있다. 준토쿠 천황이 지은 금비초에 그림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현재 건물(귀신의 방)에는 백택왕의 그림이 그려져 있지 않다.[47] 참고로, 메이지 시대의 『금비초 강의』 3권 상(세키네 마사나오 저)에서 인용하고 있는 에도 중기의 수필 「나츠야마잡담」에는 백택왕은 리(李)의 장군, 「백택왕」으로도 기록되어 있다.[48] 1968년(쇼와 43년), 황거 동교원이 일반 공개되었지만, 교토고쇼는 GHQ의 관리하에 있으면서도 1946년(쇼와 21년) 11월에 일반 공개[48]되었으나, 현재도 귀신의 방은 일반 공개되지 않는다고[48] 고이케는 말하고 있다. 이에 대해, 건축 배치를 연구하는 고이케 야스토시는 저서 『일본인이라면 알아두고 싶은 올바른 건축 배치의 책』에서 교토고쇼나 천황가가 귀의 재앙, 신의 벌(자연재해, 화재, 전염병의 만연)을 두려워하여 쓰키지베이를 오목하게 만들었다기보다는, 서민에게 재앙이 미치지 않도록 황실이 일방적으로 오목한 부분(사루가쓰지)으로 받아들이고, 고쇼 내부의 세이료덴의 귀신의 방으로 귀를 인도하여 귀를 베어 세상의 평화를 기원했던 것(궁중 제사)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논하며, 밖에서 본 고쇼 담의 오목한 부분에만 주목한 서민의 단순한 생각이 귀문 제거의 발상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하고 있다.
그 대각선상의 건물 북동쪽 구석의 귀문에 해당하는 위치에는 방이 없고, 발코니의 일부가 되어 있다. 남쪽 베란다는 넓은 1실을 이루고, 별명으로 "덴조노마"라고 불린다. 여기는 덴조닌, 즉 세이료덴으로의 승전을 허락받은 사람들의 대기실이며, 회의실로도 사용되었다. 이 방에는 "닛큐칸"이라는, 세로로 길고 꼭대기가 뾰족한 판이 놓여 있다. 여기에 덴조닌의 성명을 적고, 당번 덴조닌의 이름이 적힌 곳에 출근 날짜와 시간을 적은 종이를 붙였다. 덴조노마와 신샤의 경계 벽의 높은 위치에는 "구시가타마도"라고 하는 반원형의 작은 창이 열려 있다. 구시가타마도는 기둥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나뉘어 있으며, 오른쪽 절반은 낮에 앉는 곳이 있는 신샤에, 왼쪽 절반은 귀신의 방에 각각 면하고 있다. 이 창에는 가로 난간이 있으며, 신샤 쪽에서는 덴조노마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덴조노마 쪽에서는 신샤 쪽을 볼 수 없다. 이 창은 뇨칸들이 승전한 덴조닌들의 평가를 하는 데 사용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세이료덴 내부의 쇼헤키가는 야마토에 계열의 도사 미쓰키요, 토사 미쓰후미, 토사 미쓰타케가 담당하고 있다.[49][50][51][52]
세이료덴 서쪽에 있는 서원식 건물은 주된 방의 이름을 따서 “'''여러 대부의 방'''”이라고 불린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3개의 방이 있으며, 각각 “공경의 방”, “전상인의 방”, “여러 대부의 방”이라고 한다. 구교의 방은 별명이 “호랑이 방”이며, 산기 이상의 공가가 사용했다. 덴조비토의 방은 별명이 “학 방”이며, 제후, 소자다이, 고가 등이 사용했다. 모로타이후의 방은 별명이 “벚꽃 방”이며, 그 이름처럼 여러 대부가 사용했다. 이처럼 고쇼 내부에서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사용하는 방이 엄격하게 나뉘어 있었다. 방 이름인 학 방, 호랑이 방, 벚꽃 방은 각 방의 칸막이 그림의 그림 주제에서 따온 것으로, 모두 수묵담채이며, 호랑이 그림은 기시다이, 학 그림은 가노 에이가쿠, 벚꽃 그림은 하라 자이쇼의 필치이다. 여러 대부의 방 북쪽에는 “오차요세”, 남쪽에는 다이쇼 천황 즉위식 때 만들어진 “신오차요세”가 있다.[53][54][55]
'''소고쇼'''는 세이료덴 동쪽, 자신전 북동쪽에 위치한 남북 방향의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홰나무 껍질 지붕이다. 시작은 무로마치 시대, 쇼군이 참내할 때 휴식을 취하거나 의복을 갈아입기 위해 설치된 곳이다. 에도 시대가 되면서 천황이 여러 종류의 의식이나 쇼군·다이묘·에도 막부의 사자, 소자다이, 제후 등을 알현하고 황태자의 원복 등의 의식에 사용된 건물이다. 메이지 유신의 게이오 3년(1867년, 신력으로는 1868년 1월)에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처리를 결정하기 위한 이른바 “고고쇼 회의”가 열린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56] 다만 --. 가모가와 강변에서 열린 불꽃놀이에서 발사된 불꽃의 잔불이 홰나무 껍질 지붕에 떨어져서 발화한 것이었다.[57][58] 오늘날의 소고쇼는 4년 후에 소실된 안세이 시대 소고쇼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재건한 것이다. 구조는 내부의 신사 부분에 3개의 방을 설치하고 동서남북에 각각 처마를 설치하고 있다. 신사는 다다미 바닥에 격천장, 처마는 나무판 바닥에 화장 지붕 밑이다. 건구에는 반덧문을 사용하고,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계단을 설치하고 있으며, 외관은 신덴즈쿠리 풍의 요소가 보이지만, 내부는 쇼인즈쿠리 풍이다. 다만 도코노마 등의 자시 장식은 없다. 신사의 3개의 방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아래쪽 방”, “중간 방”, “윗쪽 방”이 되며, 천장은 모두 격천장이지만, 아래쪽은 격천장, 중간은 작은 조립 격천장, 윗쪽은 최고급의 접이식 작은 조립 격천장으로 방의 격에 따라 형식에 차이를 두고 있다. 윗쪽 방에는 두꺼운 다다미 2장을 깐 위에 자리를 놓고 천황의 옥좌로 하고, 그 뒤에는 일본화의 사계절 그림 병풍을 세우고 있다. 이들 3개의 방의 칸막이 그림은 전통적인 일본화 기법으로 일본의 사계절 풍경을 그린 것으로, 윗쪽 방에는 요시노의 봄, 중간 방에는 후지산의 여름과 류센지 강의 가을, 아래쪽 방에는 오토 강의 겨울을 그리고 있다. 안세이 시대 소고쇼의 칸막이 그림은 윗쪽은 가노 에이가쿠, 중간은 쓰루자와 단마, 아래쪽은 가쓰야마 다쿠분, 동쪽 처마는 하라 자이쇼, 남쪽 처마는 우메도 자이신이 각각 담당했지만, 많은 칸막이 그림이 궁전과 함께 재로 돌아갔다.[59]
하지만, 화재에서 구출한 쇼지 11장과 슬라이딩 도어 그림 6장, 당시 별도로 보관되어 있던 북쪽 처마를 담당한 레이제이(오카다) 다메치카가 그린 쇼지 6장과 윗쪽 방을 담당한 가노 에이가쿠가 그린 윗쪽 방 북쪽 쇼지 6장은 현재도 궁내청 교토 사무소에서 보관되고 있다. 다른 소실된 칸막이 그림은 기쿠치 게이게쓰 문하의 일본 화가 30명이 남아있는 쇼지 등과 사실을 바탕으로 고증을 거쳐 5년의 세월을 들여 복원한 것이다.[60][61][62][63][64][65][66]
'''오가쿠몬조'''는 소고쇼 북쪽에 위치한 남북 방향의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 홰나무 껍질 지붕이다. 소고쇼와 달리, 헤이안 복고풍 건물이 아니고, 건구는 마이라토를 사용하고, 내부의 주된 방에는 도코, 다나를 설치하는 등 내부 외관 모두 쇼인즈쿠리의 디자인으로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한 게이초 시대의 건립 당시 처음으로 설치된 건물로, 고쇼하지메 등의 행사가 열린 외에, 학문뿐만 아니라 유흥의 장소나 천황이 공가 등과 대면하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67] 안세이 시대 건립의 막말 무렵이 되면 오가쿠몬조는 연중 행사의 장소를 비롯하여, 고쇼고텐의 수리를 할 때 임시 고쇼고텐으로도 사용된 외에 대면의 장소로 사용되어, 고메이 천황이 도쿠가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도쿠가와 요시노부와 대면한 곳이 되었다.[68]
메이지 유신에서는 신정부의 수립을 선언한 “오세이후코”를 게이오 3년 12월 9일(1868년 1월 3일)에 천황 행차 후 오가쿠몬조에서 발표했다.[69][70]
내부는 동서 2열, 각 열 3개의 방인 6개의 방 구성이 된다. 동열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윗쪽 방”, “중간 방”, “아래쪽 방”으로 하고, 서열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국화 방”, “산수유 방”, “기러기 방”으로 한다. 윗쪽 방과 국화 방에는 도코와 지가이다나를 설치한다. 각 방의 칸막이 그림은 가노 에이가쿠, 기시다이, 하라 자이쇼 등의 필치이다. 동열의 표면 방에는 중국의 고사를 주제로 한 한화가 그려져 있고, 안쪽 방인 서열의 여러 방에는 일본화의 초목과 새가 그려져 있다.[71][72][73]
오가쿠몬조의 복도를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구교의 숙소였던 “'''팔경의 방'''”이라는 궁전이 있으며 “물새의 방”(원래는 어유자의 대기실), “팔경의 방”(간파쿠 대기실), “임화정의 방”(원래는 의주 대기실), “임화정의 북쪽 방”(원래는 대신 대기실), “흰 천 방”(원래는 근습당상 대기실), “금계의 방”(어번어면의 사람 대기실), “낙장압의 방”의 6개의 방이 있다.

'''고쇼고텐'''은 오가쿠몬조 북동쪽에 위치한 동서 방향의 건물로, 천황의 일상생활 장소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이 궁전에서는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옮겨갈 때까지의 거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이곳부터는 메이지 유신기까지 오쿠무키의 궁전으로 여겨지고 남자는 어린이와 노인 무사를 제외하고는 남성 출입 금지로 하여 수행하는 궁녀나 황후 등 여성과 여자만 출입을 허락받았다.[74] 지붕은 맞배지붕, 홰나무 껍질 지붕이다. 자신전과 함께 고쇼 내에서 가장 큰 건물이다. 헤이안 시대에는 세이료덴이 천황의 거처였지만, 근세가 되어 고쇼고텐이 별도로 지어진 이후로는 이곳이 천황의 거처가 되고, 세이료덴은 의식의 장소가 되었다. 고쇼고텐은 세이료덴과 같은 복고풍이 아니고, 쇼인즈쿠리를 기본으로 한 건물이며, 내부는 앞뒤 3열로 방을 배치하고, 총 15개의 방으로 나뉘어 있다. 가장 앞 열에는 서쪽에서 “아래쪽 방”, “중간 방”, “윗쪽 방”이 있으며, 이들은 의식 등이 행해진 표면의 방이다. 아래쪽 방, 중간 방, 윗쪽 방 순으로 바닥 높이가 한 단씩 높아지지만, 이들 3개의 방의 경계에는 기둥 2개씩만 설치되어 있고, 칸막이 벽이나 덧문은 없다. 윗쪽 방의 동쪽, 장대 구조의 안쪽에는 “겐지노마”가 있다. 여기는 예전에 세이료덴의 야궁전에 놓여 있던 3종 신기 중 검과 곡옥이 놓여 있던 방이다. 윗쪽・중간・아래쪽 방의 칸막이 그림은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한 것으로, 제감도라고 불리는, 통치자에 대한 경계로서의 그림 주제가 선택되어 농채의 신중한 필법으로 그려져 있다. 그림의 화가는 윗쪽이 가노 에이가쿠, 중간이 쓰루자와 단마, 아래쪽이 자다 시게나리이다. 겐지노마에는 도사 미쓰키요가 가초에를 그리고 있다. 겐지노마의 동쪽 안쪽에는 “오쇼자시타노마”, “오쇼자우에노마”가 있으며, 건물의 동쪽면에서 북쪽면에 걸쳐 “1의 방”, “2의 방”, “3의 방”, “다음 방”이 늘어선다. 이들은 안쪽 방으로, 오쇼자는 독서시작 등 내부의 행사나 대면에 사용되었고, 1, 2, 3의 방, 다음 방은 천황의 일상생활의 장소였다. 오쇼자시타노마 남쪽, 건물의 남동쪽 끝에는, 스노코엔에 튀어나온 형태로 “낙장압의 방”이 있다. 건물의 북서부에 위치한 “신구치노마”(남북 2개의 방)는 앞쪽에 궁녀가 시중들던 뇨보슈쿠쇼라는 방이 있다. 그 신구치의 서쪽 끝 방에는 “신구치노마의 나무판 방”이라고 불린 천황의 호위와 에도 막부로부터의 전달 역할로 노인 무사(60세 이상의 노인 무사)가 대기한 나무판 바닥의 넓은 방이 있다. “고토무샤”, “난쿄”라고도 불렸다. 이들 여러 방에 둘러싸인 중앙부에는 외부에 면하지 않는 “오침노마”, “오고노마” 2개의 방이 있다. 고쇼고텐은 이상 15개의 방으로 구성된다(오침노마 서쪽에 있는 “중간 방”을 포함하면 16개의 방). 안쪽 여러 방의 칸막이 그림은 앞서 언급한 가노 에이가쿠, 쓰루자와 단마 외에, 도사파, 엔잔파 등의 화가에 의한 것으로, 일본의 사계절 풍경이나 화조를 소재로 한 것이다.[75][76][77][78][79]

고쇼고텐의 오이케 정원 남동쪽 언덕에는 “물보는 곳: 모노미다이”라고 하는 천황이 오나이테이에서 표면의 모습을 살피기 위해 설치된 담의 중간에 열린 작은 언덕의 높은 전망대가 있다. 오나이테이 남쪽 흙 언덕 위에는 “긴타이”[80]라는 다실이 있다. 내부 구조는 베란다가 둘러싼
4. 정원
교토 고엔(92ha)의 북서쪽에 위치한 교토 고쇼는 황궁의 여섯 개의 문을 비롯하여 수키베(5개의 츠키지베)등 12곳의 출입구와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도랑으로 둘러싸인 11ha의 구역이다.
고쇼 부지 남쪽에는 옛 내궁의 정전인 자신전과 천황이 정무를 보던 세이료덴을 비롯한 의식과 정무에 사용되었던 건물들이 남아 있다. 그 북쪽에는 천황의 일상생활 등에 사용되었던 고쇼, 고가쿠몬죠, 고조고덴, 고후고조고덴 등에 인접한 연못과 遣水(야리미즈, 흐르는 물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한 일본식 정원이 있다.
소고쇼(小御所)와 어학문소(御学問所) 부근의 정원은 연못과 수로를 중심으로 자연의 풍취를 살린 일본정원이다. 소보리 엔슈(小堀遠州)가 참여한 이후 조성되기 시작했지만, 현재와 같은 정원의 원형은 엔보(延宝) 연간 조영 시 만들어졌다. 소어소(小御所), 어학문소(御学問所) 동쪽의 정원은 큰 연못을 중심으로 한 것으로, 오이케니와(御池庭)라고 불린다. 연못 서쪽 기슭에 조약돌을 늘어놓은 수주(洲浜)를 조성하고, 연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이 있으며, 나무다리 두 개와 돌다리 세 개가 놓여 있다.
御常御殿 동쪽에 있는 수로를 중심으로 한 정원은 御内庭(고나이테이)이라고 불린다. 수로를 건너 동쪽에는 차실인 「錦台(니시키다이)」가 있다. 御内庭보다 안쪽에 있는 御涼所(고료쇼) 동쪽의 정원은 「용천의 정원(龍泉の庭)」이라고 불린다. 이 부근에서는 수로가 동서 두 갈래로 나뉘어, 서쪽 수로는 御涼所와 청설(聴雪)을 잇는 누각 복도 아래를 지나, 일부는 청설의 처마 밑을 통과한다. 동쪽 수로는 물줄기가 그대로 구불구불 흘러 御内庭으로 들어온다.
4. 1. 남정(南庭)
교토 고엔(면적 92ha)의 북서쪽에 위치한 교토 고쇼는 11ha의 구역이다. 고쇼 부지는 동서 약 250미터, 남북 약 450미터의 남북으로 긴 직사각형이다. 에도 시대의 정원은 자시덴 남쪽에 있으며, "단테이"라고 읽는 것이 일반적이다.자신전 남쪽의 정원은 남정이라 칭하며, 흰 모래만 깔린 공간이다. 이곳은 단순한 빈터가 아니라, 자신전 건물과 하나가 된 의식을 위한 공간이다. 자신전 앞에는 좌경의 벚나무와 우경의 귤이 있다(「좌」,「우」는 천황을 보고 하는 말이며, 동쪽이 벚나무, 서쪽이 귤나무이다). 벚나무와 귤나무는 각각 꽃나무와 과수를 대표한다. 다만, 좌경의 벚나무는 헤이안 천도 당시에는 벚나무가 아니라 매화였다. 이것이 벚나무로 바뀐 것은 닌묘 천황 때이다. 만엽집 시대에는 일본 꽃나무의 대표는 매화였지만, 헤이안 시대가 되면서 사람들의 취향이 바뀌어 벚나무가 대표적인 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매화에서 벚나무로의 변경은 이를 반영한 것이다. 좌경의 벚나무는 1855년(안세이 연간), 1930년(쇼와 5년), 1998년(헤이세이 10년)에 심어졌으며, 현존하는 나무는 오오시마 벚나무의 특징을 일부 지닌 야마자쿠라 계열의 벚나무이다. 우경의 귤나무는 안세이 6년(1859년)에 심어졌다는 기록이 확인되고 있다.[109][110][111][112]
4. 2. 동정(東庭)
청명전 정면(동쪽)의 정원은 '''동정'''이라 칭하며, 온통 흰 모래만 깔린 공간이다. 다만, 두 곳에 대나무 숲이 있다. 건물 남쪽 끝, 히로소(넓은 현관)에 가까운 곳에 심어져 있는 것은 '''한죽'''(간죽)이고, 그보다 북쪽, 건물에서 수 미터 떨어진 곳에 심어져 있는 것은 '''오죽'''(쿠레타케)이다. 한죽은 맹종죽이며, 오죽은 왕대라고 여겨지지만, 현재 심어져 있는 것은 조릿대이다. 『枕草子』에는 오죽이, 『徒然草』에는 한죽과 오죽이 등장한다. 한죽과 오죽은 현재 넓은 정원의 서쪽에 치우친 위치에 있지만, 헤이안 시대의 내리에서는 청량전 동쪽에는 다른 건물(인수전)이 있었고, 동정은 현재보다 좁았다.[113][114]
청량전 동쪽, 히로소(넓은 현관)를 따라 남북으로 흐르는 돌로 깐 수로를 「'''어구수'''」(미카와미즈)라고 한다. 어구수 북쪽에는 높이 20cm 정도의 낙차가 만들어져 있는데, 이것을 「폭포 입구」라고 한다. 「폭포 입구 무사」라는 명칭은 여기서 유래한다.[115][114]
4. 3. 오이케니와(御池庭)
오이케니와(御池庭)는 교토 고쇼 내 소고쇼, 어학문소 동쪽에 있는 정원이다. 큰 연못을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연못의 서쪽 기슭에는 조약돌을 깔아 만든 스하마가 있다. 연못 안에는 세 개의 섬이 있으며, 나무다리 두 개와 돌다리 세 개가 놓여 있다.[39]
고메이 천황의 서재였던 영춘과 용천문 사이에 어량소가 있으며, 오이케니와 뒤쪽에는 다실인 금대와 지진 발생 등 유사시 긴급 피난처로 사용되었던 샘전(지진전)이 있다.[83][84]
- -]--
4. 4. 고나이테이(御内庭)
御内庭|고나이테이일본어은 御常御殿 동쪽에 있는 수로를 중심으로 한 정원이다. 수로를 건너 동쪽에는 4.5畳과 3.5畳 크기의 다다미를 깐 차실인 錦台|니시키다이일본어가 있다. 御内庭|고나이테이일본어보다 안쪽에 이어지는 어량소(피서용 궁전) 동쪽의 정원은 龍泉の庭|용천의 정원일본어이라고 불린다. 이 부근에서는 수로가 동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서쪽 수로는 어량소와 聴雪|청설일본어을 잇는 누각 복도 아래를 지나, 일부는 聴雪|청설일본어의 처마 밑을 통과한다. 동쪽 수로는 물줄기가 그대로 구불구불 흘러 御内庭|고나이테이일본어로 들어온다. 御内庭|고나이테이일본어에 걸쳐 있는 흙다리를 건너 수로 동쪽 맞은편에는 泉殿|센덴일본어(地震殿|지진덴일본어이라고도 함)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는 지진 발생에 대비하여 지붕을 가볍게 짓고 다른 건물과 떨어져 지은 건물로, 긴급 대피소로 사용되었다.[62] 聴雪|청설일본어 북쪽에 있는 건조정원은 蝸牛の庭|달팽이 정원일본어이라고 불리지만, 이것은 메이지 시대에 조성된 것이다.[118][119][120]御内庭|고나이테이일본어에는 헌상품으로서, 제15대 도쿠가와 가문 장군 도쿠가와 케이키의 등롱과 공경으로 섭정 좌대신 니조 나리요시의 잣나무와 야세무라(八瀬村)의 돌다리 등이 당시의 천황인 고메이 천황과 메이지 천황에게 헌상되었다.[121]
5. 즉위식
일본 천황의 즉위식은 대대로 교토 어소의 자신전에서 이루어졌다. 메이지 유신으로 천황이 도쿄로 옮겨 가면서, 1889년에 제정된 구황실전범(旧皇室典範일본어) 제11조에 따라 즉위식과 대상제(大嘗祭일본어)는 교토에서 거행하도록 규정했고, 다이쇼 천황과 쇼와 천황도 교토 어소에서 즉위에 관한 일련의 의식을 거행하였다.[1] 제2차 세계대전 뒤에 제정된 현재의 황실전범에서는 장소에 대한 규정이 없어졌으며, 1990년 아키히토는 일본 역사상 최초로 도쿄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1] 즉위할 때 천황이 앉는 천황의 정식 어좌(御座일본어)인 고어좌(高御座일본어) 및 황후의 정식 어좌인 어장대(御帳台일본어)는 교토 어소의 자신전에 상설되어 있어, 아키히토 천황의 즉위식에서 교토 어소의 자신전에서 행하던 「정전(正殿)의 의(儀)」는 이 고어좌와 어장대를 해체해서 도쿄까지 옮겼다고 한다.[1]
高御座|다카미쿠라일본어는 황실의 즉위식에서 사용되는 황좌이다.[2] 707년 원명 천황 시대부터 즉위식에서 사용되었으며, 현재의 황좌는 1913년 다이쇼 천황 즉위 2년 전에 원래 디자인을 본떠 제작된 것이다.[2] 실제 황좌는 검은 칠을 한 의자로, 검은 칠을 하고 주홍색 난간이 있는 3단의 단상 위에 팔각형 천개가 놓여져 있다.[2] 황좌 양쪽에는 두 개의 작은 탁자가 있는데, 이곳에는 일본의 삼종신기 중 칼과 구슬, 그리고 관인과 국새가 놓여진다.[2] 천개 위에는 봉황(hō-ō)상이 있고, 천개 주변에는 작은 봉황 여덟 마리, 보석과 거울이 장식되어 있다.[2] 천개에는 금속 장식과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2]
천황을 시야에서 가리는 미닫이 문은 賢聖障子|겐조노쇼지|賢聖障子일본어라고 불리며, 32명의 천상의 성인이 그려져 있는데, 이 그림은 헤이안 시대 회화의 주요 모델 중 하나가 되었다.[3]
御帳台|미초다이일본어는 황후의 좌석(어좌)이다.[4] 현재의 어좌는 1913년에 건설되었다.[4] 색상과 형태는 다카미쿠라(高御座)와 같지만, 크기는 약간 작고 디자인이 더 단순하다.[4] 천개에는 전설 속의 새인 란초(鸞鳥)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4]
황실의 어좌는 항상 중앙홀 중앙에 놓이고, 미초다이는 그 오른쪽에 위치한다.[4] 두 어좌 모두 미수(御簾)라고 불리는 발로 일반인의 시야에서 가려져 있다.[4]
6. 관람
교토 어소는 이전에는 참관 예약을 해야만 입장할 수 있었으나, 2016년 7월 26일 이후로는 월요일, 공휴일, 연말연시, 황실 행사 등을 제외하고는 무료로 자유롭게 입장할 수 있게 되었다.[166] 이전에는 예약 없이 관람할 수 있는 봄가을 특별 공개와 사전 예약이 필요한 일반 공개, 두 가지 방식이 있었으나, 관람객의 편의를 위해 예약이 필요 없는 연중 일반 공개로 변경되었다.
개방 시간은 다음과 같다.
- 4월~8월: 오전 9시~오후 5시 (입장은 오후 4시 20분까지)
- 9월, 3월: 오전 9시~오후 4시 30분 (입장은 오후 3시 50분까지)
- 10월~2월: 오전 9시~오후 4시 (입장은 오후 3시 20분까지)
휴관일은 월요일(공휴일인 경우 다음 날), 연말연시(12월 28일~1월 4일), 기타 행사 등으로 인해 관람이 어려운 날이다.
입장문은 청소문(清所門)이며, 시계 반대 방향으로 교토 어소를 관람하고 청소문으로 나온다. 입장 시에는 황궁경비관이 수하물 검사를 실시한다. 이전에는 봄가을 특별 공개 기간에 자정전(紫宸殿) 바로 앞까지 갈 수 있었지만, 현재는 자정전 남정(南庭)의 남동쪽 구석에서 멀리서 바라보는 형태로 변경되었다.[164]
궁내청 소유 건물이므로 원칙적으로 궁궐 외관만 관람할 수 있으며, 건물 내부 출입은 금지된다. 일정 거리 이상 궁궐에 접근하면 경보가 울리고 황궁경비관이 출동한다.[165]
6. 1. 교통
교토 지하철 가라스마선 이마데가와역에서 진입할 수 있다. 교토시영버스 가라마치 이마데가와(烏丸今出川) 버스정류장(59번, 201번, 203번 정차)에서 하차하여 남쪽으로 인고몬(乾御門)을 지나 청소문까지 도보 8분 거리이다.[164]교토시영버스 가라마치이치조(烏丸一条) 버스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남쪽으로 조금 가서 추리이치바이몬(中立売御門)을 지나 청소문까지 도보 4분 거리이다. 단, 가라마치이치조 버스정류장에는 1시간에 1대만 운행되는 51번 계통만 정차한다.[164]
교토역에서 교토시영버스 04번 계통, 17번 계통, 205번 계통 중 하나에 승차하여, "후립이대병원마에(府立医大病院前)"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세이와인몬(清和院御門)까지 도보 5분 거리이다.[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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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徳寺 勅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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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涌寺大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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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覚寺宸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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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法院大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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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丘寺 -音羽御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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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の文化財 第32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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仁和寺 > 本坊表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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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明寺本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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境内案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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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市指定・登録文化財-建造物(山科) > 毘沙門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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勧修寺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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橿原神宮本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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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殿・幣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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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楽殿(かぐらで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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橿原神宮
2024-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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摠見寺(臨済宗妙心寺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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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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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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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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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御所の通年公開につい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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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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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観ご希望の方へ|宮内庁 皇居・京都御所・離宮参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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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内庁
2022-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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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Public Opening of the Kyoto Imperial Palace & Expansion of Guided Tour of the Sento Imperial Palace, the Katsura Imperial Villa, and the Shugakuin Imperial Villa - The Imperial Household Agen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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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7
[167]
서적
1993
[168]
서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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