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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코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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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코의 변은 810년, 헤이제이 상황과 사가 천황 사이에서 발생한 일본 궁정의 정치적 사건이다. 헤이제이 천황이 퇴위 후 헤이조쿄로 거처를 옮기고, 관찰사 제도 개정을 둘러싸고 갈등이 심화되면서 구스코와 후지와라노 나카나리가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를 꾀했다. 헤이제이 상황은 천도를 시도했으나 사가 천황의 반격으로 실패하고, 구스코는 자결, 나카나리는 처형되었다. 이후 다카오카 친왕이 폐위되고, 관련자들이 처벌받았으며, 사건의 배경과 관련하여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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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코의 변
개요
헤이제이 천황
구스코의 난
명칭구스코의 변(薬子の変)
다른 명칭헤이제이 상황의 변(平城上皇の変)
발생 시기고닌 덴노 시대, 810년
원인후지와라 구스코와 헤이제이 상황의 권력 장악 시도
고닌 덴노와 구가야노미야노 황후의 권력 강화 시도
주요 인물
관련 인물헤이제이 천황
후지와라 구스코
고닌 천황
가가노 황후
후지와라 후유쓰구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다치바나노 하야나리
고노미네노 후유타다
분야노 와타마로
전개
발단헤이제이 상황의 헤이조쿄 복귀 시도와 구스코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
경과고닌 천황의 구스코 관직 박탈 및 유배 명령
헤이제이 상황의 군사 동원 시도
정부군의 진압
결과헤이제이 상황의 출가
구스코의 자살
구스코 일족의 숙청
간무 천황계의 정치적 우위 확립
배경
정치적 배경간무 천황의 천도 이후 헤이안쿄 중심 정치 체제 강화 시도
헤이제이 천황의 헤이조쿄 복귀 주장
상황과 천황 간의 권력 다툼
후지와라 씨족 내부의 권력 투쟁
사회적 배경귀족 사회 내 권력 암투 및 정치적 불안정
영향
정치적 영향율령 정치의 쇠퇴 가속화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강화
후지와라 씨의 권력 강화
사회적 영향귀족 사회의 변화 및 정치적 안정 추구
관련 법령
폐지내시 (나이시노카미, 内侍) 폐지
장인 (구로도, 蔵人) 설치
변경단정대 (단조다이, 弾正台) 권한 축소

2. 배경

806년, 간무 천황이 붕어하자 황태자 아테(安殿) 친왕이 헤이제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헤이제이 천황은 남동생 가미노 친왕(사가 천황)을 황태제로 삼았는데, 이는 병약한 헤이제이 천황의 건강과 어린 자녀들 때문에 황위 계승이 어렵다고 판단한 간무 천황의 의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헤이제이 천황의 이복 동생 이요 친왕이 모반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등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궁정 분쟁은 계속되었다.

809년, 헤이제이 천황은 병을 얻어 사와라 친왕이나 이요 친왕의 원령 때문이라 여겨 재난을 피하기 위해 양위하였다. 이때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그 오빠 후지와라노 나카나리가 반대하였으나, 헤이제이 천황은 양위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2. 1. 헤이제이 천황의 즉위와 황위 계승 문제

엔랴쿠 25년(806년), 간무 천황이 붕어하자 황태자였던 아테 친왕이 헤이제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헤이제이 천황은 동생인 가미노 친왕(사가 천황)을 황태제로 삼았는데, 이는 헤이제이 천황이 병약하고 그의 자녀들이 어려 적통에 의한 황위 계승이 어렵다고 판단한 간무 천황의 의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807년에는 헤이제이 천황의 이복 동생인 이요 친왕이 모반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등,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궁정 내부의 분쟁은 끊이지 않았다.[56]

2. 2. 사가 천황의 즉위와 '두 조정'의 대립

809년 헤이제이 천황이 갑작스러운 병으로 양위하고, 동생인 사가 천황이 즉위하였다. 황태자로는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인 다카오카 친왕이 책봉되었다.[56]

퇴위한 헤이제이 상황은 헤이조쿄로 거처를 옮겼는데, 사가 천황이 관찰사 제도를 개정하려 하자 이에 불만을 품었다.[56] 이로 인해 상황의 조정(헤이조쿄)과 천황의 조정(헤이안쿄)으로 파벌이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 조정(二所朝廷)'의 대립이라고 한다. 이 대립은 헤이제이 상황의 복위를 꾀하던 후지와라노 구스코와 후지와라노 나카나리가 부추긴 측면이 컸다. 구스코가 맡고 있던 상시(尙侍) 직책은 천황의 명령서인 내시선(內侍宣) 발급을 관장했는데, 당시에는 태상천황도 천황과 마찬가지로 국정에 관여할 수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상황이 구스코를 통해 국정에 개입할 수 있었다.

810년 3월, 사가 천황은 구로도도코로(蔵人所)를 설치하고, 6월에는 관찰사를 폐지하고 산기(参議)를 부활시켰다. 이러한 개혁은 헤이제이 상황을 더욱 자극하게 되었다.

3. 경과

810년 9월 10일, 사가 천황헤이제이 상황의 천도 시도에 맞서 이세, 오미, 미노 3국의 고쿠후(國府)와 관문을 봉쇄하고, 후지와라 나카나리를 체포 및 좌천시켰으며, 후지와라 약코(구스코)의 관위를 박탈하는 등 강경한 조치를 취했다.[57] 또한 자신의 측근들인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후지와라 후유쓰구, 기노 다카미를 요직에 등용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이에 헤이제이 상황은 직접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가 이끄는 사가 천황 측 군대에 의해 저지당했다. 결국 헤이제이 상황은 헤이죠쿄로 돌아가 출가했고, 구스코는 독을 마시고 자결함으로써 상황은 종료되었다.

이 사건으로 헤이안 시대에는 율령에 근거한 사형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7] 이후 호겐의 난(1156년)까지 약 346년간 사형 집행은 없었다.

3. 1. 헤이죠쿄 천도 시도와 사가 천황의 대응

810년 9월 6일, 헤이제이 상황헤이안쿄를 폐하고 헤이죠쿄로 천도하는 조칙을 내렸다. 이는 사가 천황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우선 조칙에 따르기로 하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 후지와라 후유츠구, 기노 다가미 등을 조궁사(造宮使)로 임명했다. 사가 천황이 신임하는 자들을 조궁사로 헤이제이쿄에 보내 헤이제이 상황 측을 견제하려는 목적이었다고 생각된다. 천도 조칙이 내려지자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다고 한다.

사가 천황은 천도를 거부하기로 결단하고, 9월 10일에 사절을 보내 이세국, 오미국, 미노국고쿠후와 관문을 굳게 지키게 했다. 그리고 후지와라 나카나리를 붙잡아 우효에후에 감금한 뒤 사도 곤노카미로 좌천시키고, 구스코의 관위를 박탈하고 죄를 알리는 를 발표했다. 또한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다이나곤으로 승진시키고, 후지와라 후유츠구를 시키부다이후로, 기노 다가미를 오와리노카미로 임명했다.

9월 11일, 사가 천황은 밀사를 헤이제이쿄에 보내 몇몇 대신을 소환했다. 이 날, 후지와라 마나쓰와 후지와라 와타마로 등이 돌아왔지만, 헤이제이 상황 파로 여겨진 와타마로는 좌위사부에 감금되었다.

사가 천황의 움직임을 알게 된 헤이제이 상황은 격노하여, 스스로 도고쿠로 가서 거병하기로 결심한다. 츄나곤 후지와라 가노마로 등 헤이제이 상황 측의 군신들은 극구 이를 말렸지만, 상황은 구스코와 함께 가마에 올라 동쪽으로 향했다.

3. 2. 사가 천황의 반격과 헤이제이 상황의 좌절

9월 6일 헤이제이 상황헤이안쿄를 폐하고 헤이조쿄천도한다는 조칙을 내리자, 사가 천황은 이를 거부하고 반격에 나섰다. 9월 10일 사가 천황은 이세, 오미, 미노 3국의 고쿠후(國府)와 관문을 봉쇄하고, 후지와라 나카나리를 체포하여 우효에후에 감금한 뒤 사도 곤노카미로 좌천시켰다. 또한 후지와라 약코(구스코)의 관위를 박탈했다.[57]

이와 함께 사가 천황은 자신의 측근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를 다이나곤(大納言)으로 승진시키고, 후지와라 후유쓰구는 시키부다이후, 기노 다카미는 오와리노카미에 임명했다. 9월 11일에는 밀사를 헤이조쿄에 보내 후지와라 마나츠, 훈야노 와타마로 등의 대신들을 소환했다. 이 중 훈야노 와타마로는 헤이제이 상황파로 지목되어 좌위사부에 갇혔다.[9]

이에 격분한 헤이제이 상황은 직접 도고쿠(東國)로 가서 군사를 일으키고자 했다. 주나곤(中納言) 후지와라 가도노마로 등이 만류했지만, 상황은 구스코와 함께 가마를 타고 동쪽으로 향했다. 사가 천황은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에게 상황의 동진을 저지하도록 명했다. 다무라마로는 에미시 정벌 때 함께 싸웠던 훈야노 와타마로의 석방을 요청했고, 와타마로는 사면되어 산기(参議)에 임명되었다.

같은 날 밤, 나카나리는 누군가에게 사살되었다. 이는 헤이안 시대에 율령에 근거한 사형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보여준다.[57] 이후 1156년 호겐의 난에서 미나모토노 다메요시가 처형될 때까지 약 346년간 사형 집행은 없었다.

헤이제이 상황은 야마토국 소에카미 군 다무라까지 갔으나, 이미 다무라마로의 군대가 방비를 굳히고 있음을 알고 헤이조쿄로 돌아갔다. 9월 12일 헤이제이 상황은 출가했고, 구스코는 독을 마시고 자결했다.[14][15]

4. 처벌

사가 천황은 구스코의 변 관련자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조서를 내렸다.[16] 다카오카 친왕은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고, 대신 사가 천황의 동생인 오토모 친왕(후의 준나 천황)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824년 헤이제이 천황이 사망했을 때, 이미 퇴위한 사가 상황의 요청에 따라 준나 천황의 이름으로 관계자들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지기도 했다.[17][18]

이 사건으로 승려 구카이는 사가 천황 측의 승리를 기원했고, 이후 일본 불교계의 주요 인물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4. 1. 처벌받은 인물

인물직위처벌
헤이제이 천황상황승려가 됨
다카오카 친왕황태자폐위
아보 친왕종4위다자이후의 장관으로 강등
이소노 왕|礒野王일본어종5위상 및 도서두|図書頭일본어이즈국의 임시 부지사로 강등
다구치 왕|田口王일본어종5위하도사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마스카 왕|真菅王일본어종5위하이키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후지와라노 구스코정3위 및 관직에서 물러나 자결
후지와라노 나카나리종4위하 및 산기사도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후 처형 (사살)
후지와라노 야스쓰구|藤原安継일본어종5위하 및 대사인조|大舎人助일본어사쓰마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후지와라노 사다모토|藤原貞本일본어종5위하 및 대장성 차관히다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후지와라노 나가누시|藤原永主일본어휴가국으로 유배
후지와라노 야마누시|藤原山主일본어휴가국으로 유배
후지와라노 후지누시|藤原藤主일본어휴가국으로 유배
후지와라노 마나쓰정4위하 및 산기이즈 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후 빗추국으로 강등
기노 타우에|紀田上일본어종4위하 및 오와리국 지사사토 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기노 요시카도|紀良門일본어종5위하 및 에치고국 지사히젠국의 임시 부지사로 강등
오노 이루카|多入鹿일본어종4위하 및 산기사누키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이후 아키국, 다시 사누키로 복귀
스가노노 니와누시|菅野庭主일본어정5위상 및 목공두|木工頭일본어아와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오노 오나카토미노 도코마로|大中臣常麻呂일본어종5위상 및 효부성의 부감독관비젠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이후 이요 국 지사로 임명
토모노 와타케타마로|伴和武多麻呂일본어종5위상 및 좌근위 소장|左近衛少将일본어무사시국의 임시 부지사로 강등, 이후 휴가 국 임시 지사로 임명
오무로노 고레쓰구|御室是嗣일본어종5위상오스미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이후 지쿠고국 임시 부지사로 임명
오무로노 우지쓰구|御室氏継일본어종5위상사쓰마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아베노 기요쓰구|安倍清継일본어종5위하 및 에치젠국 부지사아키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이후 호키국으로 유배
종5위하아와지국의 임시 지사로 강등
에치젠국 임시 2등 검사관아와 국으로 유배
에치젠 국으로 유배
이세노 야스마로|伊勢安麻呂일본어노토국으로 유배


5. 영향

사가 천황은 사건 관련자들에게 관용을 베푼다는 조치를 내렸다. 다카오카 친왕은 황태자 자리에서 물러났고, 천황의 남동생 오토모 친왕(훗날의 준나 천황)이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824년 헤이제이 상황이 사망했을 때, 이미 퇴위했던 사가 상황의 요청으로 준나 천황의 이름으로 관계자 사면령이 내려졌다.[1] 승려 구카이(空海)는 사가 천황 측의 승리를 기원하여 이후 일본 불교계의 실력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1]

6. 평가 및 연구

간무 천황이 자신의 사후 황위 계승에 대해 제시한 방침이 오히려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약자의 변의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가와우치 쇼스케는 간무 천황의 황통(皇統)에서 근친혼이 많은 점에 주목했다.[32] 그는 헤이제이 천황, 사가 천황, 준나 천황 3명에게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형제간 황위 계승을 실시하게 하며, 각각 이복 여동생을 아내로 삼아 그 소생의 자식(부모 모두 황족인 친왕)에게 황위를 계승시키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구상으로 탄생한 것은 고료 친왕(사가 천황의 황자)와 고세이 친왕(준나 천황의 황자, 요절)뿐이었다. 간무 천황 붕어 당시 헤이제이 천황은 내친왕과의 사이에 황자를 얻지 못했고, 사가 천황이 낳은 고료 친왕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35] 헤이제이 천황은 동복 동생인 사가 천황을 황태제로 세우고, 양위 후 중급 귀족의 딸을 어머니로 둔 다카오카 친왕을 태자로 세워 자신의 자손에게 황위를 계승하려 했다. 하지만, 간무 천황의 유언에 반하는, 내친왕을 어머니로 하지 않은 황자 다카오카 친왕의 태자 책봉은 궁정 내에서 헤이제이 상황에 대한 반감을 일으켜 약자의 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37]

이 가와우치 설에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야스다 마사히코는 헤이제이·사가 양 천황의 이복 동생인 준나 천황이 황위 계승자로 부상한 것은 805년 고세이 친왕의 탄생 후였다고 한다.[40] 니시모토 마사히로는 간무 천황은 처음부터 3형제의 황위 계승을 의도했으며, 『후소략기』[41] 등의 기사를 근거로 헤이제이 천황이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잇게 하기 위해 사가 천황의 폐태자를 계획하고 실패했다고 주장한다.[42]

반면, 하루나 히로아키는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으로 동생 사와라 친왕을 폐태자로 만들어 죽게 한 간무 천황이 형제 계승을 지향하여 일부러 후일의 불씨를 뿌릴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는 간무 천황에게 황위 계승 구상이 있었다면, 3명의 내친왕을 비로 삼도록 한 헤이제이 천황의 자손에게 직계 계승을 하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한다.[43] 나아가 덴무 천황의 적류 단절을 교훈으로 형제간 황위 계승이 구상된 것은 사실이나,[44] 이 구상을 발안하여 사가 천황을 황태제로 선택한 것은 헤이제이 천황이었다고 주장하며, 니시모토가 후세 사료를 바탕으로 주장한 폐태자 계획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한다.[45] 또한 다카오카 친왕의 태자 책봉은 사가 천황의 판단이었다고 한다.[46] 하루나는 황자나 귀족들의 동의를 얻기 어려운 황위 계승 구상이 실제로 기능했는지에 대해 가와우치 설에 의문을 제기한다.[48]

이처럼 약자의 변을 둘러싸고 황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에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기에, 사가 천황, 다카오카 친왕, 준나 천황의 태자 책봉 배경에 관한 연구는 약자의 변의 원인을 찾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구스코의 변에서 누가 먼저 거병을 계획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니시모토 마사히로는 헤이제이 상황이 사가 천황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복위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이제이 상황이 사가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사가 천황이 자발적으로 퇴위를 원했지만 헤이제이 상황이 이를 만류했다고 본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만에 헤이제이 상황이 복위를 시도한 것은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상황의 진정한 의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11][12][13]

반면, 하루나 히로아키는 사가 천황 측이 먼저 거병을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가 천황의 병세가 헤이제이 상황 측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

두 주장 모두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며, 헤이제이 상황이나 사가 천황 자신이 아닌 측근들이 주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6. 1. 연구사

간무 천황이 자신의 사후 황위 계승에 대해 일정한 방침을 제시했으며, 그것이 오히려 정치적 혼란을 일으켰다는 설이 약자의 변의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가와우치 쇼스케는 간무 천황의 황통(皇統)에서 근친혼이 많은 점에 주목했다.[32] 가와우치는 '''안데 친왕(헤이제이 천황)·간노 친왕(사가 천황)·오토모 친왕(준나 천황) 3명에게 황위 계승권을 인정하고 형제 간의 황위 계승을 실시하게''' 하며, 각각 이복 여동생이 되는 내친왕을 아내로 삼아 그 소생의 자식(즉, 부모 모두 황족인 친왕)에게 황위를 계승시키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구상에 기초하여 탄생한 것은 고료 친왕(사가 천황의 황자)와 고세이 친왕(준나 천황의 황자, 요절)뿐이었다. 간무 천황이 붕어할 때 헤이제이 천황은 내친왕과의 사이에 황자를 얻지 못했고, 사가 천황이 낳은 고료 친왕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35] 헤이제이 천황은 동복 동생인 사가 천황(간노 친왕)을 황태제로 세우고, 양위한 후에 중급 귀족의 딸을 어머니로 둔 다카오카 친왕을 입태자시켜 자기 자손에게 황위 계승을 실현하려 했다. 그러나, '''간무 천황의 유언에 반하는 내친왕을 어머니로 하지 않은 황자·다카오카 친왕의 입태자가 궁정 내에서 헤이제이 상황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약자의 변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37]

이 가와우치 설에는 다양한 의견이 쏟아졌다. 야스다 마사히코는 헤이제이·사가 양 천황의 이복 동생인 오토모 친왕(준나 천황)이 황위 계승자로 부상한 것은 엔랴쿠 24년(805년)의 고세이 친왕의 탄생 후였다고 한다.[40] 니시모토 마사히로는 간무 천황은 처음부터 3형제의 황위 계승을 의도했다고 한 후, 『후소략기』[41] 등의 기사를 근거로 하여, 아버지에 의한 황위 계승 구상에 반대했던 헤이제이 천황은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잇게 하기 위해 간노 친왕(사가 천황)의 폐태자를 계획하고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42]

이에 대해 하루나 히로아키는 자신의 동생인 사와라 친왕을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을 이유로 폐태자로 만들어 죽음에 이르게 한 간무 천황이 형제 계승을 지향하여 일부러 후일의 불씨를 뿌릴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하며, 만약 간무 천황에게 황위 계승 구상이 있다고 한다면 3명의 내친왕을 비로 삼도록 한 헤이제이 천황의 자손으로의 직계 계승이었을 것이라고 한다.[43] 더 나아가 덴무 천황의 적류의 단절을 교훈으로 형제 간의 황위 계승이 구상된 것은 사실이라고 본 후,[44] 이 구상을 발안하여 '''간노 친왕을 황태제로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헤이제이 천황이었다'''고 하여, 니시모토의 후세의 사료를 바탕으로 한 폐태자 계획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하고,[45] '''다카오카 친왕의 입태자는 사가 천황의 판단'''이었다고 한다.[46] 또한, 하루나는 황자나 귀족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황위 계승 구상이 실제로 기능했는지에 대해 가와우치 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48]

약자의 변을 둘러싸고 황위 계승을 둘러싼 대립에 원인을 찾는 견해가 있기 때문에, 간노 친왕(사가 천황)·다카오카 친왕·오토모 친왕(준나 천황)의 입태자의 배경에 관한 연구는 약자의 변의 원인을 찾는 데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6. 2. 간무 천황의 황위 계승 구상

간무 천황은 자신의 황통에서 근친혼을 장려하고, 세 아들( 헤이제이 천황, 사가 천황, 준나 천황)에게 형제간 황위 계승을 실시하게 하려 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러한 구상에 반하는 다카오카 친왕(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의 입태자가 궁정 내 반감을 불러일으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는 해석이 제시된다.

806년, 간무 천황이 붕어하고 황태자 아테(安殿) 친왕이 헤이제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헤이제이 천황은 남동생 가미노(神野) 친왕(훗날의 사가 천황)을 황태제로 삼았는데, 여기에는 병약한 헤이제이 천황 자신의 건강이나 천황의 자식들이 어렸기에 황위를 적자에게 잇게 하기엔 현실적으로 곤란하겠다고 여긴 간무 천황의 의향이 있었다고도 한다.[56] 이듬해, 천황의 이복 동생 이요 친왕이 모반 혐의로 죽임을 당하는 등 황위 계승을 둘러싼 일본 궁정의 분쟁은 수습되지 않았다.

809년 4월, 헤이제이 천황은 갑작스럽게 병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앞서 아버지에게 처형된 숙부 사와라 친왕이나 친동생 이요 친왕의 망령 때문이라 여겼고, 재난을 피하기 위해 양위를 결심했다. 당시 헤이제이 천황의 총애를 받으며 권세를 휘두르고 있던 후지와라노 쿠스코와 그 오빠 후지와라노 나카나리는 천황의 양위를 극구 반대했지만, 천황은 양위에 대한 강한 의사를 보이며 같은 해 4월 13일에 양위, 진노 친왕이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사가 천황). 황태자로는 헤이제이 천황의 아들인 다카오카 친왕이 책봉되었다.[2]

6. 3. 거병 계획의 주체 논쟁

구스코의 변에서 누가 먼저 거병을 계획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니시모토 마사히로(西本昌弘)는 헤이제이 상황사가 천황의 병세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듣고 복위를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이제이 상황이 사가 천황에게 양위를 강요한 것이 아니라, 사가 천황이 자발적으로 퇴위를 원했지만 헤이제이 상황이 이를 만류했다고 본다. 그러나 불과 두 달 만에 헤이제이 상황이 복위를 시도한 것은 그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하며, 상황의 진정한 의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11][12][13]

반면, 하루나 히로아키(春名宏昭)는 사가 천황 측이 먼저 거병을 계획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사가 천황의 병세가 헤이제이 상황 측을 방심하게 만들기 위한 계략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7]

두 주장 모두 확실한 증거는 부족하며, 헤이제이 상황이나 사가 천황 자신이 아닌 측근들이 주도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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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歴史をさわがせた女たち Bungei Shunjun 1979
[3] 서적 詳説日本史研究 山川出版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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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仙洞年代記 上皇と法皇の歴史 八木書店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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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문서 河内、1986年、P153-157./2014年、15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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