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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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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웅수는 대한민국의 군인, 학자, 교육자이다. 육군 창설에 참여하고 한국 전쟁에서 제2사단장으로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5.16 군사정변 당시 쿠데타에 반대하여 투옥되었으며,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고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으며, 건양대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한미장학재단 활동을 통해 재미 한인 사회에 기여했다. 2002년 세계 한인상을 수상했으며, 2018년 9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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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웅수 예비역 육군 소장
김웅수 예비역 육군 소장
이름김웅수
현지어 표기金雄洙
출생일1923년 4월 11일
사망일2018년 2월 25일
출생지일제 강점기 조선 경상북도 김천
사망지대한민국 경기도 용인
본관광산(光山)
배우자박실모
자녀3남 1녀 (딸 김미영, 장남 김용원, 차남 김용희, 김용균)
친척김조현(친조부), 김효수(누이동생), 강영훈(매제), 이웅무(사위), 이경신(차자부), 최혜경(삼자부), 이기령(사돈), 이영혜(외손녀), 이수본(외손녀), 김수진(친손녀), 김수미(친손녀), 김현중(친손자)
부모김영진(부), 이임희(모)
군 경력
복무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1945년 6월 8일 ~ 1961년 11월 16일
최종 계급대한민국 육군 소장
근무대한민국 육군 제6군단
지휘군단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한국 전쟁
서훈 내역태극무공훈장장,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대통령 개인표창
기타 이력
기타 이력연세대학교 초빙교수
웹사이트
웹사이트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1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2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공훈록 - 003

2. 생애

김웅수는 해방 후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국 전쟁 당시 제2사단장으로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 이후에는 제1야전군 창설을 주도하고, 육군본부에서 작전, 교육, 군수 분야의 요직을 거치며 군 발전에 기여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제6군단장이었던 김웅수는 쿠데타에 가담한 예하 부대에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가 반혁명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 가까이 복역 후 1962년 5월 3일 형 집행 면제로 출감되었으나, 1961년 11월 15일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1962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워싱턴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 및 석사 학위를, 카톨릭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2년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미국에 남게 되었다. 이후 카톨릭 대학교건양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미장학재단, 국제한국학회(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미국 동부 한국 재향 군인회 등에서 활동하며 재미 한인 사회 발전에 기여했고, 2002년에는 세계 한인상(Global Korean Award)을 수상하였다. 2011년 영구 귀국하였으며, 2018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 1.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그는 1923년 4월 11일 외가인 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영진(金永珍)과 이임희(李任姬)의 8남매 (3남 5녀) 중 맏이로 출생했으며 본적은 충청남도 논산이며 관향광산(光山)이다. 돌 무렵 부모님과 함께 조부인 독립지사 김조현(金朝鉉)이 활동하던 만주 흑룡강성 영고탑 (寧古塔) 근처의 독립군 부락에 합류하여 김좌진(金佐鎭), 이범석(李範奭) 장군들의 무릎 위에서 영·유아기를 보냈다. 그 후 부모님을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중학교 교육을 받고 만주의 여순에 있는 여순고등학교(旅順高等學校)에 진학하여 졸업을 앞두고 1944년 1월에 일제하의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 여순고등학교 재학 중 일본 교토제국대학교(京都帝國大學校) 법문학부에 지원하여 합격통지를 받았으나 학병 징집으로 학업을 시작하지 못하게 된다. 1945년 6월 센다이의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야마가타연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8월 15일 해방을 맞이하여 1945년 11월 다수의 잔류 한국출신 병사들을 인솔하여 서울로 귀환하였다.

김웅수는 2004년 LA 미주중앙일보에 보도된 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처음부터 군인이 되려는 꿈을 가진 건 아닙니다. 독립운동에 투신하신 할아버지를 따라 한 살 때 중국으로가 하얼빈 부근의 독립군 부락에서 자랐습니다. 이 후 학병으로 징집되어 본의 아니게 일본군에 가담하게 됐지요. 해방 후 조국에 진 빚을 갚고 독립국가 건설에 조금이라도 일조하기 위해 대한민국 군인이 됐습니다. 38선으로 나뉘어진 조국이 통일되면 군복을 벗으려고 했지요"

2. 2. 군 복무

김웅수는 해방 후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군의 기초를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6.25 전쟁 당시 제2사단장으로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 이후에는 제1야전군 창설을 주도하고, 육군본부에서 작전, 교육, 군수 분야의 요직을 거치며 군 발전에 기여했다.

5.16 군사정변 당시 제6군단장이었던 김웅수는 쿠데타에 가담한 예하 부대에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가 반혁명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 가까이 복역 후 1962년 5월 3일 형 집행 면제로 출감되었으나, 1961년 11월 15일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김웅수의 군 복무 기간 주요 보직은 다음과 같다.

기간직책
1948년채병덕 참모총장 보좌관(국방부 인사국 과장)
1948년 12월 ~ 1949년 5월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전속부관
1949년 6월 ~ 1950년 6월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1953년 12월 ~ 1954년 6월제1야전군 사령관 대리 겸 참모장
1955년 7월 ~ 1955년 9월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1955년 9월 ~ 1956년 7월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1956년 7월 ~ 1959년 1월육군본부 군수국장
1959년 1월 ~ 1960년 9월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개편위원장
1960년 9월 ~ 1960년 10월국방대학교 입교
1960년 10월 30일 ~ 1961년 5월 21일제6군단 군단장 (4대)
1961년 11월 15일전역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


2. 2. 1. 국군 창설 참여

김웅수는 1946년 5월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임관(군번 100번: 현 10100번)하여 국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그는 국방부에서 통수계통과 직분을 체계화하는 국군조직법 관계 법령 입안, 통과를 위한 실무작업에 관여하였고, 1948년에는 채병덕 참모총장 보좌관(국방부 인사국 과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널리 알려지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국군 편입을 돕기도 하였다.

그는 이범석 국방장관(국무총리 겸임)과 신성모 국방장관의 부관을 거쳐, 평소 존경하던 김홍일 육군사관학교장을 따라 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전출되었다. 육사생도대장 시절 생도 1기생(현 10기생)에게 사관으로서의 자질을 높이는 정신훈화 교육에 힘썼다.

2. 2. 2. 6.25 전쟁 참전

김웅수는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당시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부임한 지 2주 만에 철수 명령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인민군 전차의 공격을 받는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그는 부하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을 평생 안고 살았다.

휴전 직전에는 육군 제2사단장으로서 6.25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자 제2사단의 최대 승전으로 기록되는 화살머리고지 전투를 지휘했다. 이 전투의 공로로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으며, 미국 정부로부터는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받았다.

6.25 전쟁 기간 동안 그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직책
1950년 6월 ~ 1950년 7월육군 수도사단 참모장
1950년 7월 ~ 1950년 8월제 1군단 인사참모
1950년 8월 ~ 1951년 2월육군종합학교 학생연대장
1951년 3월 ~ 1951년 7월육군 제8사단 부사단장
1951년 7월 ~ 1951년 12월육군참모총장 (이종찬) 비서실장
1952년 6월 ~ 1953년 4월2군단 참모장 (준장)
1953년 5월 ~ 1953년 12월육군 제2사단장


2. 2. 3. 전후 군 개혁 노력

군사영어학교 졸업(1946년 5월)과 임관(군번 100번: 현 10100번) 이후, 김웅수는 국방부에서 통수계통과 직분을 체계화하는 극군조직법 관계 법령 입안 통과를 위한 실무작업에 관여했다. 또한 인사국 과장으로서 당시 널리 알려지지 못한 독립지사들의 국군 편입을 도왔다. 그는 이범석 국방장관(국무총리 겸임)과 신성모 국방장관의 부관을 거쳐, 평소 존경하던 김홍일 육사교장을 따라 육사 생도대장으로 전출되었다.

김웅수는 육사 생도대장으로 수도사단 참모장으로 전출되기 전까지 육사 생도들(생도 1기생, 현 10기생)에게 사관으로서의 자질을 높이는 정신훈화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후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시절에는 육군본부에 관리 과정을 도입하여 경영관리 교육을 실시하고 군 예산 회계 제도 확립에 기여하였으며 육군 편제의 대개편을 담당하였다. 군수제도를 개편하면서 부산 소재 각종 군수부대와 항만 운영부대의 효율적인 지원과 통제를 위해 부산에 군수기지 사령부를 신설하였고, 1960년 1월 군수참모부 차장을 겸하는 초대 부산군수기지사령관에 박정희 소장(대한민국 전 대통령)을 추천하여 임명되도록 하였다.

2. 2. 4. 5.16 군사정변과 투옥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육군 제6군단장이었던 김웅수는 박정희가 주도한 군사정변에 반대했다. 그는 예하 부대 중 쿠데타에 가담한 부대에 원대 복귀 명령을 내렸다. 이로 인해 혁명재판소에서 반혁명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1년 가까이 복역하던 중 1962년 5월 3일 형 집행 면제로 출감되었으나, 이미 1961년 11월 15일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된 후였다.

김웅수는 군 복무 시절 청렴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지휘관으로 알려졌지만,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강제 전역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2. 3. 도미 유학과 교수 생활

1923년 4월 11일 외가가 있던 경상북도 김천에서 태어났다. 본관광산 김씨이다. 1944년 일본 학병으로 징집되기 전까지 중국 만주 여순고등학교를 다녔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뒤, 잔류 한국 출신 병사들을 인솔하여 서울로 귀환하였다.

1962년 8월, 5·16 군사정변에 반대하다 투옥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1년 가까이 복역하던 중 형집행면제로 출감된 후, 미 국무부가 제공한 장학금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72년 11월에는 워싱턴에서 열린 유신반대시위를 총지휘하기도 했다.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워싱턴 D.C. 소재 카톨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1994년부터 1999년까지는 건양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학력



경력


2. 4. 유신 반대 운동과 망명 생활

1972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국내외 최초의 유신반대시위를 총지휘하면서, 학문을 위한 유학이 망명 생활로 바뀌었다. 유신반대시위 이후 학자로서 제2의 인생을 살면서 워싱턴 소재 카톨릭 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를 만 70세에 정년퇴임한 후, 고향 논산에 있는 건양대학교의 초빙을 받아 고국과 고향에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2. 5. 귀국과 노년

그는 군 복무 최종 보직으로 제6군단장 복무 중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날 때 예하 부대에서 쿠데타에 가담한 부대의 원대복귀를 명령한 책임으로 혁명재판부로부터 반혁명 죄목으로 10년형을 언도받고 두 번의 수감(收監)을 거치며 1년 가까운 옥고를 치렀다. 그는 군대 내에서 청렴결백하고 원칙을 고수하는 지장(智將)으로 정평이 나 있었으나 혁명세력에 의해 1961년 11월 15일을 기하여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1962년 5월 3일 형 집행 면제로 출감되었으며, 같은 해 8월 미국 국무부의 주선으로 도미 유학길에 오른다.

만학(晩學)으로 시애틀 소재 워싱턴 대학에서 경제학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으로 이주한 후 1972년 워싱턴 D.C 소재 카톨릭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하여 정년 퇴임(만 70세) 때까지 교수 생활을 한다. 1972년 11월 워싱턴에서 열린 유신 반대 시위(국내외를 통해 최초의 유신 반대 시위였음)를 총지휘하게 되어 귀국을 포기하게 된다. 그 후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교육에만 전념한다.

카톨릭 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는 한편 한인 2세들을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한미장학재단의 발전에 공헌하였고, 한미장학재단 동부 회장과 전국 이사장으로 활약하면서 장학 재단 조직 확산과 기금 확보에 앞장섰다. 아울러 국제한국학회(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 이사장, 미국 동부 한국 재향 군인회와 국가 유공자회 고문 등을 역임하면서 미주 지역 교포 사회 전반에 끼친 그의 지도력과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세계 한인상(Global Korean Award)을 수상하였다.

그는 카톨릭 대학교를 은퇴한 이후에도 고향인 논산에 위치한 건양대학교에서 5년간 만 75세까지 경제학과 교수로 후학을 양성했다. 그는 워싱턴 한인 사회의 대표적인 “올드타이머”였으며 버지니아주 맥클린에 소재한 워싱턴 한인 교회의 원로 장로로도 봉직하면서 동 교회에 지역 한인 노인들과 커뮤니티를 위한 “웅수 시니어 아카데미”를 설립하는 기금을 쾌척하였다. 그는 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문무(文武)를 겸비한 진정한 선비였다.

반세기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끝내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2011년 영구 귀국하였다. 5.16 쿠데타로 인하여 젊은 웅지를 접어야 했고 격동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가 겪은 고난과 시련들을 반추해 볼 때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군의 지휘관으로서 최선을 다했었다는 위안을 받으며 2018년 2월 25일 경기도 기흥의 노블카운티에서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유해는 미국 워싱턴으로부터 옮겨온 부인의 유해와 함께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층 320-105에 안장되어 있다.

3. 주요 활동 및 업적

김웅수는 한국 전쟁 전후 한국군, 특히 육군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해방 직후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군의 기틀을 다졌고, 한국 전쟁 중에는 제2사단장으로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전쟁 이후에는 제1야전군 창설을 주도하고 육군본부에서 작전, 교육, 군수 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육군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제6군단장으로서 쿠데타에 반대하여 강제 예편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군에서 물러난 후에는 학술 및 사회 활동에 전념했다. 미국 카톨릭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카톨릭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건양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3. 1. 군 경력

김웅수는 해방 후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군의 기초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2사단장으로 화살머리고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휴전 후에는 제1야전군 창설을 주도하고, 육군본부에서 작전교육국장, 군수국장, 군수참모부장 등을 역임하며 육군 교육 및 군수 체계 확립에 힘썼다.

1961년 5.16 군사정변 당시 제6군단장이었던 김웅수는 쿠데타에 가담한 예하 부대에 원대 복귀를 명령했다. 이로 인해 반혁명 죄목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년 가까이 복역했으며, 1961년 11월 15일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되었다. 그는 군대 내에서 청렴하고 원칙을 중시하는 지휘관으로 알려졌으나, 혁명 세력에 의해 강제 전역을 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의 군 경력은 다음과 같다.

기간직책
1948년채병덕 참모총장 보좌관 (국방부 인사국 과장)
1948년 12월 ~ 1949년 5월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 전속부관
1949년 6월 ~ 1950년 6월육군사관학교 생도대장
1950년 6월 ~ 1950년 7월육군 수도사단 참모장
1950년 7월 ~ 1950년 8월제1군단 인사참모
1950년 8월 ~ 1951년 2월육군종합학교 학생연대장
1951년 3월 ~ 1951년 7월육군 제8사단 부사단장
1951년 7월 ~ 1951년 12월육군참모총장 (이종찬) 비서실장
1952년 6월 ~ 1953년 4월2군단 참모장 (준장)
1953년 5월 ~ 1953년 12월육군 제2사단장
1953년 12월 ~ 1954년 6월제1야전군 사령관 대리 겸 참모장
1955년 7월 ~ 1955년 9월육군본부 관리참모부 차장
1955년 9월 ~ 1956년 7월육군본부 작전교육국장
1956년 7월 ~ 1959년 1월육군본부 군수국장
1959년 1월 ~ 1960년 9월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육군편제개편위원장
1960년 9월 ~ 1960년 10월국방연구원 입교
1960년 10월 30일 ~ 1961년 5월 21일6군단 군단장 (4대)
1961년 11월 15일전역 (육군 소장으로 강제 예편)


3. 2. 학술 및 사회 활동


  • 1969년 ~ 1971년 미국 육군성 공병감실 수자원 투자효율분석관 (카톨릭대학교 박사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
  • 1973년 ~ 1993년 미국 워싱턴 D.C. 소재 카톨릭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1982년 고려대학교 초빙교수
  • 1990년 연세대학교 초빙교수
  • 1994년 ~ 1999년 충남 논산시 건양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 1995년 ~ 1997년 건양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장
  • 1997년 ~ 1998년 건양대학교 경영경제연구소장

4. 저서

金雄洙중국어 회고록 – ‘송화강에서 포토맥강까지’ ㈜새로운사람들 발행 (2007년 3월 20일) (363면)

5. 상훈

훈격훈장명수여 국가비고
태극무공훈장대한민국화살머리고지 전투 공적
공로훈장 (Legion of Merit)미국
세계 한인상 (Global Korean Award)국제한국학회 (International Council on Korean Studies)2002년, 미주지역 교포사회 공헌
평생공로상 (Lifetime Service Award)한미장학재단 (Korean American Scholarship Foundation)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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