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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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지하는 1941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한 시인,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유신 시대를 대표하는 참여 시인이었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에 참여하여 6.3 시위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970년에는 시 "오적" 발표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투옥되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적인 구명 운동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석방되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생명 사상을 제창하며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으며, 1990년대 이후 정치적 행보로 인해 변절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2022년 미발표 시 8편이 공개되었으며, 로터스 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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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 [인물]에 관한 문서 | |
---|---|
한자 이름 | 金芝河 |
로마자 표기 | Gim Jiha |
다른 로마자 표기 | Kim Chiha |
기본 정보 | |
출생일 | 1941년 2월 4일 |
출생지 |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목포부 대안동 |
사망일 | 2022년 5월 8일 |
사망지 |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시 |
국적 | 대한민국 |
본명 | 김영일 (金英一) |
본관 | 김해 |
필명 | 지하(地下) |
직업 | 시인, 작가 |
종교 | 천주교 (세례명: 프란치스코) |
배우자 | 김영주 |
자녀 | 김원보 (장남), 김세희 (차남) |
경력 | 동국대학교 석좌교수 원광대학교 석좌교수 |
활동 기간 | 1969년~2022년 |
친척 | 박경리 (장모), 정일성 (외숙부) |
학력 | |
학력 | 서울대학교 미학 학사 |
작품 활동 | |
장르 | 시 |
주목할 만한 작품 | 『오적』 |
수상 | |
수상 | 로터스상 크라이스키 인권상 |
외부 링크 | |
웹사이트 | 한국문학번역원 작가 소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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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김지하는 1941년 2월 4일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일제강점기였다. 대학생 시절이던 1960년 4·19 혁명 시위에 참여하여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기여했다.[3] 1963년 '김지하'라는 필명으로 시 「저녁 이야기」를 발표했고, 1964년 한일 국교 정상화 조약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기도 했다.[4] 1966년 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1969년 공식 등단했다.[2]
김지하는 박정희 정권의 반체제 인사였다. '지하(Jiha)'라는 필명은 한국어로 '지하'를 의미했다.[5] 1970년 5월, 「오적(五賊)」을 발표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계기가 되었다.[6] 이 시는 을사늑약의 오적에 빗대어 권력층을 비판했는데, 특히 친일파 장군으로 묘사된 인물은 박정희를 연상시켜 즉시 금지되었고 김지하는 체포되었다.[7]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국내외 여론의 압력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이후 인민혁명당 사건 관련 정부의 고문 강요를 비난하며 다시 투옥되었다.[8]
2. 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김지하는 1941년 3월 전라남도 목포시에서 아버지 김맹모(金孟模)와 어머니 정금성(鄭琴星)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 김씨(金海金氏) 경파(京派) 24세손이며,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입금리에 대대로 살아온 집안이다.[42] 김지하의 아버지는 일본 오사카에서 전기 기술을 공부하고 귀국하여 목포에서 전기 기술자로 활동하며 공산주의를 접했다고 한다.김지하는 목포산정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중학교 2학년에 다니던 1954년 아버지를 따라 원주시로 이주했다.[42] 원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로 유학, 중동고등학교로 진학했다. 그 뒤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진학하여 1966년 졸업했다.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4·19 혁명과 5·16 군사 정변을 겪었고, 6·3 사태 등을 접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60년 4월, 김지하는 4·19 혁명 시위에 참여하여 이승만 정권의 붕괴에 기여했다.[3] 1964년에는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여 체포되기도 했다.[4]
1961년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이 등장하자 김지하는 반정부 활동을 강화했다. 1964년 5월 20일, 한일회담 반대 투쟁의 일환으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이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열었을 때, 김지하가 쓴 조사를 동 대학 정치학과의 송철원이 낭독했다.[13] 같은 해 6월 3일, 6.3 항쟁 당시 김지하는 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나, 9월에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18]

2. 2. 문단 데뷔와 오적 필화 사건
1969년 시 황톳길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데뷔하였다. 필명은 '지하'(地下)였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 시대 반체제 인사였던 그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 필명이 굳어져 이름처럼 사용되면서 이름을 지하(芝河)라 하였다.[5]1970년 5월, 김지하는 사상계에 오적(五賊)을 발표하였다.[6] 이 시는 을사늑약을 체결한 오적에 빗대어, 현대 사회의 재벌, 국회의원, 고급 관료, 장군, 장·차관을 새로운 '오적'으로 묘사하며 국가를 약탈하는 세력으로 비판하였다.[7] 특히, '오적' 중 한 명은 친일파 장군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으로 복무한 박정희를 연상시켰다.[7]
오적은 신민당의 기관지인 민주전선에 재인쇄되면서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14] 이로 인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 부석렬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신민당은 강제 수사를 받는 오적 필화 사건이 발생하였다.[14] 김지하는 폐결핵 재발로 체포 후 한 달 만에 석방되었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100일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다.
오적은 일본의 주간 아사히에 전문 번역되어 소개되면서, 김지하의 이름은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 3. 민청학련 사건과 투옥 생활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다가 4월 25일 전라남도 흑산도에서 체포되었다.[17][18][19] 비상군법회의는 김지하에게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선동죄 등의 혐의를 적용하여 사형을 구형했고,[19] 7월 13일, 1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했다.[21]김지하의 사형 선고는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본에서는 7월 10일, "김지하씨를 구하는 모임"이 발족되어 전 세계에 구명 운동을 호소했고,[20] 장 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놈 촘스키, 오에 겐자부로 등 세계적인 지식인들이 석방을 요구했다.[20] 일본 지식인들은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으며,[21][22][23] 8월 8일에는 "김지하씨를 구하는 국제위원회 대표단"이 한국을 방문하여 구명 운동을 펼쳤다.[23]
국제적인 압력에 국방부 장관 서종철(徐鍾喆)은 7월 21일 김지하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25] 1975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사형 집행 정지 조치로 석방되었으나, 인민혁명당 사건 진상을 폭로했다가 같은 해 3월 13일 반공법 위반 혐의로 다시 체포되어 구속되었다.[29] 이후 재판에서 무기징역에 징역 7년형을 추가로 선고받았다.
1980년 12월 11일, 김지하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30] 총 7년에 이르는 옥중 생활은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굴하지 않은 저항으로 평가받는다.
2. 4. 1980년대 이후 활동과 생명 운동
1980년대 이후 김지하는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받아들여 생명 운동을 펼치는 데 힘썼다. 그러나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분신자살한 이들의 죽음을 강하게 비판했다.[45] 그는 자신의 비판이 생명 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을 돕는 결과를 낳아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원성을 샀다.1990년대 이후 박두진, 고은의 시, 황석영, 최인훈, 이청준, 박경리 등의 작품과 함께 그의 작품도 유럽과 미국에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2001년 5월 4일,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독재자 박정희의 기념관 건립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기로 하면서, 김지하는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다. 그는 서울 시청 앞에서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 등과 함께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했다.[45]
2007년 대선 전에는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도록 권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손학규는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46]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47] 김지하는 연정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5. 변절 논란과 정치적 행보
1991년 명지대학교 학생 강경대가 시위 도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김지하는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칼럼을 기고하여 큰 논란을 일으켰다.[52] 그는 이 글에서 학생들의 분신과 투신을 비판하며 "더 이상의 죽음이 나와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지만,[52]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권을 돕는 결과를 낳아 재야 진보 세력으로부터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다.[51]2000년대 이후 김지하는 정치적인 발언과 행보로도 논란의 중심에 섰다. 2007년 대선 전에는 손학규에게 한나라당 탈당을 권유했고,[46] 2008년에는 이명박을 지지한 황석영을 옹호하며 진중권과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53] 그는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라며 황석영의 정치적 행보를 옹호했다.[53]
2009년에는 부산일보 칼럼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객들을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칼 마르크스) 신봉자"라고 표현하여 논란이 되었다.[55] 네티즌들은 "조문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살까지도 애도하게 하는 이유는 왜 빼먹었는지"라며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55]
2012년 대선에서는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47] 다른 대선 후보들을 비난하고 백낙청, 리영희 등을 매도하여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나팔수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다.[51] 2013년에는 CBS 라디오에 출연하여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국민들을 "공산화를 좇는 세력"이라고 발언하고,[56] 문재인, 안철수, 이정희 등에게 막말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58] 한 칼럼니스트는 김지하의 이러한 언행을 "좌충우돌"이라고 표현하며, 그의 욕설은 더 이상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고 비판했다.[60]
2. 6. 사망
제공된 소스에는 김지하의 사망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으므로, 사망과 관련된 내용은 작성할 수 없다.3. 작품 세계
김지하는 1970년대 유신시대를 대표하는 참여시인이었으며, 1980년대 이후에는 그리스도교, 불교의 미륵 사상과 화엄 사상, 유교, 선불교·기(氣) 철학 등 여러 가지 사상들을 융합하여 생명사상을 제창했다.[48] 그는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동학, 천주교, 증산교, 화엄사상, 선불교, 미륵신앙 등 다양한 종교 사상과 철학을 아울렀다.[2]
그의 시는 대부분 풍자적인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초기에는 서정시와 판소리 리듬 등을 통해 사회를 비판하고 권력층의 부패를 풍자했으며,[2] 1980년대에는 노동 운동 투쟁에서 거리를 두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2] 대표작으로는 《오적》, 《새》, 《황톳길》, 《타는 목마름으로》[48] 등이 있으며, 2022년에는 미발표 시 8편이 공개되기도 했다.[49]
3. 1. 초기 저항시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규정한 김지하는 서울대학교 후배 김덕룡, 고려대학교의 이명박, 이재오 등과 함께 6.3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한일회담 반대 학생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4개월간 수감되었다.[45]1970년, 장준하가 발행하는 잡지 《사상계》 5월호에 박정희 정권을 풍자한 장편시 〈오적(五賊)〉을 발표했다. 이 시에서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관료, 장군, 장·차관을 지칭한다.[14] 〈오적〉은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 60호(1970년 6월 1일)에 다시 실렸고, 이로 인해 김지하와 《사상계》 발행인 부석렬은 체포되고 신민당은 강제 수사를 당했다(오적필화사건).[14] 김지하는 폐결핵 재발로 체포 한 달 만에 석방되었다. 〈오적〉은 일본 《주간 아사히》 1970년 6월 26일호에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김지하는 당국의 감시와 도피 생활 속에서도 지하 활동을 통해 군사정권 아래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0년 12월, 첫 시집 《황토》를 출간했다.
1971년 12월 25일, 《황토》, 《오적》, 평론, 희곡을 모은 일본어 번역서 《긴 어둠 저편에》가 중앙공론사에서 출판되었다. 번역은 일본 공산당 《적기》 기자 하기와라 료가 맡았다. 이 책으로 김지하의 이름은 일본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김지하의 시는 대부분 풍자적인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황토》와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그는 서정시를 통해 사회를 비판했다. 〈오적〉, "근거 없는 소문" 같은 발라드에서는 판소리 리듬과 난해한 한자를 사용해 권력층의 부패를 풍자했다.[2]
3. 2. 후기 생명 사상
1980년대 이후, 김지하는 그리스도교, 불교의 미륵 사상과 화엄 사상, 유교, 선불교·기(氣) 철학 등 여러 가지 사상들을 교리에 얽매이지 않고 재해석하고 융합하여 생명사상을 제창했다.[48] 이러한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풍자력을 갖춘 담시와 서정시를 썼다.김지하는 당시 시대의 주요 주제였던 노동 운동 투쟁에서 거리를 두면서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개발했다.[2] 그의 작품들은 동학, 천주교, 증산교, 화엄사상, 선불교, 미륵신앙 등 다양한 종교 사상과 철학을 아우른다.[2]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 한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층인 나병환자가 감옥에 갇힌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나병환자에게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예수의 금관이 제거되고 그의 입술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9]
3. 3. 기타 작품 활동
김지하는 시 외에도 소설, 희곡,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그의 작품들은 동학, 천주교, 증산교, 화엄사상, 선불교, 미륵신앙 등 다양한 종교 사상과 철학을 아우른다.[2]그의 희곡 『금관의 예수』[9]에서 한국에서 가장 천대받는 계층인 나병환자가 감옥에 갇힌 예수를 만난다. 예수는 나병환자에게 자신을 해방시키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예수의 금관이 제거되고 그의 입술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제목 | 번역자 | 출판사 | 출판 연도 |
---|---|---|---|
긴 어둠 저편에 | 시부야 센타로(渋谷仙太郎) (하기와라 료) |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 1971 |
오족 황토 비어 | 강순(姜舜) | 아오키 서점(青木書店) | 1972 |
김지하 시집 | 강순(姜舜) | 아오키 서점(青木書店) | 1974 |
민중의 소리 | 김지하 작품 간행 위원회 | 사이말 출판회(サイマル出版会) | 1974 |
불귀 | 이회성(李恢成) |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 1975 |
양심 선언 | 이데 구주(井出愚樹) (하기와라 료) | 오오츠키 서점(大月書店) | 1975 |
나의 영혼을 해방하라 | 이데 구주(井出愚樹) | 오오츠키 서점(大月書店) | 1975 |
심야 | 정경모(鄭敬謨) | 토요 미술사(土曜美術社) | 1976 |
김지하 작품집 | 이데 구주(井出愚樹) | 아오키 서점(青木書店) | 1976 |
옥중에서 | 이데 구주(井出愚樹) | 오오츠키 서점(大月書店) | 1977 |
고행 옥중에서의 나의 투쟁 | 김지하 간행 위원회 | 중앙공론사(中央公論社) | 1978 |
밥·살리는 사람 | 타카사키 소지(高崎宗司)·나카노 노리코(中野宣子) | 오차노미즈 서점(御茶の水書房) | 1989 |
김지하 생(生)을 말하다 | 고 마사코(高正子) | 협동도서서비스 | 1995 |
상흔에 핀 꽃 | 김병진(金丙鎮) | 마이니치 신문사(毎日新聞社) | 2004 |
4. 사상
김지하는 민주주의, 생명 사상, 종교,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자신의 사상을 펼쳤다.
1970년 장준하가 주재하는 종합잡지 「사상계」 5월호에 박정희 정권을 풍자한 장편시 『오적』을 발표하여 오적필화사건으로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 작품에서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관료, 장군, 장·차관을 가리킨다.[14] 『오적』은 일본 「주간 아사히」 1970년 6월 26일호에 전문 번역되어 소개되기도 했다.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1971년에는 일본어 번역서 『긴 어둠 저편에』가 출판되어 일본에서도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번역은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 기자였던 하기와라 료가 맡았다.
4. 1. 민주주의 사상
김지하는 4·19 혁명, 5·16 군사 정변, 6·3 사태 등을 겪으며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였다.[42] 서울대학교 재학 중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규정하고, 김덕룡, 이명박, 이재오 등과 함께 6.3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4개월간 투옥되기도 하였다.[13]1964년 5월 20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서 열린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에서 김지하가 쓴 조사가 낭독되었다.[13] 6월 3일에는 1만 5천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 시위에 참여하였고, 정부는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6·3 항쟁). 김지하는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18]
1970년에는 장준하가 주재하는 잡지 '사상계'에 박정희 정권을 풍자한 시 '오적'을 발표하여 오적필화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폐결핵으로 석방되었다.[14] 이후에도 지하에서 군사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5년에는 인민혁명당 사건 조작을 비판한 수기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가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재체포되기도 하였다.[29] 1980년 석방될 때까지 7년간의 옥중 생활은 군사정권의 언론탄압에 굴하지 않은 저항으로 평가받는다.[30]
김지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중도 진보”라고 밝히며, 201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근혜 후보 지지를 표명하였다.[36]
4. 2. 생명 사상
1980년대 이후, 김지하는 각 종교의 생명 존중 사상을 받아들이고 생명 운동을 펼치는 데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분신자살을 강하게 비판했다.[45] 그는 자신의 비판이 생명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는 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원성을 샀다.4. 3. 종교관
그는 가톨릭 신자로서 한국인들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더 큰 고통과 비교하였다.4. 4. 정치관
1980년대 이후 김지하는 종교계의 생명 존중 사상을 받아들여 생명 운동에 힘썼다. 1991년 분신 정국 당시, 김지하는 1991년 5월 5일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 치워라'라는 글을 기고하여 분신자살한 이들의 죽음을 비판했다.[52] 그는 자신의 비판이 생명 존중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결과적으로 노태우 정부를 돕는 꼴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원성을 샀다.[52]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가 시위 도중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로 학생들의 죽음을 비난하여 재야 진보 세력과 대립하며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51]
2001년 5월 4일, 김지하는 민족문학작가회의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반대 릴레이 시위에 동참하여, 1964년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이후 처음으로 시위에 나섰다. 그는 서울 시청 앞에서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현기영 등과 함께 '박정희 기념관 반대 1인 시위'를 진행했다.[45]
2007년 대선 전에는 손학규가 한나라당을 탈당하도록 권유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손학규는 이후 한나라당을 탈당해 민주당에 입당했다.[46]
2008년 이명박 지지로 인해 네티즌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던 작가 황석영에 대해, 2009년 5월 18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라며 "시비 걸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53] 그는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하며[54] 진중권이 황석영을 금붕어에 비유한 것에 대해 "작가라는 것이 아침마다 변한다. 기억력이 강한 작가일수록 엉터리다"라며 황석영의 행보에 작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53] 진중권은 이에 대해 "기억력이 나쁜 작가일수록 좋은 작가라는 미학 이론은 들을수록 해괴하다. 그렇다면 최고의 작가는 금붕어겠다."라고 비판했다.[53]
2009년 5월 부산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추모하는 추모객들을 향해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칼 마르크스) 신봉자"들이라고 표현하여 논란이 되었다.[55] 네티즌들은 "조문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살까지도 애도하게 하는 이유는 왜 빼먹었는지"라며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55]
2012년 대선에서는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 지지를 선언하였다.[47] 김지하는 연정원과 인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현대 한국의 도교로 유명한 종파는 국선도, 단학선원, 연정원이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은 국선도와 인연이 있다고 한다.
2013년 1월 8일 CBS 라디오에 출연하여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국민 48%는 공산화 좇는 세력 맞지 않나"라는 발언[56] 등으로 논란이 되었다.[57]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게 막말을 하고, 이정희 후보에게 욕설을 하는 등[58] 그의 발언은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59] 한 칼럼니스트는 김지하의 욕설이 더 이상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고 평했다.[60] 또한 민청학련 사건 무죄 판결에 대해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한 평론가는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비약일 수 있지만,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생활은 보수주의가 지배하며 김지하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라고 평가했다.[61]
5. 평가
김지하는 문학적 성취와 사회 참여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정치적 행보와 발언으로 인해 비판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특히 1991년 강경대 열사 사망 사건 이후 학생들의 죽음을 비난하고, 촛불 시위 반대,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객 비난, 박근혜 후보 지지 등으로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황석영 작가를 옹호하며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라는 논리를 펼쳐 진중권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53]
5. 1. 부정적 평가
김지하는 1991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의 사망 이후 대치정국에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는 글로 학생들의 죽음을 비난하여 재야 진보세력과 맞서는 행보를 보이며 '변절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2009년 촛불 시위를 반대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객들을 비난하는 행보를 보였다. 2012년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지지하고 다른 대선 후보를 비난했으며,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리영희 교수를 매도해 "자신에게 씌워졌던 ‘빨갱이’란 누명을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씌우고 있다", "유신독재와 박근혜의 나팔수가 됐다"는 비판을 받았다.[51]2008년 이명박 지지로 네티즌들로부터 맹공격을 당하던 작가 황석영에 대해, 김지하는 2009년 5월 18일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시비걸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다. 그는 "작가가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갔다 그럴 자유는 있어야 한다[53]"며, '기억력이 나쁠수록 좋은 작가'라는 독특한 이론을 제시했다.[54] 진중권이 황석영을 금붕어에 비유하며 비판하자, 김지하는 "작가라는 것이 아침마다 변한다. 기억력이 강한 작가일수록 엉터리다"라며 황석영의 행보에 작가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진중권이 황석영을 '금붕어 기억력'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반박이었다.[53] 5월 19일 진중권은 진보신당 당원게시판에 글을 올려 "기억력이 나쁜 작가일수록 좋은 작가라는 미학이론은 들을수록 해괴하다. 그렇다면 최고의 작가는 금붕어겠다. 금붕어의 눈앞에는 2초 마다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라고 말했다.[53]
2009년 5월 부산일보에 게재한 칼럼에서 김지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객들을 향해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칼 마르크스) 신봉자"들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네티즌들은 "내가 아는 그 김지하가 맞는가", "정말로 '타는 목마름'의 그 김지하 시인 맞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 "조문과 마르크스가 무슨 관계가 있는가", "자살까지도 애도하게 하는 이유는 왜 빼먹었는지", "삶은 무조건 고귀하고 죽음은 무조건 비겁한 것인가"라며 그의 글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네티즌은 "김지하 시인 안목으로는 자살이라는 것이 비겁한 행동이었겠지만 고인을 추모하는 사람은 각자 자기 자신의 이유가 있어서 추모하는 것"이라며 "그걸 마치 옳지 않다는 듯이 하는 자세가 별로 좋은 자세는 아니다"라며 비판했다.[55]
2013년 1월 8일, 김지하는 CBS 라디오에 출연하여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국민 48%는 공산화 좇는 세력 맞지 않나"라는 발언을 해 논란이 되었다.[56][57] 문재인, 안철수 후보에게 막말을 하고 이정희 후보에게 욕설을 하는 등[58]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이라는 평과 비판이 이어졌다.[59] 한 칼럼니스트는 좌충우돌하던 그의 언행에서 무엇보다 끔찍스러웠던 것은 정제하지 않고 내뱉는 막말이라며, 김지하가 공론장에 내뱉는 '한마디로 X 같아서…' 등의 욕설은 더 이상 시인의 언어가 아니라고 평가했다.[60] 또한 민청학련 무죄 판결에 대해 “돈이나 많이 줬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에 대해, 한 평론가는 김지하가 ‘돈 때문에’ 박근혜 당선인을 옹호하기로 마음먹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비약일 수 있다며, 그와 비슷한 연령대의 생활은 보수주의가 지배한다며 김지하는 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것이라고 평가했다.[61]
6. 수상 경력
연도 | 내용 |
---|---|
1975년 |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 로터스 특별상[10] |
1981년 |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 브루노 크라이스키상[2] |
1985년 | 미국 사회연구대학교 명예박사 |
1993년 | 이상문학상 |
2002년 | 제14회 정지용문학상, 제17회 만해문학상, 제10회 대산문학상 |
2003년 | 제11회 공초문학상 |
2005년 | 제10회 시와 시학상 작품상 |
2006년 | 제10회 만해대상 평화부문상 |
2010년 | 제6회 경암학술상 예술부문 |
2011년 | 민세상 |
7. 가족 관계
8. 김지하를 연기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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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大統領選 「恩讐を越えて」あの金芝河氏が朴槿恵候補を支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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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39년 만에 무죄(金芝河、39年ぶりに無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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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지하, 지구 위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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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가 낳은 세계적인시인 - 노겸(勞謙) 김지하(金芝河, 19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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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박경리 딸 김영주와 결혼… 주례 김수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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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변절의 길 걷는다,,,박근혜 지지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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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미발표 시 8편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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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시인, '사실상 무죄' 재심판결에 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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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또 백낙청 공격에 문단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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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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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대 사망 20주기 등록금 투쟁서 비롯, 정권 퇴진 운동으로 달궈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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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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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작가는 좌우 오갈 자유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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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봉하마을에서 악을 쓰는 맑스 신봉자"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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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48% 공산세력" 김지하 막말 논란에 의견 분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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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막말'발언 논란, 누리꾼 비난 '봇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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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 또 막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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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의 막말, 지적 수준 의심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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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칼럼 김지하, 황석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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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광의 왜?시인의 자리에서 내려와 버린 김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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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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