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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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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학조는 조선 세조 때 승려로, 불교 진흥에 기여하고 팔만대장경 수호에 공헌했다. 안동 학가산에서 출가하여 삼막사에서 득도했으며, 세조의 신임을 받아 월인석보 간행,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 금강산 유점사 중건, 해인사 중수 등 왕실 불사에 참여했으며, 홍길동에게 무술과 병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말년에는 해인사에서 대장경을 간행하고 입적했으며, 부패와 권력 남용으로 사림의 비판을 받았다. 특히 영응대군 부인과의 간통 사건은 무오사화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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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조
기본 정보
이름학조
한자 표기學祖
속성미상
출생미상
사망1364년 (공민왕 13년)
국적고려
활동 정보
직업승려, 시인
법명학조 (學祖)
별칭혜원 (惠元)
종파선종
스승석옹
주요 활동공민왕의 왕사
대표 작품
작품《학조가》
기타《영가집》 서문
생애
출생 및 초기 생애출생 시기는 미상이며, 속성은 알려져 있지 않다.
구법 및 선종 수학석옹(石翁)에게서 선종을 수학하였다.
1348년(충목왕 4년)에 원나라에 가서 고승(高僧)의 법을 묻고 돌아왔다.
공민왕의 왕사 책봉1351년(공민왕 즉위년)에 공민왕이 즉위하자 왕사가 되었다.
왕사로 있으면서 왕에게 불교의 교리를 강론하고, 왕의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학 활동시에 능하였으며, 특히 불교적인 내용을 담은 시를 많이 지었다.
작품으로 《학조가》가 전하며, 《영가집》 서문을 짓기도 했다.
사망1364년(공민왕 13년)에 사망하였다.

2. 생애

학조는 어린 나이에 안동 학가산 중대사와 애련사(艾蓮寺)에서 출가하였으며, 안양시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등곡대(燈谷臺)에서 득도하였다.[1] 세조의 신임을 얻어 신미, 학열 등과 함께 불교 진흥에 힘썼다.[1]

월인석보 간행, 불경 국어 번역, 훈민정음 활용에 기여했다.[1] 속리산 복천사 대법회, 금강산 유점사 중건, 해인사 중수 및 팔만대장경 보관 등에도 참여했으며, 특히 팔만대장경을 수호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1]

의적 홍길동에게 학문과 무술을 가르친 인연도 있다.[1] 1500년(연산군 6년)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대장경 3부를 간행하고 발문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1] 갑자사화무오사화의 화를 피했으며, 1520년(중종 15년)에는 왕명으로 해인사 대장경 1부가 추가 간인되었다.[1]

말년에는 학가산 애련사로 돌아와 입적(入寂)하였다.[3] 그의 부도는 법주사 복천암에 스승 신미대사의 부도와 함께 있으며, 1514년(중종 9년)에 건립되었다.[4] 2004년 보물 제1418호로 지정되었다.[4]

2. 1. 출가

어린 나이에 일찍이 안동 학가산 중대사와 애련사(艾蓮寺)에서 출가하였으며, 현 안양시 소재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등곡대(燈谷臺)에서 득도하였다.[1]

학조대사가 승려가 된 연유에 대한 전설이 소산마을에 전해 내려온다. 학조가 집에서 글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던 어느 날, 풍산 금산촌(소산리) 마을을 지나가던 노승이 학조의 관상을 보고 학조의 아버지에게 "이 아이를 제게 주시어 절로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학조의 아버지 김계권은 그 까닭을 물었고, 노승은 어린 학조를 가리키며 "제 말이 미심쩍으시면 이 아이의 발바닥 금(족상)을 보십시오. 이대로 속세에 두면 이 아이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큰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학조의 아버지가 노승의 말대로 발바닥을 보니 과연 임금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이에 학조의 부모는 13세의 어린 학조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한다.[1]

2. 2. 불교 진흥 활동

단종의 죽음 이후 죄책감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한 세조를 만났으며, 신미, 학열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1]

1459년(세조 5년) 신미, 학열과 함께 월인석보를 간행하고,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다.[1] 특히 스승 신미를 도와 훈민정음 창제 및 한글 활용에 기여하였다.[1]

1464년(세조 10년) 속리산 복천사에서 임금을 모시고 신미, 학열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1] 1467년(세조 13년) 세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에 보내어 유점사를 중건하였다.[1] 1468년에는 신미, 학열과 함께 설법하여 양반 사대부들 역시 불교에 귀의하거나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1] 그해 1월 역말(驛騎)을 받고 고성유점사로 파송되었으며,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匠人) 15인에게도 또한 왕실에서 역말을 내려 주었다.[1]

1468년 4월 왕명을 받아 승려 학열과 함께 사신 접대를 준비하였다.[1] 1476년 《천수경》을 언해, 교정하였으며,[1] 1482년(성종 13년) 정현왕후의 명으로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의 번역을 완성하였다.[1] 1488년(성종 19년)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 중수 및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경판당을 중창하였다.[1] 학조의 최고 공적은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1] 이때 해인사 경내에 세조의 원당(願堂)이 설치됨으로써 해인사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1]

2. 3. 홍길동과의 인연

가출하여 떠돌던 의적 홍길동은 김천 황악산 직지사(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에서 학조대사를 만난다. 학조대사는 홍길동의 좌절과 억눌린 꿈, 그리고 희망을 보고 학문과 무예에 남다른 그를 절에 머물게 하면서 병법과 무술을 가르쳤다. '황악산인(黃岳山人)' 이란 도호는 이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1]

2. 4. 말년과 입적

1500년(연산군 6년)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행, 인쇄하고 직접 그 발문을 지었다. 여러 부패와 이권행위 개입 등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갑자사화무오사화의 칼을 피해 중종 반정 때까지도 살아 남았다.[1] 1520년(중종 15년)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가 간인 되었다.[1]

말년에는 출가한 사찰인 학가산 애련사(艾蓮寺)로 다시 돌아와 입적(入寂)하였다.[3]

학조대사의 부도는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스승 신미대사(혜각존자) 부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1480년 신미대사 부도를 세우고 34년 후인 1514년(중종 9년) 5월에 신미대사 부도 옆에 건립했다.[4] 탑의 팔각중대석 두면에 ‘正德九年甲戌五月日立(정덕구년갑술오월일립)’그리고 ‘學祖燈谷和尙塔(학조등곡화상탑)’이란 5행의 명문이 있어 1514년(중종 9년)에 건립 되었음을 알게 한다.[4] 2004년 4월 5일 지방문화재 13호에서 보물(보물 제1418호)로 지정되었다.[4]

3. 권력 남용과 비판

학조는 왕실의 위세를 이용하여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갈아치우고,[1]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영응대군의 땅과 백성을 사취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1] 이러한 비리 행위는 논란이 되었으나 왕실의 무마로 덮어졌지만, 연산군 때 다시 문제가 되었다.

3. 1. 사림의 비판

사림파세조정희왕후의 총애를 받던 학조의 비리와 부패를 비판했다. 특히 학조가 왕실의 위세를 이용하여 해인사 주지를 자신의 수하로 교체한 사건과,[1]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영응대군의 토지와 백성을 사취한 사실을 문제 삼았다.[1] 이러한 비판은 왕실의 무마로 덮어졌으나, 사림파는 부패한 승려와 정계의 유착, 왕실의 비호 문제를 계속 제기했다. 이 문제는 연산군 때 다시 불거지게 된다.

학조는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와 간통했다는 추문에도 휩싸였다.[2] 김종직은 이를 비판하고 조롱했으며, 그의 제자들은 이 사실을 왕조실록에 기록하여 무오사화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2]

세조 말년부터 관직에 진출한 사림파는 학조의 활동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사림들은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려 했으나, 세조와 정희왕후 등 불교를 옹호하는 왕실 때문에 왕실 불사를 공개적으로 반대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 관료들은 대군 부인들의 사찰 출입을 승려와의 스캔들로 만들어 불사를 막으려 했다.

3. 2. 영응대군 부인과의 간통 사건

세조와 정희왕후의 총애를 받던 학조에 대한 추문은 사림파의 불교 비판의 주요 소재가 되었다.[1] 학조는 영응대군의 부인 송씨와 간통하였는데, 평소 그를 혐오하던 김종직은 이를 비판, 조롱하였다.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군장사란 절에 올라가 설법을 듣다가 계집종이 깊이 잠들면 학조와 사통을 했다.[2] 이는 하녀에 의해 발설되어 알려졌고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박경은 김일손에게 홍인문 밖에 '영응대군 부인 송씨가 중 학조와 사통을 했다'는 방문이 붙은 것을 알렸고,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적는 바람에 박경은 호된 고문을 당하고 겨우 살아났다.[4] 이 사건은 후일 김종직의 제자들이 왕조실록에 기록함으로써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다.

세조 말년부터 관직에 진출한 사림파는 학조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학조가 활동하던 시기는 세조 때부터 중종 때까지로, 사림들의 정계 진출이 본격화된 시점이었다. 사림들은 성리학을 통해 지배권을 강화하고자 했지만, 세조와 정희왕후, 인수대비, 인혜대비 등 불교를 옹호하는 왕과 왕비들로 인해 대놓고 왕실 불사를 반대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의 관료들은 대군 부인들의 사찰 출입을 스님과의 스캔들로 둔갑시킴으로써 이들의 불사를 막고자 하였다.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김삼근(金三近)봉화현감, 비안현감 역임
부친김계권(金係權)한성부판관 역임, 권맹손의 사위
삼촌김계행(金係行)성균관대사성, 증이조판서, 보백당
동생김영전(金永銓)사헌부감찰, 합천군수 역임
동생김영균(金永鈞)진사, 봉사 역임
동생김영추(金永錘)합천군수, 수원부사 역임
동생김영수(金永銖)사헌부감찰, 영천군수, 사헌부장령 역임
조카김영(金瑛)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삼당
조카김번(金璠)시강원 문학, 평양서윤, 증이판
조카김순(金珣)찰방, 형조좌랑, 수군절도사 역임
종손자김생해(金生海)신천군수, 증좌찬성, 성종의 아들 경명군 이침(李忱)의 사위
종증손자김대효(金大孝)삼가현감, 증영상
종증손자김원효(金元孝)군기시정, 증이판
종증손자김극효(金克孝)돈녕부도정, 증영상, 정유길의 사위


참조

[1] 서적 사화로 보는 조선 역사 석필 2005
[2] 서적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가람기획 1999
[3] 서적 조선 선비 살해사건 다산초당 2006
[4] 뉴스 말과 글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http://www.pressian.[...] 프레시안 2007-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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