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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풍’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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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풍'81'은 전두환 정부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주년을 맞아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를 홍보하기 위해 기획한 대규모 문화 행사이다. 1981년 5월 여의도광장에서 5일간 진행되었으며, 민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공연, 대회, 축제, 장터 등이 열렸다. 하지만, 고유 문화의 원형 보존 부족, 과도한 비용, 정부 주도의 '관제 축제'라는 비판과 함께, 대중문화를 통한 탈정치화 시도, 3S 정책의 일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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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풍’81
행사 개요
명칭국풍 '81
로마자 표기Gukpung Paldsibil
개최 시기1981년
주최문화공보부
성격대규모 종합 문화 예술 행사
행사 목적 및 의의
목적민족 문화의 창달
새로운 문화 정책의 방향 제시
사회 정화 운동의 문화적 뒷받침
건전한 가치관의 확립
의의1980년대 문화 정책의 전환점
대규모 행사 동원 체제의 효시
관 주도 문화 행사의 대표적 사례
행사 내용
주요 행사민족 문화 예술 축전
전국 규모의 문화 예술 경연 대회
전통 문화 시연 및 체험 행사
문화 예술 관련 학술 대회
각종 전시회 및 공연
세부 프로그램개막식 및 축하 공연
민속 예술 경연 대회
국악 및 양악 공연
무용 및 연극 공연
문학 및 미술 전시회
학술 강연회 및 토론회
체육 행사 및 민속 놀이 시연
평가
긍정적 평가다양한 문화 예술 향유 기회 제공
전통 문화에 대한 관심 증대
문화 예술계의 발전 도모
부정적 평가관 주도 행사의 한계
획일적인 문화 조성 우려
사회 비판 기능 약화
기타
관련 용어문화 정책, 사회 정화 운동, 관 주도 문화

2. 배경 및 준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1979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킨 뒤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1979년 동양방송에서 주최했던 ‘제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KBS로 옮기면서 제2회 행사를 추진하려던 참에,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의 지시로 소박했던 축제가 '국풍'이라는 대규모 행사로 바뀌었다.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 등을 포섭하고자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자신의 모교였던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행사에 참가토록 했다.

'국풍81'은 '민족 단결의 대합창'을 구호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한 대규모 문화 축제였다. 전국 190여 개 대학 250여 개 동아리 대학생과 연예인 등 1만 3000여 명이 참여했고, 행사장을 찾은 사람은 1000만 명에 달했다. 여의도 일대는 '보행자 천국'으로 지정되었고, 야간 통행 금지도 일시 해제되었다. 정부가 제작하여 영화관에서 상영된 『대한뉴스』는 당시 '국풍81'이 "거대한 민중 문화의 축전, 민족 문화의 창조적 계승을 위한 충실한 토대를 만들었다"고 보도했다.

2. 1.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주년과 국풍81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킨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1]

19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동양방송에서 주최했던 ‘제1회 전국 대학생 축제 경연대회’를 KBS로 옮기면서 제2회 행사를 추진하려던 참이었다. 이때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의 지시로 소박했던 축제가 '국풍'이라는 대규모 행사로 바뀌었다.[1] 허문도는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채희완 등을 섭외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하였고, 결국 자신의 모교였던 서울대학교 졸업생들을 모아 행사에 참가토록 했다.[1]

1981년 5월 28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주년 즈음에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국풍81'이 개최되었다.[1] 이 날부터 6월 1일까지 5일 동안 전통 예술제, 가요제, 연극제, 팔도 굿, 팔도 명물 장 등 행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1]

그러나 '국풍'81'은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군부가 국민적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관제 축제'였다.[1] 허문도 정무 제1비서관은 197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정치극 운동' 등 '우리'를 찾으려는 열기를 흡수하여 대학생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

그러나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등 민중 문화 운동 그룹은 '국풍'81' 참여를 거부했고, 각 대학의 탈퇴도 참여를 거부했다.[1] 이에 허문도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의 농악대를 참여시키려 했지만, 그들마저 제안을 거절하자 졸업생과 군 복무 중이던 그들까지 데려와 '위장' 참여시켰다.[1] 결국, '국풍'81'은 정부의 의도와 달리, '청년'이 아닌 프로 연예인 중심의 축제로 변질되었다.[1] 공연 내용도 대부분 향락적인 대중 문화 공연과 박제화된 민속 놀이였다.[1]

2. 2.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홍보

1981년 5월은 5·18 민주화 운동 1주년을 맞이하는 해였고, 같은 해 9월 30일에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를 앞두고 있었다. 정부는 국풍’81을 통해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 홍보 활동을 벌였다.[1] 전두환 정부는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국민들의 시선을 올림픽 유치에 집중시키기 위해 방송사와 광고 등을 통해 대대적인 홍보를 진행했다.[1] 하계 올림픽 유치 경쟁 도시가 일본 나고야였기 때문에, 정부는 국민들의 반일 감정과 민족 자존심을 자극하여 5·18 민주화 운동을 잠재우려 하였다.[1]

3. 진행

'새 역사를 창조하는 것은 청년의 열과 의지와 힘이다'라는 구호(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여의도광장과 둔치 마당에서 5일간 밤낮없이 행사가 진행되었다. 행사가 열리는 여의도 일대는 차 없는 거리로 지정되었고, 행사 기간 동안 야간통행금지도 일시 해제되었다. 행사에는 전국 198개 대학의 6천여 명의 학생과 일반인 7천여 명이 참가하여 민속 문화를 중심으로 한 각종 공연·대회·축제·장터 등이 진행 또는 운영되었다. 행사에 동원된 인원은 16만명이었고, 5일간 행사를 보기 위해 여의도를 찾은 인원은 6백만명(본부측 추산 1000만명)에 달했다.[4] 민속문화보다는 야간에 있었던 가요제가 더욱 큰 인기를 끌었다.

1981년 5월 28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국풍’81'이 개최되었다. 이 날부터 6월 1일까지 5일 동안 전통 예술제, 가요제, 연극제, 팔도 굿, 팔도 명물 장 등 행사가 밤낮으로 이어졌다.

'국풍’81'은 '민족 단결의 대합창'을 구호로 한국신문협회가 주최하고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한 대규모 문화 축제였다. 전국 190여 개 대학 250여 개 동아리 대학생과 연예인 등 1만 3000여 명이 참여했다. 행사장을 찾은 사람은 1000만 명에 달했다. 여의도 일대는 '보행자 천국'으로 지정되었고, 야간 통행 금지도 일시 해제되었다.

4. 평가

행사 직후 언론에서는 대규모 군중 집회를 허용하고 민족 문화를 자각하게 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5][6] 그러나 고유 문화의 원형 보존 노력이 부족했고, 농번기에 행사를 개최하여 시기 선택이 부적절했으며, 막대한 비용과 질서 유지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제기되었다.[5][6] 한편, 충무김밥은 국풍81을 통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9]

4. 1. 권위주의 정권의 문화적 자원 동원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12·12 군사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여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80년 언론 통폐합 이후, 청와대 정무1비서관 허문도의 지시로 '국풍'이라는 대규모 행사가 기획되었다.[1]

'국풍81'은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군부가 국민적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관제 축제'였다. 허문도는 197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정치극 운동' 등 '우리'를 찾으려는 열기를 흡수하여 대학생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

그러나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등 민중 문화 운동 그룹은 '국풍81' 참여를 거부했고, 각 대학의 탈퇴도 참여를 거부했다. 허문도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의 농악대를 참여시키려 했지만, 그들마저 제안을 거절하자 졸업생과 군 복무 중이던 그들까지 동원해 '위장' 참여시켰다. 결국, '국풍81'은 정부의 의도와 달리, '청년'이 아닌 프로 연예인 중심의 축제로 변질되었다. 공연 내용도 대부분 향락적인 대중 문화 공연과 박제화된 민속 놀이였다.[1]

"국풍81"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문화에 의한 탈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국풍81"을 "유례없는 거대한 놀이터, 천만 명의 구경꾼을 동원한 난장판"이라고 규정했다. "제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 조작 행사였다는 것이다. "국풍81"은 제5공화국의 우민화 정책, 이른바 "3S 정책"과 맥을 같이하며, 지금도 "관제 축제"의 대명사로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1]

4. 2. '관제 축제'라는 비판

1981년 전두환 정부가 5·18 1주년을 맞아 광주에 쏠릴 국민의 관심을 잠재우고 정권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제5공화국 헌법에 규정된 '민족문화의 창달'을 앞세워 대규모 문화행사를 계획했다는 주장이 있다.[8]

'국풍81'은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군부가 국민적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된 '관제 축제'였다. 허문도 정무 제1비서관은 197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정치극 운동' 등 '우리'를 찾으려는 열기를 흡수하여 대학생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등 민중 문화 운동 그룹은 '국풍81' 참여를 거부했고, 각 대학의 탈춤반도 참여를 거부했다. 이에 허문도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농악대를 참여시키려 했지만, 그들마저 제안을 거절하자 졸업생과 군 복무 중이던 그들까지 데려와 '위장' 참여시켰다. 결국, '국풍81'은 정부의 의도와 달리, '청년'이 아닌 프로 연예인 중심의 축제로 변질되었다. 공연 내용도 대부분 향락적인 대중 문화 공연과 박제화된 민속 놀이였다.[5][6] 국회에서는 대학생들의 참여가 적었음이 지적되었고, 이듬해 열린 민속학자 심포지엄에서는 현장의 자연민속을 파괴할 수 있는 ‘모조 민속’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7]

"국풍'81"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문화에 의한 탈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국풍'81"을 "유례없는 거대한 놀이터, 천만 명의 구경꾼을 동원한 난장판"이라고 규정했다. "제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 조작 행사였다는 것이다. "국풍'81"은 제5공화국의 우민화 정책, 이른바 "3S 정책"과 맥을 같이한다. "국풍'81"은 지금도 "관제 축제"의 대명사로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

4. 3. 3S 정책과의 연관성

1980년 5월, 광주를 피로 물들인 군부가 국민적인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해 '국풍81'을 기획했다는 비판이 있다.[1] 이는 '관제 축제'였다.[1] 허문도 정무 제1비서관은 1970년대부터 대학가에서 일어났던 '정치극 운동' 등 '우리'를 찾으려는 열기를 흡수하여 대학생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

그러나 김지하, 김민기, 임진택 등 민중 문화 운동 그룹과 각 대학의 탈 동아리는 '국풍81' 참여를 거부했다.[1] 허문도는 자신의 모교인 서울대학교 농악대를 참여시키려 했지만, 그들마저 제안을 거절하자 졸업생과 군 복무 중이던 그들까지 데려와 '위장' 참여시켰다.[1] 결국, '국풍81'은 정부의 의도와 달리, '청년'이 아닌 프로 연예인 중심의 축제로 변질되었다.[1] 공연 내용도 대부분 향락적인 대중 문화 공연과 박제화된 민속 놀이였다.[1]

"국풍81"은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문화에 의한 탈정치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1] 언론학자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는 저서 『한국 현대사 산책』에서 "국풍81"을 "유례없는 거대한 놀이터, 천만 명의 구경꾼을 동원한 난장판"이라고 규정했다.[1] "제5공화국의 태평성대"를 선전하기 위한 대대적인 대중 조작 행사였다는 것이다.[1] "국풍81"은 제5공화국의 우민화 정책, 이른바 "3S 정책"과 맥을 같이한다.[1] "국풍81"은 지금도 "관제 축제"의 대명사로 끊임없이 인용되고 있다.[1]

5. 국풍81 출신 가수

6. 관련 논문


  • 채정수, 〈스펙타클과 정치권력의 상관성 연구: '국풍’81'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영상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0년 8월[1]
  • 김지연, 〈전두환 정부의 국풍81: 권위주의 정부의 문화적 자원동원 과정〉,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 2014년[2]

참조

[1] 웹사이트 國風八十一 https://terms.naver.[...] 2021-05-12
[2] 웹사이트 1981년 문화대축제 ‘국풍 81’ http://news.khan.co.[...] 2021-05-12
[3] 뉴스 傳統과 젊음의 한마당 汝矣島 大祝祭 國風81 開幕 경향신문 1981-05-28
[4] 뉴스 國風人波延千萬... 「熱氣5日」 오늘밤 閉幕 경향신문 1981-06-01
[5] 뉴스 우리 民俗 熱氣 5日 「國風81」 取材기자 放談 경향신문 1981-06-02
[6] 뉴스 「國風81」 동아일보 1981-06-02
[7] 뉴스 판치는 「模造民俗」 동아일보 1982-09-09
[8] 뉴스 어제의 오늘 1981년 문화대축제 ‘국풍 81’ http://news.khan.co.[...] 경향신문 2009-06-22
[9] 뉴스 '[맛] 통영에 이런 맛집 있었네!' http://news20.busan.[...] 부산일보 2008-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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