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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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길재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이색,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의 벼슬을 거절하고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통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며,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다. 또한, 고려 유신 회고가로 알려진 시조를 남겼으며, 조선 시대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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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은 16세기 조선의 유학자로, 주자학을 발전시키고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의 저서를 남기고 사단칠정 논쟁을 벌였으며, 만년에 도산서당을 짓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힘쓰다 문묘에 종사되었다.
길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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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길재 |
한글 | 길재 |
한자 | 吉再 |
가타카나 | キル・ジェ |
로마자 표기 | Kil Chae |
로마자 표기 (개정) | Gil Jae |
링크 |
2. 생애
이색, 정몽주, 권근의 문하에서 주자학을 배워 이들과 함께 삼은(三隱)으로 불렸다. 성균관 박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건국 후에도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사양하고 경상도 선산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김숙자에서 김종직, 김굉필|김굉필한국어,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 학통이 형성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다.
2. 1. 고려 시대
11세 때 절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그 뒤 포은(圃隱) 정몽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세 때인 1370년(공민왕 19) 박분에게 《논어》, 《맹자》를 배웠으며, 그 뒤 박분과 함께 개경으로 가서 이색, 정몽주, 권근의 제자가 되어 성리학을 공부하였다. 1374년(공민왕 23)에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감시에 합격했다.1386년(우왕 12) 문과에 급제했다. 1387년 성균관 확정이 되고, 1388년(우왕 14)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1389년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고 여러 차례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왕은 그를 아껴서 사직서를 반려하였다. 창왕 때에는 문하주서가 되었으나, 고려가 쇠망할 기운을 보이자,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2. 2. 조선 시대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1]1400년(정종 2년),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세자 이방원이 태상박사 벼슬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며 거절하고 고향 경상북도 선산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1]
세종 즉위년인 1419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1]
문하에 오식, 김숙자, 배인경, 최운룡, 신영손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1] 그의 성리학은 김숙자, 오흠로, 최운룡,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으로 이어졌다.[1]
조선 시대 청백리 21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
3. 사상과 영향
비록 그는 조선의 관직에는 진출하지 않았으나 그의 동문들, 그가 후에 길러낸 제자들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색(목은), 정몽주(포은), 권근의 문하생으로 주자학을 수학하여 앞의 두 사람과 함께 “삼은(三隱)”이라 불렸다. 성균관 박사가 되어 교육에 전념하고 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이 건국된 후에도 여러 차례의 등용을 사양하고 경상도 선산에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문인인 김숙자에서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통이 형성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다.
조선 시대 청렴결백한 관리로서 「청백리(淸白吏)」 21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학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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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이정, 안향→이제현→이색→정도전, 이숭인 |
→정몽주→권근→권우→세종대왕→정인지 |
→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백인걸→이이(율곡) |
→성수침→성혼(우계) |
→김안국→김인후 |
→김정국 |
→주계부정 이심원→윤탁 |
→김일손 |
→손중돈→이언적 |
→김전 |
→남곤 |
4. 문학
이색(목은), 정몽주(포은), 권근의 문하생으로 주자학을 수학하여 앞의 두 사람과 함께 “삼은(三隱)”이라 불렸다. 성균관 박사를 역임했으며, 문하주서에 이르렀으나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조선 건국 후에도 여러 차례 등용을 사양하고 경상도 선산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문인인 김숙자에서 김종직, 김굉필|김굉필한국어, 조광조로 이어지는 사림파의 학통이 형성되었다.
저서로는 야은집이 있으며,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야은집》
- 《야은언행습유》(冶隱言行拾遺)
- 《야은속집》
조선 시대 청백리(淸白吏) 218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1]
4. 1. 시조
冶隱|야은중국어의 시조는 고려의 옛 도읍지 송경(지금의 개성)을 찾았을 때 읊은 〈고려 유신 회고가〉가 유명하다.: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
: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5. 저작
- 《야은집》
- 《야은언행습유》(冶隱言行拾遺)
- 《야은속집》
고려의 옛 도읍지 송경(지금의 개성)을 찾았을 때 읊은 시조 〈고려 유신 회고가〉는 유명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도라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6. 관련 작품
1996년~1998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배우 강태기가 길재 역을 연기했다.
6. 1. 드라마
1996년~1998년 KBS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배우 강태기가 길재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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