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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카와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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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로카와번은 1724년 야나기사와 쓰네타카가 1만 석 영지를 받아 설립된 일본의 번이다. 초대 번주는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법규를 제정했으나, 재정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7대 번주 야나기사와 미쓰테루는 번교를 세워 교육에 힘썼고, 보신 전쟁에서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폐지되었고, 마지막 번주 야나기사와 미쓰쿠니는 구로카와 현 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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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카와번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번 명칭구로카와 번
봉록1만 석
번주 가문야나기사와 가문
종류후다이 다이묘
역사
존속 기간1724년 ~ 1871년
이전야마토 고리야마 번 (1724년)
이후시라스 현 (1871년)
지리
위치니가타현 가노바라 군
번청구로카와 진야

2. 번의 역사

야나기사와 요시사토가 고리야마 번으로 이봉된 후, 야나기사와 쓰네타카가 1만 석을 받아 구로카와 번을 세웠다. 초대 번주 쓰네타카는 번 지배 체제 확립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듬해 사망하였다. 야나기사와 사토즈미는 쓰네타카의 유지를 이어받아 번의 기반을 강화했지만, 농민들의 저항과 연공 미납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사토즈미는 농민들을 처벌하고 숙장 인마 제도를 정비하여 번 지배 제도를 정립하였다.

구로카와 번은 고쿠다카는 1만 석이었으나, 산지가 많아 농지 개간이 어려웠고, 실질 고쿠다카는 1만 석을 밑돌았다. 역대 번주들은 대부분 에도에 머물렀기 때문에 지출이 많아 재정난에 시달렸고, 본가인 고리야마 번에서 돈을 빌리기도 했다. 1843년에는 5천 냥 남짓의 채무를 떠안고 있었다.

7대 번주 야나기사와 미쓰테루는 번교 홍도관을 세워 번사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신을 보냈으나 소극적인 입장을 취했다.

1869년, 야나기사와 미쓰쿠니가 구로카와 번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으로 구로카와 번은 폐지되어 구로카와 현이 되었다가, 니가타현에 편입되었다.

2. 1. 설립 배경

에도 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휘하에서 활약한 소바요닌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맏아들 야나기사와 요시사토1724년(교호 9년) 3월 11일, 고후 번에서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이봉되었다. 같은 해 윤4월 28일, 요시야스의 넷째 아들 야나기사와 쓰네타카도 분가로서 1만 석 영지를 지급받아 번을 세웠는데, 이것이 구로카와 번의 시작이다.

초대 번주 쓰네타카는 번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34조에 이르는 법규를 제정했다. 그러나 쓰네타카는 이듬해 8월 23일에 사망하였다.

2. 2. 초기 번정 (1724년 ~ 1735년)

에도 막부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 휘하에서 활약한 소바요닌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맏아들 야나기사와 요시사토교호 9년(1724년) 3월 11일, 고후 번에서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이봉되었다. 그 후 같은 해 윤4월 28일, 요시야스의 넷째 아들 야나기사와 쓰네타카도 분가로서 1만 석 영지를 지급받아 번을 세웠는데, 이 번이 구로카와 번이다.

초대 번주 쓰네타카는 번의 지배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같은 해 10월에 34조에 이르는 법규를 제정했다. 하지만 쓰네타카는 이듬해 8월 23일에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은 야나기사와 사토즈미는 쓰네타카의 유지를 받들어 번의 기반 강화를 시행했다. 그러나 오토모무라 소자에몬(大友村惣左衛門일본어) 등이 에도로 가서 세금, 하천 운임료를 면제해 줄 것을 호소하였고, 연공 미납이 계속되는 비상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대해 사토즈미는 농민들을 철저히 처벌하고, 교호 15년(1730년)에는 숙장(宿場) 인마의 제도를 정비하여 번 지배 제도를 정립하였다.

2. 3. 재정난과 번 통치 (1736년 ~ 1868년)

초대 번주 야나기사와 쓰네타카는 번의 지배 체제를 굳히기 위해 34개 조에 달하는 법규를 제정했다. 그러나 쓰네타카는 이듬해 사망하였고, 야나기사와 사토즈미가 뒤를 이어 번의 기반 강화를 시행했다. 하지만 농민들이 에도로 가서 세금 및 하천 운임료 면제를 호소하고 연공 미납이 계속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사토즈미는 농민들을 처벌하고 숙장(宿場) 인마 제도를 정비하는 등 번 지배 제도를 정립했다.[4]

구로카와 번의 고쿠다카는 1만 석이었으나, 번의 영지는 산지가 많아 새로운 농지 개간이 불가능했고, 실질 고쿠다카는 1만 석을 밑돌았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역대 번주들 대부분이 에도에 정부해 있었기 때문에 지출 비용이 많아, 본가인 고리야마 번으로부터 돈을 빌리는 상황이었다. 덴포 14년(1843년)에는 5천 냥 남짓의 채무를 떠안고 있었다고 한다.[4]

7대 번주 야나기사와 미쓰테루는 안세이 연간 구로카와 진야 내에 번교 홍도관을 세우고 번사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 힘썼다. 메이지 원년(1868년) 보신 전쟁에서는 아이즈 번의 요청에 따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신을 보냈으나,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렀다.[4]

2. 4.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1868년 ~ 1871년)

1868년 보신 전쟁에서 7대 번주 야나기사와 미쓰테루는 아이즈번의 요청에 따라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신을 보냈으나, 소극적인 입장에 머물렀다.[4] 이듬해 양자인 야나기사와 미쓰쿠니가 마지막 번주가 되어 구로카와 번지사가 되었고,[4]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으로 구로카와 번은 폐지되어 구로카와 현이 되었다.[4][5]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니가타현에 편입되었다.[4][5]

3. 역대 번주

'''야나기사와 가문''' (후다이 다이묘)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석고
1야나기사와 쓰네타카|柳沢経隆|야나기사와 쓰네타카일본어1724년 ~ 1725년교부쇼유 (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2야나기사와 사토즈미|柳沢里済|야나기사와 사토즈미일본어1725년 ~ 1735년교부쇼유 (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3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柳沢里旭|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일본어1735년 ~ 1736년--10,000 석
4야나기사와 야스타카|柳沢保卓|야나기사와 야스타카일본어1736년 ~ 1774년민부노쇼 (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5야나기사와 노부토|柳沢信有|야나기사와 노부토일본어1774년 ~ 1797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6야나기사와 미쓰히|柳沢光被|야나기사와 미쓰히일본어1797년 ~ 1836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7야나기사와 미쓰테루|柳沢光昭|야나기사와 미쓰테루일본어1836년 ~ 1868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8야나기사와 미쓰쿠니|柳沢光邦|야나기사와 미쓰쿠니일본어1868년 ~ 1871년교부쇼유 (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3. 1. [[야나기사와 씨|야나기사와 가문]]

#이름재임 기간관위조정 관위석고비고
야나기사와 가문 (후다이 다이묘) 1724년 ~ 1868년
1야나기사와 쓰네타카|柳沢経隆|야나기사와 쓰네타카일본어1724년 ~ 1725년교부쇼유(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2야나기사와 사토즈미|柳沢里済|야나기사와 사토즈미일본어1725년 ~ 1735년교부쇼유 (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3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柳沢里旭|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일본어1735년 ~ 1736년--10,000 석
4야나기사와 야스타카|柳沢保卓|야나기사와 야스타카일본어1736년 ~ 1774년민부노쇼 (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5야나기사와 노부토|柳沢信有|야나기사와 노부토일본어1774년 ~ 1797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6야나기사와 미쓰히|柳沢光被|야나기사와 미쓰히일본어1797년 ~ 1836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7야나기사와 미쓰테루|柳沢光昭|야나기사와 미쓰테루일본어1836년 ~ 1868년이세노카미 (伊勢守)종5위하10,000 석
8야나기사와 미쓰쿠니|柳沢光邦|야나기사와 미쓰쿠니일본어1868년 ~ 1871년교부쇼유 (刑部少輔)종5위하10,000 석



야나기사와 쓰네타카|柳沢経隆|야나기사와 쓰네타카일본어(1695년 1월 1일 ~ 1725년 9월 29일)는 구로카와번의 초대 다이묘였다. 그는 유명한 야나기사와 요시야스의 넷째 아들이었고, 에도의 칸다바시에서 태어났다. 유아기에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에게 알현되었고, 1701년에는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하는 것을 허가받았다. 1709년, 아버지의 영지인 고후번에서 10,000석의 봉토를 받았고, 1710년에는 겐푸쿠 의례를 치렀다. 1724년, 영지가 고후에서 에치고국으로 이전되었고 구로카와 번의 다이묘가 되었다. 그러나 불과 4개월 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다이나곤 오기마치 사네토요의 딸과 결혼했으나, 상속자는 없었다. 묘는 도쿄 신주쿠에 있는 게케이사에 있다.

야나기사와 사토즈미|柳沢里済|야나기사와 사토즈미일본어(1709년 ~ 1735년 12월 15일)는 구로카와 번의 2대 다이묘였다. 야마토코리야마 번의 사무라이인 야나기사와 요시키요의 다섯째 아들로, 후사 없이 사망한 쓰네타카를 사후 양자 입적하여 뒤를 이었다. 오사카 가반과 닛코 부교를 역임했지만, 1735년 에도에 있는 가문의 마고메 저택에서 후사 없이 사망했다.[1]

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柳沢里旭|야나기사와 사토아키라일본어(1722년 7월 10일 ~ 1736년 7월 11일)는 구로카와 번의 3대 다이묘였다. 야마토코리야마 번의 무사 야나기사와 사토미쓰의 장남이자 사토즈미의 조카였으며, 사토즈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다. 그러나 쇼군의 메츠케 감찰관과 면담을 가진 직후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2]

야나기사와 야스타카|柳沢保卓|야나기사와 야스타카일본어(1727년 6월 16일 ~ 1774년 5월 2일)는 구로카와 번의 4대 다이묘였다. 야마토코리야마 번의 사무라이였던 야나기사와 사토미쓰의 차남이자 사토아키라의 동생이었다. 1747년에 오방가시라를 역임했다. 우토 번의 호소카와 오키나리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 다카토리 번의 우에무라 이에유키의 딸과 재혼했다. 1774년에 사망했으며 장남이 뒤를 이었다.[3]

야나기사와 노부토|柳沢信有|야나기사와 노부토일본어(1752년 4월 7일 ~ 1797년 4월 9일)는 구로카와 번의 5대 다이묘였다. 야나기사와 요시타카의 장남으로, 1774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야마토고리야마 번의 야나기사와 요시사토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후 후쿠야마 번의 아베 마사요시의 딸과 재혼했다. 1797년에 사망했으며, 장남이 뒤를 이었다.[4]

야나기사와 미쓰히|柳沢光被|야나기사와 미쓰히일본어(1784년 8월 27일 ~ 1836년 11월 2일)는 구로카와 번의 6대 다이묘였다. 야나기사와 노부토의 장남으로, 1797년 부친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같은 해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공식적으로 알현을 받았다. 1802년과 1823년에는 오사카 가반을, 1806년, 1821년, 1828년에는 닛코 부교를 역임했다. 신조번의 도다 마사치카의 딸과 결혼했으며, 이후에는 야마토고리야마 번의 야나기사와 야스미쓰의 딸과 결혼했다. 1836년 사망했으며, 남성 상속인은 없었다.[5]

야나기사와 미쓰테루|柳沢光昭|야나기사와 미쓰테루일본어(1823년 7월 21일 ~ 1900년 4월 4일)는 구로카와 번의 7대 다이묘였다. 야마토 고리야마 번의 야나기사와 야스히로의 열 번째 아들이었으며, 1836년에 야나기사와 미쓰기를 계승하기 위해 사후 양자로 입적되었다. 구로카와 다이묘 중에서 실제로 번을 방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바쿠마쓰 시대에 한 학교를 설립했다. 1863년에는 소샤반, 1864년에는 새로 창설된 가쿠몬 부교에 임명되었다. 보신 전쟁 동안 번을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참여시켰지만, 지원에는 미온적이었다. 1868년, 양자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도쿄에서 1900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다.

야나기사와 미쓰쿠니|柳沢光邦|야나기사와 미쓰쿠니일본어(1854년 4월 22일 ~ 1923년 10월 22일)는 구로카와 번의 8대(이자 마지막) 다이묘였다. 다케다 씨족의 후손인 하타모토 다케다 노부유키의 여섯째 아들이었다. 1862년 야나기사와 미쓰테루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1867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공식 알현을 받았다. 1868년 부친이 은퇴하면서 다이묘가 되었다. 1869년,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그를 구로카와의 황실 지사로 임명했고, 1871년 폐번치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 1879년 대장성에 들어갔다. 1884년, 화족 작위인 자작으로 봉해졌다. 1890년부터 1897년까지 귀족원 의원으로 재직했다. 1923년 사망하자 자작의 작위는 야나기사와 미쓰하루(1891년 ~ 1957년)에게 넘어갔다.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 1869년 새로운 메이지 정부는 구로카와 번의 마지막 다이묘였던 야나기사와 미쓰쿠니를 구로카와의 황실 지사로 임명했고, 그는 1871년 폐번치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1] 1884년에는 화족 작위인 자작으로 봉해졌다.[1] 1890년부터 1897년까지는 귀족원 의원으로 재직했다.[1]

메이지 유신 후에는 가모바라군 43개 촌(구 미즈하라 다이칸소 관할의 막부령 25개 촌, 하타모토령 14개 촌, 아이즈번령 6개 촌, 미카이치번령 1개 촌)이 더해졌다.[2]

참조

[1] 서적 Land and Lordship in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1998
[2] 웹사이트 Echigo Province http://www.japanese-[...] 2013-04-07
[3] 서적 Noblaire du Japon http://www.unterstei[...] 2003
[4]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5]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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