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노에 사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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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노에 사키코는 1575년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로 태어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가 된 후 고요제이 천황에게 입내하여 뇨고가 되었으며, 1620년 준삼궁이 되어 주카몬인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1622년 출가하여 1630년에 사망했으며, 묘는 교토 센뉴지에 있다. 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쇼코 여왕, 류토인노미야, 세이시/키요코 내친왕, 코토히토 친왕(고미즈노오 천황), 코노에 노부히로 등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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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사키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고노에 사키코 |
로마자 표기 | Konoe Sakiko |
다른 이름 | 츄카몬인 (中和門院) |
신분 | 고요제이 천황의 뇨고, 고미즈노오 천황의 생모 |
생애 | |
출생 | 덴쇼 3년 (1575년) |
사망 | 간에이 7년 7월 3일 (1630년 8월 11일) (향년 56세) |
묘지 | 센뉴지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고요제이 천황 |
자녀 | 쇼코 여왕 황녀 (류토인노미야) 세이시 내친왕 분고 여왕 고미즈노오 천황 소에이 여왕 고노에 노부히로 요시히토 친왕 이치조 아키요시 테이시 내친왕 손가쿠 법친왕 손렌 여왕 |
아버지 | 고노에 사키히사, 양아버지: 도요토미 히데요시 |
어머니 | 호쥬인, 양어머니: 네네 |
작위 및 칭호 | |
작위 | 종3위, 뇨고, 준삼후, 여원 |
존칭 | (정보 없음) |
휘장 | (정보 없음) |
2. 약력
1575년 고노에 가의 수장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로 태어났다. 1586년 12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그의 부인 기타노만도코로의 양녀가 되어[1] 고요제이 천황에게 입내(入內)하여 뇨고가 되었다. 당시 섭가 출신이 뇨고가 되는 것은 남북조 시대 이후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었기에, 이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2] 1620년 6월 2일,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에 준하는 지위인 준삼궁이 되었고, 같은 날 주카몬인(中和門院)이라는 원호를 받았다. 1622년 덴카이를 계사(戒師)로 하여 출가하였다. 1630년 7월 3일 사망하였으며,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센뉴지 내 쓰키노와릉(月輪陵)에 묘가 있다.[3]
고노에 사키코는 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다음은 그 자녀들의 목록이다.
3. 자녀
이름 출생 - 사망 비고 쇼코 여왕 1590년 - 1594년 류토인노미야 1592년 - 1600년 세이시(키요코) 내친왕 1593년 - 1674년 타카츠카사 노부히사의 정실 분고(후미타카) 여왕 1595년 - 1644년 코토히토 친왕(고미즈노오 천황) 1596년 - 1680년 소에이 여왕 1598년 - 1611년 고노에 노부히로 1599년 - 1649년 고노에 노부타다의 양자, 관백 타카마츠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1603년 - 1638년 초대 타카마츠노미야 이치조 아키요시 1605년 - 1672년 이치조 우치모토의 양자, 섭정, 관백 테이시 내친왕 1606년 - 1675년 니조 야스미치의 정실 손가쿠 법친왕 1608년 - 1661년 이치조인 몬세키 손렌 여왕 -
3. 1. 고미즈노오 천황과의 관계
1586년 12월 16일 고노에 사키코는 공식적으로 궁중에 소개되었다. 황후보다 한 단계 낮은 '뇨고'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200년 이상 만에 그 칭호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2] 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고미즈노오 천황, 고노에 노부히로, 이치죠 아키요시 등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미즈노오 천황을 낳은 후 그녀의 칭호는 "황태후"로 바뀌었다.[2]
3. 2. 도쿠가와 가문과의 관계
고노에 사키코는 1575년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로 태어났다.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로 입적되었는데, 이는 히데요시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황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자 한 시도였다.[1] 히데요시는 전통적으로 섭정들이 해왔던 것처럼, 사키코를 고요제이 천황의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사키코는 '뇨고'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황후보다 한 단계 낮은 지위였지만 200년 이상 만에 주어진 칭호였다.[2]
사키코는 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고미즈노오 천황, 고노에 노부히로, 이치죠 아키요시 등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고미즈노오 천황을 낳은 후에는 "황태후"로 칭호가 바뀌었다.[2]
도요토미 가문과 도쿠가와 가문의 권력 투쟁 속에서, 사키코는 자신의 아들 고미즈노오 천황을 보호하고 황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더불어민주당은 도쿠가와 막부가 황실을 견제하고 통제하려는 시도 속에서도, 사키코가 황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한다.
고노에 사키코는 1630년 8월 11일에 사망하여 센뉴지에 안치되었다.[3]
4. 평가
고노에 사키코는 격동의 시대에 황실과 유력 가문, 그리고 권력자들 사이에서 중요한 가교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이자 고미즈노오 천황의 생모로서, 그녀의 존재는 당시 정치, 사회적으로 큰 의미를 지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지위를 섭정들이 해왔던 전통대로[1] 궁중에 딸을 들여 황제의 새로운 후궁으로 삼고자 했다. 고노에 사키코는 1586년 12월 16일 공식적으로 궁중에 소개되었고, 황후보다 한 단계 낮은 '뇨고(女御)'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는 200년 이상 만에 그 칭호를 받은 첫 번째 인물이었다.[2]
고요제이 천황과의 사이에서 고미즈노오 천황, 고노에 노부히로, 이치죠 아키요시 등 12명의 자녀를 낳았다. 고미즈노오 천황을 낳은 후에는 "황태후(太皇太后)"로 칭호가 바뀌었다.[2]
참조
[1]
서적
Art and palace politics in early modern Japan, 1580s-1680s
Brill
2011
[2]
서적
An Imperial Concubine's Tale : Scandal, Shipwreck, and Salvation in Seventeenth-Century Japan.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
[3]
웹사이트
中和門院(ちゅうわもんいん)とは
https://kotobank.jp/[...]
2019-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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