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이 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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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가이 우타는 하기 번의 번사로, 개국론과 공무합체론을 주장하며 조슈 번의 중역을 지냈다. 그는 '항해원략책'을 통해 조정과 막부의 공무합체를 시도했으나, 존왕양이파와의 대립,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인한 공무합체파의 실각으로 인해 실각했다. 이후 조슈 번의 책임을 지고 할복했으며, 사후에는 그의 정책과 인물됨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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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이 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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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나가이 도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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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 에도 시대 말기 |
출생 | 문정 2년 5월 1일(1819년6월 22일) |
사망 | 분큐 3년 2월 6일(1863년3월 24일) |
개명 | 해당사항 없음 |
이명 | 아악, 요노스케, 요자에몬, 하야토, 우곤 |
계명 | 용헌성의영검거사 |
묘소 | 가이초지(야마구치현하기시) |
주군 | 모리 다카치카 |
번 | 조슈번사 |
씨족 | 오에 성나가이 씨 |
부모 | 아버지:나가이 야스노리 어머니:후쿠하라 도시시게의 딸 |
형제 | 해당사항 없음 |
배우자 | 해당사항 없음 |
자녀 | 사다코 |
특기 사항 | 해당사항 없음 |
2. 생애
하기 번의 번사 나가이 지로우에몬 야스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2년(분세 5년), 4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여 가문을 이었으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가문의 녹봉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 후, 번교(藩校)인 메이린칸에서 수학하였고,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시동(侍童)이 되었다. 모리 다카치카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세자 모리 사다히로의 후견인이 되기도 하였다. 1858년(안세이 5년), 조슈 번의 중역인 직목부(直目付, 감독관)가 되었다.
1861년(분큐 원년), 개국론자였던 나가이 우타는 공무합체에 기반한 항해원략책을 번주에게 건의하여 번론(藩論)으로 채택되었다. 이후 조정과 막부의 공무합체파에게 환영받았으며, 같은 해 11월 번주 다카치카와 함께 에도로 가서 노중(老中) 구제 히로치카, 안도 노부마사와 회견하고, 항해원략책을 건의하며 공무 주선을 의뢰했다.
요시다 쇼인과 그의 문하생이 주류였던 존왕양이파와 대립했던 나가이 우타는,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 대옥으로 쇼인이 체포된 후 에도로 호송되었을 때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쇼인의 제자인 구사카 겐즈이, 마에바라 잇세이 등은 나가이 우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1862년(분큐 2년),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막부의 공무합체파가 실각하면서, 조슈 번 내에서 양이파가 세력을 회복하고 나가이 우타에 대한 배척 운동이 거세졌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조정 공작으로 인해 나가이 우타의 주장은 조정을 비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모리 다카치카에게 귀국 근신을 명령받았다. 같은 해 6월, 나가이 우타는 면직되어 귀국했다.
1863년(분큐 3년), 나가이 우타는 조슈 번의 책임을 모두 지는 형태로 할복을 명령받았다. 나가이 본인은 이 조치에 납득하지 않았지만, 번론이 양분되어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할복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2월, 하기 성 아래 하지하라(土原)의 자택에서 검시관(検視役) 구니시 지카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45세로 할복했다.
나가이 우타의 장녀 사다코(貞子)는 도미오카 제사장에서 근무했다.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추다는 오랫동안 세자부(世子付)의 동료로 지낸 친구 사이였다. 나가이 우타는 할복 전날, 고추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남은 자식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끝에는 “누명을 쓰고, 이러한 몰골로 수만 가지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라는 사세구(辞世の句, 세상을 떠날 때 남기는 시)를 남겼다.[3]
2. 1. 가문 및 초기 이력
하기 번의 번사이며 대조사(大組士中老)였던 나가이 지로우에몬 야스노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22년(분세 5년), 4살 때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여 가문을 이었으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가문의 녹봉이 절반으로 줄었다.[3] 그 후, 번교(藩校)인 메이린칸에서 수학하였고, 번주 모리 다카치카의 시동(侍童)이 되었다.[3] 모리 다카치카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세자 모리 사다히로의 후견인이 되기도 하였다.[3] 1858년(안세이 5년), 조슈 번의 중역인 직목부(直目付, 감독관)가 되었다.[3]2. 2. 항해원략책과 공무합체론
나가이 우타는 개국론자로서 1861년(분큐 원년) 항해원략책을 번주에게 건의하여 번론(藩論)으로 채택되었다.[1] 항해원략책은 공무합체에 기반한 정책으로, 조정과 막부의 공무합체파에게 환영받았다. 같은 해 11월, 번주 다카치카와 함께 에도로 가서 노중(老中) 구제 히로치카, 안도 노부마사와 회견하고, 항해원략책을 건의하며 공무 주선을 의뢰했다.[3]2. 3. 존왕양이파와의 대립 및 실각
나가이 우타는 요시다 쇼인과 그의 문하생이 주류였던 존왕양이파와 대립했다.[3] 이이 나오스케의 안세이 대옥으로 쇼인이 체포된 후 에도로 호송되었을 때, 나가이 우타는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쇼인의 제자인 구사카 겐즈이, 마에바라 잇세이 등은 나가이 우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3]1862년(분큐 2년),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막부의 공무합체파가 실각하면서, 조슈 번 내에서 양이파가 세력을 회복하고 나가이 우타에 대한 배척 운동이 거세졌다. 이와쿠라 도모미 등의 조정 공작으로 인해 나가이 우타의 주장은 조정을 비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모리 다카치카에게 귀국 근신을 명령받았다. 같은 해 6월, 나가이 우타는 면직되어 귀국했다.
2. 4. 할복
1863년(분큐 3년), 나가이 우타는 조슈 번의 책임을 모두 지는 형태로 할복을 명령받았다. 나가이 본인은 이 조치에 납득하지 않았지만, 번론이 양분되어 내란이 일어나는 것을 우려하여 할복을 받아들였다. 같은 해 2월, 하기 성 아래 하지하라(土原)의 자택에서 검시관(検視役) 구니시 지카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향년 45세로 할복했다.[3]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추타에게는 할복 전날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남은 자식들의 보호를 부탁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는 "누명을 쓰고, 이러한 몰골로 수만 가지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라는 유언의 시를 남겼다.[3]
2. 5. 사후
나가이 우타의 장녀 사다코(貞子)는 도미오카 제사장에서 근무했다.[3]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추다는 오랫동안 세자부(世子付)의 동료로 지낸 친구 사이였다. 나가이 우타는 할복 전날, 고추다에게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며, 남은 자식들을 돌봐달라고 요청하는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끝에는 “누명을 쓰고, 이러한 몰골로 수만 가지 생각하는 것은 나라의 장래”라는 사세구(辞世の句, 세상을 떠날 때 남기는 시)를 남겼다.[3]3. 사세구(辞世の句)
나가이 우타의 사세구(辞世の句, 죽음에 임하여 남긴 시)는 다음과 같다.
- 이제 와서 무엇을 말하랴, 대대로 이어져 온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는 몸이기에
- 임금을 위해 버리는 목숨은 아깝지 않지만, 다만 생각나는 것은 나라의 앞날이로다.
-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으나, 아직 업(業)은 이루어지지 않았네. 부끄럽다 45년의 광기여. 지금 당장 성불하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니, 바라건대 천마(天魔)를 이끌고 국광(國光)을 도우리라.
4. 평가
나가이 우타의 항해원략책은 당시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한 현실적인 정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오랜 대립 관계에 있던 구사카 겐즈이 등의 양이파와도 해군 강화를 통한 외교력 추진, 통상 교섭 강화 등 개국 노선에서는 일치하는 점이 있었다. 주요 쟁점은 조정의 입장과 막번 체제 유지에 있었으며, 당시로서는 양쪽 모두에 상응하는 현실적 노선이었기 때문에 번론 통일이 어려웠다는 측면도 있었다.[2]
메이지 유신 이후, 요시다 쇼인의 원수로 지목되어 나가이 우타의 평가가 낮아졌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와쿠라 도모미는 "나가이보다 훌륭한 사람은 없다. 그는 기토나 오쿠보보다 훌륭하다"라고 평가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슈에서 호걸이라고 하면 나가이 가가쿠를 따를 자가 없다"라고 말했다. 노무라 야스시는 "나가이 가가쿠는 적이지만 훌륭한 남자였다"라고 평가했다. 고다마 아이지로의 증언에 따르면, 이노우에 가오루는 나가이 우타의 죽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그의 유족을 도왔다고 한다. 반면,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나가이 우타에 대한 증위(贈位)에 반대했다.[2]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나가이 우타는 여러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다루어졌다. 1971년 ABC 텔레비전·국제 방영의 《천황의 세기》에서는 오구리 카즈야가, 1977년 NHK 대하드라마 《화신》과 1989년 닛폰 TV 연말 시대극 스페셜 《기병대》에서는 아쓰미 이쿠타이가, 2015년 NHK 대하드라마 《불타오르다》에서는 하바 유이치가 나가이 우타를 연기하였다.
5. 1. 텔레비전 드라마
참조
[1]
서적
草莽論
ちくま学芸文庫
[2]
서적
実録維新十傑 第十巻
https://dl.ndl.go.jp[...]
平凡社
1935-03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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