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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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극화는 1957년 다쓰미 요시히로에 의해 정의된 일본 만화 장르로, 기존의 아동 대상 만화와는 달리 성인 독자를 위한 진지한 스토리텔링과 사실적인 그림체를 특징으로 한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만화 세대의 지지를 받으며 언더그라운드 만화로 인기를 얻었고, 데즈카 오사무를 비롯한 주류 만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극화는 영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표현 기술을 발전시켰으나, 1970년대 학생운동의 쇠퇴와 함께 인기가 감소했다. 현재는 언더그라운드 출판사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으며, 다쓰미 요시히로, 사이토 타카오 등의 작가들이 극화 장르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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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화 | |
---|---|
기본 정보 | |
유형 | 만화 스타일 |
특징 | 극적인 스토리텔링, 사실적인 묘사, 성인 대상 |
역사 | |
기원 | 1950년대 후반 일본 |
발전 | 데즈카 오사무의 만화에 대한 반발로 생겨남 |
영향 | 다른 예술 장르, 특히 영화에 영향 |
작가 및 작품 | |
주요 작가 | 사이토 다카오 시라토 산페이 다쓰미 요시히로 |
대표 작품 | 고르고 13 카무이전 늪 |
스타일 및 특징 | |
그림체 | 사실적이고 상세한 그림체 |
스토리텔링 | 극적이고 복잡한 서사 |
주제 | 폭력, 사회 비판, 역사적 사건 등 성인 대상 주제 |
대상 독자 | 주로 성인 독자 |
다른 만화 스타일과의 비교 | |
대조 | 쇼넨 또는 쇼조 만화와 대조되는 스타일 |
유사점 | 일부는 헤타우마와 유사한 스타일 |
영향 | |
일본 | 망가의 다양한 장르에 영향 |
세계 | 해외 만화가들에게 영향 |
2. 역사
1950년대 일본에서는 데즈카 오사무로 대표되는 도쿄 중심의 아동 만화가 주류를 이루었다.[2] 그러나 오사카의 대본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다쓰미 요시히로, 마쓰모토 마사히코 등 젊은 작가들은 데즈카의 영향 아래 있었으면서도, 아동 만화와는 다른 길을 모색했다.[3] 이들은 느와르 영화나 범죄 소설 등에서 영감을 받아 더 어둡고 진지하며 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리고자 했고[4], 이는 기존 만화보다 폭력적이거나 사실적인 묘사를 포함하기도 했다.[5][6]
1957년, 다쓰미 요시히로는 자신의 작품이 기존 '만화'와 구별되기를 바라며 '劇画|게키가일본어'(극화)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 명칭은 곧 비슷한 지향점을 가진 다른 작가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주로 주류 출판사가 아닌 대본소 시스템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으며[7][8], 이미지와 텍스트의 조화, 클로즈업을 통한 내면 묘사, 페이지 넘김과 이야기 전개의 동기화 등 새로운 시각적 표현 기법을 실험했다.[5]
1959년에는 다쓰미를 중심으로 사이토 타카오, 마쓰모토 마사히코 등이 참여한 '劇画工房|게키가 고보일본어(극화공방)'가 결성되어 "극화 선언"을 발표하며 극화의 존재를 알렸다.[7][9] 비록 극화공방 자체는 내부 갈등으로 1960년 해체되었지만[11], 극화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8][7]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가 더 성숙한 내용을 찾으면서 극화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시기 극화는 미일 안보 조약 반대 운동 등 당시 학생 운동 및 청년 문화와 맞물려 반항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시라토 산페이의 작품 등을 연재한 가로와 같은 잡지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으며[8][6], 극화의 인기는 주류 만화계에도 영향을 미쳐 데즈카 오사무조차 《불새》, 《아돌프에게 고한다》 등에서 극화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일본 만화의 황금기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 운동의 쇠퇴와 함께 극화 붐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주류 소년 만화 잡지들이 더욱 상업화되고, 러브 코미디나 뉴웨이브 등 새로운 장르가 등장하면서 극화는 점차 "무겁고 답답하다"는 인상을 주며 주류에서 밀려났다.[27][25] 다쓰미 요시히로는 극화가 폭력이나 에로티시즘 등 자극적인 요소와 동일시되는 경향을 비판하며, 본래의 의미를 되찾으려 노력하기도 했다.[6][12]
현재 극화는 독립적인 장르라기보다는 다양한 현대 만화에 그 기법과 영향력이 녹아들어 있는 형태로 평가받는다.[8] 비록 일본 내에서는 주류 장르가 아니지만, 2000년대 이후 해외 그래픽 노블 시장에서 다쓰미 요시히로, 츠게 요시하루 등의 작품이 번역, 소개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2. 1. 극화의 탄생
1950년대 일본의 주류 만화는 도쿄에서 제작되었으며, 주로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을 중심으로 어린이를 대상으로 했다.[2] 데즈카가 도쿄로 이주하기 전 오사카에 거주할 당시, 다쓰미 요시히로와 마쓰모토 마사히코 등 그를 존경하는 작가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3] 이들은 데즈카의 영화적 기법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그의 디즈니 풍 유머러스한 아동 만화와는 다른 길을 가고자 했다. 그들은 느와르 영화와 범죄 소설의 영향을 받아 진지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기를 원했다.[4]이러한 배경 속에서 '劇画|게키가일본어'라는 용어가 탄생했다. 이 용어는 1957년 말, 나고야의 대여 만화 출판사인 센트럴 문고(セントラル文庫일본어)에서 출판된 단편집 『거리 12호(街 12号일본어)』에 실린 다쓰미 요시히로의 작품 「유령 택시(幽霊タクシー일본어)」 표지에 처음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쓰미는 자신의 작품이 기존의 아동용 '만화(漫画|망가일본어)'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았고, 더 진지한 성격의 작품을 나타내기 위해 이 용어를 만들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쓰미는 "제가 읽었던 신문 기사의 영향을 일부 받았습니다. 어떤 종류의 감정적 반응을 갖게 되고 그것을 만화로 표현하고 싶어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5]
극화는 기존 만화보다 더 사실적인 그림체와 어두운 분위기를 특징으로 했으며, 폭력적인 묘사도 더 강했다.[5][6] 초기에는 "그림이 어둡다", "사실적이고 잔혹하다"는 비판도 있었지만,[23] 점차 청년층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극화 작가들은 주류 출판사가 아닌, 작품을 구매하는 대신 빌려보는 방식의 대본소(대여 만화) 시장에서 주로 활동했다.[7][8] 대여 만화 극화의 주요 독자층은 노동계급의 젊은이들이었으며, 작가들 역시 비슷한 배경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다쓰미가 '극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전, 마쓰모토 마사히코는 1956년 11월 자신의 작품 ''흡혈귀 주''를 만화 대신 '駒画|코마가일본어'라고 칭하기도 했다. 마쓰모토의 아들은 이것이 극화의 기초가 되었다고 주장했다.[3] 다쓰미 역시 '극화' 외에 영화의 초기 용어인 '활동사진(活動映画|카쓰도오 에이가일본어)'에서 파생된 '카쓰도가(活動画일본어)'나 '카쓰가(活画일본어)' 같은 이름도 고려했었다. 이는 극화 운동이 영화로부터 받은 영향을 보여준다.[10]
극화 운동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오사카의 닛폰마루 문고(日の丸文庫일본어) 소속 작가들은 출판사와의 원고료 문제 등으로 인해 이시카와 후미야스, K·모토미츠, 사쿠라이 쇼이치, 야마모리 스스무, 사토 마사아키 등 7명이 "간사이 만화가 동인(関西漫画家同人일본어)"을 결성했다. 1959년 1월, 이들 중 5명(이시카와, 모토미츠, 사쿠라이, 야마모리, 사토)은 다쓰미 요시히로와 만나 그의 '극화' 명칭을 함께 사용하기로 합의했다.[24]
이를 바탕으로 1959년, 다쓰미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이시카와 후미야스, K·모토미츠, 사쿠라이 쇼이치, 야마모리 스스무, 사토 마사아키, 그리고 사이토 타카오 등 7명이 모여 극화 제작 집단인 "劇画工房|게키가 고보일본어(극화공방)"를 도쿄에서 결성했다.[8] 사이토 타카오는 처음에는 '설화(説画일본어)'라는 명칭을 주장했으나 다쓰미의 설득으로 합류했다. 이후 마쓰모토 마사히코도 자신의 '코마가' 명칭에 대한 고집을 꺾고 4월에 합류하여 8인 체제가 되었다.
극화공방은 활동 시작에 앞서 "극화공방 안내(劇画工房ご案内일본어)"라는 제목의 엽서 150매를 신문사, 출판사, 만화가들에게 발송했는데, 이는 후에 "극화 선언"으로 불리며 만화계에 '극화'라는 단어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7][9] 이 선언문은 데즈카 오사무에게도 전달되었다.
극화공방은 새로운 장르인 극화의 인기를 견인하며 『그림자(影일본어)』(닛폰마루 문고), 『거리(街일본어)』(센트럴 문고), 『마천루(摩天楼일본어)』(토게츠쇼보) 등 다수의 극화 단편집 출판을 이끌었고, 대여 만화 시장의 황금기를 여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내부 갈등으로 인해 극화공방은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0년에 해체되었다.[11][8][7] 비록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극화공방이 남긴 영향은 컸다.
극화의 등장은 주류 만화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데즈카 오사무는 극화의 영향을 받아 《불새》나 《아돌프에게 고한다》와 같은 작품에서 더 현실적인 화풍과 어두운 주제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특히 다쓰미 작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반대로 다쓰미 역시 데즈카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데즈카는 극화의 인기에 대응하고 실험적인 작품을 발표하기 위해 1967년 잡지 COM을 창간하기도 했다.[8]
다쓰미 요시히로는 극화의 목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목표했던 것은 만화 독자층의 연령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적인 것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더 나이든 독자층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저 혼자 한 것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것과 아동 만화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것 사이에는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있었습니다."[5]
2. 2. 극화공방의 결성
오사카의 닛폰마루 문고(日の丸文庫) 소속 대여 만화가들은 원고료 미지급 문제에 직면하여, 출판사와의 교섭력을 높이기 위해 이시카와 후미야스(石川フミヤス), K·모토미츠(K・元美津), 사쿠라이 쇼이치(桜井昌一), 야마모리 스스무(山森ススム), 사토 마사아키(佐藤まさあき), 이와이 시게오(岩井しげお), 스즈키 코우지(鈴木洸史) 등 7명이 모여 만화 제작 집단 ‘간사이 만화가 동인(関西漫画家同人)’을 결성했다.1959년 1월 5일, 다쓰미 요시히로는 자신의 집에서 ‘간사이 만화가 동인’ 소속 만화가 중 5명(이시카와, 모토미츠, 사쿠라이, 야마모리, 사토)과 회합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야마모리 스스무의 요청으로 다쓰미는 자신이 사용하던 ‘극화(劇画)’라는 명칭을 닛폰마루 문고 동료들과 공유하는 데 동의했다.[24]
같은 해 1959년, 다쓰미 요시히로를 중심으로 이시카와 후미야스, K·모토미츠, 사쿠라이 쇼이치, 야마모리 스스무, 사토 마사아키, 그리고 사이토 타카오 등 7명이 모여 극화 제작 집단인 극화공방(劇画工房)을 결성했다.[8] 사이토 타카오는 초기에 '설화(説画)'라는 명칭을 선호했으나 다쓰미의 설득으로 합류했다. 결성 회의에 참석했던 마쓰모토 마사히코는 자신이 만든 '코마가(駒画)'라는 명칭을 고수하며 참여를 망설였으나, 같은 해 4월 합류하여 총 8인 체제가 되었다.
극화공방은 활동 시작에 앞서 "극화공방 안내(劇画工房ご案内)"라는 제목의 엽서 150매를 신문사, 출판사, 동료 만화가들에게 발송했는데, 이는 "극화 선언(劇画宣言)"으로 불리게 되었다.[7][9] 이 선언은 큰 홍보 효과를 거두며 만화계에 '극화'라는 용어를 정착시키는 데 기여했다. 이 엽서는 데즈카 오사무에게도 전달되었으며, 그는 훗날 자서전 『나는 만화가(ぼくはマンガ家)』에서 이를 언급하기도 했다.
극화공방의 활동과 함께 극화는 대여 만화 독자들 사이에서 빠르게 인기를 얻었으며, 『그림자(影)』(닛폰마루 문고), 『거리(街)』(센트럴 문고), 『마천루(摩天楼)』(토게츠 서방) 등 극화 단편집이 다수 출판되며 대여 만화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극화공방은 오래가지 못했다. 1959년 8월, 다쓰미 요시히로의 자택에서 열린 긴급 회의에서 다쓰미, 사이토 타카오, 마쓰모토 마사히코 3인이 탈퇴를 선언하면서 극화공방은 결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부 분열로 해산되었다.[11] 조직 자체는 단명했지만, 그 영향력은 지속되었다.[8][7]
2. 3. 극화 붐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만화를 읽고 자란 세대는 더 높은 연령대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을 원했고, 극화는 이러한 틈새 시장을 파고들었다. 이 세대는 '만화 세대'로 불리며, 당시 히피 문화에서 록 음악이 했던 역할과 비슷하게 만화를 일종의 저항의 형태로 소비했다. 특히 1960년대 미일 안보 조약에 반대하는 학생 운동과 노동자 계급 지향의 그룹 사이에서 만화 읽기가 확산되었다.1965년, 데즈카 오사무가 이른바 'W3 사건'으로 주간 소년 매거진 연재를 중단하자, 편집장 우치다 마사루는 대본소 극화 작가들에게 연재를 의뢰했다. 이 작품들이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으면서 주간 소년 매거진은 극화 노선을 강화했다. 극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른 출판사들도 잇따라 극화 잡지를 창간하며 붐을 형성했다.
잡지명 | 출판사 | 창간 연도 |
---|---|---|
코믹 매거진 | 호분샤 | 1966년 |
주간 만화 액션 | 후타바샤 | 1967년 |
영 코믹 | 소년화보사 | 1967년 |
빅 코믹 | 쇼가쿠칸 | 1968년 |
플레이 코믹 | 아키타 쇼텐 | 1968년 |
이 잡지들에서는 사이토 타카오, 사토 마사아키, 가와사키 노보루, 난바 켄지, 고이케 가즈오, 나가시마 신지, 시라토 산페이, 츠게 요시하루, 가지와라 잇키, 미야타니 카즈히코, 바론 기토모토, 이케가미 료이치, 우에무라 카즈오 등의 작가들이 활동하며 인기를 끌었다.
노동계급 젊은이들이 주요 독자층이었던 극화는 당시 학생 운동의 열기와 맞물려 "오른손에는 아사히 저널, 왼손에는 주간 소년 매거진"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25] 1964년 창간된 가로는 전공투 세대 대학생들이 즐겨 읽는 잡지가 되었다. 1970년 요도호 납치 사건을 일으킨 적군파 그룹이 "'''우리는 내일의 죠다'''"라고 선언한 것은 당시 극화가 젊은이 문화에 미친 영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데즈카 오사무 역시 《불새》나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작품을 통해 극화의 영향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초기 극화는 "그림이 어둡다",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잔혹하다"는 비판도 받았으나[23], 1960년대 잡지 연재를 통해 점차 대중적인 장르로 자리 잡았다.
2. 4. 붐의 종언
극화 붐에 대한 반발도 있었는데, 극화를 싫어하기로 유명했던 寺田ヒロオ(테라다 히로오)는 さいとう・たかを(사이토 타카오)에게 비판적인 내용의 문서를 보내기도 했다.[26]1972년 발생한 아사마산장 사건 등으로 좌익 학생운동이 급진화되고 이후 쇠퇴하면서, 젊은 세대의 지지를 받던 극화 역시 침체기를 맞이했다. 극화는 점차 "무겁고 답답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젊은 독자들에게 외면받기 시작했고, 1970년대 중반부터는 인기를 누리던 극화 잡지들의 판매 부수가 급격히 감소했다.
당시 영 코믹(ヤングコミック)의 편집자였던 岡崎英生(오카자키 히데오)는 극화 잡지 쇠퇴의 원인으로 삼류 극화지(에로 극화지)의 유행과 더불어, 1979년 6월 창간된 주간 영 점프 (슈에이샤) 및 1980년 7월 창간된 주간 영 매거진 (고단샤)과 같은 새로운 청년 만화 잡지의 등장을 주요 요인으로 꼽았다.[27]
또한, 1970년대 후반 오일 쇼크의 충격에서 벗어나 경기가 회복되던 시기에는 소년 점프와 같이 기상천외하고 큰 규모의 이야기나 소년 선데이에서 유행한 러브 코미디 장르가 인기를 얻었다.[25] 극화계 내부에서도 뉴웨이브 만화를 포함하여 극화의 기법을 받아들인 새로운 스타일의 만화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전통적인 극화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갔다.
2. 5. 극화의 현재
극화 붐 이후에도 베테랑 작가들이 계속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이후 데뷔한 극화가들도 등장하고 있지만, "장르로서의 극화"는 침체기에 있다. 1972년 아사마산장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좌익 운동의 과격화와 학생운동의 쇠퇴와 맞물려 젊은이들에게 지지를 받던 극화계 역시 침체되었다. 극화는 점차 "무겁고", "답답한" 것으로 여겨져 젊은 독자들에게 외면받았고, 인기를 누렸던 극화 잡지들은 1970년대 중반부터 판매 부수가 급격히 감소했다.[27] 또한 주류 소년 만화 잡지들이 상업화되면서 극화의 영향력은 줄어들었고, 이러한 경향의 작품들은 주로 언더그라운드 출판사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1970년대 후반 경기 회복기에는 소년 점프의 스케일 큰 이야기나 소년 선데이의 러브 코미디가 인기를 얻었으며,[25] 뉴웨이브 만화 등 극화 기법을 도입한 새로운 만화들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극화는 점차 도태되었다.1995년, 극화의 창시자 중 한 명인 다쓰미 요시히로는 자전적 만화 『극화표류』를 발표하여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극화 붐 이후 잘못 알려진 극화의 이미지를 바로잡고 그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그는 이전에도 '게키가'라는 용어가 폭력이나 에로티시즘 같은 자극적인 요소와 동일시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평범한 삶을 다루는 자신의 작품과의 차이를 강조한 바 있다.[12][6]
현재 대부분의 만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극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된다.[8]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화와 극화를 명칭상 분리하려는 시도는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으며, 여전히 '만화'라는 포괄적인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오랫동안 일본 외 다른 언어로 거의 번역되지 않았던 극화는 2000년대 이후 변화를 맞이했다. 그래픽 노블 전문 출판사들이 극화 작품을 번역하여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캐나다의 Drawn & Quarterly와 같은 출판사들이 다쓰미 요시히로, 츠게 요시하루 등의 작품을 영어로 소개하면서 서구 그래픽 노블 시장에서도 극화의 인지도가 높아졌다.
3. 극화의 표현 기술
극화는 기술적인 측면에서 기존 만화와 차별화되는 새로운 표현 기법들을 도입했다. 대표적으로 카메라워크를 활용한 컷 분할을 들 수 있다. 부감(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이나 다양한 앵글을 사용하여 3인칭 시점을 도입했고, 이를 통해 이전 만화에서는 보기 어려웠던 역동적인 시점에서의 묘사가 가능해졌다. 이전의 만화들은 대부분 정면 고정 시점으로 그려졌었다. 또한, 인물의 클로즈업을 통해 내면 심리를 자세히 묘사하는 기법도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이전 만화계에서는 인물의 클로즈업을 단순히 성의 없게 그린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이 외에도 굵은 글씨로 강조된 의성어/의태어나, 효과선, 집중선을 사용한 연출, 같은 장면을 여러 컷에 연속적으로 그려 시간의 경과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연출 등도 극화 공방 시기에 개발된 기법들이다.
극화 공방의 작가들은 할리우드 영화를 참고하여 이러한 기법들을 만화에 맞게 개발했다. 이러한 혁신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당시 그들이 주로 활동했던 출판사인 히노마루 문고(日の丸文庫)의 "표지 외에는 자유롭게 그리게 한다"는 방침과, 만화 편집을 담당했던 전무 야마다 기이치(山田敬一)가 영화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점이 작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극화에서 개발된 이러한 기법들은 곧 다른 만화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어 빠르게 모방되었고, 만화의 일반적인 표현 기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기법들이 더 이상 극화만의 독자적인 특징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대신, 후대의 극화 잡지 붐 시기에 유행했던 "선이 많고 사실적인 터치의 그림체로 그려진 만화가 극화"라는 스테레오타입적인 이미지가 대중에게 남게 되었다.
사이토 타카오에 따르면, 원래 그림체는 극화의 조건에 포함되지 않으며, 데포르메된 그림이나 소년, 소녀 취향의 그림체로도 극화는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극화 초창기를 이끌었던 작가들이 점차 활동을 줄이고 사이토 타카오만 남게 되면서, 그의 그림 스타일이 마치 극화의 표준인 것처럼 대중에게 오해되어 굳어졌다는 것이다.[28] 실제로 극화 초기를 대표하는 작가인 다츠미 요시히로나 마츠모토 마사히코의 그림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극화풍" 이미지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극화가로 분류되지 않는 츠게 요시하루나 미즈키 시게루 같은 작가들도 젊은 시절에는 대여점용 극화 만화를 그린 경험이 있다.
4. 주요 극화 작가
극화 장르를 대표하는 주요 만화가와 그들의 대표작은 다음과 같다.
- 가와사키 노보루 (''거인의 별'')[17]
- 고지마 고세키 (''론 울프 앤드 큐브'')[10]
- 나가야스 타쿠미 (''사랑과 정의'')
- 난파 켄지 (''태클 맹우 시리즈'', ''어택 액션'', ''점프 사자'')
- 다쓰미 요시히로 (''표류하는 인생''[7], ''극화대학'')
- 데즈카 오사무 (''피닉스'', ''키리히토에게 바치는 노래'', ''아폴로의 노래'', ''MW'')[19][20]
- 마쓰모토 마사히코 (''담배 소녀'')[6]
- 미즈키 시게루 (''미즈키 시게루의 히틀러'')[18]
- 바론 기모토 (''유협전'' 시리즈)
- 사이토 타카오 (''골고 13''[2], ''바롬 1'')
- 사토 마사아키 (''타락의 별'')
- 소노다 코케이 (아리카와 에이이치) (''아이언 머슬'', ''도전 자격'')
- 시라토 산페이 (''카무이'')[8]
- 시모토모 가츠미 (''바퀴벌레 야로'', ''쾌남아 고리이치페이'')
- 이케가미 료이치 (''스파이더맨: 만화''[15], ''I・餓男 (아이우에오 보이)'', ''남자무리'', ''크라잉 프리맨'')
- 이치노세키 케이 (''램프의 아래'')
- 츠게 타다오 (''슬럼 울프'')[21]
- 츠게 요시하루 (''스크류 스타일'')[22]
- 카나에 세이사쿠 (''실험인형 더미 오스카'')
- 카와구치 카이지 (''침묵의 함대'', ''지팡'', ''태양의 계시록'')
- 카지와라 이키 (''가라테 지고쿠편'')[16]
- 코이케 카즈오 (''론 울프 앤드 큐브'')[10]
- 테라자와 타케이치 (''코브라'', ''고쿠'')
- 토치보리 시게루 (''크레이지 해저군함'')
- 하세가와 호세 (''하카타꼬 순정'')
- 하야시 세이이치 (''붉은 엘레지'')[13]
- 호시노 요시노부 (''소우자쿠 교수 시리즈'', ''야마타이카'')
- 히라타 히로시 (''사쓰마 기시덴''[14], ''자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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