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시노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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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이시노스케(典侍)는 일본 황실에서 천황과 황후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던 여성 관직이다. 고대부터 에도 시대 말기까지 존재했으며, 천황의 측근으로서 일상생활을 보조하거나 황자를 낳는 역할도 했다.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제도가 개혁되어 황후 아래로 통합되었으며, 다이쇼 천황의 일부일처제 시행으로 시첩 역할은 사라졌다. 마지막 덴지는 다케야 쓰네코였으며, 쇼와 시대에 이르러 여관 제도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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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시노스케 | |
---|---|
개요 | |
직책 | 궁중의 여관 |
계급 | 종삼위 상당 |
별칭 | 후궁 뇨쥬 고모노나이시 |
상세 정보 | |
역할 | 덴노의 침전 모시는 일 고케에서 황족 · 공경에게의 칙명 전달 덴죠비토의 출입 관리 의식에서의 봉사 |
인원 | 정원 4명 |
임명 방법 | 뇨칸 중에서 선발 귀족의 딸 중에서 천거 |
근무 장소 | 고쿄 |
역사적 변천 | |
설치 시기 | 나라 시대 |
제도 변화 | 헤이안 시대: 구교의 딸이 임명되기 시작 가마쿠라 시대: 무가의 딸도 임명 에도 시대: 고미즈노오 천황 때, 제도 정비 |
관련 항목 | |
관련 직책 | 나이시노카미 뇨쥬 쇼시 고토노나이시 간토쿠 주나곤노텐지 |
2. 역사
나이시노스케는 덴지라고도 불리며, 천황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역할을 했다. 천황이 다른 궁궐로 이동할 때에는 검새를 받드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천황의 유모나 선지가 덴지로 임명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이들은 천황 즉위 후 팔십도신제의 사신이 되는 것이 관례였다.[1]
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정식 황비가 아닌 덴지나 조지(掌侍)가 천황의 총애를 받아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천황의 유모였던 여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덴지가 천황의 처첩이 되었다.[1] 남북조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덴지나 조지가 되는 여성이 특정 공가 출신으로 고정되었고, 이들이 낳은 아이가 천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2][3]
헤이안 시대 말기, 궁중의 고급 여관 중 최고위는 덴시였다. 그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여 여관을 통괄하는 자를 '''다이텐시(大典侍)'''라고 불렀으며, 고토나이시와 함께 어소의 어상어전 사무를 총괄했다.[4]
덴시는 천황의 일상생활을 보좌하는 비서 역할과, 천황의 총애를 받아 황자를 낳는 역할을 수행했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고노에 사키코가 고요제이 천황의 뇨고가 되면서 천황의 정비인 뇨고의 입내가 재개되었지만, 뇨고(혹은 중궁)는 한 명이었기 때문에 측실 역할은 주로 덴지가 담당했다. 따라서 에도 시대에 즉위한 천황의 생모는 대부분 덴지였다. 뇨고·중궁이 섭가·궁가 출신이었던 것처럼, 덴시는 우림가, 명가 중 상위 가계를 가진 공가의 여성이었다. 청화가·대신가는 섭가보다 하위, 우림가·명가보다 상위에 해당하지만, 뇨고나 덴시를 배출하지 않았다.[4]
덴지의 정원은 4명이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는 실제로는 더 많은 경우가 있었다. 이는 덴지가 황자를 낳거나 병에 걸려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인원을 늘려 4인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고토쇼지 지위에 있던 자가 고령, 은퇴, 사망 전에 명예롭게 정원 외 덴지로 승진하는 경우도 있었다. 새 천황 즉위 시에는 다이텐시나 그에 버금가는 덴시 1, 2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물러나는 관례가 있었다. 전 천황이 생존(퇴위하여 상황이 됨)하면 센토고쇼(仙洞御所)로 옮기고, 사망(붕어)하면 삭발했다. 이후 새롭게 덴지로 선발된 자를 보충하여 정원 4명으로 되돌렸다.[4]
메이지 유신 이후, 덴지를 비롯한 여관 제도는 크게 변화했다. 고메이 천황의 덴지였던 히로하시 시즈코와 다카노 후사코는 권력 남용을 이유로 파면되었다.[4] 덴지는 황후 아래로 통합되었고, 무가(무사 가문)와 화족 자녀들도 채용되기 시작했다.[4] 메이지 시대에는 메이지 천황과 쇼켄 황태후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몇몇 덴지와 곤덴지가 측실 역할을 했다. 다이쇼 천황의 어머니인 야나기하라 나루코가 천황의 생모가 된 마지막 덴지이다.
2. 1. 고대 및 중세 시대의 덴지
천황을 가까이에서 모셨으며, 천황이 별전에 거둥할 때에는 검새를 받드는 것이 직무였다. 천황의 유모 (혹은 동궁 선지)가 임명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그 경우에는 즉위 후에 행해지는 팔십도신제의 어사(御使)가 되는 것이 관례였다.[1]헤이안 시대 후기에는 정식 황비가 아닌 덴지나 조지(掌侍)가 천황의 총애를 받아 그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천황의 유모였던 여성을 제외하고는 덴지가 거의 천황의 처첩이 되었다.[1]
남북조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는 덴지나 조지가 되는 여성이 특정 공가 출신으로 고정되었고, 이들이 낳은 아이가 천황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2][3]
2. 2. 에도 시대 말기까지의 덴지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궁중의 고급 여관 중 최고위였다. 그 덴시(典侍) 중에서도 최상위에 위치하여 여관을 통괄하는 자를 '''다이텐시(大典侍)'''라고 칭했으며, 고토나이시(나가하치노 츠보네(長橋局))와 함께 어소 어상어전의 사무 모든 것을 장악했다.[4]덴시는 천황의 일상생활에서의 비서적 역할을 맡는 자(오키요의 여관)와, 천황의 총애를 받아 황자를 낳는 역할을 하는 자가 있었다.[4]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고노에 사키코가 고요제이 천황의 뇨고가 되어, 이후 천황의 정배인 뇨고의 입내가 재개되었지만, 뇨고(혹은 책립되어 중궁)는 기본적으로 한 명이며, 측실의 역할은 주로 덴시가 담당했다. 따라서, 에도 시대에 즉위한 천황의 생모 대부분은 덴시다. 뇨고·중궁이 되는 것이 섭가·궁가의 여자였듯이, 여관도 출신의 일정한 가계가 정해져 있었고, 덴시는 우림가, 명가 중에서 상위 가계를 가진 공가의 여자가 되었다. 청화가·대신가는 섭가보다 하위, 우림가·명가보다 상위에 해당하지만, 이 가계는 뇨고도 덴시도 배출하지 않았다.[4]
덴시의 정원은 4명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에도 시대 후기에는 실제로는 그보다 많은 경우가 있었다. 이는 덴시가 황자를 낳거나 병에 걸리거나 하여 덴시로서의 직무가 불가능하게 된 경우 등에 덴시 인원을 늘려 실질 4인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또한, 고토쇼지 지위에 있던 자가 고령 또는 은퇴·사망에 앞서 정원 외의 덴시로 명예적으로 승진하는 예도 있었다. 새 천황 즉위 시에 다이텐시 혹은 그에 다음가는 덴시 클래스의 1, 2명 이외의 덴시는 물러나는 (전 천황이 생존(퇴위하여 상황이 됨)의 경우에는 센토고쇼(仙洞御所)로 옮기고, 사망(붕어)의 경우에는 삭발) 관례가 존재했기 때문에, 새롭게 덴시로 선발된 자를 보충하여 정원 4명으로 되돌리는 것이 이루어졌다.[4]
2. 3. 메이지 시대 이후의 덴지
메이지 유신 이후, 덴지를 비롯한 여관 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고메이 천황의 덴지였던 히로하시 시즈코와 다카노 후사코는 권력 남용을 이유로 파면되었다.[4] 덴지는 황후 아래로 통합되었고, 무가(무사 가문)와 화족 자녀들도 채용되기 시작했다.[4]메이지 시대에는 메이지 천황과 쇼켄 황태후 사이에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몇몇 덴지와 곤덴지가 측실 역할을 했다. 다이쇼 천황의 어머니인 야나기하라 나루코가 천황의 생모가 된 마지막 덴지이다.
3. 직무
「궁성여관봉직심득서」에 따르면, 덴지와 곤덴지는 다음과 같은 직무를 수행했다.[1]
4. 덴지의 폐지
다이쇼 천황이 일부일처제를 실시함에 따라 시첩 역할을 하는 덴지는 없어졌다. 그러나 사무 여관으로서의 덴지는 존속했으며, 마지막 덴지는 다이쇼 15년(1926년) 6월에 덴지로 승진한 다케야 쓰네코(요우바이나이시노스케)였다. 덴지 다케야 쓰네코, 곤나이시노스케 시미즈다니 히데코를 정점으로 한 다이쇼 천황 시대의 여관은 천황의 붕어로, 황후궁직 여관에서 황태후궁직 여관이 되었다.
다이쇼 말기, 당시 황태자였던 히로히토 친왕은 여관 제도의 개혁을 추진했다.[1] 덴지, 곤나이시노스케 등을 폐지하고 여관장을 정점으로 하는 동궁직 여관 제도는 히로히토 친왕이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그대로 황후궁직의 여관 제도로 이어졌다.[1] 이로써 덴지 등의 직제는 데이메이 황후의 황태후궁직에만 존속되었다.[1] 또한 여관이 미혼 여성으로 구성되어 궁중에 거주하는 어국 제도도 황태후의 아오야마 고쇼에서만 존속되었다.[1] 쇼와 27년(1952년) 1월 1일, 황태후궁직의 잔무 처리가 모두 완료되면서 율령 제도 이후 유지되어 오던 여관 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다.[1]
5. 참고: 둘러보기 상자
(출력 없음)
참조
[1]
서적
後宮の歴史
學燈社
2008
[2]
문서
[3]
논문
織豊期の後宮女房-職掌と活動-
校倉書房
2011
[4]
간행물
近世の典侍について
学習院大学人文科学研究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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