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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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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명진은(1904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1919년 인천고등상업학교 재학 중 3·1 운동에 참여하여 항일 투쟁을 벌이다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 활동하며 한국독립당 국가민족자치행정위원 등을 역임했고, 광복 후에는 한국민주당에서 활동하다 인천시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1996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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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진 (1904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김명진
원래 이름金明辰
출생일1904년 10월 8일
출생지대한제국 경기도 인천 제물포 내동촌 152번지
사망일1965년 4월 10일
사망지자유중화민국 타이완 타이베이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대한민국 경기도 인천
종교유교(성리학)
정당무소속
본관수안(遂安)
배우자해주 최씨 부인(海州 崔氏 夫人, 1899~1968)
자녀슬하 3남 2녀
직책
직책대한민국 경기도 인천시 시장 직무대행 서리(大韓民國 京畿道 仁川市 市長 職務代行 署理)
임기1950년 9월 2일 ~ 1950년 9월 26일
학력 및 경력
학력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 중퇴
경력한국독립당 국가민족자치행정위원
서훈
서훈1996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정부 관련
대통령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부통령이시영 (대한민국 부통령)
총리신성모 (대한민국 국무총리 서리)
장관조병옥 (대한민국 내무부 장관)
차관김갑수 (대한민국 내무부 차관)
의장최응복 (대한민국 경기도 도지사 권한대행)
웹사이트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3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4

2. 별칭

아명은 김형오(金炯梧)·김명준(金明埈)이며, 는 산남(山南)·청호(靑虎)·찬수(贊樹, 鑽樹)·법천(法天)·협촌(峽村)·둔촌(屯村)·회촌(回村)이다.[1]

3. 생애

김명진은 경기도 인천 제물포 내동촌(지금의 인천)에서 태어나,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지금의 김포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3·1 운동과 항일 투쟁, 체포와 투옥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 상술되어 있다.

1923년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자치행정위원을 지냈으며, 1931년 탈당했다가 1932년 복당하여 1년간 국가민족군사책략위원 직을 맡았다. 1933년 재탈당했으나,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예하 1~2급 첩보대원으로 활동했다. 1936년 한국독립당에 다시 복당하여 1946년 12월까지 민족행정과학특보위원 직을 지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활동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 상술되어 있다.

1945년 중화민국 쓰촨 성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주로 서울인천에 정주하였으며, 1946년 12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국가지방자치행정위원 직위를 지냈지만, 1949년 12월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다. 이후 1950년 경기도 인천시장 직무대행 서리 직책을 잠시 지냈다.[1] 광복 이후의 활동에 대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 상술되어 있다.

3. 1.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경기도 인천 제물포 내동촌(지금의 인천)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김포군 검단면 원당리(지금의 김포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1919년 인천고등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동맹 휴학을 벌였다. 때마침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학교 내에서 일본 경찰의 사주를 받은 교원들에 대항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인천고등상업학교 등에서 동맹 휴학 사태가 발생하자, 일본 경찰은 학교 교원을 통해 동맹 휴학 중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다. 김명진 등은 교원들로부터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았다. 이에 김명진은 교원들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내 통신망을 절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동급생 이만용(李萬用), 선배 박철준(朴喆俊) 등과 함께 행동대를 조직하고 교내 통신망 절단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경, 김명진과 박철준은 인천공립보통학교에 몰래 들어가 전선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끊고 사무실 전화기도 파손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조직적인 동맹 휴학을 계획하던 중, 이 사건이 발각되어 김명진과 박철준 등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명진은 퇴학당했고, 1919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전신법, 절도 관련 혐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항소하여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으로 감형받고 옥고를 치렀다.

3. 2. 3·1 운동과 항일 투쟁

그는 1919년 3월, 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동급생들과 함께 동맹 휴학을 벌이던 차에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교내에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교원들에 대항을 하면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인천고등상업학교 등에서 동맹 휴교 사태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학교 교원을 통하여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김명진 등은 교원들로부터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는 고통을 받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김명진은 교원들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내 통신망을 절단할 계획을 세우고, 동급생 이만용(李萬用)·선배 박철준 등과 함께 행동대를 조직하고 교내 통신망 절단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경, 김명진·박철준은 인천공립보통학교 내에 몰래 들어가 전선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전화기도 파손하면서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나아가 조직적인 동맹 휴학을 계획하던 중, 이 일이 발각되면서 김명진·박철준 등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결국 퇴학되었고, 1919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전신법·절도 관련 혐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으로 감형받고 옥고를 치렀다.

3. 3. 체포와 투옥

1919년 3월, 경기도 인천고등상업학교 3학년 재학 중 동급생들과 동맹 휴학을 벌이던 차에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교내에서 일경의 사주를 받은 교원들에 대항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인천고등상업학교 등에서 동맹 휴교 사태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은 학교 교원을 통해 학생들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있었다. 김명진 등은 교원들로부터 심한 감시와 통제를 받던 중, 교내 통신망을 절단할 계획을 세우고, 동급생 이만용(李萬用), 선배 박철준 등과 함께 행동대를 조직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다.

1919년 3월 8일 오후 9시경, 김명진과 박철준은 인천공립보통학교 내에 몰래 들어가 전선 절단용 가위로 전화선을 절단하고, 사무실 전화기도 파손하여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조직적인 동맹 휴학을 계획하던 중, 이 사건이 발각되어 김명진과 박철준 등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김명진은 퇴학당하고, 1919년 6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전신법, 절도 관련 혐의 등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여 같은 해 7월 2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형으로 감형받고 옥고를 치렀다.

3. 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활동

1923년 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예하에서 활동하였다. 1923년부터 1931년까지 한국독립당 국가민족자치행정위원을 지냈으며, 1931년 탈당하였다가 1932년 복당하여 1년간 국가민족군사책략위원 직을 맡았다. 1933년 재탈당하였으나, 이후에도 대한민국 임시 정부 예하 1~2급 첩보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한국독립당에 다시 복당하여 1946년 12월까지 민족행정과학특보위원 직을 지냈다. 1945년 중화민국 쓰촨 성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였고, 1946년 6월 귀국하였다.

3. 5. 광복과 귀국

1945년 중화민국 쓰촨 성 충칭에서 조선 광복을 맞이한 그는 1946년 6월 귀국하여 주로 서울인천에 정주하였으며, 1946년 12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다.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국가지방자치행정위원 직위를 지냈지만, 1949년 12월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다.[1]

3. 6. 광복 이후의 활동

1945년 중화민국 쓰촨 성 충칭에서 조선 광복을 목도하였다.[1] 그는 1946년 6월 조선 고국에 귀국하여 귀국 직후에는 주로 서울과 인천에 정주하였으며[1] 1946년 12월 한국독립당을 탈당하였고, 1947년 12월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국가지방자치행정위원 직위를 지냈지만, 1949년 12월 한국민주당을 탈당하였다.[1]

이후 1950년 경기도 인천시장 직무대행 서리 직책을 잠시 지냈다.[1]

4. 학력

5. 서훈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6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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