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함석헌은 일제강점기, 광복 이후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1년 평안북도에서 태어나 3.1 운동 참여로 학교를 중퇴하고, 오산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해방 후 월남하여 종교 활동과 평론 활동을 했으며, 무교회주의, 기독교, 장로회 신앙을 거쳐 씨알사상을 제창했다. 1989년 사망했으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염주군 출신 - 리태남
리태남은 금속 산업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북한 경제 발전에 기여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강선제강연합기업소 당 책임비서, 남포시 행정경제위원회 위원장, 함경남도 및 평안남도 당위원회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고 내각 부총리를 지냈으며 김일성 훈장과 김정일 훈장을 수훈했다. - 대한민국의 반전 운동가 - 신해철
신해철은 1988년 무한궤도로 데뷔하여 독보적인 음악적 입지를 구축하고 사회 문제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 '마왕'이라는 별명을 얻은 뮤지션, 방송인이자 사회 운동가였으나, 2014년 의료 과실로 사망하여 신해철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 조만식 - 류영모
류영모는 일제강점기 한국의 종교 사상가이자 교육자로, 유불도 기독교 사상을 융합한 '얼나' 사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고 은퇴 후 농사를 지으며 제자들을 가르치고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 조만식 - 조연흥
조연흥은 1940년 평양 출생으로 독립운동가 조만식의 아들이며, 연세대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로 30여 년간 근무, 전무이사를 거쳐 퇴직하고, 《아마존 야성기행》 저술 및 방일영문화재단 이사장을 역임했다.
함석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함석헌 |
한자 | 咸錫憲 |
로마자 표기 | Ham Seok-heon |
로마자 표기 (매큔-라이샤워) | Ham Sŏkhŏn |
호 |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 |
국적 | 대한민국 |
직업 | 작가, 시인, 종교 전도사 |
기타 직업 | 사회운동가, 언론인, 수필가 |
생애 | |
출생일 | 1901년 3월 13일 |
출생지 | 대한제국 평안북도 룡천군 미라면 원성동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염주군 다사로동자구) |
사망일 | 1989년 2월 4일 |
사망 장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울대학교 병원 |
사인 | 노환 |
가족 | |
부 | 함형택 |
모 | 김형도 |
배우자 | 황득순 |
학력 | |
학교 | 도쿄 고등사범학교 |
전공 | 역사교육학과 |
학위 | 전문학사 |
종교 | |
종교 | 퀘이커 |
경력 | |
재직 | 종교인 |
전직 | 사회운동가 언론인 작가 저술가 수필가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 씨알의 소리 편집대표위원장 신민당 고문 |
2. 생애
함석헌은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 활동했다. 본관은 강릉(江陵)이며 호는 신천(信天), 씨알, 바보새이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후, 사무원과 소학교 교사 등을 전전하다가 1928년부터 1938년까지 오산학교 교사를 역임했다. 이후 교육, 언론 활동 등에 종사하다가 해방 후 1947년 월남하였다. 1956년부터는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평론,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을 하였다.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를 따랐으나, 중기에는 기독교,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꾸었다.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연루되어 퇴학당했다. 1921년 오산학교에 편입, 1923년 졸업 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진학하여 1924년 우치무라 간조를 만났다. 1928년 졸업 후 오산학교에서 조선사 교사를 역임했고,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게재했다.
1938년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여 교직에서 쫓겨났다.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평안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조선로동당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으로 탈출했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서 논객으로 활약했다. 1961년 장면의 국토건설단에 초빙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면서 야인으로 돌아갔다.
이승만 시대부터 자유당의 반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섰다. 1970년 법정 등과 《씨알의 소리》를 창간했으나,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으로 1980년 강제 폐간되었다. 1979년과 1985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고, "씨알 사상"을 제창하여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었다.
1989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89세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1901-1928)
함석헌은 1901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당숙 함일형(咸一亨)이 세운 서당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906년 덕일소학교(德一小學校)에 입학, 1914년에 졸업하였다. 그해 양시공립소학교에 편입하여 1916년 졸업하였다.[1]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17년 황득순과 결혼하였다. 1919년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 재학 중, 숭실학교 교사였던 6촌 형 함석은 등의 영향으로 3·1 운동에 참가하였다. 3.1운동에 대한 반성문을 쓰면 복학시켜 준다는 일본인 교장의 제의를 거부하고 퇴학하여 2년간 학업을 중단하였다. 이 시기 함석헌은 수리조합 사무원과 소학교 선생 등을 하였다.[1]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 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1]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 대학)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1]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 송두용(宋斗用), 정상훈(鄭相勳), 유석동(柳錫東), 양인성(楊仁性)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1]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역사과 수석으로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는 동인지 《성서조선》에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1]
2. 1. 1. 가족 및 친인척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사망 | 비고 |
---|---|---|---|
아버지 | 함형택 | 1880년 - 1941년 | |
어머니 | 김형도 | ||
배우자 | 황득순 | 1902년 - 1978년 | |
장남 | 함국용 | 1919년 - | 북한 거주 |
장녀 | 함은수 | 1921년 - | 북한 거주 |
차녀 | 함은삼 | 1926년 - | |
사위(차녀) | 정승림 | 1924년 - 2012년 | |
외손(차녀) | 정광필, 정현필 | ||
3녀 | 함은자 | 1929년 - 2017년 | |
사위(3녀) | 최진삼 | 1921년 - | |
외손(3녀) | 최응일 | ||
차남 | 함우용 | 1931년 - | |
자부(차남) | 양영호 | ||
친손(차남) | 함정해 | ||
4녀 | 함은화 | 1933년 - | |
사위(4녀) | 서완근 | ||
외손(4녀) | 서천희 | ||
5녀 | 함은선 | 1940년 - | |
사위(5녀) | 장기홍 | 1934년 - | |
외손(5녀) | 장수범 | ||
누나 | 함석혜 | ||
여동생 | 함석란 | ||
남동생 | 함석창 | ||
여동생 | 함석보 | 1910년 - 2002년 | |
5촌 숙부 | 함일형 | ||
6촌 형 | 함석은 | 1892년 - 1928년 |
2. 1. 2. 학력
1914년 용천 덕일소학교 수료[1]1916년 용천 양시보통학교 졸업[1]
평양고등보통학교 중퇴 (1955년 명예 졸업)[1]
오산고등보통학교 졸업[1]
도쿄 고등사범학교 역사교육학과 전문학사[1]
2. 2. 오산학교 교사 및 《성서조선》 활동 (1928-1945)
1921년 함석규 목사의 권유로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五山學校)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했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다. 또한 이때 안창호, 이승훈, 이광수, 조만식 등과도 알게 되어 그들로부터 민족주의 사상과 실력 양성론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후일 그는 맹목적인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에 비판적인 성향으로 돌아서게 된다.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
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졸업(역사과 수석)과 동시에 귀국하여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을 가르쳤다. 1934년~1935년에 동인지 《성서조선》에서 그의 주저인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연재한다.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치되었다.[1]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의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였다.
1940년 평안남도 송산(松山)에서 김혁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의 이사로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계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남도 대동경찰서에 체포, 유치장에서 1년간 수감 생활을 하다가 1942년 초 풀려났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 제158호(폐간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관련자가 모두 투옥되는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함석헌은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1943년 4월 1일까지 1년간 복역하였다(수형번호1588번).
1945년 혈맹의 친구였던 김교신이 흥남에서 장티푸스로 별세하고, 그 해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2][3]
2. 3. 광복 이후 활동 (1945-1989)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함석헌은 해방이 '도둑같이(아무도 모르게) 왔다'고 평하였다.[2][3] 광복 이후 신의주 학생시위의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난 후 1947년 3월 17일 월남하였다. 월남 전 조만식을 만나고 오기도 했다.[4]함석헌은 일본 유학 중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를 따랐으나, 중기에는 기독교, 후기에는 장로회로 바꾸었다. 1962년 미국 국무성 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특별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퀘이커교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며, 1989년까지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 인사들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이자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 활약하였다. 1956년부터 장준하의 사상계에 참여하여 정치, 시사 등에 대한 평론 활동, 신앙 활동, 반독재 민주화운동 등을 하였다. 1970년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1980년 1월 폐간될 때까지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함석헌의 광복 이후 활동 (1945년 ~ 1989년)'''
시기 | 주요 내용 |
---|---|
1945년 | 8.15 광복을 맞이함. 광복이 ‘도둑같이 왔다’고 평가.[2][3] |
1945년 ~ 1947년 | 신의주 학생시위 배후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당국에 투옥되었다가 소련군에게서 풀려남. |
1947년 3월 17일 | 월남. 조만식을 만나고 옴.[4] |
1947년 ~ 1956년 | YMCA에서 성서 강해, 신학 및 종교 강연 활동. 조만식 추모 활동 참여. |
1956년 ~ | 장준하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 |
1962년 | 미국 국무성 내 기독교 신자 정치인들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 퀘이커교 인사들과 교류. |
1970년 |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 창간. |
1980년 1월 | 《씨알의 소리》 폐간. |
1989년 | 매년 미국 정계의 기독교 인사들의 초청으로 미국 방문. |
2. 3. 1. 대한민국 제1공화국 시기 (1948-1960)
1947년 3월부터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고, 이후 성서 강해와 신학, 종교적 강연 활동을 하였다. 또한 조만식의 추모 활동에도 참여하였다.[4]1950년 한국 전쟁 때는 대전을 거쳐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휴전 후 상경하였다. 이후 1956년부터 장준하 등의 천거로 《사상계》를 통해 논객으로 활약하였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견해를 발표하면서 정부의 정책에 비평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같은 해 5월 잡지 《사상계》에 발표한 칼럼이 화제가 되었다.
이 일로 그는 우익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959년 6.25 전쟁 관련자들에 대한 훈장 서훈 이야기가 나오자 "형제를 죽이고도 무슨 훈장이냐"라고 비판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났다. "한국전쟁에 대해 비판하고 전쟁하는 국가와 거리를 두어보려는 목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이 놀라운 일"이라고 일갈하기도 했다.
2. 3. 2. 대한민국 제2공화국 시기 (1960-1961)
1961년 장면이 국토건설단을 창설하고 강사를 초빙할 때, 국토건설요원 정신교육 담당 강사로 초빙되었다.[1] 그러나 5·16 군사 정변으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자 다시 야인으로 되돌아갔다.[1] 그해 7월 사상계에 발표한 정치평론인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글을 통해 5·16 군사 정변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군정 인사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2. 3. 3. 대한민국 제3공화국 ~ 제5공화국 시기 (1961-1987)
제3공화국 출범 후 함석헌은 종교인으로서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등 사회운동에 참여했다.[5] 1967년에는 장준하의 국회의원 총선거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 정권, 즉 자유당 정권 시절부터 좌익 운동에 참여하여 3선 개헌에 반대하였으며, 이후 10월 유신 이후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서 수차례 투옥되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에 들어가기도 했다.1970년에는 정치, 시사평론을 실은 월간잡지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였으나 정권의 탄압을 받았다. 이후 《씨알의 소리》 발행인, 편집인, 주간 등으로 있으면서, 장준하 등 재야 언론인들을 필진으로 영입하고 1980년 1월 폐간될 때까지 신진 문인들을 발굴하였으며, 글과 강연 등을 통해 민중 계몽운동을 폈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5]
10·26 사건 이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자 윤보선 등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1월 24일 YWCA 위장 결혼식에 참석하였다가 사건에 연루되어 윤보선과 함께 재판정에 섰다. 1980년 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선고 공판에 출석하였다. 같은 해 1월 25일 수경사 보통군법회의의 최종상고심에서 윤보선은 징역 2년, 함석헌은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복권되었다. 1980년 신군부, 즉 전두환 정권의 탄압으로 《씨알의 소리》는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12월 복간되어 2011년 7월 현재 217호까지 출간되었다.
제5공화국에서도 민주화운동을 계속하다가 1984년에는 민주통일 국민회의 고문을 지냈다. 1985년 민주쟁취 국민운동본부 고문이 되었다.
함석헌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반대하였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민족통합을 참으로 하려면 우리의 대적이 누군가부터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분열시킨 도둑이 누구입니까? 일본? 미국? 소련? 중공? 아닙니다. 어느 다른 민족이나 이데올로기 때문이 아닙니다. 국민을 종으로 만드는 국가지상주의 때문입니다. 이제 정치는 옛날처럼 다스림이 아닙니다. 통치가 아닙니다. 군국주의 시대에조차 군림은 하지만 통치는 아니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참 좋은 군주는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민주주의 시대에, 나라의 주인이 민중이라면서 민중을 다스리려 해서 되겠습니까? 분명히 말합니다. 남북을 구별할 것 없이 지금 있는 정권들은 다스리려는 정권이지 주인인 민중의 심부름을 하려는 충실한 정부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설혹 통일을 한다 해도 그것은 정복이지 통일이 아닙니다. 민중의 불행이 더해질 뿐입니다. 나는 그래서 반대합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국가주의와 민족지상주의는 개인으로 하여금 권리와 자유를 스스로 반납하는 주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1984년 민주쟁취국민운동본부 고문에 위촉됐다. 또한 동아일보로부터 제1회 인촌상을 수여받았다.
'''함석헌의 주요 활동 (1961년 ~ 1987년)'''
연도 | 주요 활동 |
---|---|
1961년 ~ 1963년 | 미국 펜들 힐과 영국 우드브룩의 퀘이커 학교에서 수학 |
1963년 | 박정희 장군의 대통령 출마에 반대하는 시위 |
1965년 | 박정희 대통령의 일본과의 동맹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 |
1974년 | 박정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한 헌법 개정 시도에 반대하는 시위 후 유죄 판결 |
1979년 | 미국 친구 봉사회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 |
1985년 | 미국 친구 봉사회에 의해 다시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 |
1987년 | 언론 및 미디어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인촌상 수상 |
2. 3. 4. 말년 (1987-1989)
1987년 언론 및 미디어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제1회 인천상을 수상하였다. 1989년 서울대학교병원에서 89세로 사망하였다.3. 사후
2002년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건국포장 수훈 이후 묘소가 대전현충원(애국지사 제3-329 묘역)으로 이장되었다.[6]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고, 퀘이커 모임(1961년과 1967년)을 계기로 퀘이커 신자가 되었다.[6] 상훈으로 1987년 제1회 인촌상과 200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일대기로 《내가 본 함석헌》, 《함석헌 평전》이 있다.
4. 사상
함석헌은 김교신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 운동을 했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았으며[1], 귀국 후에도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으로 줄곧 무교회주의 신념을 지켰다.
1934년부터 1935년에 걸쳐 잡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보는 조선사(의미적으로 보는 조선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1942년 5월, 《성서조선》 158호에 실린 김교신의 "조가(弔蛙)"가 문제가 되어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 《성서조선》은 폐간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했다.
1945년 광복 이후 평안도를 중심으로 활동했으나, 조선노동당에 의해 "반공산적"이라는 이유로 투옥되었고,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했다. 이후 종교인으로서 강연회를 열었고, 1956년부터 《사상계》에서 논객으로 활동했다.
이승만 시대부터 자유당의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기 때문에 여러 번 투옥되었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 노벨 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으며, 성경뿐만 아니라 동서양의 고전을 폭넓게 공부해 독자적인 "씨알사상"을 제창했다.
4. 1. 무교회주의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1924년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하여 그의 무교회주의를 접했다.[1]동경고등사범학교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 등과 함께 교회에 다니지 않고도 신앙을 유지하는 무교회주의 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1]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창간에 참여하고 논객으로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였던 함석헌은 김교신, 송두용 등과 함께 초창기 한국 무교회주의 기독교 운동을 하였다.[6] 귀국 후에도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집회의 영향으로 줄곧 무교회주의 신념을 지켰다.
4. 2. 씨알사상
함석헌은 동서양의 고전을 섭렵하여 자신의 사상으로 소화하고,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였다.[5] 비폭력주의를 신조로 하여 "한국의 간디"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5. 논란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지 여부를 두고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이자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에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하며, 함석헌 사상의 일관된 주제 중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꼽았다.[7]
5. 1. 사회진화론 추종 논란
2010년 함석헌이 사회진화론 추종자인지 여부를 두고 학계에서 논란이 있었다. 2009년 3월 함석헌평화포럼 공동대표인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는 한길사에서 발간한 30권 분량의 '함석헌 저작집'에 실은 글 '함석헌 저작집 발간에 부치는 말'에서 함석헌을 사회진화론자라고 주장했다. 당시 함석헌씨알사상연구원장이던 김영호는 함석헌 사상에서 반복되는 일관된 주제 중 하나로 사회진화론을 꼽았다.[7]이에 대해 함석헌이 창간한 잡지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인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씨알의 소리' 2010년 1~2월호에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의 문제'라는 반론을 실어 "함석헌의 철학과 사회진화론은 물과 기름처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이라고 반박했다.[7] 김상봉 교수는 "사회진화론은 전쟁으로 열등한 종족이 도태되고 우수한 종족들만이 살아남아 인류가 발전했다는 것"이라며 "사회진화론자들은 약자가 도태되는 것은 자연적인 필연이므로 이를 인위적으로 막는 것은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본다"고 설명했다.[7]
그는 "만물을 짓고, 만물을 유지하고, 뜻을 이뤄가는 것은 힘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한 함석헌의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 사상은 '힘의 철학'이 아니라 '사랑의 철학'이기 때문에 사회진화론과 양립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7] 김상봉은 함석헌이 '생명은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하나'라고 지적했다는 점을 들며, 함석헌이 평소 민족이기주의와 국가지상주의를 비판했기에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했다.[7]
2010년 김영호는 3월 16일 열린 함석헌학회 창립총회 기념 학술발표에서 '함석헌과 사회진화론'이라는 제목의 글로 김상봉 교수의 주장을 재반박했다. 김영호 교수는 '함석헌은 사회/전체의 진화를 주장하지 않았는가'라는 부제가 달린 이 글을 통해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자신이 쓴 '사회 진화론'을 '사회다윈주의(Social Darwinism)'로 오해한 것"이라고 반박하며, '사회진화론'에는 김상봉 교수가 받아들인 '사회다윈주의' 외에도 여러 다른 일반론이 있다고 주장했다.[7] 그는 함석헌이 쓴 "지금까지 생각의 주체는 개인이었지만 앞으로는 커뮤니티이다. 그런 역사의 진화단계가 지금이다"라는 글을 인용하며 함석헌이 전체사회, 즉 인류공동체로서의 사회 진화를 통찰했다고 강조했다.[7]
6. 저작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뜻으로 본 한국역사 등의 저서를 통해 자신만의 역사관을 제시하였고, 간디의 간디 자서전,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등을 번역하여 한국 사회에 소개하였다.
6. 1. 저서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1948
- 인간혁명, 1961
- 역사와 민족, 1964
- 뜻으로 본 한국역사, 1967
- 통일의 길, 1984
-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 1984
- <함석헌 저작집> , 2009
- 시집, 수평선 너머, 2009
- 김성수, 『한국 퀘이커 햄석헌 평전』, 서울: 사민서관, 2001
- 『고난의 한국 민중사』(金学鉉 역, 신교출판사, 1980년 6월)
6. 2. 번역서
참조
[1]
웹인용
함석헌 선생의 생애
http://ssialsori.net[...]
함석헌 기념사업회
2008-11-13
[2]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인물과사상사
2004
[3]
서적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길사
2003
[4]
일반
[5]
뉴스
길을찾아서 인혁당 가족 돕자 시작된 미행과 도청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1-01-22
[6]
웹사이트
나는 어떻게 퀘이커가 되었나-함석헌 선생의 수필
http://www.quakerseo[...]
[7]
뉴스
'함석헌이 사회진화론자?' 학계 논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4-16
[8]
뉴스
“물건의 과학보다 ‘人間性의 과학’ 발전시켜야지”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4-09-06 #추정 날짜. 정확한 날짜 정보가 부족합니다.
[9]
뉴스
인터뷰 노벨平和賞(평화상)후보에 추천된 咸錫憲(함석헌)옹 "힘이 正義(정의)가 아니라 正義(정의)가 힘"
http://newslibrary.n[...]
1985-02-22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어이가 없네”…김형석 ‘광복은 연합국 선물’ 해명에 의원 실소
독립기념관 내부서도 "김형석 기념사 부적절, 조직원들 분노"
[사설]“광복은 연합군 선물” 언급한 독립기념관장, 물러나야
‘광복은 연합군 선물’ 독립기념관장 논란···민주당 “뉴라이트 인사들 거취 정해라”
7월22일 알림
6월13일 알림
5월19일 알림
“극우세력 뒷배 전락한 ‘한국 개신교’ 강하게 비판하셨죠”
‘종교간 열린 대화’ 강조한 신학자 김경재 교수 별세
3월12일 알림
‘한글에 깃든 다석 류영모의 하늘’···다석학회 창립 20년만에 첫 학술대회 개최
독재 맞선 법정, 시대 아픔 껴안아 [.txt]
“물리학 너머 피안을 봤다…서양철학서 자유로워졌다” [.tx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