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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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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병덕은 일제강점기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 육군에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군인이다. 1916년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평양제일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광복 후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대위로 임관했으며, 대한민국 육군 창설에 참여하여 육군참모총장까지 역임했다. 한국 전쟁 초기 서울 방어 실패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하동 전투에서 전사하여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2005년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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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병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채병덕
한자 표기蔡秉德
로마자 표기Chae Byung-duk
일본식 이름오시마 헤이도쿠 (大島秉徳)
상서(霜緖)
별명코끼리 (북한 연락부 암호명으로 추정)
출생일1916년 4월 17일
사망일1950년 7월 27일
출생지일제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사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하동
묘소국립서울현충원 제1장군묘역 12호
거주지대한민국 서울
가족아버지 채관수, 장인 백홍석, 장모 장애신, 배우자 백경화 (1913~1986)
육군참모총장 재직 당시의 채병덕
군사 경력
소속 정체일본 제국 (~1945)
대한민국
소속 조직대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복무 기간일본 제국 육군: 1937년 ~ 1945년
대한민국 육군: 1946년 ~ 1950년
최종 계급소좌 (일본 육군)
중장 (대한민국 육군, 추서)
지휘육군참모총장
근무육군본부
육군 영남편선관구사령부
지휘관육군참모총장
육군 영남편선관구사령관
참전태평양 전쟁
한국 전쟁
소속 부대없음
전공없음
상훈없음
제대 후없음
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참모총장
직책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참모총사령관
임기1948년 8월 15일 ~ 1948년 8월 16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국무총리이범석
국방부 장관이범석
국방부 차관최용덕
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참모총장 (2)
직책대한민국 국방부 합동참모총장
임기1948년 8월 16일 ~ 1949년 5월 9일
대통령이승만
부통령이시영
국무총리이범석
국방부 장관이범석
국방부 차관최용덕
기타 정보
정당무소속

2. 생애

1946년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에 입대하여 육군 대위로 임관했다. 한국육군사관학교(당시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했으며(군번 10002번),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육군에 근무하였다. 제1연대 A중대장, 탕위부 특별부대장, 제4여단장 등을 역임한 후, 1949년 5월 9일 제2대 육군참모총장이 되었다.

1949년 10월, 38선에서의 남북 무역 부정을 둘러싼 남북무역사건으로 김석원 제1사단장과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채병덕과 김석원을 모두 예비역으로 편입시켰으나, 이범석 국무총리의 신임이 두터웠던 채병덕은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행정본부장으로 현역에 복귀하였다. 1950년 4월, 다시 육군참모총장(소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조선인민군의 공격을 막는 지휘를 맡았으나, 서울을 상실하였다(서울 전투). 채병덕은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남경상도 방위사령부로 전출되었다.

1950년 7월 23일,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2] 1950년 7월 27일, 미군 제29연대 제3대대와 함께 행군 중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고개에서 신원불명의 집단에게 기습 공격을 받고 머리에 총상을 입어 전사하였다.[9] 사후 중장으로 특진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채병덕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 이향리에서 출생하였다.[1] 1916년 4월 17일, 평안남도(현재의 평안남도, 북한)에서 채관수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1923년 봄, 평양종로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년 만에 전과목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9년에는 조선인의 입학이 어려웠던 평양제일중학교(일본인 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수석을 유지하였다. 특히 수학, 물리, 역사, 지리 성적이 우수하였고, 영어는 좋아하지 않았지만 꾸준히 공부하여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체육에도 뛰어나 유도와 육상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청소년기 채병덕을 알았던 사람들은 모두 그가 수재이자 동시에 성실한 노력가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4학년 때, 배속 장교와 교장의 권유로 일본육군사관학교 입학 시험을 치렀다. 1933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49기)에 입학하였는데, 이는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정규 과정으로 합격한 사례이다. 예과 2년 차에 야전포병과를 1지망으로 하였으나 2지망이었던 중포병과에 배정되었다. 1935년 3월 예과를 수료한 후, 4월부터 9월까지 사세보(佐世保)의 중포병연대에서 부대 근무를 하였다.

같은 해 10월, 6개월간의 부대 근무를 마치고 육사 본과에 입학했다. 전술·전략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수학에 능숙하여 중포병을 지원, 요새중포병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사세보(佐世保)의 중포병연대에 배속되었다.[6] 1938년 3월 30일 중위로 진급하였다.[7] 같은 해 6월 5일, 평양에서 백홍석과 정홍범의 장녀 백경화와 결혼식을 올렸다.

2. 2. 일본 군 복무

1933년 4월, 일본 육군사관학교(49기)에 입학하였다.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정규 과정으로 합격한 사례이다. 예과 2년차가 되면 병과가 나뉘는데, 야전포병과를 1지망으로 하였으나 2지망이었던 중포병과에 배정되었다.[13] 1935년 3월 예과를 수료한 후, 4월부터 9월까지 사세보의 중포병연대에서 부대 근무를 하였다.[13]

같은 해 10월, 6개월간의 부대 근무를 마치고 육사 본과에 입학했다. 전술·전략에는 별 관심이 없었고 수학에 능숙하여 중포병을 지원, 요새중포병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사세보의 중포병연대에 배속되었다.[13] 1937년 8월 21일 포병 소위로 임관하였다.[6] 1938년 3월 30일 중위로 진급하였다.[7] 같은 해 6월 5일, 평양에서 백홍석과 정홍범의 장녀 백경화와 결혼식을 올렸다.[13] 1939년 겨울, 육군포병학교에 입학하였다.[13] 졸업 후 육군병기학교 교관이 되었고, 1940년에는 오사카의 육군조병창에 근무하게 되었다.[13] 일본군 시절 상관과 자주 마찰을 빚었는데, 특히 오사카 육군조병창 근무 중에는 창장에게 반항하여 육군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고 한다.[13] 1941년 3월 대위, 1944년 3월 1일 소좌로 진급하였다.[8]

종전 당시에는 경기도 인천 부평(富平) 육군조병창 제1공장장이었다. 병기 관련 분야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육군 시절에는 한 번도 전장 경험을 하지 못했다. 한국에 군대가 창설될 때 전력의 기반이 될 공업과 병기 생산에 이 조병 시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공원들을 설득하여 장비 확보 및 관리에 힘썼지만, 미군에 의해 철거되었다.[13]

2. 3. 대한민국 군 복무

1946년 1월 15일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대위로 임관하여, 같은 날 창설된 남조선국방경비대 제1연대장을 맡았다.[13] 이후 1 보급 부대장, 병기 부대 사령관, 후방 부대 사령관, 제4 여단장 등을 역임했다.

신성모의 추천으로 1948년 8월 2일 통위부 참모총장, 8월 15일 국방부 합동참모총사령관, 8월 16일 국방부 합동참모총장에 임명되었고, 12월 1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2월 1일에는 육군 소장으로 승진하였다.

1949년 5월 9일, 국방부 기구 간소화로 육·해군을 통합 지휘하던 국방부 참모총장 제도가 폐지되고 국방부 장관이 통할하게 됨에 따라 신성모의 추천으로 제2대 육군총참모장이 되었다.

총참모장 재직 중 전력 증강을 위한 부대 증설, 교육 강화를 위한 각종 군사 학교 신설, 북한 대남유격대 토벌 작전 수행 등의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1949년 10월 남북 교역 사건 및 제1사단장 김석원과의 갈등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하였고, 1950년 4월 말에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4]

2. 4.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채관수
부인백경화1913년 출생 ~ 1986년 사망. 백홍석 장군의 차녀.
장인백홍석일본 육군사관학교 27기,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특3기, 통위부 보병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 준장 예편.


3. 한국 전쟁과 죽음

채병덕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제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 합류하여 1950년 4월 육군참모총장(소장)으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2]

한국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 육군은 급속도로 붕괴되었다. 1950년 6월 30일 채병덕은 해임되어 남경상도 방위사령부로 전출되었고,[2] 7월 27일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23][2]

3. 1. 한국 전쟁 초기 대응

1949년 10월 남북한 간 물자교역 과정에서 발생한 남북교역사건 및 제1사단장 김석원과의 갈등으로 참모총장직에서 해임, 예편되었다가 1949년 12월 14일 국방부 병기 행정 본부장으로 복귀하였다. 1950년 4월 말 제4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4] 그러나 야전군 지휘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이라는 점은 참모총장으로서 문제가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 북한의 남침 정보를 접하여 1950년 5월 1일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나, 1950년 6월 23일 해제하였다. 1950년 6월 24일 전방 지휘관들의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개전 초기 지휘 혼란을 야기하였다. 채병덕은 그동안 38선에서의 무력 침공 사건이나 대남유격대 준동 시 비상경계 형식으로 대처했고, 그것으로 실효를 거두어 특별한 경계 조치를 하지 않았다.[15]

정보국에서 북한군 남침 정보를 수없이 보냈지만, 채병덕은 국군이 전투기와 전차, 미군 지원 없이도 북한군을 격퇴할 수 있다고 허풍을 떨었다. 신성모의 허가를 받고 국군 병력 반 이상을 휴가 보냈고, 정보국의 정보 분석과 북한 남침 경고를 무시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이 함락되는 등 패전을 거듭하였다. 채병덕은 휴가, 외출 보낸 병력에게 복귀 명령을 내리고 육사교도대 생도 1기(262명) 및 2기(227명)를 포천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6월 25일 오후)[16] 그러나 이 국군의 동두천, 포천 역습은 결국 실패한다.[17]

한국 전쟁 발발 당일(6월 25일) 오후 2시 국무회의에서 채병덕은 “적의 전면 공격은 아닌 것 같으며 이주하,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으로 보인다”고 답했다.[18] 다음 날(6월 26일) 오후 국무회의에서는 서울 사수를 공언하였고, 명령만 있으면 나흘 안에 평양을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기도 했다.[19]

3. 2. 한강 인도교 폭파와 해임

맥아더는 한국 전쟁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도쿄에서 이승만을 잠시 만났을 때 채병덕의 해임을 건의했다고 한다. 1950년 6월 28일 한강철교가 폭파되자 맥아더는 이승만이 보는 앞에서 채병덕에게 한강방어선 지휘에 대해 질문했다.[20] 그러나 채병덕은 우물쭈물하며 200만 남한 청년들을 동원해 훈련시켜 침략을 격퇴하겠다고 답했다. 맥아더는 채병덕 앞에서는 이승만에게 그를 칭찬했으나, 그날 저녁 이승만과 독대하며 채병덕의 경질을 강하게 요구했다.[20] 결국 채병덕은 1950년 6월 30일 육군참모총장에서 해임되어 '경남 지구 편성군 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나, 실제로는 1개 대대 정도의 병력만 주어졌다. 1964년 한강 인도교 폭파 재심에서 채병덕이 실질적 책임자로 결론지어졌다.[21]

3. 3. 전사

1950년 7월 23일 국방부장관 신성모는 채병덕에게 "귀하는 서울을 잃고 중대한 패전을 당했다. 책임은 중하고 크다. 그런데 지금 적은 전남에서 경남으로 지향하고 있다. 이 적을 막지 않으면 전 전선이 붕괴될 것이다. 귀하는 패주 중인 소재 부대를 지휘해서 적을 격퇴하라. 귀하는 선두에 서서 독전할 필요가 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22]

채병덕은 이 명령으로 남해안을 돌아 공격해오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출전했다가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인민군 6사단의 매복작전에 걸려 하동 전투에서 전사했다.[23][2] 훗날 채병덕 살해 음모가 제기되기도 했다.[23]

4. 사후 평가 및 논란

대한민국 정부는 채병덕이 전사하자 1계급 특진시켜 중장을 추서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유일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고나 한국 전쟁 중 전사한 대한민국 육군 및 공군 장군들이 몇 명 더 존재한다.[3] 경상남도 하동군에는 그의 추모비가 있다.[4]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친일파로 등재되었다.

4. 1. 긍정적 평가

채병덕은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유일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다.[3] 경상남도 하동군에는 그의 추모비가 있다.[4]

4. 2. 부정적 평가

채병덕은 한국 전쟁 중 전사한 유일한 대한민국 육군 장군이다.[3] 그러나 사고로 사망하거나 한국 전쟁 중 전사한 대한민국 육군 및 공군 장군들은 몇 명 더 존재한다.[3]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되었다.

4. 3. 친일 논란

2005년 8월 29일,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되었다.[1]

5. 기타

채병덕은 군번 2번을 받았으나, 1번 군번이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고 군 경력도 짧았던 이형근에게 주어진 것에 불만을 품었고, 이형근과 인사 담당자였던 임선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10]

체중이 100kg이 넘는 거구였으며, '뚱뚱한 채(チェ)'라는 별명이 있었다. 카리스마 있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며, 부하들을 잘 챙기는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만주국군 출신 정일권을 "정은 辻政信보다 뛰어나다"라고 말하며 중용했다. 1950년 7월 채병덕의 후임으로 정일권이 참모총장에 취임했을 때, 정일권은 겸연쩍게 임명장을 내보이며 "저는 차장으로 당신을 돕기 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자, 채병덕은 "그럼, 내 후임은 정 장군인가!"라며 기뻐하며 눈물을 흘리면서 정일권의 어깨를 감동적으로 두드렸다.

서울 방어 당시 채병덕과 함께 행동했던 연락 장교 하우스만 대위는 "기습 공격이라는 배경과 상황이 불분명하고, 이형근 준장이 처음부터 끝까지 채 총장의 방침에 비판적이었던 점을 고려해 볼 때, 결과만으로 채 총장의 전략 능력을 평가하는 것은 가혹하다. 결과론만이 횡행하고 있지만, 사건의 진실을 규명한 후 평가해야 하며, 그에게만 책임을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죽은 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쉽지만, 역사가는 그러한 안일함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주한미군 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가 1949년 8월 19일에 찰스 볼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채병덕에 대해 "총참모장은 일본에서 교육받은 포병 소좌이며, 그는 열심히 노력하고, 조언을 잘 듣고, 장비를 함부로 팔지 않고, 아마도 지금 그 직무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그는 호감이 가고, 뚱뚱하고, 승진을 원하며, 소장이지만, 그와 거의 동급인 고문관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다."라고 적혀 있다.[11]

남북 무역 사건에 대해 이응준은 "그것은 김석원의 고집불통이 문제를 악화시킨 것이다. 채병덕은 뇌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청렴하고 가난했다. 법적으로도 채병덕의 주장이 옳다. 그러나 김석원은 한번 생각하면 목숨을 걸 정도로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다.

강영훈에 따르면, 채병덕은 "내가 총참모장이 되면, 당신을 인사, 백선엽을 정보, 강문봉을 작전, 양국진을 군수국장에 임명하겠다"라고 말하며 총참모장으로 추천해줄 것을 종용했다.[12] 강영훈은 이를 거절했지만, 후에 총참모장이 된 채병덕은 강영훈을 국회 연락 장교로 임명했다.[12]

6. 수상

수여 날짜훈장 종류
1952년 5월 20일을지무공훈장[1]
1950년 12월 30일충무무공훈장[2]


참조

[1] 뉴스 광복을 위해 배우자”… 日육사 출신 한국인의 고뇌와 배신 https://n.news.naver[...]
[2] 뉴스 "논에 군인 시신 많아 농사를 짓지 못했지" https://n.news.naver[...]
[3] 뉴스 휴전 54년의 추억 https://www.konas.ne[...]
[4] 뉴스 `이제야 떳떳이 장군을 뵙습니다` 채병덕장군 전사비 제막 http://www.knnews.co[...]
[5] 문서 佐々木春隆の朝鮮戦争韓国編では1917年生まれ
[6] 웹사이트 官報.1937年8月23日 https://dl.ndl.go.jp[...]
[7] 웹사이트 官報.1938年3月31日 https://dl.ndl.go.jp[...]
[8] 웹사이트 第36号 昭和19年3月1日 陸軍異動通報(1) https://www.jacar.ar[...]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2019-03-29
[9] 뉴스 (4)채병덕 장군 의문의 전사 https://news.joins.c[...] 중앙일보 2018-11-21
[10] 웹사이트 <14> 대한민국 국군의 ‘자랑스러운 군번’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8-08-04
[11] 웹사이트 Letter from W. L. Roberts to Charles L. Bolte http://archive.histo[...]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2019-05-12
[12] 뉴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아니면 '아니오' 해야지 (18)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22-05-05
[1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4] 서적 청산하지 못한 역사1: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청년사
[15] 뉴스 6ㆍ25는 끝났는가? http://news.naver.co[...] 대전일보 2007-06-26
[16] 뉴스 군 어제와 오늘<30> 「북극성會」(6) “正規출신은 온실의 화초같은 애송이 “短期출신, 후배명예욕 질타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93-07-29
[17] 웹사이트 의정부전투 (議政府戰鬪)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02-17
[18]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19]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50년대편 1권
[20] 서적 한국전쟁: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일월서각 1950-06-30
[21] 문서 김득중,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
[22] 서적 청산하지 못한 역사1: 한국 현대사를 움직인 친일파 60 청년사 1950-07-23
[23] 서적 한국현대사산책 195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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