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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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센고쿠 시대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일본의 무장이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겼으며,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사망한 후 셋쓰 이바라키 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고마키·나가쿠테 전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에 참전했으며, 임진왜란 중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조선군에게 습격당해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그의 죽음 이후, 영지 몰수 위기에 처했으나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아 동생 나카가와 히데시게가 영지를 상속받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수정으로 기록되었으며, 한응인의 서장에는 명나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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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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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나카가와 히데마사 |
출생 연도 | 1568년 |
사망 연도 | 1592년 11월 27일 (만 24세) |
사망 장소 | 분로쿠 전투 |
직업 | 사무라이 지휘관 |
배우자 | 쓰루히메 |
부모 |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 |
친척 | 형제: 나카가와 히데나리 장인: 오다 노부나가 |
신분 | |
씨족 | 나카가와 씨 |
주군 | 오다 노부나가 → 하시바 히데요시 |
관위 | 우에몬노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나카가와 기요히데 |
어머니 | 구마다 소하쿠의 딸 |
형제자매 | 히데마사, 히데나리, 이토히메 |
배우자 | 쓰루히메 (오다 노부나가의 딸) |
기타 정보 | |
시대 | 센고쿠 시대 |
2. 생애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를 따라 오다 노부나가와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 1583년 아버지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전사하자 가독을 이어 영주가 되었으며, 이후 히데요시 휘하의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인정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으나, 같은 해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 중 조선군의 습격으로 전사했다. 그의 죽음은 전투 중 부주의로 인한 것으로 여겨져 논란이 있었으나, 아버지의 공적 덕분에 동생 히데나리가 감봉된 영지를 상속받았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포로로 잡혀 명나라에서 처형되었다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1][2]
2. 1. 초기 생애와 오다 가문 섬김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며, 노부나가 사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기요히데가 사쿠마 모리마사의 공격을 받고 전사하자, 가독을 이어받아 셋쓰국 이바라키 5만 석 영지의 영주가 되었다. 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으며,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워 하리마국 미키 6만 5천여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고 이봉되었다.2. 2. 도요토미 가문 섬김과 영지 상속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으나, 노부나가 사후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기요히데가 사쿠마 모리마사의 공격으로 전사하자, 셋쓰국 이바라키 5만 석 영지를 상속받아 가독을 이었다.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전했으며,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워 히데요시로부터 하리마국 미키 13만 석으로 영지가 늘어나며 이봉되었다.
이후 1587년 규슈 정벌에서는 3천 명의 군세를 이끌고 참전하여 지쿠젠국 방면에서 활동했으며,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2천 명의 군세를 동원하여 니라야마성 공방전에 참여했다.
1592년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갔다. 처음에는 선발대에서 제외되었으나 8월 이후 도해하여 경기도 양지(陽智)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4일,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조선군의 습격(매복)을 받아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히데요시가 12월 6일자로 보낸 주인장(朱印状)에도 순찰 중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본래 전투 중 부주의(無覚悟)로 인한 사망은 가독 상속이 불허되는 사안이었기에, 나카가와 가문에서는 이를 숨기고 일반적인 전사로 위장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이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그럼에도 히데요시는 아버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참작하여 특별히 동생 히데나리에게 영지 상속을 허락했다. 다만 영지는 절반으로 감봉되었으며, 히데요시는 여러 장수들에게 히데마사의 죽음을 거론하며 부주의한 죽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히데마사가 평수정(平秀政)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에 따르면, 히데마사는 조선에서 포로로 잡혀 명나라로 압송된 후[1] 사형에 처해졌다[2]고 전해지기도 한다.
2. 3. 주요 전투 참전과 공적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를 섬겼고, 노부나가 사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겼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아버지 기요히데가 사쿠마 모리마사의 공격으로 전사하자, 가문을 계승하여 셋쓰국 이바라키(茨木) 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1584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1585년 시코쿠 정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히데요시로부터 하리마국 미키(三木) 13만 석으로 영지를 늘려 받았다. 1587년 규슈 정벌에는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참전하여 호소카와 다다오키, 호리 히데마사 등과 함께 지쿠젠(筑前) 방면에서 활동했다.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서는 2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니라야마 성(韮山城) 공격에 참여했으나, 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아 호조 우지노리가 항복할 때까지 포위전을 벌였다.
1592년 임진왜란(분로쿠의 역)에도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왔다. 처음에는 선발대에서 제외되었으나 8월 이후 도해하여 경기도 양지(陽智)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4일,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히데요시의 문서에 따르면 순찰 중 매복에 걸려 사망했다고도 한다.
전장에서의 부주의한 죽음("무각오(無覚悟)")은 원칙적으로 가문 계승이 불가능했기에, 나카가와 가문에서는 히데마사의 죽음을 단순 전사로 위장하려 했으나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아버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세운 공을 감안하여 특별히 동생 히데나리(秀成)에게 영지 상속을 허락했다. 다만 영지는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히데요시는 이 일을 계기로 다른 장수들에게도 전장에서의 부주의한 죽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히데마사가 '평수정'(平秀政)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응인(韓應寅)의 기록에 따르면, 히데마사가 조선군에게 포로로 잡혀 명나라로 보내진 후[1] 사형에 처해졌다[2]는 다른 이야기도 전해진다.
2. 4. 임진왜란 참전과 죽음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으로 바다를 건너왔다.[1] 처음에는 선발대에서 제외되었으나, 8월 이후 도항하여 경기도 양지 지역 수비를 맡았다.같은 해 10월 24일,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조선군의 습격을 받아 향년 25세로 전사했다.[1][2]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히데요시의 12월 6일자 주인장(朱印状)에는 순찰 중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카가와 가문에서는 히데요시의 질책과 영지 몰수를 우려하여 그의 죽음이 전투 중이 아닌 매사냥 중 발생했다는 사실을 숨기려 했으나, 오히려 발각되어 히데요시의 분노를 샀다. 히데요시는 '무각오(無覚悟)' 즉, 전투 준비나 각오 없이 당한 죽음은 가문의 상속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의 공적을 고려하여 영지를 절반으로 줄였지만 동생 나카가와 히데나리에게 상속을 특별히 허락했다. 동시에 다른 장수들에게는 이러한 무의미한 죽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평수정(平秀政)'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응인(韓應寅)의 서장(書狀)에 따르면 그가 조선군에게 포로로 잡혀 명나라로 압송된 후 사형에 처해졌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1][2]
2. 5. 사후 처리와 가독 상속
1592년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조선으로 건너간 히데마사는 경기도 양지( 陽智|요치일본어 ) 수비를 맡았다. 그러나 같은 해 10월 24일, 수원 부근에서 매사냥을 하던 중 조선군에게 포위되어 습격을 받고 향년 2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당시 히데요시는 전투 중 부주의(無覚悟|무카쿠고일본어)로 인한 죽음의 경우 가문의 가독 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엄격한 방침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카가와 가문에서는 히데마사의 사인을 단순 전사로 위장하여 히데요시의 질책과 영지 몰수를 피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곧 발각되었고, 오히려 히데요시의 큰 분노를 샀다.
히데요시는 히데마사의 죽음에 대해 크게 노했지만, 그의 아버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세운 공적을 특별히 참작하여 동생 히데나리( 秀成|히데나리일본어 )에게 가독 상속을 허락했다. 다만, 영지는 기존의 절반으로 감봉되었다. 히데요시는 이 일을 계기로 여러 장수들에게 히데마사와 같은 무의미한 죽음을 경계하도록 주의를 주었다고 전해진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히데마사가 평수정( 平秀政|타이라노 히데마사일본어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에 따르면 그가 조선군에게 포로로 잡혀 명나라로 압송된 후[1] 사형에 처해졌다[2]는 다른 기록도 존재한다.
참조
[1]
문서
선조 113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5월 24일(신미) 1번째기사
[2]
문서
선조 116권, 32년(1599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8월 9일(을유) 3번째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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