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가와 히데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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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가와 히데시게는 1583년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사망한 후 형 히데마사가 임진왜란 중 사망하면서 가문을 계승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공적을 인정받아 영지를 상속받았으며, 1594년 분고국 오카번의 영주가 되었다. 정유재란에 참전하여 전라도와 충청도 지역에서 활약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1612년 사망했으며, 조선에서 가져온 모란을 오카성에 심었고, 현재 오이타현 에유우지에 모란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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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마사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긴 무장으로, 아버지의 전사 후 가독을 이어 영주가 되었으며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등에 참전하여 조선에서 전사했다. - 오카 나카가와가 - 오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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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가와 히데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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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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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나카가와 히데나리 (中川秀成) |
출생 | 1570년 |
사망 | 1612년 9월 9일 (43세) |
국적 | 일본 |
직업 | 다이묘 |
가문 | |
씨족 | 나카가와 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나카가와 기요히데 |
어머니 | 구마다 무네시로의 딸 |
형제 | 나카가와 히데마사, 히데나리, 이토히메 |
배우자 | 도라히메 |
자녀 | 히사모리, 사쿠마 가쓰나리, 미즈노 모토쓰나의 정실 |
경력 | |
주군 | 도요토미 히데요시 → 도요토미 히데요리 → 도쿠가와 이에야스 → 도쿠가와 히데타다 |
봉록 | 분고 오카번 번주 |
주요 전투 | |
전투 | 조선 Campaign |
전투 | 세키가하라 Campaign |
2. 생애
1583년(덴쇼 11년),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나카가와 가문은 형인 나카가와 히데마사가 이었다. 그러나 히데마사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매사냥을 하다 포위되어 사망했다. 히데시게는 아버지의 공적 덕분에 하리마국 미키 6만 6천 석 영지를 상속받을 수 있었다.
1594년 히데요시의 명으로 분고국 오카번 7만 4천 석으로 이봉되었고,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 정유재란에도 참전하여 황석산성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처음에는 서군 측에 가담하는 듯했으나, 본 전투 이후 동군으로 전향하여 오타 가즈요시를 공격하는 등의 공을 세워 영지를 보전받았다.
1612년 사망했다. 그는 조선에서 가져온 모란을 오카성 등에 심었는데, 현재 오이타현 다케다시 에유우지(英雄寺)에 그 모란이 남아있다.[5]
2. 1. 가문의 계승과 임진왜란
1583년(덴쇼 11년), 아버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전사한 후, 형 히데마사가 가문을 계승했다. 그러나 1592년(분로쿠 원년) 임진왜란 당시 히데마사가 조선에서 매사냥을 하던 도중 포위되어 살해되었다.[1] 나카가와 가문은 히데마사가 전란 중에 유희를 즐기다 죽은 것이 밝혀질까 두려워 전사했다고 보고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들켜 분노를 샀다. 하지만 아버지 기요히데가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활약한 것이 인정받아 히데시게는 하리마국 미키시 6만 6천 석의 상속을 허락받았다.[1]1593년(분로쿠 2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1천 명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94년(분로쿠 3년) 2월, 히데요시로부터 분고국 오카에 7만 4천 석의 영지를 받아 이봉하였다. 같은 해 1월 27일, 도요토미 성을 하사받았다.[2] 1597년(게이초 2년)부터 시작된 정유재란(게이초의 역) 때는 1천 5백 명을 동원하여 우군에 속해 도해,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에 참가했다. 여러 장수들이 모인 26일 전주 회의 이후에는 이케다 히데오와 함께 태인(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 광주 제압을 지시받았다. 이후 전라도 경략을 재확인한 9월 16일 정읍 회의에도 참석하여 충청도에서 전라도에 걸쳐 전전했다.
2. 2. 세키가하라 전투와 이후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가신을 서군 측의 단고 다나베성 공격에 파견했지만, 세키가하라에서 벌어진 본전이 종결된 후에 동군에 가담했다.[3] 전투 전부터 호소카와 다다오키 가신의 마쓰이 야스유키, 아리요시 다쓰유키와 연계하여 오토모 요시무네와의 싸움을 상정하고 가신 고바야시 신스케와 서신을 주고받게 했다. 서군의 우스키성주 오타 가즈요시를 공격했고, 사가노세키 전투에서는 오타에게 가신을 빼앗겼지만, 그 공적으로 인해 전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영지를 안도받았다.게이초 17년(1612년)에 사망했다.
조선에서 모란을 가져와 오카성과 여러 사찰에 심고 여러 차례 옮겨 심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제2대 번주 나카가와 히사모리가 조부 사쿠마 모리마사의 보리(菩提일본어)를 기리기 위해 간에이 21년(1644년)에 건립된 에유우지(英雄寺일본어, 오이타현 다케다시카이(竹田市会々)[5] 2033)의 산몬쇼츠키도(山門鐘付き堂일본어) 우측에 있으며, 이 에유우지는 모란이 피는 매년 4월 20일에 모란 축제와 법요(法要일본어)를 개최하고 있다.
3. 모란과 관련된 일화
나카가와 히데시게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모란(牡丹|모란일본어)을 가져와 오카성(岡城)과 여러 사찰에 심었다. 이후 모란은 여러 차례 옮겨 심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모란은 제2대 번주 나카가와 히사모리(中川久盛)가 조부 사쿠마 모리마사의 보리(菩提|보제일본어)를 기리기 위해 1644년에 건립된 에유우지(英雄寺|영웅사일본어, 오이타현 다케다시카이(竹田市会々)[5] 2033)의 산몬쇼츠키도(山門鐘付き堂|산문종부당일본어) 우측에 있다. 이 에유우지에서는 모란이 피는 매년 4월 20일에 모란 축제와 법요(法要|법요일본어)를 개최하고 있다.
4. 가계
참조
[1]
문서
宮部文書
早稲田大学所蔵荻野研究室収集文書
[2]
서적
日本近世武家政権論
2000
[3]
문서
新助
[4]
서적
일본 근세 다케이에 정권론
2000
[5]
문서
다케다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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