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교신은 일제강점기 무교회주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 언론인이다.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으며, 귀국 후 함석헌 등과 함께 월간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며, 1940년에는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을 간행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추방되었고, 1942년에는 성서조선 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광복을 앞둔 1945년 발진티푸스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상은 소설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 한국의 기독교계 인사 - 장기려
장기려는 일제강점기부터 대한민국에서 의사, 교육자,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 간암 환자 간 대량 절제술 성공, 복음진료소 설립을 통한 무료 진료, 청십자 의료보험조합 창설 등 의료 발전에 기여하고 봉사와 박애를 실천하여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린다. - 우치무라 간조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우치무라 간조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 무교회주의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무교회주의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김교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원어 이름 | 金敎臣 |
별명 | 양칼 |
출생일 | 1901년 4월 18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함경남도 함흥군 |
사망일 | 1945년 4월 25일 |
사망 장소 | 일제 강점기 조선 함경남도 함흥부 |
국적 | 대한제국 |
종교 | 개신교 |
직업 | 종교인, 교육가 |
학력 | 도쿄 고등사범학교 지리학과 전문학사 |
부모 | 아버지 김염희(金念熙), 어머니 양신(楊愼) |
2. 생애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19년 일본 정칙영어학교에 유학하여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경성 양정고보, 제일고등보통학교,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7년 함석헌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잡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었으나 창씨개명과 일본어 강요에 응하지 않았다. 1944년 흥남의 일본 질소 비료 공장에서 세틀먼트 활동을 하다가 1945년 4월 발진티푸스로 사망하였다.[3]
2. 1. 출생과 성장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본 유학을 가기 전까지 함흥에서 성장하였다.2. 2. 일본 유학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했다.[1] 1920년 도쿄의 호리네스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고, 1921년 우치무라 간조의 로마서 강해에 감명을 받아 이후 성서 집회에 출석했다.[2]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지리·박물과로 전과하였고, 1927년에 졸업하였다.[1] 도쿄 유학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고 성서 중심의 무교회주의를 주창하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와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1]2. 3. 귀국 후 교육 활동
도쿄고등사범학교 이과 제3부를 1927년에 졸업하고 귀국한 김교신은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1928년부터 경성의 양정고보, 1940년에는 제1고등보통학교, 1941년에는 개성의 송도고보에서 지리학, 박물학 교사로 근무하며 학생들을 가르쳤다.[2] 그는 기숙사 학생들을 지도하고, "무레사네" 모임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전인교육에 힘썼다.[2] 유달영, 윤석중, 손기정 등 많은 제자들이 김교신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강건한 체력과 곧은 성격, 날카로운 외모로 "양칼"이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눈물을 자주 흘릴 정도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2. 4. 성서조선 발행
1927년 7월 김교신은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함께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까지 발행하였다. 《성서조선》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주장하며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다. 김교신은 잡지 교정으로 눈이 충혈되고 학교 일과 잡지 발행을 같이 하느라 과로로 병이 날 정도로 열심히 일했으며, 혼자서 수금, 주필, 사무, 배달, 취재, 교정, 교열을 담당하였다.[3] 그러나 김교신은 서점에 배달하러 갈 때마다 “이것도 잡지냐, 팔리지도 않는 잡지를 왜 만드냐”[4]와 같은 모욕을 겪기도 했으며, 같은 기독교인들과의 갈등[5], 조선총독부 검열로 인한 잡지 발간 지연 등 늘 폐간 직전의 위기와 싸워야 했다.1942년, 이른바 성서조선의 권두문 "조와(弔蛙, 얼어 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는 뜻)"로 인한 필화 사건이 발생하여 김교신은 1년여의 옥고를 치렀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 김교신은 "조와" 사건 이전에도 이미 조선총독부의 감시하에서 돼지(군국주의 국가들)[6], 북쪽 아이(나치 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저먼 셰퍼드(나치 독일)[7],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 정권 치하의 이탈리아)[8]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일제를 비판하고 있었다.
2. 5. 성서조선 사건 이전의 우화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조와" 사건이 일어난 1942년 이전에도 이미 조선 총독부의 감시 아래 돼지(군국주의 국가들)[6], 북쪽 아이(나치 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저먼 셰퍼드(나치 독일)[7],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정권 치하의 이탈리아)[8]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비판하고 있었다.2. 6. 죽음
1944년 흥남의 일본 질소 비료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를 위한 세틀먼트 활동에 종사했지만, 광복을 앞둔 1945년 4월 발진티푸스로 급서했다.[3] 흥남 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매우 성실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1]3. 사상
김교신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21년 우치무라 간조의 로마서 강해에 감명을 받아 성서 집회에 출석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다.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졸업 후 귀국하여 교사로 재직하면서,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주장했다.
김교신은 교회라는 제도나 형식보다는 예수와 성서에 근거한 조선을 위한 기독교를 추구했으며, 이는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얼에 맞는 기독교 사상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1940년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을 간행했으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추방당했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투옥되었으나 비전향을 관철했으며,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강요에도 응하지 않았다.[2]
3. 1. 조선적 기독교
김교신은 교회라는 조직과 그 속에서 유지되어 온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 곧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1]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얼에 따른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를 추구하였다. 1927년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설파하였다.[2]3. 2. 무교회주의
우치무라 간조의 로마서 강해에 감명을 받은 김교신은 송두용, 유석동, 양인성, 정상훈, 함석헌 등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기 위한 무교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1] 김교신이 생각하는 기독교는 교회라는 조직과 형식이 아닌, 예수와 성서 위에 세워진 조선을 위한 기독교였다. 즉, 선교사들의 사상적 지배[1]에서 벗어나 한국인의 얼에 따른 기독교 사상을 생각하고 실천하는 기독교였다.1927년 김교신은 함석헌 등 무교회주의 동지들과 함께 『성서조선』지를 창간하여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며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자"고 주장하며 조선적 기독교를 추구했다. 1940년에는 『우치무라 간조와 조선』을 간행했으나, 조선총독부 경찰에 의해 추방당했다. 1942년에는 동지들의 조선의 독립 주장이 치안유지법 하에서 필화로 탄압받아(「성서조선 사건」) 1년간 투옥되었으나 비전향을 관철했으며,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강요에도 응하지 않았다.[2]
3. 3. 반제국주의
김교신은 1927년 7월 월간 동인지 《성서조선》을 창간하여 1942년까지 잡지 발행에 힘썼다. 그는 잡지 발행을 위해 혼자서 수금, 주필, 사무, 배달, 취재, 교정, 교열을 담당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3] 그러나 서점 배달 시 "이것도 잡지냐, 팔리지도 않는 잡지를 왜 만드냐"와 같은 모욕을 겪기도 했다.[4] 기독교인들과의 갈등,[5] 조선 총독부의 검열로 인한 잡지 발간 지연 등 여러 어려움에 직면했다. 결국 1942년 '조와(弔蛙, 얼어 죽은 개구리를 애도한다는 뜻)'라는 권두언으로 인한 필화사건으로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성서조선》은 폐간되었다.김교신은 '조와' 사건 이전에도 조선 총독부의 감시하에서 돼지(군국주의 국가들),[6] 북쪽 아이(나치 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저먼 셰퍼드(나치 독일),[7]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 정권 치하의 이탈리아)[8]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1942년 동료의 조선의 독립 주장이 치안유지법 하에서 필화로 탄압받아(「성서조선 사건」) 1년간 투옥되었으나 비전향을 관철했으며, 창씨개명과 일본어 상용 강요에도 응하지 않았다.
4. 일기
김교신의 기독교 사상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기를 읽는 것이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에 〈일기〉를 연재했는데, 노평구의 《김교신 전집》은 부키에서 3권의 단행본으로 만들어졌고, 익투스에서 김교신 선생의 일기를 정리해서 책으로 만들기도 했다. 일기 내용에는 지리·박물 수업을 위해 찾아간 광산에서 만난 가난한 청소년 노동자들에 대한 슬픔[9], 애국심[10], 사회주의자였던 친구 한림과의 깊은 우정[11],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12], 사회주의 유물론의 늪에 빠진 제자에 대해 애통해 하는 모습,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잘 된다는 믿음, 기독교 신앙은 예수의 복음을 고난으로써 따름이지 교회생활이나 살아서는 부귀영화 누리다가 죽어서 천당을 덤으로 얻으려는 값싼 기복신앙이 아님을 말하는 이야기, 동네 장로교회에 온 개신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말은 화려하나 내용은 없다고 날카롭게 지적하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5. 평가와 영향
김교신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 교육계, 종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글은 해방 직후 한국어 교육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는 후배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조정래 작가는 소설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김교신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는데, 소설에서 김교신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기독교 근본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편협함과 정복성에서 벗어나 조선 민족의 기독교를 만들고자 한 기독교 사상가로 그려진다.
5. 1. 해방 이후의 영향
김교신의 글은 해방 직후 한국어 교육 교본으로 사용될 정도로 뛰어났으며, 그의 글에 담긴 투철한 교육 철학과 교육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는 후배 교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1]5. 2. 문학에서의 언급
조정래 작가는 소설 《아리랑》과 《태백산맥》에서 김교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소설에서 김교신은 직접 등장하지 않지만, 기독교 근본주의를 따르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편협함과 정복성에서 벗어나 조선 민족의 기독교를 만들고자 한 기독교 사상가로 그려진다.[4] 《아리랑》과 《태백산맥》에 등장하는 기독교 사회주의를 실천하려는 진보적인 기독교인인 고서완은 김교신의 사상에 동의하여 성서조선을 구독하고, 서민영은 기독교 근본주의자인 황순직에게 선교사의 영향에서 벗어나 기독교가 한민족의 종교가 되도록 노력했던 김교신의 사상을 설명한다.[4]6. 비판
김린서 목사는 김교신이 일본인 우찌무라 간조를 추종한 것에 대해,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상황에서 왜 영적으로도 일본의 식민지를 자처하느냐며 못마땅해했다.[13]
하지만 당시 일제는 친일 교회만을 남겨두었기 때문에, 오히려 한국 교회는 대부분 신사참배 등 반성서적인 일제에 열성적으로 찬동하는 친일파였다. 반면에 우찌무라 간조는 일본의 전쟁과 식민지 등 일본제국주의 자체를 맹렬히 비난하며 반대해왔다.
나라 전체가 식민지화와 전쟁을 찬성하고 한국인을 개 취급하는 일본에서의 유학 시절, 우찌무라 간조가 한국 식민지화와 제국주의를 비난하고 반대하는 것은 김교신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그는 무교회주의에 감명받았다기보다 제국주의 반대에 감명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당시 일본과 한국의 대부분 교회는 전쟁을 일으켜 타국민을 학살하고 남의 나라를 빼앗는 반성서적인 친 제국주의, 친일파였다. 일제가 한국에 친일, 친제국주의 교회만을 살려두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교회에 참여하지 않는 무교회를 실천한 것은 친일, 제국주의 교회를 한정한 것이지, 하나님의 교회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김교신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5년 죽음을 맞이해 진정한 한국 교회의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가 일평생 보아온 것은 친일, 친제국주의 교회였다.
참조
[1]
웹인용
http://sgti.kehc.org[...]
2008-05-13
[2]
간행물
다시 읽고 싶은책-노평구의 김교신 전집
기독교사상
2003-01
[3]
일기
1931-01-31
[4]
일기
1931-04-06
[5]
일기
1934-12-16
[6]
일기
1938-06-10
[7]
일기
1940-06-06
[8]
일기
1940-06-06
[9]
일기
1938-07-27
[10]
일기
1935-09-28
[11]
일기
1940-06-19
[12]
일기
1938-10-02
[13]
간행물
무교회주의자 내촌감삼 씨에 대하야
신학지남
1930-0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