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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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순석은 1922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기를 거치며 시를 창작한 북한의 시인이다. 용정의 사립중학교를 다니며 습작 활동을 시작했으며, 해방 후 함경북도 문예총에서 활동하며 시집을 간행하려 했으나 전쟁으로 원고가 소실되었다. 1954년 소련을 방문하여 창작에 영향을 받았으며, 시집 <<황금의 땅>>을 출간했으나, 1950년대 말 사상 투쟁으로 비판받고 좌천되었다.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강의를 하다가 1974년 사망했다. 그의 작품은 향토적 색채와 전통 시가의 정서를 담았으며, 북한 내부에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대한민국에서는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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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순석 |
출생일 | 1922년 10월 28일 |
출생지 | 함경북도 나남시 |
사망일 | 1974년 12월 26일 |
직업 | 시인 |
작품 | |
장르 | 시 |
2. 생애
김순석은 1922년 10월 28일 함경북도 나남시 수남리(현재의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일대)에서 태어났다. 가난 때문에 1934년 북간도로 이주하여 용정의 한 사립중학교를 다녔으며, 중학교 시절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많은 시를 습작하였다.
해방 이후 함경북도 문예총 조직에 참여하여 〈산향〉, 〈보리 베는 처녀〉 등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재개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함경북도 문예총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어랑천〉 등을 발표했고, 종군 작가는 아니었지만 전쟁 시기 고향 사람들의 투쟁 모습을 형상화한 시들을 썼다.
1954년 4월 26일 소련작가동맹 초청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작가 대표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3개월간 소련 각지를 여행했다. 이때 쉬빠쵸브와의 교류는 그의 시 창작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1] 1955년 소련 방문 때 조소친선에 대해 적었던 시들을 모아 <<찌플리스의 등잔불>>을 간행하였다.
1951년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과 함께 활동한 어랑군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어랑천한국어을 썼다. 1956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조선 시문학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3] 1958년 1월 시집 <<황금의 땅>>을 출간하였는데, 이 시집은 그의 전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집으로 평가받는다.[1]
그러나 1958년 10월 김일성의 교시 이후, 김순석은 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작가로 비판받고 희천 공작기계공장으로 좌천되었다.[1] 이후 정식 시집을 내지 못하고 몇 편의 시 단편만 발표하였다.[1]
1962년부터 1968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시 창작 강의를 담당했으며, 이후 희천 공작기계공장 현지 파견 작가로 활동했다. 1965년 빨치산 투쟁과 조선로동당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내용의 시초 <<투사의 노래>>를 발표했다.[6]
김순석은 1974년 12월 16일, 53세(만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 1. 해방 전 (1922-1945)
1922년 10월 28일(일부 자료에는 1921년 10월 28일로 나와 있음) 함경북도 나남시 수남리(현재의 함경북도 청진시 라남구역 일대)에서 태어났다. 김순석 일가는 빈농으로 가난 때문에 1934년 북간도로 이주하여 김순석은 북간도에서 7년간 살았다. 그는 윤동주의 고향이기도 한 용정의 한 사립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부터 글 읽기, 글짓기를 좋아해 많은 시를 습작하였다.2. 2. 해방 후부터 한국 전쟁기 (1945-1953)
해방 이후 창작 활동을 다시 시작하였고, 함경북도 문예총 조직에 참여했다. 당시 문우들의 도움으로 〈산향〉, 〈보리 베는 처녀〉 등을 발표했다. 첫 시집 《새날의 서정》을 간행하려고 했으나 폭격으로 원고가 소실되었다. 전쟁 중에는 함경북도 문예총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어랑천〉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전쟁 시기, 그는 종군 작가는 아니었지만, 전쟁 시기 고향 함경북도 사람들의 투쟁 모습을 형상화한 시들을 썼고, 이 시들을 모아 시집 《영웅의 땅》을 출간했다.2. 3. 소련 방문 (1954)
1954년 4월 26일 소련작가동맹 초청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작가 대표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문하여 3개월간 소련 각지를 여행했다. 방문 기간 중 쉬빠쵸브와 교류한 사건은 그의 시 창작에 새로운 전기를 열어주었다.[1] 그는 쉬빠쵸브와 만나서 나눈 담화를 정리해 <서정시에 대한 담화>라는 글로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었던 <<조선 문학>> 1954년 8월호에 발표하기도 하였다. 1955년에는 소련 방문 때 조소친선에 대해 적었던 시들을 모아 <<찌플리스의 등잔불>>을 간행하였다. 소련 여행은 그의 향토적 미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시집 <<황금의 땅>>에도 영향을 끼쳤다.[2]2. 4. 1950년대: 창작 활동과 비판
1951년에는 한국 전쟁 당시 인민군과 함께 활동한 어랑군 주민들의 모습을 그린 어랑천한국어을 썼다. 1954년 11월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조선 문학한국어 편집위원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1955년 작가들의 현지 파견으로 고향과 가까운 함경북도 어랑군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그의 대표 시집인 황금의 땅한국어 집필에 집중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시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창작 지도의 중심 방향으로 "매개 시인들이 독자적이고 개성적인 목소리로 도식주의를 타파하고 조선의 시문학사에 다양하고 풍부한 쓰찔로써 우리 문학의 보다 높은 양양을 기하기 위한 방향에서 사업을 추진시켜야 한다"고 밝혔다.[3]2. 5. <<황금의 땅>> 출간과 좌천 (1958-1959)
1958년 1월 시집 <<황금의 땅>>을 출간하였다. 이 시집은 김순석의 전반 창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집으로 평가받는다. 이 시집에는 전후 시기 농촌의 사회주의적 개조 활동에 참여한 경험을 토대로 쓰여진 다수의 시가 실려있다.[1]그러나 그해 10월 14일 김일성이 '작가 예술인들 속에서 낡은 사상 잔재를 반대하는 투쟁을 힘 있게 벌일데 대한 교시'를 내리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시단은 치열한 사상 투쟁이 벌어지게 된다. 김순석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했고, 1958년 12월 27일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에서 시분과 위원장 직위에서 해임되었다. 1959년 초부터는 부르주아 의식을 청산하지 못한 배부른 개인 취미로 시를 쓰는 작가로 혹독한 비판을 받고 희천 공작기계공장으로 노동 개조를 받으러 좌천되었다.[1] 이후로도 김순석에 대한 비판은 계속돼 1959년 5월에는 '소부르주아적 개인 취미에 떨어졌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로는 정식 시집을 내지 못하고 몇 편의 시 단편만 발표하게 됐다.[1]
2. 6. 1960년대 이후
1962년부터 1968년까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시 창작 강의를 담당했으며, 이후에는 희천 공작기계공장 현지 파견 작가로 활동했다. 1950년대 말 혹독한 비판을 받은 후, 그의 시 세계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1965년에 낸 시초 <<투사의 노래>>에는 다섯 편의 시가 실려 있는데, 대체로 빨치산 투쟁과 조선로동당에 대한 감사를 표하는 내용이다.[6]2. 7. 사망
1974년 12월 16일 김순석은 한국 나이 53세(만 52세)로 짧은 생을 마쳤다.3. 평가
김순석에 대한 평가는 출신 지역에 따라 크게 엇갈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김순석이 개인적이고 심미적인 시를 주로 썼다는 이유로 평가가 엇갈린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개성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았으나, 1959년 반부르주아 투쟁의 영향으로 '배부른 부르주아적 사고에 물든 시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 한설야는 김순석이 현실을 외면하고 소부르주아적 감정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으며, 이정구는 그의 시가 인민들의 언어 교양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지적했다.[1] 현재 북한 내에서 김순석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으며, 그의 시집 <<황금의 땅>>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1] 엄호석은 김순석의 시가 김소월의 영향을 받아 부르주아 사상 잔재를 담고 있으며, 예술 자체에만 매달려 있다고 비판했다.[1]
반면 대한민국에서는 김순석을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북한 문학>>에서는 그를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기도 했으며,[4] 이명재의 <<북한문학사전>>, 신형기·오성호의 <<북한문학사>> 등에도 그의 생애와 작품 경향이 소개되어 있다. 중국 연태대학교 김영수 교수는 김순석을 북한 시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시인으로 평가했다.[5]
3.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 평가
김순석은 개인적이면서도 심미적인 시를 많이 썼기 때문에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부적으로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1950년대 중반까지는 개성 있는 시인으로 평가받았지만, 1959년 반부르주아 투쟁의 영향으로 '배부른 부르주아적 사고에 물든 시인'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받았다.[1]한설야는 '그는 현실을 등지고 오솔길이나 도랑물을 노래하고 소부르주아적 애상 가운데서 서정을 찾고 있으며 내용이 없는 형식주의에 매달려 있다'고 비판했다. 이정구는 <최근 우리 시문학상에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서 '우리 시인들 중 일부는 비계급적인 통용어, 비특징적인 지방어를 끌어들여 인민들의 언어교양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김순석을 포함한 일부 시인들을 비판했다.[1]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김순석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는 거의 없으며, 박팔양의 <시집 '찌플리쓰의 등단불'>, 김명수의 <서정시에 있어서의 전형성, 성격, 쓰찔> 등의 단편적인 글들만 남아있다.[1]
김북원은 김순석의 시집 <<황금의 땅>>에 대해 '개성, 쓰찔의 다양성, 주제의 확대라는 미명 밑에서 화초와 자연, 사랑과 죽음 등 소위 '영원한 쩨마'를 추구하며 현실과 거리가 먼 시편들에서 손재주를 부렸다'고 비평했다. 박아지의 <시집 '황금의 땅'을 읽고>도 있으나, 전반적으로 <<황금의 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대한민국 이명재 교수가 편찬한 <<북한문학사전>>에 그의 대표 시집 목록에 <<황금의 땅>>이 빠져있는 것이 그 예시이다.[1]
엄호석은 <창작에서 공산주의적 당성을 더욱 관철시키자>에서 '애수는 그의 머리에 남아있는 부르주아 사상 잔재이며 낡은 예술적 관점이다. 그것이 특히 이 시인이 즐겨 모범하고 있는 김소월의 것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확실히 김순석의 시는 생활보다 예술 자체에 매달려 있으며 인민을 공산주의적으로 교양하려는 열렬한 당성보다 자기의 취미에 보다 많이 열중한다'고 지적하였다. 이를 통해 김순석은 시인 김소월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문학 세계를 상당히 추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
3. 2. 대한민국 및 외부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김순석을 높게 평가하는 시각이 다수 존재한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북한 문학>>에서는 김순석을 북측 최고의 시인으로 꼽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극찬하였고,[4] 이명재의 <<북한문학사전>>(국학자료원, 1996)에는 그의 생애와 창작경향이, 신형기 오성호가 펴낸 <<북한문학사>>(평민사, 2000)에는 짧게 언급되어 있다. 중국 연태대학교 한국어학과 김영수 교수 역시 논문에서 김순석을 북한 시 60년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시인으로 보았다.[5] 중국에서 최초로 김순석을 다룬 평론은 <김순석과 그의 시에 대하여>이고, 이후 김병민 외 2인이 연변대학출판사에서 펴낸 <<조선ㅡ한국 당대문학사>>에 잠깐 인용됐다.4. 김순석 시문학의 특징과 의의
김순석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신 시인들 중에서도 드물게 특색 있고 예술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을 썼다.[6] 그의 작품 세계는 방언과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사용하여 짙은 향토적 색채를 띠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김순석의 시는 3.4조, 4.4조와 같은 민족 고유의 음수율과 고전적인 어투를 사용하여 언어의 리듬감을 살리고, 종결 어미를 통해 한민족 전통 시가의 정서와 품격을 드러냈다. 이는 조선 시대 시조의 여유로움과 운치를 계승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김순석의 시 중에는 김소월의 사랑시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러한 시들은 운율과 표현 형식 면에서 민족 전통시가와의 연관성을 보여준다.[7] 김순석은 북한 문학에서 다루기 꺼려했던 대담한 주제와 소재를 시에 도입하려 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8]
5. 김순석 시문학의 시대적 배경
김영수 연태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는 자신의 논문에서 김순석이 1950년대 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에서 비교적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9]
6. 작품 목록
김순석은 1953년 <<영웅의 땅>>, 1955년 <<찌플래스의 등잔불>>, 1958년 <<황금의 땅>> 등의 시집을 발표했다.
6. 1. 시집
6. 2. 대표작
참조
[1]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2]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3]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4]
서적
북한 문학
2007
[5]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6]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7]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8]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9]
논문
김순석의 시적 행로와 향토적 미의식의 확대 - 황금의 땅을 중심으로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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