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키 모리타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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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키 모리타카는 1573년에 태어나 1632년에 사망한 인물로, 센고쿠 시대 무장 구키 요시타카의 아들이자 도바 번의 초대 번주이다. 그는 아버지의 가독을 이어받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아버지의 서군 가담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이후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가신을 처형하고 도바 번을 다스리며 에도 막부에 협력했다. 말년에는 후계자 문제로 가문 내 분쟁이 있었으며, 사망 후 아들 히사타카가 가문을 이었으나 영지가 삭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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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키씨 - 구키 요시타카 (센고쿠 시대)
구키 요시타카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약한 구키 수군의 수장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후 자결한 철갑선 활용의 해전으로 유명한 무장이다. - 구키씨 - 구키 히사타카
구키 히사타카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다이묘로, 구키 요시타카의 양손자이며, 상속 분쟁으로 토바번에서 산다번으로 감봉된 후 다카쓰키번의 수위를 맡았다. - 도바번주 - 구키 히사타카
구키 히사타카는 에도 시대 초기의 무장이자 다이묘로, 구키 요시타카의 양손자이며, 상속 분쟁으로 토바번에서 산다번으로 감봉된 후 다카쓰키번의 수위를 맡았다. - 도바번주 - 도이 도시마스
도이 도시마스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쓰나의 배려로 도이 가문을 재흥하고 시모쓰마 번주를 거쳐 고가 번, 도바 번을 지낸 후 가라쓰 번의 초대 번주를 역임하며 선정(善政)을 펼쳐 영민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의 학문은 가라쓰에서 "오쿠류의 학"으로 불리며 계승되었다. - 1573년 출생 - 도이 도시카쓰
도이 도시카쓰는 에도 막부 초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3대 쇼군을 섬기며 막부의 정치, 행정, 재정 등 여러 분야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막번 체제 확립과 외교, 통화 제도 개혁에 기여했으나, 후반에는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된 인물이다. - 1573년 출생 - 시몬 마리우스
시몬 마리우스는 독일의 천문학자로,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별개로 목성의 주요 위성들을 발견하고 이름을 붙였으며, 안드로메다 은하를 관측하는 등 업적을 남겼으나, 우주 구조에 대한 견해는 지동설을 지지하지 않았다.
구키 모리타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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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족 | 구키 씨 |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
계명 | 마쓰가쿠인덴젠조슈다이슈신게쓰젠코다이코지(조안지, 조코지) 쇼가쿠인덴신게쓰젠코다이코지(신게쓰인) |
묘소 | 조안지(미에현도바 시 도바) 신게쓰인(효고현산다 시 니시야마) 조코지(아이치현다하라 시 오쿠보 정) |
관직 | |
관위 | 종5위 하, 나가토 수 |
막부 | 에도 막부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미쓰 |
번 | 시마도바 번주 |
개인 정보 | |
출생 | 덴쇼 원년 (1573년) |
사망 | 간에이 9년 9월 15일 (1632년10월 28일) |
개명 | 손지로 도모타카 미쓰타카 모리타카 |
가족 정보 | |
부모 | 구키 요시타카, 다치바나 무네타다 여동생 호린인 |
형제자매 | 시게타카 고가 사마 실 도요다 고로에몬 실 노리타카 모리타카 슈덴노스케 고로시치 고로하치 와타나베 가즈마 실 고로쿠로 (유케이) 아오야마 부젠 실 조헤이 고로베이 |
배우자 | 정실: 다치바나 무네타다 딸 덴오인 측실: 니시야마 민부 딸 류세이인, 아사쿠라 가케이 딸 |
자녀 | 도다 다다요시 정실 규쇼인 마쓰다이라 가쓰타카 정실 호주인 오와카 (미즈노 가쓰토시 정실 조세이인) 구키 요시마사 실 지쇼인 (자쇼인?) 구키 가즈시게 실 지코인 (조코인?) 요시타카 고시가 다카하루 실 교치인 사다타카 다카스에 다카시게 히사타카 |
양자 | 호리우치 우지요시 정실 |
2. 생애
덴쇼 원년(1573년) 구키 요시타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타치바나 무네타다의 여동생이다. 게이초 2년(1597년) 아버지 요시타카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다.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종군했고,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급히 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버지 요시타카는 토바성에서 서군에 가담하고 있었고, 전투 후 모리타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아버지의 목숨을 구해 줄 것을 간청하여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 전에 구키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토요다 고로에몬이 독단적으로 요시타카에게 할복을 권유했고, 요시타카는 자결했다. 모리타카는 격노하여 고로에몬을 톱형벌로 참수하고 효수했다. 모리타카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옥룡산 다이후쿠지를 개축하고[1], 도쇼산 조안사로 고쳤다.[1][2] 또한 사찰 영지 100석과 경내외의 등롱 기름값 20석을 절에 기진했다.[2]
도바 번 초대 번주로서 5만 6000석을 영유했다. 구키 수군을 이끌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으며, 에도 성 축성 때는 목재와 석재를 해상 수송하여 에도 막부에 협력했다.[3] 이후 장남 요시타카를 폐적하고, 오남 히사타카를 환속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삼남 타카스에는 이에 반대했다. 간에이 9년(1632년) 모리타카가 사망하자 가독 다툼이 일어나 번내는 히사타카 파와 타카스에 파로 나뉘었다. 막부의 명령으로 히사타카가 뒤를 이었지만, 2만 석이 삭감되고 셋쓰 산다로 이봉되었다. 한편, 타카스에에게는 이에미츠의 명령으로 단바에 새롭게 2만 석이 주어져 단바 아야베 번이 되었다. 두 곳 모두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구키 가문의 수군력은 잃게 되었다.
2. 1. 출생과 가독 상속
덴쇼 원년(1573년) 구키 요시타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타치바나 무네타다의 여동생이다. 게이초 2년(1597년) 아버지 요시타카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았다.[1]2. 2. 세키가하라 전투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종군하였다.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하여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급히 귀국하였다. 아버지 구키 요시타카는 서군에 가담하여 도바 성에 있었다. 전투 후, 모리타카는 이에야스에게 아버지의 구명을 탄원하여 허락받았다. 그러나 그 전에 구키 가문의 장래를 걱정한 가신 도요타 고로에몬이 독단으로 요시타카에게 할복을 권유했고, 요시타카는 자결하였다. 모리타카는 격노하여 고로에몬을 톱켜기 형벌로 처형하고 효수하였다. 모리타카는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옥룡산 다이후쿠지를 개축하고[1], 도쇼산 조안사로 개칭했다.[1][2]2. 3. 도바 번주 시대
게이초 2년(1597년) 아버지 구키 요시타카로부터 가독을 이었다. 게이초 5년(160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이즈 정벌에 종군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거병으로 세키가하라 전투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버지 요시타카는 도바 성에서 서군에 가담하고 있었다. 전투 후 모리타카는 이에야스에게 아버지의 구명을 탄원하여 허락받았으나, 가신 도요타 고로에몬의 독단으로 요시타카는 할복하였다. 모리타카는 격노하여 고로에몬을 톱켜기로 참수 후 효수하였다.[1]도바 번 초대 번주로서 5만 6000석을 다스렸다. 구키 수군을 이끌고 오사카 전투에 참전했으며, 에도 성 축성 때 목재와 석재를 해상 수송하여 에도 막부에 협력했다.[3] 이후 장남 요시타카를 폐적시키고 다섯째 아들 히사타카를 환속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셋째 아들 다카스에가 반대하였다. 간에이 9년(1632년) 모리타카가 사망하자 가독 다툼이 발생할 가능성을 감지한 막부는 히사타카에게 모리타카의 뒤를 이으라 명했고, 구키 가문은 셋쓰 산다 번으로 이봉되었다.
2. 4. 가독 분쟁과 최후
병약했던 장남 요시타카를 폐적하고, 출가했던 오남 히사타카를 환속시켜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삼남 다카스에는 이에 반대하여 가독 다툼이 일어났다.[3] 간에이 9년(1632년) 모리타카가 사망하자 가독 다툼은 더욱 심화되었다. 막부의 명령으로 히사타카가 뒤를 이었으나, 영지가 2만 석 삭감되고 셋쓰 산다 번으로 이봉되었다. 다카스에는 단바 아야베 번으로 이봉되었다. 이로 인해 구키 가문의 수군력은 약화되었다.[4]3. 묘소
모리타카는 에도에서 병사한 후, 유해는 보제사인 도바의 도쇼산 조안사에 안장되었다.[1]
가독 다툼으로 인해, 간에이 10년(1633년 4월 13일)에 구키 히사타카가 셋쓰국 산다번으로, 다카스에가 단바국 아야베번으로 전봉되자, 모리타카의 유언에 따라 다카스에가 조안사에서 공양을 거행했다.[1]
이에 대해, 히사타카는 이봉지인 메이린사를 모리타카의 계명에 따라 텐오잔 신게츠인으로 개칭하고, 이곳을 보제사로 삼아, 모리타카의 오륜탑을 건립했다. 산호를 세이료잔으로 개칭한 것은 간분 5년 (1665년)의 일이다.[1]
다하라번 제2대 번주인 토다 타다요시가 모리타카의 딸 (큐쇼인)을 정실로 맞이한 관계에서, 토다 씨의 보제사인 운류산 조코지에도 묘가 건립되었다.[1] 이는 중세의 반비의 계보를 잇는 공양탑으로도 여겨진다.[1]
4. 등장하는 소설
가토 히로시의 소설 『수군 아득히』 (분게이슌주, 2014년 2월)에 등장한다. 이후 『분슌 문고』(상)(하) (2016년 8월)로 출간되었다.[1]
참조
[1]
서적
1991
[2]
서적
1991
[3]
논문
1974
[4]
서적
岡倉天心
河出書房新社
2012-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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