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와라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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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와라 친왕은 덴지 천황의 손자이자 고닌 천황의 아들로, 간무 천황의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나,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중 사망했다. 그는 사후 '스도 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원령(怨靈)이 간무 천황의 후계자들에게 재앙을 가져왔다는 믿음 때문에 다양한 진혼 의식이 거행되었다. 현재 그의 능묘는 야시마릉으로 불리며, 여러 신사에서 제신으로 숭배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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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오카쿄는 784년 간무 천황이 건설한 수도로, 수운에 유리하고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가문의 지지 기반이었으나, 사건과 재앙으로 인해 794년 헤이안쿄로 천도되었으며, 현재는 나가오카쿄시로 그 이름을 이어가고 있다.
사와라 친왕 | |
---|---|
기본 정보 | |
칭호 | 친왕 선사 |
다른 이름 | 친왕 젠지 |
신상 정보 | |
출생 | 덴표쇼호 2년 (750년)? |
사망 | 엔랴쿠 4년 10월 7일 (785년 11월 13일) 또는 17일 (23일) 가와치 국마다 군 요도 강 다카세 다리 머리 (현재 오사카부모리구치시 바바 정) |
묘소 | 야시마 능 (나라현나라시야시마초 (아와지 국쓰나 군에서 야마토 국으로 이장)) |
존호 | 숭도천황 |
계명 | 해당 사항 없음 |
정치 | |
황위 계승 | 황태자 |
황위 계승 기간 | 덴오 원년 4월 4일 (781년5월 1일) - 엔랴쿠 4년 (785년) 9월 |
가족 관계 | |
부 | 고닌 천황 |
모 | 다카노노 니가사 |
형제자매 | 노토노 히메미코 가이조 간무 천황 사와라 친왕 히에다 친왕 사케히토 내친왕 다도 친왕 미누마 내친왕 히로네노 모로카쓰 |
배우자 | 해당 사항 없음 |
자녀 | 해당 사항 없음 |
2. 생애
781년, 형인 간무 천황이 즉위하면서 사와라 친왕은 황태자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785년, 나가오카쿄 건설 책임자 후지와라노 타네츠구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사와라 친왕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아와지국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 굶어 죽었는데, 이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혹이 남아있다.[1]
사와라 친왕은 덴지 천황의 손자이자 고닌 천황의 아들이었다. 어머니는 다카노노 니이가사였다. 그는 11세에 도다이지에서 출가하여 승려 생활을 하다가, 간무 천황의 즉위와 함께 환속하여 황태자가 되었다.
간무 천황은 사와라 친왕이 죽은 후, 그의 혼령이 여러 재앙을 일으킨다고 믿었다. 아내와 아들이 병에 걸린 것도 사와라 친왕의 원혼 때문이라고 여겨졌다.[5] 이에 간무 천황은 사와라 친왕에게 '스도 천황'이라는 시호를 추증하고, 야마토국에 다시 매장하는 등 그의 혼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1]
사와라 친왕은 863년 교토 신센엔에 안치된 온료 중 하나가 되었다. 슈가쿠인의 스도 신사에서는 사와라 친왕의 가미를 모시고 있다.[1]
2. 1. 초기 생애
덴지 천황의 손자이자 고닌 천황으로 즉위한 시라카베 왕과, 와카사노 아타에(후의 다카노노 니이가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출생 연도는 『오카가미』 상권 모로타다의 뒷부분 기록, 『혼초 황윤 소운록』, 『일대요기』 등에 덴오 원년(781년) 입태자 시점에서 32세라고 기록된 점을 근거로 덴표쇼호 2년(750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 한편, 『도다이지 요록』 권4와 「다이안지 숭도 천황 어원 팔도 양소 기문」(다이고지본 『제사 연기집』 소인) 등의 자료에서는 21세에 수계하고 진고케이운 2년(768년) 또는 3년에 다이안지 동원에 이주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야마모토 유키오와 하세베 쇼지는 750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주장한다. 당시 왕족의 이름은 유모의 씨족 성에 연유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사와라 친왕의 입태자 동년 11월 19일에 무위에서 외종5위하를 수여받은 사와라노 오미 시즈메가 사와라 친왕의 유모였으며, 그 이름도 그녀에게서 유래되었다고 생각된다.사와라 친왕은 출생 당시 황통이 덴무 천황 계로 계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과 관련이 없다고 여겨졌으며, 모계 혈통 또한 하급 귀족이었고 관인으로서의 출세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에 11세에 도다이지에서 출가했다. 도다이지에서는 도테이를 스승으로 겐사쿠인에 거주했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21세에 수계하고 다이안지 동원으로 옮겨갔다. 호키 원년(770년)에 아버지 고닌 천황이 즉위했기 때문에 '''친왕 선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다이안지로 옮겨간 후에도 사와라 친왕은 료벤의 후계자로서 도다이지와 조토다이지시에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지도적인 높은 지위에 있었다.[2]
2. 2. 황태자 책봉
781년, 간무 천황이 고닌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하면서 사와라 친왕은 황태자로 지명되었다.[1] 간무 천황 즉위 다음 날인 4월 4일에 입태자가 되었다.[3] 당시 간무 천황의 첫째 아들인 안덴 친왕(훗날의 헤이제이 천황)이 이미 태어났음에도 사와라 친왕이 황태자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아버지 고닌 천황의 의향이라는 설, 간무 천황이 붕어했을 경우 안덴 친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와라를 세웠다는 설, 어머니의 신분이 낮았던 탓에 동모제인 사와라 친왕을 황태자로 삼아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려 했다는 설 등이 있다. 황태제임에도 사와라 친왕이 비를 맞이하거나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간무 천황의 요구인지 사와라 친왕의 의지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혼인을 하지 않아 자손이 없었던 것도 황태자가 된 요인으로 추정된다.[3]동궁부는 중납언 후지와라노 타마로가, 춘궁대부는 우쿄대부 오토모노 야카모치가 겸임했고, 춘궁료에는 키노 시라마로가 임명되었다. 784년 간무 천황은 후지와라노 타네츠구(타마로의 조카)를 조장오카궁사에 임명하고, 11월 11일 나가오카쿄로 천도했다. 나가오카 궁터의 조도인 동남방에서는 "춘궁"이라고 묵서된 스에키가 출토되었다.
783년 후지와라노 타마로가 사망한 후 춘궁부는 공석이 되었다. 게다가 춘궁대부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784년 지절 정동장군으로 임명되어 무츠국으로 내려갔고, 785년 8월 28일 무츠국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이 일어난 것은 그 다음 해 9월, 간무 천황이 나가오카를 떠나 있었던 시기였다.
2. 3.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과 죽음
785년, 새로운 수도 나가오카쿄 건설을 담당하던 후지와라노 타네츠구가 암살당했다. 이 사건에 사와라 친왕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 『속일본기』에는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만 기록되어 있을 뿐, 사와라 친왕에 대한 언급은 없다.하지만 『일본기략』에는 사와라 친왕이 오토모노 야카모치 등의 권유로 타네츠구 제거에 동의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사와라 친왕은 오토쿠니데라에 유폐된 후 아와지로 이송되던 중 단식 끝에 오사카부 모리구치시의 타카세 신사 부근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아와지에 묻혔다.[4]
사와라 친왕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일본기략』은 사와라 친왕이 자발적으로 단식하여 아사했다고 전하지만, 『미즈카가미』 등에는 간무 천황이 음식을 끊어 기아사시켰다는 기록도 있다.[3]
타네츠구 암살에 사와라 친왕이 실제로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하다. 기타야마 시게오는 오토모노 츠구히토 등이 독단적으로 타네츠구를 암살했고, 간무 천황이 이를 사와라 친왕 제거에 이용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나가무라 마코토는 나가오카쿄 천도에 반대하던 도다이지 등 나라 사찰 세력과 연결된 사와라 친왕이 천도를 막기 위해 타네츠구 암살을 획책했다고 본다.
사와라 친왕이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지, 아니면 실제로 암살에 관여했는지는 여전히 논쟁거리이다.
3. 사후
785년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사망한 사와라 친왕은, 이후 간무 천황과 국가에 닥친 여러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졌다. 간무 천황은 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800년 스도 천황(崇道天皇)으로 추존하고 야마토국으로 이장하여 스도 천황릉을 조성했다. 사와라 친왕은 교토 신센엔의 원령 중 하나이자, 슈가쿠인 스도 신사의 가미로 숭배받고 있다.[1]
3. 1. 스도 천황 추존과 원령
785년, 나가오카쿄 건설을 담당하던 후지와라노 타네츠구가 암살당했다. 사와라 친왕은 수도 이전 반대에 연루되어 아와지국으로 유배되었으나, 그곳으로 가는 길에 굶어 죽었다.[1]이후 간무 천황의 아내가 죽고 아들이 병에 걸리는 등 여러 문제가 발생하자, 간무 천황은 사와라 친왕을 황태자로 삼았다. 그해 말, 사와라 친왕은 스도 천황(崇道天皇)으로 추존되었다. 이는 사후에 황제의 지위와 칭호를 받은 유일한 사례이다.[1] 그는 야마토국에 다시 매장되었다. 이후에도 문제가 계속되자 수도를 헤이안쿄(교토)로 다시 옮기게 되었다.
863년, 교토의 신센엔에 안치된 원령 중 하나가 되었다. 다른 인물들은 모노노베노 모리야(587년 사망), 이요 친왕(807년 처형), 후지와라노 나카나리(810년 처형), 다치바나노 하야나리(842년 사망), 분야노 미야타마로(843년 사망)였다. 사와라 친왕의 가미는 야마시로국 슈가쿠인의 스도 신사에서 숭배받고 있다.[1]
788년 이후, 아테 친왕(훗날의 헤이제이 천황)의 발병[5], 간무 천황의 비 후지와라노 료시·후지와라노 오토무로·사카노우에노 마코토의 병사, 간무 천황과 사와라 친왕의 생모인 다카노노 니이가사의 병사, 역병 유행, 기근 등이 잇따랐다. 이러한 일들은 신기관의 복점에 의해 사와라 친왕의 재앙으로 여겨졌다. 792년에는 사와라 친왕에게 수호묘 1연이 배정되었다.
고후쿠지의 승려 젠주는 사와라 친왕에게 원한을 품지 않도록 제언했고, 친왕의 분노를 진정시켜 아테 친왕의 병을 치유했다고 하여 797년에 승정의 지위를 받았다.[7]
797년 5월 20일에는 승려 2명을 아와지국에 파견하여 친왕의 영혼에게 사죄하고, 799년 2월 15일에는 춘궁료·오토모노 코레나리와 덴토 다이호시·타이신을 아와지국에 파견하여 사죄하는 등 진혼 의식이 거행되었다.
800년 7월 23일, 사와라 친왕은 스도 천황으로 추증되었고, 묘는 산릉이 되었다. 춘궁료·오토모노 코레나리가 음양사나 승려들과 함께 산릉으로 파견되어 제사를 지냈고, 아와지국 쓰나군 2연을 묘지기로 삼았다. 이때 이노우에 내친왕도 함께 추존 및 위령되었다.
804년 말부터 건강이 악화된 간무 천황은 사와라 친왕의 진혼에 더욱 힘을 쏟았다. 805년 4월에는 여러 나라에 스도 천황을 위해 고쿠라(穀倉)를 만들게 하여 정세 40속을 납부하게 하고, 개장 스도 천황사를 임명하여 친왕을 야마토국으로 이장하는 것을 진행하게 했다. 이장된 장소는 나라시 야시마정의 스도 천황릉으로 추정된다.
806년에 위독해진 간무 천황은 3월 17일에 쓰구씨 암살 사건 관계자들을 복위시키고, 스도 천황을 위해 여러 나라의 고쿠분지 승려가 춘추 2중월(2월·9월)의 7일간 금강반야경을 읽도록 명한 뒤 같은 날 붕어했다. 5월 18일에 아테 친왕이 헤이제이 천황으로 즉위한 후, 그 해 겨울에 사와라 친왕을 위해 야시마사를 창건했다. 사가 천황도 병이 들자 사와라 친왕의 재앙을 두려워하여, 810년 7월 27일에는 사와라 친왕을 위해 승려 100명을 득도시키고, 29일에 법화경 서사를 시켰다.
3. 2. 묘소와 제사
사와라 친왕은 처음에는 아와지국에 묻혔으나, 그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쓰나군에 수호호가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 군 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다음 두 곳이 전승지로 알려져 있다.야마토국으로 개장된 후의 능은 야시마릉(八嶋陵)이라 불렸으며, 엔기 제릉료식에 따르면 소재지는 소에카미군이며, 조역은 동서 5정, 남북 4정, 수호호는 2연이었다.
근처에는 친왕을 모시는 사당인 시마다 신사가 있으며, 거기서 북쪽으로 몇 km 떨어진 나라 마을에 있는 숭도 천황사, 고료 신사 등에서도 친왕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다. 교토의 귀문에 위치한 사쿄구 가미타카노에는 교토에서 유일하게 사와라 친왕만을 제신으로 모시는 숭도 신사가 있다.
도다이지에서는 매년 니가츠도슈니에 때 신명장을 봉독하고 법회의 가호를 빌며, 최종 단계에서 열한 기둥의 "고령(御霊)"의 이름을 읽어 올리는데, 그 첫머리에 야시마노고령(八嶋ノ御霊)이라고 적혀 있어 사와라 친왕의 원념을 위로하고 있다.[8]
『곤키』 조호 3년(1001년) 3월 18일 조에는 숭도 천황의 다이안지 어재소(大安寺御在所)가 보이며, 같은 해 5월 19일 조에도 다이안지 동원의 숭도 천황 묘(崇道天皇廟)라는 말이 보이는데, 이 둘은 같은 시설로 보이며, 11세기에는 다이안지에도 사와라 친왕의 위령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참조
[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2]
논문
早良親王と長岡遷都:遷都事情の再検討
続群書類従会成
1985
[3]
논문
〈崇道天皇〉の成立とその展開―九世紀における〈天皇〉の位相―
岩田書院
2015
[4]
서적
藤原種継事件の前後
[5]
문서
日本紀略
0792-07-04 #延暦11年6月10日
[6]
문서
類聚国史
0792-07-11 #延暦11年6月17日条
[7]
문서
扶桑略記
0797-02-14 #延暦16年正月16日条
[8]
간행물
東大寺二月堂声明(Ⅹ)神名帳
https://hdl.handle.n[...]
奈良教育大学
198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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