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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코기리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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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코기리비키는 톱으로 사람을 썰어 죽이는 형벌을 의미하며,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화권에서 사용되었다. 페르시아, 트라키아, 로마 제국 등에서 정치적 숙청, 반란 진압, 종교적 박해 등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기독교 순교자, 시크교도, 무슬림 등 종교적, 민족적 갈등 속에서도 나타났다. 톱질형은 널빤지에 고정하거나 거꾸로 매다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시행되었으며, 횡단면 또는 종단면으로 썰어 죽이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에 사형의 한 종류로 존재했으며, 문화적 참조로 힌두교와 불교의 지옥 묘사, 유럽의 사순절 풍습 등에서 톱질형이 등장한다.

2. 역사

고대 페르시아, 트라키아, 로마 제국 등에서 톱질형이 시행된 기록이 있다. 칼리굴라 황제는 톱질형을 즐겨 사용했으며, 구약성서의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의 므나세 왕의 명령으로 톱으로 썰려 죽었다고 전해진다.[16] --

기원전 451년경 공포된 12표법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조각내어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톱질형과 유사한 형태로 해석되기도 한다.[12] 키토스 전쟁 당시 유대인 반란군은 로마인들을 톱으로 썰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며,[14] 발렌스 황제는 반란을 일으킨 프로코피우스와 그의 장군들을 톱으로 썰어 죽였다.[15]

중세 유럽에서는 열심당원 시몬, 코누스와 그의 아들,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 등 기독교 순교자들을 톱으로 처형하는 경우가 있었다.

루카스 크라나흐 (아버지)가 그린 성 시몬을 두 동강 내는 삽화


무함마드 알리 치하의 총독 압드 우르 라만 베이, 모로코술탄 물레이 이스마일 치하에서도 톱질형이 행해졌다.[24][25][28] 오스만 제국에서도 톱질형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여러 건 전해지며, 무굴 제국아우랑제브 황제는 시크교도 바이 마티 다스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53]
무굴 제국에 의한 바이 마티 다스의 처형을 묘사한 그림.
베트남중국에서도 톱질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페인에서는 모리스코 반란(1568년)과[65] 라 만차 반란(1808년) 당시 톱질형이 사용되었다.[67] 1812년 대육군 당시에도 프랑스 군인들이 톱으로 썰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69]

덴랴쿠 연간(947년~957년)에 즈시노오마루가 단고의 영주가 되어 유라 항구의 산쇼다유를 붙잡아 대나무 톱으로 그 목을 베었다는 전설이 있다. 에도 시대에는 톱질형이 형식적인 것으로 바뀌어 수형자의 목을 땅에서 내놓고 피가 묻은 톱과 함께 전시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실제 사형은 십자가형으로 집행되었다.[74][75] --

1869년(메이지 2년) 7월 8일에 나온 형법관 지령에 의해 톱질형은 폐지되었다.

  • - 18세기 프랑스령 캣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스위스 출신 병사가 톱으로 두 동강 났다.[5]

2. 1. 고대

톱질형은 고대 페르시아, 트라키아, 로마 제국 등에서 시행된 기록이 있다.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왕 자암시드는 백성들의 반란으로 톱으로 썰려 죽임을 당했다.[5]

로마 제국칼리굴라 황제는 톱질형을 즐겨 사용했으며, 몸통을 가로질러 톱질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이러한 처형을 보면서 식사를 즐겼다고 한다.[2]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이사야는 유다의 므나세 왕의 명령으로 톱으로 썰려 죽었다고 전해진다.[16] --

2. 1. 1. 페르시아

페르시아호르미즈드 4세는 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아내와 아들이 톱으로 썰리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8] 다리우스 2세의 아내 파뤼사티스는 며느리 스타테이라의 여동생 록사나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6]

2. 1. 2. 트라키아

트라키아의 왕 디에길리스와 그의 아들 지젤미우스는 여러 사람을 톱으로 썰어 죽이는 잔혹함을 보였다.[15]

2. 1. 3. 로마

기원전 451년경 공포된 12표법은 로마인들의 가장 오래된 법전이다. 아울루스 겔리우스는 저서 《아티카의 밤》에서 12표법에 몇몇 범죄에 대해 톱으로 처형하는 방법이 언급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처형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기록했다.[11] 12표법의 채무 관련 조항에는 채권자가 채무자를 조각내어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톱질형과 유사한 형태로 해석되기도 한다.[12]

키토스 전쟁 당시 유대인 반란군은 로마인들을 톱으로 썰어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14] 발렌스 황제는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프로코피우스와 그의 장군들을 톱으로 썰어 죽였다.[15]

2. 2. 중세 및 근대

중세 유럽에서는 기독교 순교자들을 톱으로 처형하는 경우가 있었다. 열심당원 시몬, 코누스와 그의 아들, 심포로사와 그녀의 일곱 아들, 시나이 산의 38명의 수도승과 순교자, 성 타르불라 등이 그 예시이다. 몬테풀치아노의 수도사 콘라드 데 엘리스 바르텔레미 형제도 머리에서 아래로 톱질을 당했다고 한다.[23]

북아프리카에서는 무함마드 알리 치하의 총독 압드 우르 라만 베이가 사람들을 톱으로 잘랐다는 기록이 있으며,[24] 모로코술탄 물레이 이스마일 치하에서도 1705년 알카이드 메렉,[25] 1721년 라르베 쇼트가 톱질형에 처해졌다.[28]

오스만 제국에서도 톱질형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여러 건 전해지며, 무굴 제국아우랑제브 황제는 시크교도 바이 마티 다스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53] 베트남중국에서도 톱질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페인에서는 모리스코 반란(1568년)과[65] 라 만차 반란(1808년) 당시 톱질형이 사용되었다.[67] 1812년 대육군 당시에도 프랑스 군인들이 톱으로 썰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69]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카를로비치 대교구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톱으로 썰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0]

2. 2. 1. 기독교 순교자

예수의 사도였던 열심당원 시몬은 이란 페르시아에서 톱으로 썰려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처형 방법은 발을 거꾸로 매달아 톱으로 자르는 것이었다고 한다.[4]

''아크타 산토룸''에 따르면,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코누스는 아내가 죽은 후 7살 된 아들과 함께 사막으로 갔다. 그는 소아시아 (아나톨리아) 코니아에서 여러 이교도 우상을 파괴했다. 붙잡힌 그는 아들과 함께 굶주림과 불로 고문을 당했고, 결국 톱으로 썰려 죽어가면서 기도했다.[18]

16세기의 ''폭스 순교자 열전''에 따르면, 심포로사는 트라야누스 (98–117) 또는 하드리아누스 (117–138) 시대에 살았던 일곱 아들을 둔 과부였다. 이교 사원에서 기도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심포로사는 채찍질을 당한 후, 큰 돌을 매단 채 아니에네 강에 던져졌다. 여섯 아들은 모두 칼에 찔려 죽었고, 막내 외제니우스는 톱으로 썰렸다.[19][20]

2. 2. 2. 북아프리카

1843년 윌리엄 홀트 예이츠는 무함마드 알리 (1801~1849 재위) 치하의 총독 압드 우르 라만 베이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는 잔인하고 탐욕스러웠다고 한다. 그는 배교한 콥트인이었으며, 부를 축적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를 남용했다. 그는 심지어 사람들을 톱으로 둘로 잘랐다고 한다.[24]

술탄 물레이 이스마일 (1672~1727 재위) 치하의 모로코에서도 여러 차례 톱질형이 집행되었다. 1705년에는 알카이드(성주 또는 총독) 메렉이 처형되었고,[25] 1721년에는 라르베 쇼트가 톱질형에 처해졌다.[28]

2. 2. 3. 오스만 제국

오스만 제국에서는 사람을 톱으로 써는 형벌이 존재했다는 기록이 여러 건 전해진다. 대부분 메흐메트 2세 통치 기간(1451–1481)에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다음은 그 사례들이다.

사건 발생 시기사건 내용
1453년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주민들에게 가해진 잔혹 행위 중 하나로 톱질형이 언급된다.[39]
1460년모레아 전제공국의 마지막 데스포테스인 데메트리오스 팔레올로고스가 투르크에 항복한 후, 미스트라스 성의 성주가 톱으로 두 동강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40]
1460년헝가리 장군 미하엘 실라지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톱으로 반으로 잘렸다.[41]
1460-64년모레아에서 베네치아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 주민들이 여러 전투를 벌였고, 포로로 잡힌 500명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져 톱질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42]
1463년구호기사단 기사들이 미틸리니를 방어하다 항복했지만, 일부 보도에 따르면 톱으로 두 동강 났다.[43] 케네스 마이어 세톤은 술탄이 약 400명의 기사들의 머리를 살려주기로 약속했지만, 맹세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톱으로 반으로 잘랐다고 한다.[44]
1469/1470년네그로폰트 전투에서 도시가 함락된 후, 총독 파올로 에리초는 목숨을 보장받았으나 배신 행위로 톱으로 두 동강 났다.[45]
1473년시칠리아인 안토니는 갈리폴리에서 술탄의 배에 불을 지른 죄로 톱으로 두 동강 났다.[46]
1480년오트란토 학살 당시 대주교 스테파노 펜디넬리가 톱으로 반으로 잘리도록 명령받았다는 보고가 있다.[48]
1611년디오니시우스가 주도한 반란 실패 후, 주요 공모자 중 일부가 톱으로 두 동강 났다.[49]


2. 2. 4. 아시아

무굴 제국아우랑제브 황제는 시크교도 바이 마티 다스를 톱으로 썰어 죽였다.[53] 바이 마티 다스는 구루 테그 바하두르의 추종자로, 1675년 카슈미르 힌두교도들을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시키려는 것에 저항하다 다른 시크교도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1839년 베트남 순교자 중 한 명인 가톨릭 군인 아우구스티노 후이는 톱으로 몸이 두 동강 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58] 그러나 다른 자료에는 참수되었다는 기록도 있다.[59][61]

2. 2. 5. 중국

당 소종 황제(재위 888–904)는 죄수 중 한 명에게 톱으로 자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 청나라 초기, 명나라 숭정제가 1644년에 자살했을 때, 새 황제는 이전 정권의 강력한 지지자였던 광동 부총독 진(陳)을 톱으로 두 동강 내는 처형을 명령했다.[64]

2. 2. 6. 유럽

1812년 대육군 당시 프랑스 군인들이 톱으로 썰려 죽었다는 기록이 있다.[69] 모스크바 대화재 이후, 농민들과 코사크들은 프랑스 군인들에게 적대적이었고, 일부는 톱으로 썰어 죽였다고 한다.

1848년 헝가리 혁명 당시, 카를로비치 대교구의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톱으로 썰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0] 1850년에 출판된 ''Ungarns gutes recht''(헝가리의 정당한 권리)라는 팸플릿에서는 세르비아인들이 헝가리 여성, 어린이, 노인들을 훼손하고, 천천히 불에 구워 죽였으며, 일부는 톱으로 썰었다고 주장한다.

2. 3. 일본

덴랴쿠 연간(947년~957년)에 즈시노오마루(대왕환이라고도 함)가 단고의 영주가 되어 유라 항구의 산쇼다유를 붙잡아 대나무 톱으로 그 목을 베었다는 전설이 있다("安寿と厨子王丸|안쥬와 즈시노오마루일본어" 참조).

에도 시대 이전에는 실제로 목을 톱으로 썰었으나, 에도 시대에는 톱질형이 형식적인 것으로 바뀌어 수형자의 목을 땅에서 내놓고 피가 묻은 톱과 함께 전시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실제 사형은 십자가형으로 집행되었다.[74][75] 『어정서백개조』 71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살인 및 상처를 입힌 죄에 대한 처벌, 하나, 주인을 죽임. 이틀간 전시하고 하루 끌고 다니며, 톱질을 한 뒤 십자가형. 같은 백삼, 처벌의 형태, 종전의 예에 따름, 하나, 톱질, 교호 6년에 확정, 하루 끌고 다님. 양 어깨에 칼자국을 냄. 대나무 톱에 피를 묻혀 옆에 세워 둠. 이틀간 전시. 톱질을 할 만한 자가 있으면 톱질을 시킴. 단, 밭과 집, 토지 재산은 모두 몰수

3일간(2일 밤) 전시한 후 끌고 다님을 한 뒤 십자가형으로 처형했다. 전시 방법은 니혼바시 남쪽 광장에 가로세로 3척, 깊이 2척 5촌의 구멍 전시 상자라는 상자를 땅속에 묻고, 상자에 목에 족쇄를 채운 죄인을 넣어 목만 땅에서 나오도록 한 다음 전시했다. 이때 죄인의 양 어깨에 베인 상처를 내고, 목의 좌우에 그 피가 묻은 대나무 톱과 쇠 톱을 세워 두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 시대에는 7일간 톱으로 목을 썰었다고 하지만, 후에 형해화되어 게이안 연간에 실제로 톱으로 썰었던 자가 있었기 때문에 비인을 두고 감시하게 하고, 동심도 순찰을 했다.

에도 시대에 서민에게 부과되었던 6종류의 사형 중에서 가장 무거운 형벌이며, 주인을 살해한 경우에만 적용되었고 결소를 부가형으로 부과했다. 이 형은 1869년(메이지 2년) 7월 8일에 나온 형법관 지령에 의해 폐지되었다.

톱질형으로 처형된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 후지와라노 쓰네키요 - 1062년, 전9년의 역에서 패배하여 붙잡혀 의도적으로 날이 무딘 태도로 톱질형으로 처형되었다.
  • 와다 신고로 - 미요시 가문의 피관. 1544년(덴분 13년), 쇼군가의 시녀와의 불륜으로 호소카와 하루모토 등에 의해 처형되었다(『信次公記|노부쓰구 경기일본어』).
  • 스가누마 사다나오, 이마이즈미 도젠 - 다케다 가문의 가신 스가누마 사다타다의 숙부 · 가신. 나가시노 전투에서 패주한 사다타다의 귀환 시 입성을 거절한 죄로, 후에 처형되었다.
  • 스기야 젠주보 - 1573년, 오다 노부나가를 저격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 오가 야시로 - 도쿠가와 가문의 가신. 1574년, 다케다 가문에 내통한 혐의로 처형되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기는 뇨보의 양친 - 1593년(분로쿠 2년) 11월 7일, 뇨보가 히데요시의 노여움을 사 연좌되었다(『時慶卿記|도키요 경기일본어[76]』 같은 해 11월 4일 조).
  • 도요다 고로에몬 - 구키 가문의 가신. 1600년, 구키 모리타카에 의해 아버지 요시타카를 자결로 몰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 도쿠가와 이에미쓰 가신 나카가와 모 - 기리시탄 숭배 혐의로 처형되었다.
  • 나오스케 곤베에 - 강도. 1721년에 체포되어 니혼바시에서 톱질형으로 효수된 후, 스즈가모리 형장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2. 4. 아메리카

18세기 프랑스령 캣 아일랜드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스위스 출신 병사가 톱으로 두 동강 났다.[5] 아이티 혁명 당시에는 백인 농장주가 톱으로 썰려 죽었다.[6]

3. 방법

로마 황제 칼리굴라와 관련된 사건에서 톱질은 몸의 가운데를 가로질러(횡단면) 행해졌다고 한다.[2] 이는 고대 중국의 처형 방법인 허리 자르기와 유사하다. 모로코의 경우, 톱질은 사타구니에서 위로, 머리에서 아래로 세로(정중 시상면)로 행해졌다고 한다.[3]

열심당원 시몬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그림처럼 처형자는 거꾸로 매달린 채 사타구니에서 시작하여 몸의 가운데를 세로로 톱질하여 갈랐으며, 처형자를 고정하거나 지지하는 널빤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4] 다른 경우, 사형수는 톱질 전에 하나 또는 두 개의 널빤지에 고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3]

1757년 미시시피주 캣 아일랜드 반란, 1791년 아이티 혁명 에서도 널빤지에 고정하여 톱질하는 방법이 사용되었다. [29][36]

중국에서는 희생자를 땅에 깊숙이 박힌 말뚝 사이에 단단히 고정된 두 개의 널빤지 사이에 수직으로 고정하여 톱질을 했다. 톱의 양쪽 끝에 한 명씩 두 명의 처형자가 고정된 널빤지와 갇힌 희생자를 아래로 톱질했다.[62]

당 소종 황제(재위 888–904)는 그의 죄수 중 한 명에게 톱으로 자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

4. 한국의 톱질형

주어진 자료에 따르면 톱으로 사람을 처형하는 방식은 여러 문화권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다. 로마 제국에서는 칼리굴라 황제 시대에 몸의 가운데를 가로질러 톱질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하며, 이는 고대 중국의 요참과 유사하다.[2] 모로코에서는 사타구니에서 위로, 또는 머리에서 아래로 세로로 톱질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한다.[3]

열심당원 시몬의 경우처럼, 처형자를 거꾸로 매달아 사타구니에서부터 세로로 톱질하는 방식도 있었다.[4] 때로는 사형수를 하나 또는 두 개의 널빤지에 고정시킨 후 톱질을 하기도 했다.[3] 1820년대 버마에서는 특정 범죄에 대해 범인을 두 개의 널빤지 사이에 묶어 톱으로 두 동강 내는 형벌이 시행되었다는 보고도 있다.[54] 버마의 장군 마하 반둘라는 불복종 행위를 한 고위 장교를 널빤지에 묶어 톱으로 처형했다고 전해진다.[56]

5. 문화적 참조

힌두 설화에서 야마는 죽음의 신이다. 그는 생전에 악행을 저지른 자들에게 벌을 내린다. 브라만을 강탈한 죄인은 나라카 (지옥)에서 톱으로 켜지는 형벌을 받는다.[71]

鋸解之刑중국어은 불교 지옥에서 행해지는 형벌 중 하나였다. 승려들은 대중이 보고 반성하도록 그림을 제작하여 사후 세계의 고통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72]

> 광둥의 한 불교 사원에서는 일 년 중 특정 시기에 법정에 죽은 자들의 고통을 끔찍하게 묘사한 그림들이 전시된다. 어떤 이들은 톱으로 켜지고, 어떤 이들은 갈고리에 찔리고, 어떤 이들은 끓는 물 가마솥에 던져지고, 또 다른 이들은 불에 탄다. 승려들의 뛰어난 지도 아래,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 끔찍하거나 감각을 역겹게 하는 모든 광경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 앞에서 언급한 몽하의 휴게실에서는 몇 점의 엄선된 그림들이 교훈적인 효과를 내며 전시되었다. 고통의 장소가 존재한다는 추정은 판사의 분노를 달랠 힘이 있다고 여겨지는 승려의 금고에 수입을 가져다준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19세기까지 촌락과 마을에서 "세가레 라 베키아"(Segare la vecchia, "늙은 여인을 톱질하기")라는 기이한 전통이 사순절 (사순절 중간 일요일)에 행해졌다. 이 관습은 소년들이 "마을에서 가장 나이 많은 여자"를 찾아다니며 그녀를 닮은 나무 인형을 만드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다음, 나무 인형을 가운데로 톱질했다. 민속학자 야코프 그림은 이를 "낡은 해"/겨울을 상징적으로 물리치는 기묘한 봄 의례로 보았다. 그는 또한 그의 시대에 남슬라브족 사이에서도 이와 매우 유사한 관습이 존재했음을 언급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예언자 이사야는 톱질로 처형되어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성 이사야의 순교는 중세 유럽에서 많은 그림으로 그려졌다.

동예 영화 '도쿠가와 여형벌 그림 두루마리 소가죽 찢기'(1976)에서는 야간 보초병으로 고용된 거지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정신 나간 취객이 지나가다가 주인공의 목을 톱으로 썰어버리는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제목의 소가죽 찢기 형은 이와는 다른 에피소드), 이러한 역사적 경위가 상당히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다. 덧붙여, 이 작품의 주연인 카와타니 타쿠조는 훗날 대하 드라마 '황금의 나날'에서 형식화되지 않은 전국 시대의 톱질 형으로 죽는 역할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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