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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공투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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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학공투회의는 1960년대 말 일본에서 일어난 학생 운동 조직으로, 기존 학생 자치회의 한계를 넘어선 전투적인 투쟁 방식을 특징으로 한다. 1968년 도쿄 대학과 니혼 대학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대학 내 문제뿐 아니라 사회 전반의 문제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되었다. 전공투는 대학 점거, 바리케이드 봉쇄 등의 전술을 사용했고, 폭력과 자기 부정 등의 특징을 보였다. 전공투의 영향으로 일본 사회와 정치 지형에 변화가 있었으며, 일부 전공투 출신 인사들은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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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학공투회의
기본 정보
전공투 게바헬
전공투 게바헬
일본어 명칭全学共闘会議 (젠가쿠쿄토카이기)
약칭全共闘 (젠쿄토)
조직
창립1965년?
창립자야마모토 요시타카
활동 기간1965년? - 1969년
활동 지역일본 전국
지도자야마모토 요시타카
회원수3000명 내외?
활동
주요 활동무기한 스트라이크
대학 교사 점거
주요 인물
주요 인물야마모토 요시타카 (전 전공투 대표)
이노세 나오키 (전 신슈 대학 전공투 의장)
시오자키 야스히사 (전 신주쿠 고등학교 전공투 활동가)
센고쿠 요시토 (전 도쿄 대학 전공투 활동가)
사카모토 류이치 (전 신주쿠 고등학교 전공투 활동가)
다테마쓰 와헤이 (전 와세다 대학 전공투 활동가)
테리 이토 (전 니혼 대학 전공투 활동가)

2. 역사

전학공투회의(전공투)는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학생운동 조직이다. 각 대학별로 결성되었기 때문에 시기, 목적, 조직, 운동 방침은 서로 달랐지만, 일본대학의 니치다이 전공투와 도쿄대학의 토다이 전공투가 가장 유명했다. 이들은 "대학 해체", "자기 부정" 등의 구호를 내걸고, 시위에서 기동대와 충돌하며 투석이나 "게바봉"(게발트 봉)을 사용하기도 했다.

전공투는 특정 정당의 지시를 받는 조직 운동이라기보다는 대중 운동의 성격이 강했다. 민청계 전학련과 대립했는데, 도쿄 대학 투쟁에서 민청계 전학련은 전공투가 난입하는 가운데서도 대학 당국과 협상을 통해 사태를 종결시키려 했다. 니혼대 분쟁에서는 체육회 계열, 민족파 계열이 전공투와 대립했다.

전공투 운동은 1968년 초부터 1969년에 걸쳐 도쿄대학과 니혼대학의 투쟁을 중심으로 전국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처음에는 각 대학의 개별 문제(학비 문제 등)를 다루었지만, 점차 “대학과 학생・연구자의 본연의 자세를 검토하는 대학의 이념과 학문의 주체를 둘러싼 운동”[57]으로 발전했다.

도쿄대 투쟁에서 “대학해체”, “자기부정” 구호가 등장하면서, 전공투 운동은 대학 내 문제를 넘어 “학생들과 국가권력 간의 투쟁”[57] 형태로 발전했다. 1968년 11월 22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 앞에서 열린 「동대, 일대 투쟁승리전국학생총궐기집회」에는 2만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1969년 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전공투가 봉쇄하고 있던 야스다 강당에 8500명의 기동대가 투입되면서 동대전공투운동은 막을 내렸지만, 전공투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69년에는 일본 주요 대학의 80%에 해당하는 165개교에서 전공투 투쟁으로 바리케이드 봉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좌파 정파 간의 내분, 연합적군아사마 산장 사건, 일본적군의 요도 호 사건 등으로 급진적 학생운동은 지지를 잃었고, 전공투도 급속히 붕괴했다.[59] 1969년 9월에는 전국 78개 대학 26,000명이 참가한 전국전공투 결성대회가 열렸지만, 이미 신좌파 8개 정파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61]

한편, 국회에서는 1969년 8월 3일 사토 내각에서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성립되어[62] 대학 자치가 위협받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9월 들어 대부분의 대학에 바리케이드 해체를 위한 기동대가 투입되었다.

전학공투회의는 대학 투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실현 불가능한 요구들이 이어지면서 점차 동력을 잃고 학생들의 지지를 잃었다.

2. 1. 전사(前史)

전공투 운동 이전 일본 학생운동은 대부분 학생들의 생활 옹호를 목적으로 했으며, 대학 측의 양보를 얻어낸 경우는 드물었다. 이러한 학생운동은 1949년 신제대학 출범 이전부터 있었지만, 수업 거부나 시위에 그쳤기 때문에 대학 당국에 큰 부담이 되지 않았다.

전공투 운동 이전 학생운동의 사례는 다음과 같다.

대학발생 시기주요 내용결과
오차노미즈 여자대학1965년 9월 22일기숙사 규정 개악 반대, 전학 무기한 수업 거부9월 30일 학생대회에서 수업 거부 해제
다카사키 경제대학1965년 9월시 측의 사학화 제안에 반대, 등록금 대폭 인상 반대 투쟁징계 처분자 발생, 영화 《압살의 숲》에서 상세히 다룸
도쿄 상선대학(현 도쿄 해양대학)1965년 11월 5일스트라이크11월 26일 학생대회에서 스트라이크 해제
와세다 대학1965년 12월대학도서관 규정 개정 투쟁, 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제1법학부, 제1상학부, 제1정경학부, 제1이공학부, 제1문학부 연이어 스트라이크 돌입6월 공학부 스트라이크 해제, 문학부 마지막으로 해제하며 투쟁 종식
메이지 대학1966년 11월 25일학비 인상 반대, 이즈미 캠퍼스에서 무기한 스트라이크패배
게이오기주쿠 대학1968년미군 의학부 자금 유입 문제,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유급 문제 등 학생 투표로 봉쇄 해제
주오 대학1966년 12월 8일학생회관 관리운영권 문제, 4천 명 학생 대학 측과 협의,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요구 수용, 25일 바리케이드 해제
국제기독교대학1963년, 1966년등록금 인상 반대 투쟁, 생협설립투쟁, 능력연(能研)테스트 입시대체 및 응시료 인상 반대 투쟁, 본관 점거63명 징계 처분



기존 학생 자치회의 다수결 방식으로는 전투적인 전술이 부결되었기 때문에, 활동가 학생들만의 "공투 회의"가 각지에서 발족했다[22]。 전공투 운동은 본관 봉쇄 및 바리케이드 스트라이크라는 실력 행사를 동반하고, 강사와 교직원의 출입을 저지하는 투쟁 방식으로 발전했다.

2. 2. 발단

1968년 5월, 도쿄국세국이 니혼대학(이하 일대)을 가택수색하여 22억의 용도불명금을 적발했다. 당시 일대에서는 후루타 쥬지로 이사장의 방침에 따라 학생자치회가 인정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 용도불명금 문제를 계기로 대학당국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 5월 23일 지요다구 칸다미사키정의 경제학부 앞에서 일대의 첫 시위인 “이백 미터 데모”가 열렸다.[11] 5월 27일에는 아키타 아케히로를 의장으로 하여 니혼대학전학공투회의(이하 일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이사회는 일대전공투의 요청에 따라 9월 30일 학생과 당국의 협상의 장으로서 “전학집회”를 료고쿠 강당에서 개최했다. 이 집회에는 3만 5천 명의 학생이 참가하여 전공투 측에서는 이것을 노동조합법의 단체교섭에 빗대어 “대중단교”라고 불렀다. 12시간의 협상 끝에 당국은 회계 공개 및 이사진 퇴진 등 일대전공투 측의 요구를 일단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날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대중단교는 상식을 일탈하고 있다”[55]며 참견, 당국이 학생들과의 약속을 철회했다. 료고쿠 강당에는 일본도를 든 체육회 학생들이 난입, 그 직후 돌입한 경찰기동대를 일대전공투 학생들은 박수로 맞이했지만 기동대는 전공투 측 학생들만 진압했다. 이로써 니혼대 분쟁은 진정되지만 일부 일대생들은 도쿄대 투쟁 등에 합류했다.

도쿄대학에서 의대 인턴 문제를 둘러싸고 학생들에게 부당처분을 내린 것을 발단으로 대학당국에 대한 항의 시위가 높아졌다. 야스다 강당을 일시점거한 뒤 7월 5일 물리학과 대학원생 야마모토 요시타카를 의장으로 도쿄대학전학공투회의(동대전공투)가 결성되었다. 동대전공투도 일대전공투와 마찬가지로 대학 내 건물들을 바리케이드 봉쇄하고 당국과의 “대중단교”를 요구했다.

2. 3. 전개

전학공투회의(전공투) 운동은 1968년 초에서 1969년에 걸쳐 도쿄대학과 니혼대학의 투쟁과 병행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요원의 불과 같이"[56] 전국의 대학으로 퍼져나갔다.

전공투는 처음에는 각 대학의 개별 문제(학비 문제 등)를 다루는 조직이자 운동으로서 각 대학의 학생회 테두리를 넘어 결성되었다. 그 뒤 대학 당국의 경직된 대응과 정부기동대의 개입을 경험하는 가운데 점차 전학(全学)화하여 “대학과 학생・연구자의 본연의 자세를 검토하는 대학의 이념과 학문의 주체를 둘러싼 운동”[57]으로 비화했다. 전공투는 현재의 대학은 “제국주의적 관리에 짜 넣어진 「교육공장」에 지나지 않으며, 교수회는 그 관리질서를 담당하는 「권력의 말단기구」”이며, 이런 상황에서 「대학의 자치」는 이제 환상에 지나지 않고, 그러한 관리질서 총체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과제라고 주장하며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 등 폭력에 의한 대학 해체를 주장했다. 또한 신분으로서의 「학생・연구자」를 안으로부터 부정하는 「자기부정」의 사상적 물음이 진행되어야 하며, 전학적 바리케이드 봉쇄는 제국주의 대학 해체의 정치성을 가진 동시에 자기부정의 사상을 갖는다고 여겨졌다.[57]

도쿄대 투쟁에서 “대학해체”, “자기부정” 구호가 등장하고 대학 내 문제의 테두리를 넘어 “학생들과 국가권력 간의 투쟁”[57] 형태로 발전했다. 이는 각 대학의 타협으로 종결될 수 있는 투쟁이 아니었으며, 이후 투쟁 패배 이후 운동이 단숨에 쇠락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학생으로서 와세다대학 투쟁에 참여한 쿠레 모토후사는 “「자기부정」은 「자기긍정」이다. 출세를 위해 학문을 하면 할수록 학문의 본의에서 멀어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은 자기부정이다. 자기부정은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긍정의 결과가 출현할 것”이라고 말했다.[57]

1968년 11월 22일, 도쿄대학 혼고캠퍼스 야스다 강당 앞에서 「동대, 일대 투쟁승리전국학생총궐기집회」가 열리고 2만 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이 궐기대회는 이후 각 대학의 전공투 운동의 원점이자, 그 운동의 빛나는 절정이었다.[57] 11월 1일에는 동대의 오오코치 카즈오 총장・전학부장・평의원이 분쟁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1968년에서 1969년까지 30여 대학이 바리케이드 봉쇄 상태였다.

1969년 1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전공투가 봉쇄하고 있는 야스다 강당에 8500명의 기동대가 공격을 개시, 72시간에 걸친 공방전이 전개되면서 동대전공투운동은 종말로 치달았다(도쿄 대학 야스다 강당 사건). 그러나 동대 투쟁이 짐으로써 전공투 운동은 전국에 들불처럼 번졌다.[57] 1969년 교토대학을 비롯해 홋카이도대학, 도호쿠대학, 히토츠바시대학, 도쿄외국어대학, 도쿄교육대학, 요코하마국립대학, 시즈오카대학, 신슈대학, 가나자와대학, 나고야대학, 오사카대학, 오사카교육대학, 오사카시립대학, 오카야마대학, 히로시마대학, 규슈대학, 구마모토대학, 메이지대학, 와세다대학, 게이오대학, 호세이대학, 니혼대학, 토요대학, 주오대학, 도시샤대학, 리츠메이칸대학, 간사이대학, 간사이가쿠엔대학 등 일본의 주요 국공립대와 사립대 80%에 해당하는 165개교가 전공투투쟁에 의한 전학 바리케이드 봉쇄를 겪었다.

2. 4. 쇠락

일반적으로 1970년대에 들어서 신좌파 정파들 간의 우치게바로 인해 1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고, 특히 연합적군아사마 산장 사건일본적군의 요도 호 사건 등으로 인해 급진적 학생운동은 급속히 지지를 잃었으며, 자연발생적 운동이었던 전공투도 급속히 붕괴했다는 것이 통설이다.[59] 하지만, "어느 당파건, 무당파 운동이건 연합적군 사건으로 동원력이 줄어든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론도 있다.[60]

어쨌든 "일시에 발화했던 전공투운동은 순식간에 진화되었다."[57] 1969년 9월 6일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전국 78개 대학 26,000 명이 참가한 전국전공투(도쿄 대학 전공투 의장 야마모토 요시타카가 의장, 일대전공투 의장 아키타 아키오가 부의장) 결성대회가 있었던 시점에는 이미 중핵파, 사학동, 학생해방전선, 학생인터, 공학동, 반제학평, 프론트, 프로학동 등 신좌파 8개 정파가 “실질적 당파공투” 또는 “캄파니아 조직”을 만들었다고 한다.[61]

한편, 국회에서는 1969년 8월 3일 사토 내각에서 최악의 경우 문부성 명령으로 대학 전체 업무를 중단할 수 있다는 「대학의 운영에 관한 임시조치법」이 성립되었다.[62] 이에 따라 대학 자치를 중시하고 자력해결을 목표로 했던 여러 대학 구성원들 간에 대학이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동요가 확산되었다. 후기 수업이 시작된 9월 들어 대부분의 대학에는 바리케이드 해체를 위한 기동대가 투입되었다.

전학공투회의는 대학 투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 사항들이 이어지면서 점차 동력을 잃고 학생들의 지지를 잃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학들은 실제로 해산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베헤이렌(시민 베트남 평화 연합) 단체의 오다 마코토는 전학공투회의가 도쿄 대학을 파괴하지 못한다면 자신만의 운동을 시작하겠다고 주장했다.[1]

3. 특징

전학공투회의(약칭 전공투)의 가장 큰 특징은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폭력 찬미에 있다. 도쿄대학 강사였던 작가 시바타 쇼는 전공투의 폭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전공투의 두 번째 특징은 기존의 학생자치회, 전학련을 기반으로 하는 학생운동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주오대학 학관투쟁 지도자였던 코우즈 아키라는 "상부 조직으로서 전학련 가입에는 자치회 조직의 특별 참가 결의가 필요하고, 가입금도 상납해야 하며, 임원도 내야 하고, 상명하복의 조직적 구속도 있었다. 하지만 전공투의 최대 특징은 학교 상황에 불만을 가진 뜻있는 사람들이 모여 결맹하면, 마음대로 전공투라고 칭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전공투의 이러한 느슨함과 대충함은, 정치 변혁을 지향하는 의식 있는 학생의 집합체인 전학련 활동가상과는 다른 광범위한 확대를 보였다"라고 말했다.[56]

세 번째 특징은,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개된 68혁명이 그 이전의 학생운동과 차별되는 특징으로서, 학생들이 교육자들을 규탄하는 스타일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파리대학 낭테르교에서 “학생들이 교수와의 관계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은 기묘”하다고 말했다.[64] 전공투는 아카데미션(학인)들이 대학의 “감시/관리체제의 위에 서서만 「양심적」=「진보적」 할 수 있다는 사태에 전혀 무자각”하다고 여기고, “학외에서 「민주적」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학내에서는 학생 탄압을 감싸고 도는 교원들에게 그 기만성을 질책했다.”[61]

전공투 게바 헬름 (나리타 공항 하늘과 땅의 역사관)


전공투는 각 대학 등에서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 시기, 목적, 조직, 운동 방침 등은 각기 달랐다. 그중에서도 일본대학의 '''니치다이 전공투'''와 도쿄대학의 '''토다이 전공투'''가 유명하며, 이후 '''전국 전공투'''도 결성되었다. 매스컴은 도다이 전공투에서 "대학 해체", "자기 부정"과 같은 주장을 내걸었다고 전파했고, 이는 널리 유포되었다. "실력 투쟁"을 전면에 내세우며, 시위에서의 기동대와의 충돌에서는 투석이나 "게바봉"(게발트 봉)도 사용되었다. 특정 당파가 자기의 사상이나 방침을 내세우는 조직 운동이라기보다는 대중 운동의 측면이 있었다고도 한다.

전공투와 가장 대립한 것은 민청계 전학련으로, 도쿄 대학 투쟁에서도 전공투가 난입하는 가운데, 7개 학부 대표단을 주도하여 대학 당국과 확인서를 만들고 종결시켰다. 입시 중단으로 문부성이 움직였을 때에는 스트라이크 해제의 실력 행사를 하여, 이에 전공투도 응전함으로써 기동대 도입의 계기가 되었다. 니치다이에서 전공투와 대립한 것은 체육회 계열·민족파 계열이었다.

4. 평가

전학공투회의(전공투)에 대한 평가는 현재까지도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오구마 에이지는 저서 『1968』에서 전공투 운동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소학교 및 중학교 시절 전후민주주의의 이상적 교육을 받은 이들이 수험 경쟁에 죄책감을 느끼고 대학의 대량생산 교육에 환멸을 느꼈다.
  • 일본이 개발도상국이던 시절에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고도경제성장의 결과로 선진국이 된 일본 사회에 위화감을 느끼고 풍요로운 사회 특유의 "현대적 고민"을 안고 있었다.


오구마는 일본의 전공투 세대가 이후 정치 활동에 관여한 사람이 적은 이유를 "급속한 기세로 선진국화한 일본에서 학생운동은 「정치운동」이 아닌 「자기표현」을 위한 것이 아니었나"라고 추론했다. 그러나 오구마의 관점은 “‘자기’를 찾고 ‘자기’를 표현하려고 했지만 ‘좌절’했다는 소외이론에 집약시키는 통념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있다.[61]

오구마의 저서는 오다 마코토와 츠루미 슌스케로 대표되는 베평련에 가능성의 핵심을 두고 “전후민주주의의 구제와 재론을 위한 패러다임 창출을 목적”으로 하고 있어, “사실오인이나 독단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자료 문맥의 횡령”이라는 비판을 받는다.[65]

스가 히데미는 『혁명적인, 너무나 혁명적인: 1968년 혁명 시론』에서 이매뉴얼 월러스틴장프랑수아 리오타르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참조하여, 전공투 운동을 세계사적 사건인 68혁명과 미셸 푸코, 질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의 "68 사상"에 병렬되는 일본 내의 사건으로 추출하려 했다.

츠무라 타카시는 1984년 『중앙공론』에서 “대의에 기대지 않고, 소비사회의 상대주의에 해체당하는 일 없이, 어떻게 국가와 모든 국면에서의 대치를 계속할 수 있는가, 그 「교통」을 어떻게 가능케 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지난 십여년 간 십구백만 명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모색해 온 것이다. 이 실천의 다발과 그물코야말로 전공투의 「총괄」이라 할 것이다.”라고 평가했다.[66] 실제로 전공투를 경험한 사람들이 생협운동, 생태운동, 여성주의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에서 전공투 운동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적었다. 1968년 내각부 여론조사[67]에서 학생운동 지지 또는 공감 응답자는 70% 정도였다. 부모에게 학비를 지원받는[68] 학생이 공부보다 운동에 몰두하는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제대해체”, “입시분쇄”, “엘리트로서의 자기부정”을 주장했던 야마모토 요시타카는 운동 종식 후 슨다이 예비교의 입시강사가 되었다. 그는 전공투에 관해 일절 발언하지 않았지만, 1992년 운동 당시 자료를 국립국회도서관에 기증했고, 2015년 도쿄대 투쟁 회고록 『나의 1960년대』를 출간했다.

전공투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듯한 폭력 찬미
  • 기존 학생회, 전학련 기반 학생운동과 다름
  • 대학 교원과 학생의 관계에서 교원을 규탄하는 스타일 등장.


마루야마 마사오는 도쿄대 전공투의 자료 파괴를 "나치도 하지 않았던 만행"이라고 비판했다.[21]

사토 마사루는 전공투가 대의제 민주적 절차를 따르지 않는 점을 지적하며, "근본적인 부분에서는 1930년대의 익찬 운동의 부활이기도 하고, 소비에트적이기도 하다. 혹은 나치와 비슷한 부분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22]

5. 영향

전학공투회의(전공투)를 비롯한 1968년 학생운동에서는 세계적으로 대학본부 점거와 대중단교 전술이 채택되었다. 이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생디칼리슴의 전술이 냉전 시대에 부활한 드문 현상이었다.[69] 1968년의 문제 제기는 대의제 밖으로 넘쳐흐른 '정치'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기존 정치사회제도와 민주주의 재검토로 이어졌다.[70]

무라카미 신이치로는 서구 좌파 정당들이 68세대 반란에 혼란을 겪었지만 그 에너지 일부를 흡수해 크게 변모한 반면, 일본에서는 68세대가 기업사회에 잠식되면서 기존 좌파 정당들에 변화가 거의 없었고, 이것이 전반적인 "좌익의 썰물"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한다. 즉, 전공투 세대(단카이 세대)는 고도경제성장 절정기에 정치의 계절을 '졸업'하고 '기업사회' 주요 담당자가 됨으로써 서구 68세대와 다른 길을 걸었다.[71]

1969년 12월 제32회 중의원의원 총선거에서 여당 자민당은 20석 증가한 300석을 넘었다. 반면 사회당은 약 50석 감소한 90석으로 대패했다. 공명당공산당은 약진했다. 투표율은 68.5%로 급락, 이후 무당파층이 급증하며 사회당 지지율은 정체되었다.

이시카와 마스미는 사회당 지지율 급락이 전공투 운동과 직접적 연관이 있다고 주장했다.[72] 사회당은 '일부 학생들의 폭력적 행동'을 전면 부정했지만, 신좌파·전공투 세력과 엄격히 구별되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이시카와는 이런 태도가 프라하의 봄, 문화대혁명 등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겹쳐 사회당 지지층 대량 기권 및 이탈, 무당파층 증가로 이어졌다고 지적한다.

반면 공산당은 도쿄대 투쟁 분쇄를 직접 지도하며 전공투와 대결했다. 공산당은 의회주의 전환 과정에서 폭력투쟁을 내건 전공투와 대립했다. 민청은 신좌파와 항쟁하는 사수대로 새벽행동대를 조직했으나, 게발트봉을 남기지 않고 철수해 우치게바 이미지를 피하는 데 성공했다.[74]

전공투 행동은 대학뿐 아니라 외부에도 영향을 미쳤다. 1967년 4월 전공투 스트라이크로 중앙 경마 일부 일정이 중지·연기되어, 벚꽃상과 사츠키상이 같은 날 다른 경마장에서 시행되었다.[44]

6. 전공투 출신 유명인

7. 한국과의 관련성

한국의 민주화·학생 운동에서는 "전공투처럼 싸우자"가 구호가 되었다고 한다.[4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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