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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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사(軍師)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에서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관직 또는 역할을 지칭한다.
軍事|군사중국어는 신라의 지방 군사 관직이었다.
군사는 서양의 군 제도에서 참모와 달리 군 사령관과 대등하거나 약간 상위의 관계였으며, 빈객(요인), 고문과 같은 입장이었다. 때로는 군주의 스승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군주보다 상위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1]
한국에서는 신라 시대에 지방 유력자에게 주어지던 관직이었으며, 중국에서는 양한 교체기, 후한 말, 삼국 시대, 위진남북조 시대를 거치며 참모, 감찰관, 도독 대행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조조는 군사를 참모 집단으로 활용했고, 제갈량은 유비와 유선 정권에서 군사중랑장, 군사장군, 승상을 역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일본에서는 중세 시대에 군사라는 관직은 없었지만, 전국 시대 다이묘 가문에서 군학자들이 군사의 역할을 했으며, 에도 시대에는 군기물을 통해 군사의 이미지가 널리 퍼졌다. 역사 속에서 군사는 모략을 펼치고 정략을 상담하는 역할을 했으며,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이다.
2. 한국의 군사
2. 1. 신라
신라의 지방 유력자에게 주어지던 지방의 군사 관직이었다.
3. 중국의 군사
하지만 이러한 군사상은 스승을 제자보다 상위로 여기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이며, 실제로 군 사령관보다 상위의 입장에서 군사에만 조언하는 군사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일본 전국 시대의 군담 등 창작(픽션)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제갈량(제갈공명)조차도 정치·군사를 넘어 촉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했다. 즉, 군주를 대신해 군정과 정무 양면에 권한을 행사한 인물이 군사에만 전념하는 인물보다 상위에 있었다는 것이 실정에 가깝다.[1]
조조는 사공부·승상부에 군사·군사제주로 구성된 참모 집단을 만들어 정책·전략 결정에 참여시켰다. 특히 중군사 순유는 군사 집단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군사·국정·인사·재판·법제는 모두 순유에게 결정하게 했다"고 평가받았다.[10] 곽가는 조조의 자문에 참여하여 "깊이 산략에 통달하고 사리를 간파했다"고 평가받았으며,[11] 건안칠자에 속하는 진림, 왕찬 등 명문가들은 조조의 비서로서 기밀을 다루었다. 조조는 당대 군웅들과 마찬가지로 명사를 군사로 끌어들였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군사를 조직적인 군사·정치 고문으로 활용했다.
3. 1. 관제상의 군사
군사는 서양 군제에서 참모와 달리 군 사령관과 대등하거나 약간 상위의 관계였으며, 빈객(요인), 고문과 같은 입장이었다. 때로는 군주의 스승으로 대우받기도 했고, 군주보다 상위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군사상은 스승을 제자보다 상위로 여기는 유교적 사고방식에 기반하며, 실제로 군 사령관보다 상위에서 군사에만 조언하는 군사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일본 전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군담 등 창작(픽션)에서 비롯된 부분이 크다. 제갈량(제갈공명)조차도 정치·군사를 넘어 촉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했다. 즉, 군주를 대신해 군정과 정무 양면에 권한을 행사한 인물이 군사에만 전념하는 인물보다 상위에 있었다는 것이 실정에 가깝다.[1]
중국에서는 주나라 문왕이 여상(태공망, 강자아)을 스승으로 삼고, 아들 무왕 때 은나라를 멸망시킨 일이나, 부장이지만 군략으로 큰 공을 세운 손빈 등이 『사기』에 나타나는 것처럼, 예로부터 군사에 해당하는 인물이 존재했다. 한나라 고조 유방을 섬긴 장량은 야전의 공적이 없었지만, "모략을 휘장 안에서 펼쳐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했다"라고 고조가 말한 것처럼 군사의 전형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서는 중세에 군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세에는 군사라는 호칭이나 직책은 없었고,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음양도의 영향을 받은 점성술, 역 등의 점술로 전투의 길흉을 점치는 군배자였다고 한다. 근세 군학에서도 천후 예측에 관한 점성술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여, 근세에 '군배자' 개념이 '군사' 개념에 포함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군사'라는 말이 사료상에 나타나는 근세 초기에도 양자는 개념상 구분되는 경우가 있어, 위의 설에는 유보가 필요하다는 논자도 있다.[17]
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시대에 들어서자, 태평 시대의 풍조에서 센고쿠 다이묘가 전장에서 사용한 전법을 연구하는 군학이 생겨났다. 군학자에 의해 가이 국 다케다 신겐을 섬긴 야마모토 간스케[18], 에치고 국 우사미 스루가노카미 사다유키, 스루가 국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섬긴 다이겐 셋사이, 분고 국 오토모 소린을 섬긴 다치바나 도세츠 등 전설적인 무장이 군학의 시조로 칭송받았고, 센고쿠 다이묘 가문에는 군사 직제가 존재했고 그들이 실제로 활약한 군사라고 믿어지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전국 시대 전투를 다룬 군기물이 많이 쓰여 센고쿠 다이묘를 섬기는 명참모들이 그려졌고,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군기물이 강담이나 역사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다케나카 한베에 등 군사 이미지가 일반에 퍼졌다. 히데요시가 다케나카 한베에를 맞이하기 위해 7번 그의 암자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고사에 기반한 것처럼, 일본 군사 이미지는 대부분 중국 역사 이야기에 착안하여 에도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 역사 이야기 속 군사는, 어떤 군주를 섬겨 군사와 정략에 모략을 펼치는 인물로 그려졌다. 이 때문에 일반적인 말로는 군중 참모에 한정하지 않고, 동아시아 제국에서 정략 상담역으로 활약한 인물을 널리 군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3. 1. 1. 양한 교체기
신나라 멸망과 후한 건국 시기인 양한 교체기의 군웅들이 명사를 초빙한 것에서 군사(관직)가 비롯되었다. 후한의 유수 휘하의 등우에게는 한흠[2]이, 외효에게는 방망[3]이 그 예이다. 당시 군벌들은 군사를 '스승'으로 삼아 휘장 안에서 모략을 펼치는 임무를 맡겼다. 군웅과 군사의 관계는 군신 관계가 아니었고, 군사는 진퇴와 거취의 자유를 가진 빈객으로 대우받았다[4] . 양한 교체기의 군사는 전시 체제 하의 임시직이었기 때문에, 후한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폐지되었다.
3. 1. 2. 후한 말
후한 말, 군웅들이 봉기하면서 군사가 다시 나타났다. 원소는 노식[5]을, 유표는 채모[6]를 군사로 삼았다. 노식은 황건적 토벌에 공을 세운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였고, 채모는 형주의 명사로 알려졌다. 당시 명사는 높은 명성을 가진 지식인(주로 유학자)을 의미했다.[7] 이들은 학식과 지혜를 제공하거나, 군웅의 패권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 혹은 명사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군사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의 주요 관료 등용법인 향거리선은 지방관이나 지방 유력자가 우수한 인물을 추천하는 제도로, 지방에서의 명성이 중요했다. 따라서 명사들은 향거리선에 추천되기 쉬웠다. 특히 효렴은 유교적 교양을 중요시했다. 손권의 군사 장소도 효렴으로 추거된 인물로, 서주 등 북방에서 명성을 떨친 명사였다. 손책은 장소를 스승이자 친구의 예로 대우했다.[8]
유비 정권에서 군사중랑장, 군사장군, 승상을 지낸 제갈량은 젊은 시절 사마휘, 방덕공에게 '와룡'이라 불리며 기대를 모은 형주의 명사였다.[9]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선 정권을 승상으로서 이끌며 형주 출신 인재를 중용했고, 자신의 후계자로 형주 출신 장완을 지명했다.
3. 1. 3. 조조의 참모 집단
조조는 사공부·승상부에서 군사·군사제주로 구성된 참모 집단을 만들어 정책·전략 결정에 참여시켰다. 특히 중군사 순유는 군사 집단의 우두머리로 여겨져, "군사·국정·인사·재판·법제는 모두 순유에게 결정하게 했다"고 평가받았다.[10] 조조가 새롭게 설치한 군사제주는 제도화된 본격적인 참모 관직이었다. 예를 들어 곽가는 조조의 자문에 참여하여 "깊이 산략에 통달하고, 사리를 간파했다"고 평가받았으며[11], 건안칠자에 속하는 진림, 왕찬, 완우, 서간 등 명문가들은 조조의 비서로서 기밀을 다루었다. 조조는 당대 군웅들과 마찬가지로 명사를 군사로 끌어들였지만, 더욱 적극적으로 군사를 조직적인 군사·정치 고문으로 활용했다.
3. 1. 4. 조위
조조 정권의 중추가 위공국으로 옮겨지면서, 군사는 참모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대신 방면군 최고 사령관인 도독을 감찰하는 임무가 군사에게 주어졌다. 예를 들어, 대장군 군사 신비는 촉한군과 대치하는 대도독 사마의에게 파견되어 그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고 전군 장병을 감독했다.[12]
3. 1. 5. 촉한
제갈량의 북벌에서 군사는 전투 때마다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관위로서 임명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호 아래에 전군사·중군사·후군사 등이 있으며, 감군·영군·호군·전군·참군과 함께 군을 지휘·통솔했다. 예를 들어 제갈량 사후, 장완이 도호가 되고, 그 아래에 등지가 전군사, 양의가 중군사, 비의가 후군사가 되었으며, 강유는 우감군, 장익은 전령군, 왕평은 후전군이 되었다.[13]
3. 1. 6. 양진
서진에서는 경제 사마사의 휘를 피하여 '군사'로 개칭되었으나[1], 지방 군단의 감찰관으로서의 기능은 조위에서 계승되었다. 예를 들어 팔왕의 난 때, 사마륜은 부장 관습을 사마경의 군사로 파견했지만, 사마경은 구실을 만들어 관습을 죽였다[14]. 이것은 감찰을 임무로 하는 군사가 방면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진대의 군사는 도독을 대행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중병의 도독 형주제군사 양호에게 파견된 군사 두예가 도독을 보좌했으며, 양호의 사후 즉시 도독에 취임한 것[15]이 그 예이다. 이윽고 군사는 도독의 교체 시에, 후임 도독으로 예정된 자가 잠정적으로 취임하는 관직으로 변질되어 갔고, 동진에서는 이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3. 1. 7. 남북조
남북조 시대에 군사는 감찰 기능이 약해지면서 정규 군제가 아닌 관직이었기 때문에 점차 쇠퇴해 갔다. 남조에서는 양나라의 양간이 원법승의 군사를 맡은 것이 감군으로서의 군사의 마지막이었다[16] . 북조에서는 북위·북제가 위진의 감군으로서의 군사 제도를 계승했지만, 그 존재 의의는 역시 후퇴해 갔다. 수·당에서 어사가 군을 감찰하게 되면서, 제도로서의 군사는 설치되지 않았다.
3. 2. 참모로서의 군사
軍師중국어는 서양의 군 제도에서 참모와 달리 군 사령관과 대등하거나 약간 상위의 관계에 있었으며, 빈객(요인), 고문과 같은 입장이었다. 때로는 군주의 스승 취급을 받기도 했으며, 군주보다 상위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1]
하지만 이러한 군사상은 스승이 제자보다 상위로 여겨지는 유교적인 사고방식이며, 실제로 군 사령관보다 상위의 입장에서 군사에만 조언하는 군사는 『삼국지연의』, 『수호전』, 또는 일본 전국 시대의 군담 등 창작(픽션)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부분이 크다. 군사의 대표적인 예인 제갈량(제갈공명)조차도 정치·군사를 넘어 촉의 거의 모든 분야에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즉, 군주를 대신하여 군정 양면에 권한을 행사한 인물이 군사에 전념하는 인물보다 상위에 있었다는 편이 실제 상황에 가깝다.[1]
조조는 사공부·승상부에서 군사·군사제주로 참모 집단을 구성하여 정책·전략 결정에 관여시켰다. 특히 중군사 순유는 군사 집단의 으뜸으로 여겨져 "군사·국정·인사·재판·법제는 모두 순유에게 결정하게 했다"라고 평가받았다.[10] 조조가 새롭게 설치한 군사제주는 제도화된 본격적인 참모 관직이었다. 예를 들어 곽가는 조조의 자문에 참여하여 "깊이 산략에 통달하고 사리를 간파했다"라고 평가받았으며,[11] 건안칠자에 속하는 진림·왕찬 등 명문가들은 조조의 비서로서 기밀을 다루었다. 조조와 당대 군웅들은 명사를 군사로 끌어들인다는 점은 같았지만, 조조는 더욱 적극적으로 군사를 조직적인 군사·정치 고문으로 활용했다.
조위가 건국되고 조조 정권의 중추가 승상부에서 위공국으로 옮겨지자, 군사는 참모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대신 방면군 최고 사령관인 도독을 감찰하는 임무가 군사에게 주어졌다. 예를 들어 대장군 군사 신비는 촉군과 대치하는 대도독 사마의에게 파견되어 그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고 전군 장병을 감독했다.[12]
촉한 제갈량의 북벌에서 군사는 전투 때마다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관위로서 임명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도호 아래에 전군사·중군사·후군사 등이 있으며, 감군·령군·호군·전군·참군과 함께 군을 지휘·통솔했다. 예를 들어 제갈량 사후 장완이 도호가 되고, 그 아래에 등지가 전군사, 양의가 중군사, 비의가 후군사가 되었으며, 강유는 우감군, 장익은 전령군, 왕평은 후전군이 되었다.[13]
4. 일본의 군사
일본에서는 중세에 군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세에 군사라는 호칭이나 그에 상당하는 직책은 없었고,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음양도의 영향을 받은 점성술, 역 등의 점술을 배우고, 합전에서의 길흉을 점치는 군배자였다고 한다.[17] 근세의 군학에서도 천후 예측에 관한 점성술 등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근세에서 '군배자' 개념이 '군사' 개념 속에 포함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군사'라는 말이 사료상에 나타나는 근세 초기의 시대에도 양자는 개념상 구분되는 경우가 보이기 때문에, 위의 설에는 일정한 유보가 필요하다는 논자도 있다.[17]
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자, 태평 시대의 풍조에서 오히려 센고쿠 다이묘가 전장에서 사용한 전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군학이 생겨났다. 군학자에 의해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을 섬긴 야마모토 간스케[18], 에치고 국의 우사미 스루가노카미 사다유키,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섬긴 다이겐 셋사이, 분고 국의 오토모 소린을 섬긴 다치바나 도세츠 등의 전설적인 무장이 군학의 시조로 칭송받은 결과, 센고쿠 다이묘 가문에는 군사의 직제가 존재했고, 그들이 실제로 활약한 군사라고 믿어지게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전국 시대의 합전을 다룬 군기물이 많이 쓰여 센고쿠 다이묘를 섬기는 명 참모들이 그려졌고, 더 나아가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군기물이 강담이나 역사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다케나카 한베에 등의 군사의 이미지가 일반에게 퍼졌다. 히데요시가 다케나카 한베에를 맞이하기 위해 7번 그의 암자에 다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 일화에 근거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일본 군사의 이미지는 대부분 중국의 역사 이야기에 착안하여 에도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역사 속 유명한 군사
- 중국
양한 교체기의 군웅들이 명사를 초빙하면서 군사(軍師)라는 관직이 기원하였다. 후한 유수 휘하의 등우에게는 한흠[2], 외효에게는 방망[3]이 있었다. 이들은 군사의 예시이다. 당시 군벌들은 군사를 '스승'으로 삼아 모략을 펼치는 임무를 맡겼다. 군웅과 군사는 군신 관계가 아니라 진퇴거취의 자유를 가진 빈객으로 대우받았다.[4] 양한 교체기의 군사는 전시 체제 하의 임시직이었기에, 후한의 중국 통일 후 폐지되었다.
후한 말기 군웅 봉기 시에 군사가 다시 나타났다. 원소에게는 노식[5], 유표에게는 채모[6]가 있었다. 당시 명사란 높은 명성을 가진 지식인(주로 유학자)을 의미한다.[7]
조조는 사공부·승상부에서 군사·군사제주에 의한 참모 집단을 구성하여 정책·전략 결정에 관여시켰다. 특히 중군사 순유는 군사 집단의 으뜸으로 여겨졌다.[10] 조조가 새롭게 설치한 군사제주는 제도화된 본격적인 참모 관직이었다. 곽가는 조조의 자문에 참여했다.[11]
위 건국 후, 조조 정권의 중추가 승상부에서 위공국으로 옮겨지자 군사는 참모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대신 방면군 최고 사령관인 도독을 감찰하는 임무가 군사에게 주어졌다. 서진에서는 경제·사마사의 휘를 피하여 '군사'로 개칭되었으나, 지방 군단의 감찰관으로서의 기능은 조위에서 계승되었다. 팔왕의 난 때, 사마륜은 부장 관습을 사마경의 군사로 파견했지만, 사마경은 구실을 만들어 관습을 죽였다.[14] 이는 감찰을 임무로 하는 군사가 방면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진대의 군사는 도독을 대행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동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감찰 기능이 약해진 군사는 본래 정규 군제 밖의 관직이기도 하여 차츰 쇠퇴해 갔다. 남조에서는 양의 양간이 원법승의 군사를 맡은 것이 감군으로서의 군사의 마지막이었다.[16] 북조에서는 북위·북제가 위진의 감군으로서의 군사 제도를 충실히 계승했지만, 그 존재 의의는 역시 후퇴해 갔다. 수·당에서 어사가 군을 감찰하게 되면서 제도로서의 군사는 설치되지 않았다.
- 일본
일본에서는 중세에 군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세에 군사라는 호칭이나 그에 상당하는 직책은 없었고,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음양도의 영향을 받은 점성술, 역 등의 점술을 배우고, 합전에서의 길흉을 점치는 군배자였다고 한다.[17]
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자, 태평 시대의 풍조에서 오히려 센고쿠 다이묘가 전장에서 사용한 전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군학이 생겨났다. 에도 시대에는 전국 시대의 합전을 다룬 군기물이 많이 쓰여 센고쿠 다이묘를 섬기는 명 참모들이 그려졌고, 더 나아가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군기물이 강담이나 역사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다케나카 한베에 등의 군사의 이미지가 일반에게 퍼졌다.
일본에는 군사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와 유사한 존재로서 유명한 인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였던 다케나카 한베와 구로다 간베가 있다.
5. 1. 중국
양한 교체기의 군웅들이 명사를 초빙하면서 군사(軍師)라는 관직이 기원하였다. 후한 유수 휘하의 등우에게는 한흠[2], 외효에게는 방망[3]이 있었다. 이들은 군사의 예시이다. 당시 군벌들은 군사를 '스승'으로 삼아 모략을 펼치는 임무를 맡겼다. 군웅과 군사는 군신 관계가 아니라 진퇴거취의 자유를 가진 빈객으로 대우받았다.[4] 양한 교체기의 군사는 전시 체제 하의 임시직이었기에, 후한의 중국 통일 후 폐지되었다.후한 말기 군웅 봉기 시에 군사가 다시 나타났다. 원소에게는 노식[5], 유표에게는 채모[6]가 있었다. 당시 명사란 높은 명성을 가진 지식인(주로 유학자)을 의미한다.[7] 명사는 학식과 지혜를 갖추었거나, 군웅이 패권을 정당화하는 상징으로서, 혹은 명사층을 끌어들이려는 목적으로 군사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후한의 주요 관료 등용법인 향거리선은 지방관이나 지방의 유력자가 그 지방의 우수한 인물을 추천하는 제도였다. 그 지방에서의 명성이 중요시되었기에, 명사는 향거리선에서 추거되기 쉬웠다. 손권의 군사가 된 장소도 효렴으로 추거되었는데, 서주 등 북방에서 명성을 떨친 명사였다. 손책은 장소를 사우의 예로 대우했다.[8]
유비 정권에서 군사중랑장·군사장군·승상을 지낸 제갈량은 젊은 나이에 사마휘·방덕공에게 '와룡'으로 평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던 형주의 명사였다.[9] 유비 사후, 제갈량은 유선 정권을 승상으로서 이끌었다. 형주 출신 인재를 중용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형주 출신의 장완을 지명했다.
한편, 조조는 사공부·승상부에서 군사·군사제주에 의한 참모 집단을 구성하여 정책·전략 결정에 관여시켰다. 특히 중군사 순유는 군사 집단의 으뜸으로 여겨져, "군사·국정·인사·재판·법제는 모두 순유에게 결정하게 했다"고 평가받았다.[10] 조조가 새롭게 설치한 군사제주는 제도화된 본격적인 참모 관직이었다. 곽가는 조조의 자문에 참여하여 "깊이 산략에 통달하고, 사리를 간파했다"고 평가받았으며,[11] 건안칠자에 속하는 진림·왕찬·완우·서간 등 명문가들은 조조의 비서로서 기밀을 다루었다.
위 건국 후, 조조 정권의 중추가 승상부에서 위공국으로 옮겨지자 군사는 참모 집단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대신 방면군 최고 사령관인 도독을 감찰하는 임무가 군사에게 주어졌다. 대장군 군사 신비는 촉군과 대치하는 대도독 사마의에게 파견되어 그의 군사 행동을 견제하고 전군 장병을 감독했다.[12]
제갈량의 북벌에서 군사는 전투 때마다 임명되는 것이 아니라 관위로서 임명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도호 아래에 전군사·중군사·후군사 등이 있으며, 감군·령군·호군·전군·참군과 함께 군을 지휘·통솔했다. 제갈량 사후, 장완이 도호가 되고, 그 아래에 등지가 전군사, 양의가 중군사, 비의가 후군사가 되었다. 강유는 우감군, 장익은 전령군, 왕평은 후전군이 되었다.[13]
서진에서는 경제·사마사의 휘를 피하여 '군사'로 개칭되었으나, 지방 군단의 감찰관으로서의 기능은 조위에서 계승되었다. 팔왕의 난 때, 사마륜은 부장 관습을 사마경의 군사로 파견했지만, 사마경은 구실을 만들어 관습을 죽였다.[14] 이는 감찰을 임무로 하는 군사가 방면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진대의 군사는 도독을 대행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었다. 중병의 도독 형주제군사 양호에게 파견된 군사 두예가 도독을 보좌했으며, 양호 사후 즉시 도독에 취임했다.[15] 이후 군사는 도독 교체 시에 후임 도독으로 예정된 자가 잠정적으로 취임하는 관직으로 변질되어 갔고, 동진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감찰 기능이 약해진 군사는 본래 정규 군제 밖의 관직이기도 하여 차츰 쇠퇴해 갔다. 남조에서는 양의 양간이 원법승의 군사를 맡은 것이 감군으로서의 군사의 마지막이었다.[16] 북조에서는 북위·북제가 위진의 감군으로서의 군사 제도를 충실히 계승했지만, 그 존재 의의는 역시 후퇴해 갔다. 수·당에서 어사가 군을 감찰하게 되면서 제도로서의 군사는 설치되지 않았다.
5. 2. 일본
일본에서는 중세에 군사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중세에 군사라는 호칭이나 그에 상당하는 직책은 없었고, 실제로 존재했던 것은 음양도의 영향을 받은 점성술, 역 등의 점술을 배우고, 합전에서의 길흉을 점치는 군배자였다고 한다.[17] 근세의 군학에서도 천후의 예측에 관한 점성술 등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근세에서 '군배자' 개념이 '군사' 개념 속에 포함되었다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군사'라는 말이 사료상에 나타나는 근세 초기의 시대에도 양자는 개념상 구분되는 경우가 보이기 때문에, 위의 설에는 일정한 유보가 필요하다는 논자도 있다.[17]전국 시대가 끝나고 에도 시대에 들어가자, 태평 시대의 풍조에서 오히려 센고쿠 다이묘가 전장에서 사용한 전법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군학이 생겨났다. 군학자에 의해 가이 국의 다케다 신겐을 섬긴 야마모토 간스케[18], 에치고 국의 우사미 스루가노카미 사다유키,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섬긴 다이겐 셋사이, 분고 국의 오토모 소린을 섬긴 다치바나 도세츠 등의 전설적인 무장이 군학의 시조로 칭송받았다. 그 결과, 센고쿠 다이묘 가문에는 군사의 직제가 존재했고, 그들이 실제로 활약한 군사라고 믿어지게 되었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전국 시대의 합전을 다룬 군기물이 많이 쓰여 센고쿠 다이묘를 섬기는 명 참모들이 그려졌고, 더 나아가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군기물이 강담이나 역사 소설의 소재로 다루어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 다케나카 한베에 등의 군사의 이미지가 일반에게 퍼졌다. 히데요시가 다케나카 한베에를 맞이하기 위해 7번 그의 암자에 다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유비와 제갈량의 삼고초려의 일화에 근거한다는 것이 밝혀진 것처럼, 일본 군사의 이미지는 대부분 중국의 역사 이야기에 착안하여 에도 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군사라는 관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이와 유사한 존재로서 유명한 인물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군사였던 다케나카 한베와 구로다 간베가 있다.
6. 가공의 군사
참조
[1]
서적
軍師考
東北大学日本文化研究所
1991
[2]
서적
後漢書
[3]
서적
後漢書
[4]
서적
後漢書
[5]
서적
後漢書
[6]
서적
襄陽記
[7]
서적
魏晋南北朝
[8]
서적
三国志
[9]
서적
三国志
[10]
서적
通典
[11]
서적
三国志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華陽国志
[14]
서적
資治通鑑
[15]
서적
晋書
[16]
서적
通典
[17]
간행물
戦国時代に軍師はいたのか?
2013-04-01
[18]
서적
甲陽軍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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