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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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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운은 일제강점기 및 해방 이후 활동한 시인으로, 목포상업전수학교와 영광농업보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사회 계몽 운동을 펼쳤다. 1921년 시 <불살너주오>를 발표하며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조를 짓기 시작했으며, 최남선, 이병기 등과 함께 시조 부흥 운동에 참여했다.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활동하며 동국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나, 1948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월북 이후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 재평가되었으며,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시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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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시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조운
본명조주현 (曺柱鉉) → 조운 (曺雲)
중빈(重彬)
아호정주랑(靜州郞)
출생지대한제국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읍 도동리
사망일?
국적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본관창녕
직업시조 작가 겸 대학 교수
배우자있었음(이름 미상. 1929년 결혼. 1948년 함께 월북.)
장르시조
활동 기간1921년~1947년
경력국민문학운동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
자녀1남 2녀(1948년 모두 함께 월북.)
친척최서해(이복 서얼 자형)
형제조분녀(이복 서얼 누나)
웹사이트두피디아 조운
학력
학력전남목포고등상업학교 졸업(1917년)

2. 생애

목포상업전수학교(지금의 목상고등학교)를 나와 영광농업보습학교(지금의 영광중학교)에서 농업 교사 등으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 계몽 운동을 하였다.[1] 1921년동아일보》에 <불살너주오>를 발표한 후부터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띤 현대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나의 사람〉, 〈법성포 12경〉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1947년 《조운시조집》을 발간하였다.[1]

1926년 최남선·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해 시조부흥론을 주장하였다.[1] 광복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면서 동국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1] 이후, 1948년 3월 중순 당시에 가족과 함께 월북하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활동

목포상업전수학교(지금의 목상고등학교)를 나와 영광농업보습학교(지금의 영광중학교)에서 농업 교사 등으로 교편을 잡으면서 사회 계몽 운동을 하였다.[1] 1921년동아일보》에 <불살너주오>를 발표한 후부터 민족주의적인 감정을 띤 현대 시조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조선문단》에 〈초승달이 재 넘을 때〉, 〈나의 사람〉, 〈법성포 12경〉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고, 1947년 《조운시조집》을 발간하였다.[1]

1926년 최남선·이병기 등과 함께 '국민문학운동'에 참여해 시조부흥론을 주장하였다.[1]

2. 2. 문단 활동과 시조 부흥 운동

2. 3. 광복 후 활동과 월북

3. 주요 경력

조운은 1926년 국민문학운동에 가입하여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을 맡았으나 1928년에 사퇴했다. 1945년 12월 13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사무위원을 맡았고, 1946년 2월 8일 단체 통합 이후에도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을 역임했으나 1947년 1월 8일 사퇴했다. 1947년 2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사퇴했다. 1947년 10월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을 맡았으나, 1948년 1월 탈당했다.

3. 1. 문학 단체 활동

조운은 1926년 국민문학운동에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에 사퇴하였다. 1945년 12월 13일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사무위원으로 가입하였고, 1946년 2월 8일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의 3단체 통합에 참여하여 통합 조선문학가동맹의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이 되었다. 1947년 1월 8일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사퇴하였다.

3. 2. 교육 경력

조운은 1947년 2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사퇴하였다.

3. 3. 정당 활동

조운은 1926년 국민문학운동에 가입하여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을 맡았으나 1928년에 사퇴했다. 1945년 12월 13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사무위원을 맡았고, 1946년 2월 8일 단체 통합 이후에도 사무위원 겸 총무위원을 역임했으나 1947년 1월 8일 사퇴했다. 1947년 2월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8월에 사퇴했다. 1947년 10월 남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당무위원을 맡았으나, 1948년 1월 탈당했다.

4. 월북 이후와 재평가

조운 시인은 월북 이후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어 학계에 알려져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1]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 맞추어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조운시조집》을 복간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의 교육청 부지에는 2000년 6월 29일부터 시비 건립을 추진하였다.[1] 하지만 2000년 7월 21일 밤, 전남 교육청 측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여 제막식이 열리지 못했으며,[2] 결국 2000년 9월 2일에야 제막식을 가졌다.

4. 1. 월북 이후의 삶

조운 시인은 월북 이후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어 학계에 알려져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1]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 맞추어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조운시조집》을 복간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의 교육청 부지에는 2000년 6월 29일부터 시비 건립을 추진하였다.[1] 하지만 2000년 7월 21일 밤, 전남 교육청 측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여 제막식이 열리지 못했으며,[2] 결국 2000년 9월 2일에야 제막식을 가졌다.

4. 2. 남한에서의 재평가

조운 시인은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 이후 학계에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1] 그의 탄생 100주년인 2000년 7월 22일에는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주도로 《조운시조집》이 복간되었다.[1]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의 교육청 부지에 2000년 6월 29일부터 시비 건립이 추진되었으나,[1] 2000년 7월 21일 밤 전남 교육청 측의 기단부 훼손으로 제막식이 연기되기도 했다.[2] 결국 2000년 9월 2일에 시비 제막식이 열렸다.

4. 3. 시비 건립 논란

조운 시인은 월북 이후 월북 문인이라는 이유로 이름이 잊혀졌으나, 1988년 월북 문인 해금 조치가 발표되어 학계에 알려져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의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00년 7월 22일에 맞추어 '조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조운시조집》을 복간하였으며,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의 교육청 부지에는 2000년 6월 29일부터 시비 건립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2000년 7월 21일 밤, 전남 교육청 측에서 중장비를 동원하여 시비의 기단부를 훼손하여 제막식이 열리지 못했으며, 결국 2000년 9월 2일에야 제막식을 가졌다.

참조

[1] 뉴스 잊혀진 대시인 조운, 100년만에 조명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0-07-10
[2] 뉴스 민족문학작가회의, 조운시비 훼손관련 회견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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