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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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응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때 아들 최영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금산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 최항의 현손으로, 음사로 관직에 올라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임진왜란 발발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남평에서 의병을 모집, 옥과의병과 합류하여 전라좌의병을 조직하고 고경명의 의병과 연합하여 금산으로 향했다. 금산 전투에서 왜적과 싸우다 관군의 패퇴로 의병의 사기가 저하되자 아들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 전사, 사후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고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금산 종용사와 보령 호국사에 배향되었다.
( ? ~1592년 7월10일)조선 중기(朝鮮中期)의 문신(文臣)이자 의병장(義兵將)이다. 자(字)는 사서(士瑞). 호(號)는 송암(松巖). 본관(本貫)은 삭녕(朔寧)이며.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영의정(領議政) 문충공(文忠公) 최항(崔恒)의 현손(玄孫)으로, 증 형조참의(贈 刑曹參議) 최경립(崔卿立)의 아들이다.
증 정헌대부(贈 正憲大夫) 이조판서이다.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금산 종용사, 보령 호국사에 배향되었다. 1591년 (선조 24)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3등, 1605년 (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2. 생애
일찍이 음사(蔭仕)로 여러 관직(官職)을 역임(歷任)하고,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별감(別監) 등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이후 통정대부행주부(通政大夫行主簿)로 세상(世上)이 어지러워지자 더 이상 관직에 미련(未練)을 두지 않고 관직(官職)에서 물러나 고향(故鄕)으로 낙향(落鄕)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남평(南平)에서 아들 참봉(參奉) 최영수(崔永水)와 함께 가동(家僮)을 이끌고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였다. 남평(南平)에 사는 주부(主簿) 홍민언(洪民彦)은 군량(軍糧) 10석(析)을 보내왔고, 남원출신(南原出身) 종질(從姪) 모량유사(募糧有司) 미능재(未能齋) 최상중(崔尙重)과, 양사형(楊士衡) 등은, 군량(軍糧)을 지원(支援) 운량(運糧)해 왔다. 사인(士人) 최후립(崔厚立)ㆍ최홍립(崔弘立), 그리고 장정(壯丁)들이 자원(自願)하여 찾아와 300여명의 남평의병(南平義兵)을 창의(倡義) 하였다. 그는 남평의병들의 추대로 수장(首將)으로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6월 3일에 월파(月波) 류팽로(柳彭老)가 이끄는 옥과의병(玉果義兵)과 합류(合流)하여 전라좌의병(全羅左義兵)의 의병진(義兵陣)이 이루워졌다. 즉시 북진하여 금산(錦山)으로 향(向)하던 중 고경명(高敬命) 의병과 연합합류(聯合合流)하였다. 진산과 여산을 지나 금산(錦山)에 도착하여 7월 9일 의병이 왜적과 싸워 수백명을 무찌르고 다음날인 7월 10일에 왜적이 관군을 급습(急襲)하여 관군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後退)하자 의병의 진중(陣中)이 술렁이고 사기(士氣)가 급격(急擊)히 저하(低下)되자 이에 그는 아들 최영수(崔永水)에게 선봉(先鋒)에 나아가 왜적(倭敵)을 대적(對敵)하게 하여 왜적 수십명을 참살(斬殺)하니 의병들은 사기가 오르고 죽기를 각오(覺悟)하고 싸워 수백여명의 왜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의병의 진(陣)이 무너지게 되자 그는 퇴각(退却)하지 않고 검(劒)을 빼들고 호령(號令)하며 수 많은 왜적(倭敵)을 참살(斬殺) 하다 온 몸에 상처(傷處)를 입고 아들 최영수(崔永水)와 함께 역전분투(力戰奮鬪)하였으나 마침내 부자(父子)가 함께 전사(戰死)하였다. 의병의 사상자(死傷者)가 많았던 것은 부자(父子)가 퇴각(退却)하지 않고 용감(勇敢)히 싸운 모습(模襲)에 의병들이 사기(士氣)를 일치 않고 끝까지 왜적(倭敵)과 싸웠기 때문이라고 전(傳)한다.
1605년(선조 38) 조정에서 부자(父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당시의 세인(世人)들은 최응룡(崔應龍)과 최영수(崔永水) 부자(父子)의 숭고(崇高)한 순국(殉國)에 애도(哀悼)의 뜻을 표하고 위국충절(爲國忠節)의 공(功)을 세운 충절공(忠節公)과 무열공(武烈公) 부자(父子)라 하였다.
최응룡(崔應龍)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아들 최영수(崔永水)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증직(贈職) 되었다. 선무원종공신녹권 두권이 전(傳) 한다.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 보령(保寧) 호국사(護國寺)에 배향(配享) 되었다.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최응룡의 가계는 조선 초기의 명문가였다. 고조부는 영의정을 지낸 최항이며, 증조부는 증 좌찬성 최영호, 조부는 이조판서 최수언이다.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 최경립이며, 어머니는 증 숙부인 김해 김씨이다. 최응룡은 증 정부인 경주 이씨와 혼인하여 아들 최영수를 두었다. 최영수는 승정원 증 도승지, 선무원종공신, 무열공에 추증되었다.
최영수의 아들은 동지중추부사 최부이고, 손자는 동지중추부사 최원, 증손은 동지중추부사 최홍길과 최점이다. 최홍길의 처는 정부인 여흥 민씨이고, 최점의 처는 정부인 파평 윤씨이다. 최점의 아들, 즉 최응룡의 현손은 진사 최홍도, 최홍진, 최홍립이다.
2. 2. 임진왜란과 의병 활동
최응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자는 사서(士瑞),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영의정 최항의 현손이다. 음사로 관직에 올라 통정대부에 이르렀으나,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낙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평에서 아들 최영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홍민언(洪民彦)이 군량 10석을 지원했고, 최상중(崔尙重), 양사형(楊士衡) 등도 군량을 지원했다. 최후립(崔厚立)ㆍ최홍립(崔弘立) 등 사인과 장정들이 자원하여 300여 명의 남평의병이 조직되었고, 최응룡은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6월 3일, 류팽로가 이끄는 옥과의병과 합류하여 전라좌의병을 이루고 북진, 고경명 의병과 연합하여 금산으로 향했다. 7월 9일, 금산에서 왜적과 싸워 수백 명을 무찔렀으나, 다음날 관군이 패퇴하자 의병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최응룡은 아들 최영수에게 선봉을 맡겨 왜적 수십 명을 참살, 사기를 올렸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였다. 최응룡은 퇴각하지 않고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605년, 부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세인들은 이들의 순국을 애도하며 충절공(忠節公)과 무열공(武烈公) 부자라 칭송했다. 최응룡은 이조판서, 최영수는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금산 종용사(從容祠), 보령 호국사(護國寺)에 배향되었다.
2. 3. 금산 전투와 순국
최응룡( ? ~1592년 7월 10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이다. 자는 사서(士瑞), 호는 송암(松巖), 본관은 삭녕이며, 영의정 최항의 현손이다. 통정대부행주부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평에서 아들 최영수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남평의병 300여 명의 추대로 의병장이 된 그는 6월 3일 류팽로가 이끄는 옥과의병과 합류하여 전라좌의병을 이루었다. 이후 고경명 의병과 연합하여 금산으로 향했다.
7월 9일 금산에서 왜적과 싸워 수백 명을 무찔렀으나, 다음날인 7월 10일 왜적의 급습으로 관군이 후퇴하자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졌다. 이에 최응룡은 아들 최영수를 선봉에 세워 왜적 수십 명을 참살하며 사기를 올렸으나, 중과부적으로 의병의 진이 무너지자 검을 빼들고 호령하며 싸우다 아들과 함께 전사하였다.
1605년 부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정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아들 최영수는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금산 종용사, 보령 호국사에 배향되었다.
3. 사후
3. 1. 추증과 배향
증 정헌대부(贈 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이다. 시호(諡號)는 충절(忠節)이다. 금산(錦山) 종용사(從容祠), 보령(保寧) 호국사(護國祠)에 배향되었다. 1591년(선조 24)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 3등,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3. 2. 역사적 평가
4. 가족 관계
최응룡의 고조부는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문충공(文忠公) 최항(崔恒)이며, 고조모는 달천부원군(達川府院君) 서미성(徐彌性)의 딸인 정경부인(貞敬夫人) 달성 서씨(達城徐氏)이다. 외조부는 양촌 권근(權近)이다. 증조부는 증 좌찬성(贈 左贊成) 최영호(崔永灝)이고, 증조모는 계림군(鷄林君) 정효상(鄭孝常)의 딸인 증 정경부인(贈 貞敬夫人) 경주 정씨(慶州鄭氏)이다. 조부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최수언(崔秀彦)이며, 조모는 심빈(沈賓)의 딸인 정부인(貞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또 다른 조모는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다.
아버지는 증 통정대부 형조참의(贈 通政大夫 刑曹參議) 최경립(崔卿立)이며, 어머니는 증 숙부인(贈 淑夫人) 김해 김씨(金海金氏)이다. 배우자는 증 정부인(贈 貞夫人)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아들은 승정원 증 도승지(承政院 贈 都承旨)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무열공(武烈公) 최영수(崔永水)이고, 며느리는 심철(沈哲)의 딸인 증 숙부인(贈 淑夫人)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손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부(崔富)이고, 손자며느리는 정부인(貞夫人)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다. 증손자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원(崔愿)과 최점(崔點), 최묵(崔黙), 최검(崔黔)이다. 최원의 배우자는 정부인(貞夫人) 현풍 곽씨(玄風郭氏)이다. 최점의 배우자는 정부인(貞夫人)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최묵의 배우자는 한남 방씨(漢南房氏)이며, 최검의 배우자는 서흥 김씨(瑞興金氏)이다.
현손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최홍길(崔弘吉)과 진사(進士) 최홍도(崔弘道), 최홍진(崔弘進), 최홍립(崔弘立), 최홍기(崔弘器), 최홍주(崔弘周)이다. 최홍길의 배우자는 정부인(貞夫人) 여흥 민씨(驪興閔氏)이다. 최홍도의 배우자는 광산 이씨(光山李氏)이다. 최홍립의 배우자는 남원 양씨(南原楊氏)이며, 최홍기(崔弘器)의 배우자는 전주 유씨(全州柳氏)이고, 최홍주(崔弘周)의 배우자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5. 관련 사료 및 유물
고경명(高敬命)의 동순제공사실(同殉諸公事實)에 따르면, 최응룡(崔應龍)은 자(字)가 사서(士瑞)이고 삭녕인(朔寧人)으로,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항(恒)의 현손(玄孫)이며, 통덕랑 (通德郞) 최경립(崔卿立)의 아들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 때 주부(主簿)로서 초토사(招討使)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아들 참봉(參奉) 최영수(崔永水)와 가솔(家率)을 이끌고 금산(錦山)에 이르렀다. 고경명은 최응룡의 뛰어난 기질을 보고 군사 작전에 대한 자문을 많이 구했다. 의병의 사기가 저하되어 패전하자, 최응룡은 분격하여 검(劒)을 빼들고 큰소리로 호령하며 많은 왜적을 참살하였으나 적의 창에 맞아 순절하였다. 아들 최영수(崔永水)는 왜적에게 사로잡혀 눈을 부릅뜨고 꾸짖다가 적의 칼에 전사하였다. 부자(父子)는 함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남평읍지(南平邑誌) 권지사(卷之四) 선조조 충절편(宣祖朝 忠節編)에는 "통정대부행주부삭녕최공지묘 배의인경주이씨부좌(通政大夫行主簿朔寧崔公之墓 配宜人慶州李氏祔左)"라는 기록이 있다. 묘비명에 따르면, 최응룡은 가정(嘉靖) 병인(丙寅)년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 때 주부로서 초토사 고경명을 따라 아들 최영수와 함께 금산 전투에 참전했다.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 류팽로의 월파집(月波集) 등에도 관련 기록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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