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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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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나회는 1951년 육군사관학교 출신 전두환, 노태우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군내 사조직으로, 12·12 군사 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에 깊이 관여했다. 육사 출신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군 요직을 독점하고 진급 특혜를 누렸으며, 1979년 10·26 사건 이후 권력 공백을 틈타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하나회는 1993년 김영삼 정부의 숙청으로 해체되었으나, 유사한 조직인 알자회가 존재했으며, 이들은 군 내부에서 알력을 행사하며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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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회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 성공 후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아래줄 왼쪽부터 네 번째는 노태우, 다섯 번째는 전두환이다.
이름하나회
한자 표기하나會
로마자 표기Hanahoe
설립일1963년
해산일1993년
지도자전두환
노태우
이념 및 성향
이념반공주의
전두환
군국주의
정치 성향극우
소속 정당
소속 정당민주공화당
민주정의당
민주자유당
기타
관련 정보http://www.globalsecurity.org/intell/world/rok/dsc.htm

2. 역사

하나회는 1958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7명이 결성한 칠성회(七星會)라는 비밀 단체에서 기원했다.[5] 칠성회는 1951년에 노태우,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 등 5명이 결성한 오성회(五星會)가 확대된 형태였다.[6]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군부 장악에 힘을 쏟았다. 특히 육군사관학교 4년제 첫 기수인 11기 졸업생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노태우를 각별히 신경 쓰며 심복으로 키웠다.[12] 전두환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1964년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했고, 이는 군부 내 친위 그룹이 되었다.[11][13]

하나회는 육사 각 기수에서 3~4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세력을 키웠는데,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수도경비사령부, 기무사령부, 특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등 요직을 돌아가며 맡았고, 승진 우선순위도 보장받았다.

1973년 윤필용 사건[14] 수사 과정에서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지만, 박정희는 하나회를 통해 군 내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기에 해체를 원하지 않았다.[11]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같은 해 12월 12일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16] 군 수뇌부는 하나회 출신들로 채워졌다.[17] 전두환박정희가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 9개월 만에 중장, 대장으로 2계급 승진하는 특혜를 누렸다.

1980년 5월 17일,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광주 민주화 운동).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8]

전두환은 대통령 후계자로 역시 하나회 회원인 노태우를 선택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인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9]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취임 후 쿠데타 예방을 위해 군부 내 사조직 해체에 착수했고, 하나회는 해체되었다.[21]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은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나회의 12·12 군사반란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역사를 다룬 매체는 다음과 같다.


  • 2005년 TV 시리즈 ''5공화국''
  • 2023년 한국 영화 ''12·12: 그날''[8]

2. 1. 초기 결성 배경

1951년, 육군사관학교 4년제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 5명(전두환, 노태우,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이 오성회를 조직했다.[23] 1961년 말, 전두환, 노태우 등 육사 11기생들이 친목 모임으로 칠성회를 결성했다. 칠성회는 이후 하나회로 재편되었으며, 오성회 구성원이었던 김복동은 칠성회에서 탈퇴했지만 하나회로 재개편된 후 재가입하여 사실상 복귀했다.[23]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생도들은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의 관심을 끌었다. 1963년, 하나회는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다.[23]

2. 2. 하나회의 성장과 특징

하나회는 육사 각 기수에서 3~4명의 회원을 모집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다.[25][26] 회원 가입 시 보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 절차를 거쳤다. 회원들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여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했다.[24]

1973년 윤필용 사건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으나, 박정희는 하나회를 통해 군 내부 동향을 파악하려 했기에 해체를 원하지 않았다.[11] 하나회 회원들은 서로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가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25][26]

하나회가 군에서 성장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하나회 성장 요인
요인내용
초기 구성 및 확장1951년 4년제 육사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 5명이 오성회를 조직, 이후 전두환 등 육사 11기들이 칠성회를 만들었고, 이것이 하나회로 발전. 김복동은 칠성회에서 탈퇴했다가 하나회로 재개편된 후 재가입.[23]
5·16 군사 정변 지지전두환 주도로 육사 생도들이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관심을 끔.
7·6 친위 쿠데타 실패1963년 육사 8기를 몰아내기 위한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 박정희는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 책임을 묻지 않음.
조직 운영 방식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운영, 가입 시 조직에 충성을 맹세. 고위층이나 재벌로부터 활동비를 지원받고, 회원들은 진급 및 보직에서 특혜를 누림.[24]
윤필용 사건전두환윤필용이 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꺾였지만, 전두환은 보안사령관에 복귀하여 세력을 확장. 박정희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회는 박정희에 충성하며 성장.[25]
학업 성적과 한국 전쟁하나회 구성원들은 육사 11기 생도 시절 학업 성적이 하위권이었고, 특히 전두환은 최하위권. 한국 전쟁 중이라 사관학교 졸업 후 전장으로 가야 했기에 갑종장교 탈락자 위주로 육사에 입학.[23]
진급 특혜하나회 회원들은 진급에 유리하게 편애를 받았고, 다른 장교들은 하나회 회원 진급 후 남는 자리로 심사. 장태완전두환의 진급 과정을 비교하면 불공정함이 드러남.


2. 3. 하나회의 진급 특혜와 군 내부 문제

하나회 회원들은 진급 과정에서 일방적인 특혜를 받았다. 비(非)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았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하나회 회원들은 권력 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24]

일례로, 비 하나회 출신인 장태완1950년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 1953년 휴전 당시 대위였던 반면, 하나회 회원인 전두환1955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했다. 심지어 전두환은 육사 생도 시절 성적 미달로 퇴교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7년 두 사람은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했다.[24]

1973년 윤필용 사건 수사 과정에서 강창성 보안사령관은 하나회의 실체를 밝혀냈다. 조사 결과, 하나회는 정규 육사 출신을 중심으로 10명 내외의 회원을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운영했으며, 회원 다수가 영남 출신이었다. 이들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를 누렸다.[24]

박정희는 5·16 군사 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후 군부 장악에 힘썼다. 특히 육사 11기 졸업생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노태우를 심복으로 키웠다.[12] 전두환은 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1964년 사조직 '하나회'를 결성했고, 이는 군부 내 친위 그룹이 되었다.[11][13] 하나회는 수도경비사령부, 기무사령부, 특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등 요직을 독차지하며 승진 우선순위를 보장받았다.

2. 4. 12·12 군사반란과 5·17 쿠데타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그해 12월 12일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켰다.[16] 12·12 군사반란 이후 군 수뇌부는 하나회 출신들로 채워졌다.[17] 이들을 '신군부'라 불렀다. 전두환은 박정희5·16 군사정변을 일으켰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 9개월 만에 중장, 대장으로 2계급 승진하는 특혜를 누렸다.

이어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학생 시위를 구실로 5·17 비상계엄 확대 조치를 시행하여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했으며, 국회를 무력화했다.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광주 민주화 운동한국어)

3. 10·26 사건과 신군부의 권력 장악

최규하 대통령은 10·26 사건 재판과 관련하여 "피고인의 진의와 진실이 공개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음에 유감"이라며 언론 발표를 했으나, 언론 검열에서 보도 기사 전체가 삭제되었다.[31] 10·26 사건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명령에 따라 행동했던 박흥주 대령은 군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단심제로 사형을 당했다.[32] 김재규에 대한 판결이 5월에 나오기 전인 3월에 종범임에도 먼저 총살당했다.[32] 강신옥 변호사는 김재규에 대한 판결이 무죄로 내려졌을 경우, 이는 되돌릴 수 없는 잘못된 형 집행이라고 비판했다.[32]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980년 3월 말 중앙정보부 재건을 위해 자신이 정보부장 겸직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을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4월 14일부터 겸직하게 되었다.[28]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전두환의 겸직 강행을 보고 그가 대권을 꿈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규하 대통령, 신현확 총리, 이희성은 이러한 겸직에 반대했다.[28]

1980년 5월 31일, 비상계엄 하에서 대통령 자문 기구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설치되었고, 전두환이 상임위원장에 임명되었다.[33]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제도적으로는 입법과 사법 부문에 관한 대통령 자문 기구였지만, 연락실을 운영하여 계엄사가 관할하는 군 업무까지 일부 통제할 정도로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33] 극비리에 5공화국 헌법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법사분과위의 특정 위원은 보안사에 마련된 별도의 비밀 사무실을 사용했다.[34]

쿠데타 성공 후, 계엄군 자체가 전두환 휘하에 있었지만, 5.16 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군사혁명위원회와 유사한 조직, 즉 군인들만으로 구성되어 행정, 입법, 사법 기능을 모두 갖춘 조직을 구성하려 했다.[35] 그러나 최규하 대통령이 신현확 국무총리와의 다툼을 이유로 재가하지 않아 이 조직은 만들어지지 못했다.[35]

광주항쟁 당시 미국은 대한민국의 시위를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으로 보았고, 주한미군 사령관은 주한미군 주변에서 소요 사태를 바라지 않았다.[36] 광주 항쟁 초기에 시위하는 학생만 진압했다면 시위가 크게 확산되지 않았을 것이지만, 현장에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11공수여단은 5월 18일 오후 2시경 뒤늦게 증파되었는데, 전 한미연합사 위컴 사령관은 최근 방송 인터뷰에서 시위 진압이 아닌 정권 찬탈이 목적이었기에 시위대가 해산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밝혔다.[36] 부마항쟁 당시 초동 단계 군 병력의 빠른 투입과 강경 대응이 부족했다고 보안사는 분석했고,[37] 진압 부대들은 12·12 군사반란 이후 이희성 계엄사령관 재임 시기에 시위 진압 위주로 군사 훈련을 받았다.[28] 군사 전문가들은 광주항쟁 지휘체계에 따르면 진압부대는 한미연합사 아래의 31사단장을 통해 계엄사령관에게 보고해야 했으나, 한미연합사가 통제하지 못하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통해 보안사령관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보고 있다.[36]

4. 신군부의 만행과 비리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지시로 반국가행위자의 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법(반국가특별법)이 제정되었다.[38] 이 법은 내란, 공무상 비밀 누설, 군형법, 반란, 이적, 국가보안법, 반공법,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자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외환 관련 위반도 다루었다.[39] 망명 중이던 전 정보기관 수장이 1982년 기소되어[40] 1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1996년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41] 1995년 반국가특별법 일부, 1996년에는 법령 전체가 위헌 판결을 받아 효력을 잃었다.[41] 이 법의 제15조는 법무부장관을 국방부장관, 검사를 군검찰관으로 간주했다.[39]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주도로 기획된 평화의 댐 건설은[42] 북한 금강산 댐의 저수 용량을 3배 이상 과장하고,[43] 댐이 무너지면 63빌딩 중턱까지 물이 차오를 것이라고 알렸다.[44] 1993년 국정감사에서 북한의 수공 위협 정보가 조작되었고, 국민 성금 모금이 시국 전환용으로 악용된 것으로 밝혀졌다.[45] 충격적인 금강산 댐 관련 언론 보도 다음 날인 10월 31일, 건국대학교에 갇혀 있던 1288명이 체포, 구속되었는데,[46] 이 사건은 신문 1면에도 실리지 못했다.[47]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고 사회정화작업을 추진했다. 그 일환으로 군경 합동작전인 ‘삼청작전’을 통해 삼청교육대를 설치했다.[48] 전두환 독재정권은 삼청교육대에서 사회로 내보내지 말아야 할 수용인원을 계속 감금하고자 '특수교도소' 설립을 추진했고, 1980년 11월 28일자 공문서에 특수교도소 후보지로 충북 1곳, 강원 4곳이 거론됐으나 실제 건립되지는 않았다. 이후 청송감호소라는 이름으로 경북 청송에 교도소가 문을 열었다.[49] 미순화자로 분류된 B급 1만 16명은 1980년 9월 8일부터 1981년 1월 16일까지 근로봉사라는 이름하에 작업에 동원되었다.[48]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의 설치가 불법이며, 교육과정에서 각종 인권유린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48]

청송감호소는 전두환 정권이 상습범의 즉각적인 사회복귀를 막아야 한다는 논리로 보호감호제를 시행함에 따라 1981년 10월 춘천교도소에 설치됐던 보호감호시설이[50] 1983년 2월 12일 청송으로 이전하면서 문을 열었다.[51] 보호감호제의 근거 법률인 사회보호법은 기본권 침해와 이중처벌 논란으로 2005년 폐지된다.[52]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1980년 1월 17일에 '사회기강 확립대책'을 발표했다.[53] 1980년 3월에는 마약왕 이황순을 검거했지만, 이황순과 밀접하게 지내던 보사부 마약과 감시계장은 현장 검증 중 도주하여 끝내 잡지 못했다.[54] 1980년대 초 일본 정부는 우리 정부에 “한국이 마약 단속에 소홀한 것이 의도적인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55]

대한민국 제6공화국 정부는 1992년 8월 21일에 대만 정부와 공식적인 국교를 단절했다.[56] 이로 인해 대만 사람들은 큰 상처를 받았다.[57]

5. 하나회의 해체와 그 이후

1993년 김영삼문민정부는 '군정 종식'을 내걸고 하나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진행하였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12·12 군사 반란에 대한 책임을 물어 전두환, 노태우 등 관련자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27]

하나회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으나, 군내 사조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31기생들이 하나회와 비(非)하나회로 분열되어 충돌을 빚기도 했다.[27] 군 내부적으로 알력이 남아있어 진급 심사에서 육사 출신이 높은 비율을 차지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문민정부의 군사 조직 금지 조치 이후 군내 유사 사조직인 알자회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으나, 내부적인 알력, 특히 현역과 예비군 간의 세력 다툼은 여전히 심각한 문제로 남아있다.

6. 알자회

문민정부의 군사 조직 금지 조치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던 군내 사조직이다. 그러나 내부적인 알력이 아직 남아있으며 특히 현역에서 예비군의 세력 다툼이 심각하다.[27] 육군사관학교 출신 대한민국 육군 장교들로 하나회와 똑같은 군내 사조직이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하나회 숙청 이후 23년 만인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청문회를 계기로 군내 사조직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과 그 이름이 알자회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2014년경 한국일보 기사에 따르면 육사 34기부터 43기까지 기수별 10여 명씩 총 120명이 가입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이름의 유래는 "'''알'''고 지내'''자'''"는 모임이란 뜻에서 알자회라고 한다. 대한민국 육군 내에서는 알짜 보직을 주고받아 '''알짜회'''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다고 한다. 해군과 공군 출신 구성원은 없다.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고 하나회 숙청할 당시 알자회도 발각되었지만, 그 규모가 워낙에 작았고 회원들의 직급도 낮았기 때문에 근신 정도의 가벼운 처분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났다. 결국 그때 뿌리를 뽑지 못한 것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이러한 제재를 거치며 알자회는 무력화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4년 알자회 출신인 조현천 중장이 기무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알자회 회원들이 진급과 보직 보임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이 일었다. 2016년 국정조사 청문회에서는 조현천 기무사령관이 비선 라인을 통해 천거되었으며, 청와대가 군 인사에 개입하는 창구로 사용되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대한민국 국방부의 '''공식적 입장'''은, '알자회는 이미 해체되었으며, 비선에 대한 인사 개입은 존재하지도 않고, 일부 인원이 잔존하였으나 현재로선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군내 사조직을 결성하는 것은 심각한 위헌 행위이며, 하나회가 어떤 만행을 저질렀고, 어떤 과정을 통해 혁파되었는지를 본다면 알자회 역시 그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회보다 더 심각해질 뻔한 게 39기 수석인 장경석이 42기(장진섭), 43기(심상선) 수석을 포섭했다.

결국, 군 차원에서 잔존 알자회 회원을 전원 숙청하기로 결정하여, 알자회 관련 장교들의 진급을 영구 누락시키고 해당 계급에서 전역 조치 또는 진급이 어려운 한직으로 배치했다.

7. 주요 인물

하나회의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12·12 군사반란 이후 군 수뇌부는 하나회 출신으로 채워졌다.[17] 전두환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으나,[28] 이희성전두환의 의도대로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28] 검찰은 이희성을 '바지 계엄사령관'이라고 평가했다.[28]

12․12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 측 병력이 서울에 주둔해 육군본부, 국방부 등을 장악했고, 서울 주변 부대도 장악하고 있었다.[28] 이희성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정희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밖에 없었다.[28]

유학성 장군은 합동수사본부와 관련이 없었음에도 군 인사 문제에 관여하며, 이희성에게 보안사에서 인사를 위한 모임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28]

7. 1. 하나회

1951년, 4년제 육군사관학교 첫 입학생 중 영남 출신 생도인 전두환, 최성택, 박병하, 노태우, 김복동 등 5명이 오성회를 조직한 것이 시초이다.

1961년전두환, 최성택, 백운택, 정호용, 손영길, 노태우, 권익현 등 육사 11기들이 친목 모임으로 칠성회를 만들었다. 이게 나중에 하나회로 바뀌었는데, 오성회 구성원이었던 김복동은 칠성회 당시 탈퇴했지만 칠성회가 하나회로 재개편되고 난 이후 하나회에 재가입하여 사실상으로 하나회에 복귀했다.[23]

전두환 주도로 육군사관학도들은 5·16 군사 정변 지지 시위를 벌였고, 이는 박정희 소장의 관심을 끌었다. 이후 5성회는 회원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여 확대 개편 과정을 여러 번 거쳤다. 이들은 1963년 7월 6일을 기점으로 육군사관학교 8기를 몰아내기 위해 '7·6 친위 쿠데타'를 기획했으나 실패했다. 동향 출신 세력을 키우고자 한 박정희는 이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하나회에 가입하기 위해 가입 대상자는 보스에게 절대 복종을 강요하는 서약 절차를 거쳤다.

  • 하나회의 선후배와 동료들에 의해 합의된 명령을 복종한다.
  • 하나회원 상호 간에 경쟁하지 않는다.
  • 이상의 서약을 위반할 시 '인격 말살'을 감수한다.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보안사령부 내사과 등의 진급 담당 요직을 점거하여 승진이나 자리 이동 때 선배가 후배를 추천하고 밀어주는 식으로 군내 주요 요직을 독점하였다. 1973년 윤필용 사건에서 수사 도중 하나회의 실체가 드러났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이 조사한 하나회는 (1) 정규 육사 출신을 기본 정원제로 가입, 10명 내외로 (2) 회원 다수는 영남 출신이 점한다. (3) 비밀 점조직 방식으로 조직하되 가입 시 조직에 신명을 바쳐 충성할 것을 맹세케 한다. (4) 고위층으로부터 활동비를 지급받거나 재벌로부터 자금을 징수 (5) 회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은 진급 및 보직상의 특혜라고 밝혀졌다.[24]

팀의 초기 리더는 윤필용전두환이었다. 윤필용1973년 윤필용 사건으로 한풀 꺾이지만, 조직의 다른 우두머리인 전두환은 기적적으로 보안사령관에 복귀, 전두환에 대한 박정희의 각별한 신뢰를 바탕으로 그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였다. 하나회는 박정희에 충성을 맹세하며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엄청난 세력이 되었고, 서로에 대해 "형님"이라는 암호명으로 서로가 하나회 멤버임을 과시했다.[25][26]

하나회에 가담한 구성원들이 대부분 육군사관학교 11기 생도 시절 학업 성적이 하위권이었고 특히 리더 전두환은 이 중에서 최하위였다. 성적과 실적은 비례하지 않지만 전두환은 성적이 매우 나빠서 퇴교 위기에 몰린 끝에 겨우 졸업할 정도였다. 당시 공부를 못하는 인원이 입학한 이유는 이들이 1955년 임관자인지라 입교를 1951년에 했는데 이 당시 상황이 한국전쟁 중이긴 했으나 전면전에서 점점 국지전화되어가는 시점이었으며 이 때문에 일반 대학교를 졸업하면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는 반면 사관학교를 졸업하면 졸업과 동시에 전쟁터로 끌려가야 했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갑종장교가 육군사관학교보다 더욱 엘리트 대우를 받는 장교였기 때문에 갑종장교 탈락자 위주로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실제로도 전두환과 동기인 육사 11기는 입학은 200명이 했지만 44명이 퇴교해서 실제로는 156명만 소위로 임관할 정도로 생도들의 임관의지가 부족했다. 단, 하나회에서는 김복동만 유일하게 학업 성적이 좋았다.

다음은 육사 11기로 임관한 156명 중 하나회에 소속된 소위들의 임관 성적이다.

참고로 육사 11기 학업성적 1등은 김성진으로 김성진은 야전 지휘관이 아닌 육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진로를 결정했다. 노태우의 경우 원래는 입교한 200명의 인원 중에서 10등 안에 들었을 정도로, 입학 초기에는 공부를 잘했으나 전두환 같은 친구들을 사귀는 과정에서 공부를 점점 멀리하는 바람에 성적이 크게 하락했다.

하나회 회원들만 일방적으로 진급에 유리하게 편애했으며 다른 장교들의 진급은 일단 하나회 먼저 진급 시키고 남는 자리로 진급 심사를 했다. 이 때문에 두 장교인 장태완(비 하나회)과 전두환(하나회)을 비교해보면 그들의 진급 과정이 매우 황당하다.

  • 장태완: '''1950년'''에 갑종장교로 임관하여 6.25 전쟁에 참전했으며 '''1953년''' 휴전협정 당시 '''대위'''였다.
  • 전두환: '''1955년'''에 육군사관학교로 임관했다. 1951년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성적 열등자로 퇴교 위기에 여러 번 몰리기도 했다.


원칙대로 하자면 장태완이 사단장으로 재직한 사단에 전두환장태완의 부하 연대장으로 재직해야 맞지만 이 두 사람은 '''1977년에 동시에 소장으로 진급'''했다.

1979년에는 10·26 사건 이후 육사 11기, 12기생 회원들을 중심으로 권력공백기를 이용하여 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군내 각 요직에 배치된 하나회 회원들이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의 뜻에 따라 12·12 군사 반란을 주도했다. 12·12 군사 반란 이후 하나회 인사들은 군의 핵심 요직에 올랐다. 또한 전두환12·12을 묵인한 이희성을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에, 황영시를 육군참모차장에 직접 임명하였다. 12·12에 참여한 하나회 회원과 12·12을 비호한 일부 장성들의 세력은 "새로운 군부 세력"이란 뜻으로 '신군부'로 불리게 되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군부 세력들은 5월 초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하여, 방해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5·17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고, 국회에 군병력을 주둔하여 임시국회를 무산시키는 등 반대 세력을 제압하였다. 그 당시에도 국회는 도움을 별로 주지 못하였다. 또한 이들은 5·17 쿠데타에 항거하여 일어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였다. 이후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자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의장, 보안사령관,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과 같은 군내 요직뿐만 아니라 전역 후에도 장관,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12․12 사건으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요청에 따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육군참모총장에 취임하여 계엄사령관의 권한이 있었으나 비상계엄이 해제된 1981년 1월 24일까지 전두환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의사대로 참모총장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주요업무는 전두환의 의도가 많이 참작되었다.[28] 내란 관련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검찰진술 조서에서 검찰은 속칭 '바지 계엄사령관'이었냐고 당시 계엄사령관을 평가했다.[28]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박 대통령 시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고, 정승화가 김재규의 범행과 관련이 있어 연행했다는 합동수사본부 측 주장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28] 12․12 사건 당시에 합동수사본부 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서울에 주둔해 육본, 국방부 등을 장악했고, 서울주변의 부대도 합동수사본부 측이 장악하고 있었다.[28] 그렇게 합동수사본부 측에서 전권을 장악하다시피 했기에, 보안사 수사관이 정승화 전 총장을 구속 수사하겠다며 영장을 청구하였을 때 계엄사령관은 어쩔 수 없이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밖에 없었다.[28]

합동수사본부와 군 인사 두 분야에 모두 관련이 없는 국방부 군수차관보 유학성 장군이 합동수사본부 측에 합세하여 군 인사 문제에 의견을 제시하고 관철을 시켰다.[28] 유학성 장군은 합동수사본부 측의 의견을 계엄사령관에게 말하면서 만장일치로 결정되었다는 말을 하여서, 보안사에서 인사를 위한 모임을 만들어 의논하고 있다는 느낌을 계엄사령관에게 주기도 하였다.[28]

『한국 문화의 백과사전』의 한 논문은 이 단체의 기원을 1958년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등 7명이 결성한 칠성회라는 비밀 단체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밝히고 있다.[5] 이 단체는 1951년에 결성된 5명의 회원(노태우, 전두환, 김복동, 최성택, 박병하)으로 구성된 오성회(오성회(五星會))의 확장된 형태였으며, 칠성회에는 정호용권익현이 추가로 포함되었다.[6]

처음에는 1955년 육군사관학교 11기 졸업생들에 의해 결성된 하나회는 이후 육사 각 기수에서 3~4명의 회원을 모집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는데,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었다. 하나회는 1979년 12·12 군사반란과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통해 최규하 정권을 무너뜨리고 4·19 혁명 이후의 제4공화국을 종식시킨 쿠데타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하나회는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 진압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나회는 권력 장악 이후 1980년대 내내 한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후 해체되었다.[7]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하나회 회원들은 두 차례의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관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군부 장악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전직 장성들에게는 넉넉한 생활비를 지원하여 불만을 무마했고, 예비역 장성들은 대사, 국영기업 사장 등으로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또한, 예편한 장교들을 행정부와 국영기업 등에 배치했다. 젊은 장교들 중에서는 특히 육군사관학교가 처음으로 4년제가 된 11기 졸업생들 중 영남 출신인 전두환노태우 등에게 각별히 신경을 쓰며 심복으로 키웠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박정희의 후원을 받던 전두환은 육사 동문회인 북극성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1964년 사조직을 결성했다.[11] 이것이 바로 ‘하나회’이며, 하나회는 박정희 정권의 군부 내부 친위 그룹이 되었다.[13] 북극성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려던 다른 조직으로는 ‘청죽회’가 있었는데, 청죽회 회원들은 주로 육사 수석 졸업생들과 육사 교수, 국방부 근무자들이 많았고, 현장 장교들을 기피했으며, 서울이나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자손들이 많았다. 반면 하나회는 회원 대부분이 현장 장교였고 운동을 좋아했으며, 육사 성적은 중위권이었고 경상도 출신자가 중심이라는 차이가 있었다.[11] 하나회와 청죽회의 세력 다툼은 결국 수적으로 우세했던 데다가, 리더인 전두환박정희의 후원을 받았기에 하나회가 승리했다.[11]

하나회 회원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수도경비사령부, 기무사령부, 특전사령부, 대통령 경호실, 서부전선 각 사단 등 요직을 서로 돌아가며 맡았고, 승진 우선순위도 보장받았다. 그러나 1973년 윤필용 사건[14] 수사 과정에서 육군 보안사령관 강창성은 윤필용 장군이 관리하던 하나회를 적발하고 전두환이 하나회의 실질적 리더임을 밝혔다.[11] 하나회는 군 내부에 견고한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일반 회원들은 자신과 연락하는 몇몇 사람만 알도록 하고, 전체를 파악하는 사람은 일부 지도자들만으로 제한하는 방식으로 조직을 유지했으며,[15] 육사 졸업 기수별로 일정 수의 회원을 받아들이고, 그 중심은 경상도 출신자로 구성했는데, 이들을 관리하는 대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윤필용 장군이었다.[11]

박정희는 이때 처음으로 하나회의 존재를 알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회를 통해 군 내부 동향을 파악하여 쿠데타를 예방하려 했기에 하나회 해체를 원하지 않았다. 이를 몰랐던 강창성은 하나회 수사를 진행하여 전두환을 제거하려 했지만, 오히려 보안사령관직에서 해임되어 좌천되었다.[11] 결국 윤필용 사건은 단순한 군 내부 부정 사건으로 종결되었고, 판결문 어디에도 하나회의 이름은 없었다.[11] 윤필용 장군과 가까웠던 하나회 회원들은 예편되었고, 하나회 내 전두환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같은 해 12월 6일 최규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같은 해 12월 12일 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는 12·12 사태를 일으켰다.[16] 12·12 사태 후 군 수뇌부는 하나회 출신들로 채워졌다.[17] 전두환박정희가 1961년 쿠데타를 일으켰던 시나리오를 그대로 따라 9개월 만에 중장, 대장으로 2계급 승진이라는 특혜를 누렸다. 이어 1980년 5월 17일, 학생 시위를 구실로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이에 저항하는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전두환은 1980년 8월 27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8] 전두환은 대통령 후계자로 역시 하나회 회원인 노태우를 선택했고, 노태우는 1987년 12월 16일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이듬해인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9] 하나회는 계속 존속했지만,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를 제거하려는 노태우와의 세력 다툼이 발생하면서 하나회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결국 노태우는 영남 군벌의 종식을 가져온 인물로 평가된다.[20] 1993년 2월 대통령에 취임한 김영삼은 쿠데타를 예방하기 위해 먼저 군벌 해체에 착수했고, 하나회는 해체되었으며, 회원들은 승진에서 제외되고 사라졌다고 한다.[21] 당시 일부 군 장교들은 언론에 무신정권의 사례까지 거론하며 숙청 작업에 반발했지만,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개가 짖어도 기차는 간다”라는 독설을 퍼부으며, 쿠데타로 실추된 군의 명예를 회복한다는 명목으로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8. 평가 및 비판

하나회는 현대사의 귀족 군인-정치인 집단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다는 평가를 받는다.[62] 하나회는 공조직을 병들게 하고 무력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61]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은 하나회 회원들을 2년마다 특별 진급시키는 바람에 군 5년 후배인 전두환이 자신의 준장 진급 2년 만에 준장 진급을 했고, 자신이 26사단장으로 나갔을 때 전두환은 이미 자신과 동격인 1사단장을 완료하고 상급인 보안사령관이 되어 있어 사조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았다고 밝혔다.[62] 이처럼 하나회의 진급 특혜는 군 내부의 불균형과 불만을 야기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회를 비호한 것이 12·12 군사반란의 근본 원인이라는 비판도 있다.[62] 12·12 군사반란 당시 수도경비사령부에서 반란군 측에 사격을 가한 것은 방공포대 1건뿐이었는데, 이는 수도경비사령부 장교들의 보직을 하나회 사조직 멤버로 구성했음을 보여준다.[63]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공격하는 하극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김오랑 소령이 전사하고 정병주 특전사령관 본인 역시 총상을 입었는데, 이는 자신의 최종 지휘관에게 하극상을 자행한 특전사 장교들이 하나회 사조직 멤버였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나회는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5·17 쿠데타를 일으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연행하고, 국회에 군 병력을 주둔시켜 임시국회를 무산시키는 등 반대 세력을 제압하였다. 또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진압하였다.

하나회는 진급에만 특화된 장교들로 구성되어 자질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박희도의 경우 특전사 여단장 시절 지휘 무능으로 무장공비가 담당 위수지역을 농락하고 북한으로 복귀했음에도 육군참모총장까지 올라갔다.

전두환 소장이 하나회 회장이었던 탓에 당시 대한민국 육군 자체가 전두환에 의해 쥐락펴락하다시피 했으며, 차규헌, 황영시, 유학성 등 중장들이 소장인 전두환의 부하 노릇을 해 군 위계질서에 균열을 일으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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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中公新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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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中公新書 2002
[13]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中公新書 2002
[14] 기타 首都防衛司令官の尹必鏞少将の発言をきっかけとした軍内部の粛清事件
[15] 기타 閔丙敦のハナフェに関する発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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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中公新書 2002
[21] 서적 韓国大統領列伝 中公新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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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뉴스 12·12 당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장군 육필 수기(진압 실패 10시간) http://www.sisajourn[...] 시사저널 2006-05-16
[64] 뉴스 내가 책임진다, 남북접촉(지난 10일 새벽 남북 판문점 실무접촉) 끝내라"… 재량권 가진 안보사령탑 https://www.chosun.c[...] 조선일보 2013-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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