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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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계행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연산군 시대에 간언을 하다 낙향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았으며, 청백리의 표상으로 칭송받았다. 안동 김씨 출신으로, 김종직과 교류하며 학문과 도덕을 중시했고, 성희안 등과 교류하며 강직한 신하로 이름을 알렸다. 1498년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곤경을 겪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묵계서원에 배향되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김계행은 1431년(세종 13년) 안동 풍산현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고, 10세에는 정식으로 학문에 입문하여 글의 뜻을 깨우치고 스스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14세에는 아버지 김삼근을 따라 비안현 향교에서 수학하였다.
1706년(숙종 32년) 지방 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 길안 묵계에 묵계서원을 짓고 제사를 지냈다. 1859년(철종 10년)에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처음 내려진 시호는 정헌(定獻)이었으나 1868년(고종 5년) 3월 12일 문헌(文獻)으로 바뀌었다. 문집으로는 『보백당선생실기』 4권 2책이 있다. 이 문집은 1732년(영조 8년)에 처음 간행되었고, 1901년(광무 5년)에 중간본이 나왔다.
2. 생애
1447년(세종 29년)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사림파의 영수 김종직과 평생에 걸쳐 깊은 교분을 맺었다. 성주 향학교수 시절, 조카 학조대사가 관직을 청탁하려 하자 크게 꾸짖고 다시는 만나지 않은 일화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1480년(성종 1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종부시 주부를 시작으로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 탓에 1482년 고령 현감으로 좌천되었으나, 청렴하고 근면한 자세로 백성을 다스려 짧은 기간 안에 교화를 이루고 기강을 바로 세웠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후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간쟁 업무에 힘썼다.
김계행은 조정과 왕실의 병폐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에게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풍산에 '보백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같은 해 무오사화 때 김종직과의 친분으로 의금부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났다.
1506년(중종 1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하로서의 도리와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만년에는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만휴정을 짓고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냈다. 1517년(중종 12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2. 1. 출생과 가계
김계행은 안동 풍산현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서 2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자질을 보였으며,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이미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부지런히 글을 읽었다.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으며, 1444년 14세 때 부친(김삼근)이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2. 2. 초기 생애와 수학
김계행은 안동 풍산현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다.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했고, 10세에 정식으로 학문의 길에 들어섰는데, 이미 글의 뜻을 이해하고 스스로 공부했다. 14세에는 아버지 김삼근이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공부했다.
1447년(세종 29년) 17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과 교류하였다. 김종직은 사림파의 영수로, 김계행은 그와 평생 동안 학문적 교류를 이어갔다.
2. 3. 관직 생활과 정치 활동
김계행은 1447년(세종 29년) 17세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과 교류하였다. 성주 향학교수 시절, 조카 학조대사가 국사의 신분으로 찾아왔으나, 관직 청탁을 할까 염려하여 엄하게 꾸짖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다. 이 일화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준다.
1480년(성종 11년) 문과에 급제한 후, 종부시 주부, 사헌부 감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1482년 고령 현감으로 좌천되었다. 고령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청렴하고 근면한 자세로 백성을 다스려, 짧은 기간 안에 교화를 이루고 기강을 바로 세웠다.
이후 내직으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대사간, 성균관 대사성 등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간쟁 업무에 힘썼다. 홍문관에서는 부수찬, 부교리, 교리, 응교, 전한, 부제학을, 사간원에서는 정언, 헌납, 사간, 대사간을 역임했다. 또한 사헌부 장령, 승정원 동부승지 및 도승지, 성균관 대사성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492년부터 1499년까지 김계행은 승정원 동부승지,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도승지, 첨지중추부사, 사헌부 대사헌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김계행은 조정과 왕실의 병폐에 대해 직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을 것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2. 4. 은거 생활과 사상
김계행은 1498년(연산군 4년) 연산군 초기의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잡고자 여러 차례 간언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에서 물러나 풍산 사제(笥提)에 있는 집 근처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는 자신의 시구에서 따온 것이다.
1461년(세조 7년) 31세 때,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별도의 생활 근거지를 마련하고 만년을 보낼 휴식처로 삼고자 하였다. 특히 1501년(연산군 7년) 71세 때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라는 이름처럼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던 장소였다.
보백당은 첫째 부인 이천 서씨와 23세에 사별한 후, 24세 때 의령 남씨 사헌부 장령 남상치의 차녀와 재혼하였다. 장인 남상치는 1453년(단종 1년) 계유정난으로 단종이 폐위되자 길안 묵계로 낙향하여 쌍청헌(雙淸軒)을 짓고 은둔 생활을 하였다. 장인이 묵계에 지은 쌍청헌 정자를 보백당이 71세 때 중수하고 '늦게 얻은 휴식'이라는 뜻의 만휴정이라 불렀다. 쌍청이란 '맑은 것 두 가지' 즉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의미한다. 보백당이 묵계로 거처를 옮긴 것은 처가 장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31세 때 이미 거묵동(묵촌, 묵계)의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땅과 집을 마련하고 금산촌(소산)과 묵계를 오가며 생활하다 은퇴 후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보백당에게 있어 묵계는 일찍이 만년을 위해 준비된 땅이었던 것이다.
2. 5. 무오사화와 시련
김종직과 평생 교유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 때 어세겸, 성희증 등 10명과 함께 의금부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났다.
2. 6. 중종반정과 만년
1506년(중종 1년) 76세에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 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1517년(중종 12년) 12월 17일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1706년(숙종 32년) 지방 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 길안면 묵계리에 묵계서원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년)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이었는데, 1868년(고종 5년) 3월 12일 문헌(文獻)으로 시호가 추증되었다.
3. 사후 평가와 기념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피실골에 있으며, 묘표는 외손자인 영의정 유성룡이 내용을 짓고, 외현손인 직장(直長) 박수근(朴守謹)이 글씨를 썼다. 그 후 비석이 훼손되고 묻혀 11대손 김이선(金履善)이 다시 쓰고 외후예(外後裔) 이장우(李章瑀)가 글씨를 써서 새로 세웠다.
보백당 김계행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 영남 지방의 거유 김종직과 동갑으로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교류하였다. 조정에 나아가 성종을 보필하며 이름난 신하로 널리 알려졌다. 특히 영의정 인재(仁齋) 성희안과 친분이 두터웠다. 성희안은 숭유 정책을 펼친 신진 사류로서 임금이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으며, 1506년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 중종반정을 성공시킨 1등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김계행은 대사간을 지내며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하여 성희안, 성희증 형제가 존경하는 친구였다. 한편, 김계행은 장동 김씨로 불리는 (新)안동 김씨 청음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 가문이 일어나는 시기에 안동 김씨 가문을 연 중흥 시조나 다름없었다. 조선 전기 안동 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던 원로 문장가였다. 김계행은 "청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하여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끗하기가 백옥과 같았다. 절개는 얼음처럼 굳건했다. 외손자 유성룡은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고 칭송했다.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증조부 김득우(金得雨) 전농정, 유성룡의 7대조부인 서운정 유개(柳開)의 사위, 유성룡의 8대조부인 창평현령 유난옥(柳蘭玉)의 손녀사위 조부 김혁(金革) 봉례랑, 감찰규정 권희정(權希正)의 사위, 우의정 권진(權軫)과 처남매부 관계 부친 김삼근(金三近) 봉화현감, 비안현감 역임 형님 김계권(金係權) 한성부판관, 이조판서 예문관대제학 제평공 권맹손의 사위 아들 김극인 영릉참봉 아들 김극의 진사 아들 김극예 생원 아들 김극지 1490년 21세 때 요절 아들 김극신 무과, 문천군수 장녀 박눌(朴訥, 1448~1528)에게 출가 창락도찰방, 증병조참판, 행정(杏亭) 차녀 유자온(柳子溫, 1453~1502)에게 출가 진사, 증판서, 유성룡의 증조부 3녀 남한(南漢)에게 출가 상장군 맏조카 학조(學祖) 김영형(金永衡) 세조~연산군 국사(國師), 등곡, 황악산인 둘째 조카 김영전(金永銓) 사헌부감찰, 합천군수 셋째 조카 김영균(金永鈞) 진사, 봉사 넷째 조카 김영추(金永錘) 합천군수, 수원부사 다섯째 조카 김영수(金永銖) 사헌부장령 종손자 김영(金瑛) 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삼당 종손자 김번(金璠) 시강원 문학, 평양서윤, 증이판 종손자 김순(金珣) 찰방, 형조좌랑, 수군절도사 종증손자 김생해(金生海) 신천군수, 증좌찬성,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의 사위 종현손 김대효(金大孝) 삼가현감, 증영상 종현손 김원효(金元孝) 군기시정, 증이판 증현손 김극효(金克孝) 돈녕부도정, 증영상, 사미옹, 좌의정 임당 정유길의 사위 증현손 김기보(金箕報) 거창현감, 회인현감 증현손 김성보(金星報) 원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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