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금오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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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금오서원은 조선 명종 22년(1567년)에 지역 사림이 길재를 기리기 위해 금오산에 건립을 청원하여 선조 3년(1570년)에 금오지 자리에 세워진 서원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으나, 1602년 선산읍 남산으로 복원되었고, 1609년에 중건되었다. 길재를 비롯하여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 등 5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때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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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금오서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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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서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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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금오서원 (金烏書院) |
국가 | 대한민국 |
위치 |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원리 276번지 |
유형 | 기념물 |
지정 번호 | 60 |
지정일 | 1985년 10월 15일 |
면적 | 5,577m2 |
상세 정보 | |
문화재청 ID | 23,00600000,37 |
2. 역사
1567년(조선 명종 22년) 지역 사림이 길재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뜬 금오산에 서원과 사당 건립을 청하였고, 1570년(선조 3년) 금오산 아래에 서원이 건립되었다. 1572년 최응룡(崔應龍)이 ‘금오서원봉안문’(金烏書院奉安文)을 지어 길재의 위패를 모셨다. 1575년 사액 현판과 서책이 하사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602년 선산읍 남산(藍山)에 복원되었고, 1609년 중건되었다.
2. 1. 건립
1567년(조선 명종 22년) 지역 사림이 선산부사에게 길재가 마지막으로 세상을 뜬 금오산에 서원과 사당을 건립할 것을 청하였다. 당시 선산부사 송기충(宋期忠)은 경상감사에게 이를 전하여 장계를 올려 1570년(선조 3년)에 금오산 아래, 지금의 금오지 자리에 서원을 건립하는 재가를 받았다.1572년에는 송정 최응룡(崔應龍)이 ‘금오서원봉안문’(金烏書院奉安文)을 지어 길재의 위패를 모셨다.
2. 2. 봉안
1572년에 송정 최응룡이 ‘금오서원봉안문’(金烏書院奉安文)을 지어 길재의 위패를 모셨다.2. 3. 사액
1575년에 사액 현판과 서책이 하사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건물이 전소되면서 함께 소실되었다.2. 4. 복원과 중건
임진왜란 때 건물이 전소되면서 사액 현판과 서책도 함께 소실되었다. 난이 끝나고 1602년에 금오산은 외진 곳이라 서원을 지키기 어렵다는 청에 따라, 선산부사 김용(金涌)이 지금의 선산읍 남산(藍山)에 복원하였다. 1609년에 중건하였다.3. 배향
4. 기타
흥선대원군의 서원 정리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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