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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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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립은 조선 선조 때의 무신으로, 1567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기병 운용의 불리함과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밀려 패배하고 자결했다. 그는 북방에서의 무공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임진왜란에서의 패배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장의 시호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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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립
기본 정보
신립장군묘
이름신립
한자 이름申砬
아명신임(申臨, 신림)
입지(立之)
시호충장(忠壯)
출생일1546년 11월 16일 (음력 10월 23일)
사망일1592년 4월 28일
사망지조선 충청도 충주 인근
본관평산
군사 경력
군 복무조선 육군
복무 기간1567년 ~ 1592년 4월 28일
계급삼도 도순변사
지휘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평안도 병마절도사
삼도도순변사
참전임진왜란
관직
직책조선의 평안도 병마절도사
임기1590년 11월 11일 ~ 1592년 4월 6일
임금조선 선조
기타
정당무소속
서훈의정부영의정 추증

2. 생애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진주판관 시절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의 권유로 글공부를 시작했다. 1583년 은성부사로 재직 중 여진족 니탕개(尼湯介)의 침입을 격퇴하여 명성을 얻었다.[1] 1584년에는 선조가 습진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려 했으나 비변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3]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로 토벌에 나섰으나, 왜구가 이미 철수한 뒤였다. 이후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가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복직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1590년(선조 23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에 임명되었고,[4]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선조(宣祖)에게 검(劍)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杖)과 함께 충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 방어 시설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충주로 파견되어 8,000명의 기병을 모았다. 그러나 경상도 관찰사 김수의 병력은 일본군 진격 소식에 대부분 흩어졌다.

신립은 일본군이 북상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조령(鳥嶺) 고개를 막는 대신, 기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충주에 남아 평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요한 요충지를 방어하지 못하게 하여 고니시 유키나가 군대의 북상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신립은 탄금대(탄금대|탕킨다이일본어)를 전투 장소로 선택했는데, 이곳은 한쪽에는 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굽이쳐 흐르는 강이 있어 접근 가능한 길이 제한적이었다. 신립은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항하여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분석가들은 신립이 전투 중 도망치는 조선군 상황을 고려하여,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생결단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높이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당시 신립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신립이 경험하지 못한 총기인 아르케부스(arquebus)를 장착하고 있었고, 병력 수도 조선 기병의 2배 이상(18,700명 대 8,000명)이었다. 신립의 기병은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신병과 남쪽에서 패퇴한 잔여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92년 6월 6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는 신립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진격했다. 일본군은 두 좁은 입구를 봉쇄하고 사격수와 궁수들을 보내 조선군에게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전술적 불리함을 깨달은 많은 조선군은 흩어져 좁은 길 중 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일본군에게 베이거나 강에 빠져 죽었다. 일부는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망쳤다. 신립과 장교들은 탈출했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대신 자결하였다.

신립은 탄금대에서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 싸우다 힘이 다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이때 신립 장군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2. 1. 출생과 가계

신립은 명종 원년(1546년) 10월 23일 평산 신씨 화국과 부인 파평 윤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시조 신숭겸은 고려 왕건의 개국공신이었고, 조선 전기 문신 신개는 조선 건국 이후 좌의정을 지내고 문희공의 시호를 받았다. 신개는 신립의 5대조였다.[1]

고조 신자준은 음보로 기용되어 세종 27년(1445) 장령이 되고, 세조 원년(1455) 판종부시사로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세조 3년 첨지중추원사, 세조 6년 형조참의, 세조 7년 예조참의가 되었다. 그 뒤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좌참찬에 증직되었으며, 증조 신말평은 장악원 주부로 예조판서 성현의 명을 받아 장악원 제조 류자광, 전악 반곡과 김복근을 도와 「악학궤범」 편찬에 공헌하였다. 연산군 때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1]

할아버지 신상은 경기도, 전라도, 경상도 관찰사와 형조판서(정2품)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절이다. 신상은 타고난 성격이 용맹한 것에 비해 화평하고 용서를 잘 하였으며 또한 관리의 재간이 있었다. 아버지 신화국은 성균 생원으로 전설, 별검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후에 아들이 공신이 됨으로 평주부원군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1] 신립과 신흠은 12촌 당숙 사이였으나, 각자의 자녀를 통해 선조의 인척이 되었다.[1]

}; 1512~1597)

|}

아버지신화국(申華國|신화국중국어; 1517~1578)
어머니{{lang|zh|貞敬夫人 坡平 尹氏|정경부인 파평 윤씨|}
} (언니) || 1538~1662

|-

| 신잡(申磼|신잡|중국어) (형) || 1541~1609

|-

| 신급(申礏|신급|중국어) (형) || 1543~1609

|-

| 신할(申硈|신할|중국어) (아우) || 1548~1592

|-

| 申檀香|신단향|중국어 (여동생) || 1550~1620

|-

| 申季淑|신계숙|중국어 (여동생) || 1554~1625

|}

형제자매
이름출생-사망
{{lang|zh|申芝香 平山府夫人 平山 申氏|신지향 평산부부인 평산 신씨|}
} || 1546~?

|-

| 全州 崔氏|전주 최씨|중국어 (崔弼臣|최필신|중국어; 1522~?)의 딸) || 1547~?

|}

처첩 및 자녀
배우자출생-사망
{{lang|zh|完山 李氏|완산 이씨|}
} 郡夫人 平山申氏|군부인 평산 신씨|중국어 (딸) || 1574~1622

|-

| 신경진(申景禛|신경진|중국어) (아들) || 1575~1643

|-

| 신경유(申景裕|신경유|중국어) (아들) || 1581~1633

|-

| 신경인(申景禋|신경인|중국어) (아들) || 1590~1643

|-

| 平山 申氏|평산 신씨|중국어 (딸) || 1590~?

|}

2. 2. 무과 급제와 관료 생활

1567년(선조 즉위년) 22세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선전관을 거쳐 도총부도사, 도총, 도사, 경력을 지내고 진주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진주목사 양응정(梁應鼎)이 “자네는 큰 인물이니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하자, 신립은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시고 글을 배웠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양산군수를 지냈고, 1583년 은성부사가 되었다. 이 무렵 여진족 니탕개(尼湯介)가 쳐들어와 여러 고을을 뒤흔들었으나 장군들은 모두 싸움에 졌다. 니탕개는 선조 초년부터 6진(六鎭)에 자주 드나들며 공순(恭順)의 뜻을 보였으므로 조선 조정에서 관록을 주고 후대했으나, 진장의 대우가 좋지 않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근의 여러 부족을 규합, 경원부에 침입하고 아산보와 안원보를 점령했다. 이에 신립은 기병 5백여 기를 동원, 첨사 신상절(申尙節)과 함께 훈융진을 공격하던 군사 1만 명을 물리치고, 여진족이 함경도를 침략할 때 경유하는 안두리 부락을 불태웠다.

일전해위도(一箭解圍圖)


1584년3월 17일 선조가 신립과 이전(李戩)을 20일에 거행할 습진(習陣) 행사의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명령했다가 비변사의 말에 의하여 도로 파했다.[3]

1587년 흥양(興陽)에 왜구가 침입하자 우방어사가 되어 군사를 인솔하여 토벌에 나섰다가 이미 왜구가 철수했으므로 돌아오던 중 양가의 처녀를 첩으로 삼았다는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함경남도병마절도사에 다시 등용되었으나, 졸병을 참살한 죄로 중추부동지사의 한직으로 전임되었다.

2. 3. 임진왜란

1590년(선조 23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 영변대도호부사에 보직되고[4], 이듬해 한성부 판윤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4월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어 선조(宣祖)에게 검(劍)을 하사받고 김여물(金汝杖)과 함께 충주로 향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 방어 시설이 일본군에게 함락되자,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충주로 파견되어 8,000명의 기병을 모았다. 그는 충주에서 경상도 관찰사 김수와 합류하려 했으나, 김수의 병력은 장군이 오지 않고 일본군이 진격한다는 소식에 대부분 흩어졌다.

신립이 젊었을 때 어떤 여인을 도왔는데, 그 여인은 신립의 첩이 되기를 원했으나 거절당하자 자살했다. 조령에서 싸우고자 했을 때, 그 여인의 혼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라고 말했고, 신립은 이를 믿고 탄금대에서 싸웠으나 패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한 신립의 묘 근처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앞을 지나갈 때 말이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바위 앞에서 "패장이 어찌 행인을 괴롭히는가"라고 소리치자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졌고,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 3. 1. 탄금대 전투

1592년(선조 25) 4월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로 임명되었고, 선조(宣祖)는 그에게 검(劍)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신립은 김여물(金汝杖)을 데리고 병력을 모집하여 충주에 도착하였다. 충주에서 방어진을 갖추려 하였으나,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전멸하였다.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탄금대에 진을 치고 기마전술을 시도하였으나, 왜군이 몰래 침입한 것을 모르고 방심하다 충주성을 빼앗겼다. 마을에서 불길이 일어난 후에야 반격에 나섰으나 참패하였다.[4]

1592년 4월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병력을 단월역에 주둔시키고 조령(鳥嶺)에 올라갔다가, 상주에서 패하여 쫓겨 온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을 만났다. 신립은 이일을 사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재주를 애석히 여겨 선봉에 나서 싸워 속죄하도록 용서하였다. 그러나 이는 신립 휘하 병력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이날 작전회의에서 종사관 김여물은 조령(鳥嶺)에 진지를 구축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신립은 북방에서 기병을 통해 대승을 거둔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특기인 기병을 이용하여 일본군을 무찌르기로 결정하고 탄금대 근처 달천(達川)을 뒤에 둔 배수의 진(背水之陣)을 쳤다.[4]

4월 27일, 왜적이 침입하여 척후를 나갔던 순변사 이일과 충주목사 이종장이 산속에 고립되었다. 신립은 부하 군관이 이 사실을 보고하자 군중을 현혹시킨다며 참수하고, 왜적이 아직 상주에 머무르고 있다는 장계를 올렸다.[4]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대규모 병력이 충주에 당도하였다. 적군은 부대를 여럿으로 나누어 일부는 산을 넘어 동쪽 깊숙이 침입하고, 일부는 달천을 따라 침입하였으며, 일부는 방비가 허술한 충주성으로 진입하였다. 왜군은 조령을 넘어 산과 들에 가득 찼고, 칼빛이 번쩍였다. 뒤늦게 왜군의 침입을 알아차린 신립은 급히 주성으로 달려갔으나, 마을 간격이 좁고 논이 많아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고 진영이 흐트러졌다. 이때 성 안의 적이 호각 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출격하여 아군을 포위하였다. 신립은 휘하 부대를 지휘하여 두 번이나 적진(敵陣)을 돌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왜군은 우회작전(迂廻作戰)으로 동서 양쪽에서 협공하였다.[4]

신립은 일본군이 북상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조령(초령) 고개를 막는 대신, 기병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충주에 남아 평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이는 중요한 요충지를 방어하지 못하게 하여 고니시 군대의 북상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신립은 한쪽에는 산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굽이쳐 흐르는 강이 있는 탄금대(탄금대|탕킨다이일본어)를 전투 장소로 선택했다. 접근 가능한 길은 산과 강이 만나는 양쪽 끝의 좁은 길 두 곳뿐이었다. 신립은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 대항하여 기병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분석가들은 신립이 전투 중 도망치는 조선군 상황을 고려하여,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는 사생결단의 상황에 처하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높이려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당시 신립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신립이 경험하지 못한 총기인 아르케부스(arquebus)를 장착하고 있었고, 병력 수도 조선 기병의 2배 이상(18,700명 대 8,000명)이었다. 신립의 기병은 대부분 훈련이 부족한 신병과 남쪽에서 패퇴한 잔여 병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592년 6월 6일, 고니시 군대는 신립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진격했다. 일본군은 두 좁은 입구를 봉쇄하고 사격수와 궁수들을 보내 조선군에게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전술적 불리함을 깨달은 많은 조선군은 흩어져 좁은 길 중 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일본군에게 베이거나 강에 빠져 죽었다. 일부는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도망쳤다. 신립과 장교들은 탈출했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되는 대신 자결하였다.

2. 4. 최후

그는 탄금대로 돌아가 김여물에게 임금에게 올리는 글을 짓게 하여 부하에게 주어 조정에 바치게 하고는, 김여물과 함께 적진에 돌진해 단신으로 싸우다 힘이 다하여 강가로 몰리게 되었다. 그는 항복 대신 강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고, 부장이었던 김여물 역시 따라 투신 자결하였다. 이때 신립 장군의 나이는 향년 47세였다.

2. 5. 사후

신립장군묘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번지에 있다. 부인 전주 최씨와의 합장묘로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고, 그 앞에 장명등(長明燈: 무덤 앞에 세우는 돌로 만든 등)이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묘비는 묘의 왼쪽에 있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신익상이 글씨를 써서 숙종 29년(1703)에 세운 것이다. 1986년 9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95호로 지정되었다.[1]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다.[1]

  • 신립이 젊었을 때 어떤 여인을 도왔다. 그 여인은 신립의 첩이 되기를 원했으나, 신립이 거절하자 자살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은 천연 요새인 조령에서 싸우고자 했으나, 그 여인의 혼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시오"라고 말했다. 신립은 그것을 믿고 탄금대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했다.[1]
  • 신립의 묘 근처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 바위 앞을 기승하여 지나가려고 하면 말이 움직이지 않았고, 행인들은 신립의 묘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말에서 내리는 것은 존경을 의미한다). 어느 날, 말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화가 난 한 남자가 바위 앞에서 "패장이 어찌 행인을 괴롭히는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졌고, 그 후로는 그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1]

3. 가족 관계

자녀
이름출생-사망
{{lang|zh|申悌順|신제순|}
항목내용
조부신상(申鏛)
조모전주 이씨 - 세종의 8남 계양군의 손녀
신화국(申華國, 1517 ~ 1578) - 신사임당의 8촌 동생
파평 윤씨 - 윤회정(尹懷貞)의 딸
누나평산부부인 신지향(申芝香, 1538 ~ 1622) - 인헌왕후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외조모
신잡(申磼, 1541 ~ 1609)
신급(申礏, 1543 ~ 1592)
남동생신할(申硈, 1548 ~ 1592)
여동생신단향(申檀香, 1550 ~ ?)
여동생신계숙(申季淑, 1553 ~ ?)
전처전주 이씨 - 이담명(李聃命)의 딸
후처전주 최씨 - 최필신(崔弼臣)의 딸



신립의 가계는 조선 세종의 8남 계양군의 손녀인 전주 이씨와 혼인한 할아버지 신상으로부터 이어진다. 증조부 신말평은 장악원 주부로 예조판서 성현의 명을 받아「악학궤범」편찬에 공헌하였고, 연산군 때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아버지 신화국(申華國)은 신사임당의 8촌 동생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1] 신립은 인헌왕후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외할머니가 되는 누나 신지향(申芝香)을 비롯해, 신잡(申磼), 신급(申礏), 신할(申硈) 등의 형제자매가 있었다.[1] 신립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 이담명(李聃命)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전주 최씨 최필신(崔弼臣)의 딸이다.[1] 신립은 신흠과 12촌 지간이며, 자녀들을 통해 선조의 사돈이 되었다.[1]

3. 1. 후손

신립의 가계는 조선 세종의 8남 계양군의 손녀인 전주 이씨와 혼인한 할아버지 신상으로부터 이어진다. 아버지 신화국(申華國)은 신사임당의 8촌 동생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 윤회정(尹懷貞)의 딸이다.[1] 신립은 인헌왕후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외할머니가 되는 누나 신지향(申芝香)을 비롯해, 신잡(申磼), 신급(申礏), 신할(申硈) 등의 형제자매가 있었다.[1]

신립은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부인은 전주 이씨 이담명(李聃命)의 딸이고, 두 번째 부인은 전주 최씨 최필신(崔弼臣)의 딸이다.[1] 장남 신경진(申景禛)은 순창 조씨 조정현(趙廷顯)의 딸과 혼인하여 신준(申埈)과 신해(申垓)를 낳았는데, 신해는 신익희의 11대조가 된다.[1] 차남은 신경유(申景裕), 삼남은 신경인(申景禋)이다.[1] 장녀 신제순(申悌順)은 선조의 4남 신성군의 부인이 되었고, 차녀는 이이첨의 차남 이대엽에게 출가했다.[1]

신립은 신흠과 12촌 지간이며, 자녀들을 통해 선조의 사돈이 되었다.[1] 조카 신경희광해군 때 정원군의 아들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1] 이에 원한을 품은 신경진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대군을 인조로 추대했다.[1] 이후 신립의 후손들은 서인노론, 소론에 속하게 되었다.[1]

해공 신익희는 신경인의 12대손이다.[1] 훗날 신립을 추모하는 비석이 탄금대 열두대 어귀에 세워졌고, 육당 최남선이 글을 지었다.[1]

구분내용
할아버지신상(申鏛)
할머니전주 이씨 - 세종의 8남 계양군의 손녀
아버지신화국(申華國, 1517 ~ 1578) - 신사임당의 8촌 동생
어머니파평 윤씨 - 윤회정(尹懷貞)의 딸
형제자매
누나평산부부인 신지향(申芝香, 1538 ~ 1622) - 인헌왕후의 어머니이자 인조의 외조모
신잡(申磼, 1541 ~ 1609)
신급(申礏, 1543 ~ 1592)
남동생신할(申硈, 1548 ~ 1592)
여동생신단향(申檀香, 1550 ~ ?)
여동생신계숙(申季淑, 1553 ~ ?)
배우자 및 자녀
전처전주 이씨 - 이담명(李聃命)의 딸
후처전주 최씨 - 최필신(崔弼臣)의 딸
장남신경진(申景禛, 1575 ~ 1643)
며느리순창 조씨 - 조정현(趙廷顯)의 딸
손자신준(申埈)
손자신해(申垓) - 신경인에게 양자로 입적 - 신익희의 11대조
차남신경유(申景裕, 1581 ~ 1633)
삼남신경인(申景禋)
장녀군부인 신제순(郡夫人 申悌順, 1578 ~ 1622) - 선조의 4남 신성군의 정부인
차녀평산 신씨 - 이이첨의 차남 광주 이씨 이대엽에게 출가


4. 관련 전설

신립은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산적에게 납치된 처녀를 구해주었으나, 처녀는 신립에게 거둬주기를 청하다 거절당하고 자살했다. 임진왜란 때 신립은 조령에서 싸우고자 했으나, 그 처녀의 혼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라고 하여 탄금대에서 싸웠으나 패하여 전사했다.

신립의 묘 근처에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말을 타고 그 앞을 지나가려 하면 말이 움직이지 않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 어느 날, 말이 움직이지 않는 것에 화가 난 한 남자가 바위 앞에서 "패장이 어찌 행인을 괴롭히는가"라고 소리치자 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졌고, 그 후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4. 1. 처녀 귀신

신립은 젊은 시절 사냥을 나갔다가 산적에게 납치된 처녀를 구출해준 적이 있다. 처녀는 신립에게 거둬주기를 청했지만, 신립은 이를 거절했고 그 직후 처녀는 자살했다. 이후 임진왜란이 터져 도순변사로 임명된 신립은 왜군을 막기 위해 충주로 갔고, 천연 요새인 조령에서 싸우려 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처녀의 혼령이 나타나 "탄금대에서 싸우세요."라고 했다. 신립은 이 말을 듣고 탄금대에서 싸웠지만 패배해 전사했다. 이 전설은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한 것을 그의 능력 부족이 아닌 원귀 탓으로 돌려 패배에 따른 열등감을 극복하고자 했으며,[5] 다른 한편으로는 신립의 능력에 비해 너무 일찍 억울하게 죽은 것에 대한 원인을 해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6]

4. 2. 기치미 고개와 넋고개

탄금대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이 신립 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였는데, 장군은 원통하고 분한 마음에 두 눈을 부릅뜨고 당장이라도 호령할 것 같은 기세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7] 시신을 관에 넣고 서울로 이송하는 도중에 ‘장군님’ 하고 부르면 관 속에서 ‘오냐’ 하는 대답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이천시를 지나 설봉산 인근 고개에 이르러 ‘장군님’ 하고 부르니 ‘에헴’ 하는 기침 소리가 났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고개를 신립 장군의 넋이 기침을 한 고개라 하여 기치미고개라고 불렀다. 경기도 이천시와 광주시의 경계를 이루는 적산 인근 고개에 이르러 다시 ‘장군님’ 하고 부르니, 그때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 고개를 장군의 넋이 아주 떠난 고개라 하여 넋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9]

4. 3. 곤지암

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나 광여도를 살펴보면 곤지암은 예로부터 사통팔달(四通八達) 교통의 요지였음을 알 수 있다.[8] 신립 장군의 시신을 이송하는 병사들이 곤지암에 도달하자 관이 땅에 달라붙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9] 그래서 현재의 곤지암읍 신대리 산15-1번지에 시신을 안장하고 묘를 만들었다. 묘가 있는 산등성이에서는 곤지암 읍내를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신립 장군의 관이 이 지역에서 멈춘 이유는 장군의 원혼이 곤지암 하늘을 떠돌며 충주 방어선을 뚫은 일본군들이 곤지암을 지나 서울로 향해가는 것을 감시하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63호로 지정된 '곤지암(昆池岩)'은 큰 바위와 작은 바위 2개로 구성된 화강암인데, 이 바위에는 신립 장군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신립 장군의 유해를 곤지암에 장사지낸 후부터 이 지역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10] 묘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고양이를 닮은 커다란 바위 하나가 있었는데, 누구든 말을 타고 이 앞을 지나려고 하면 말발굽이 땅에 붙어 움직이지 않아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11] 그러던 중 어느 한 장군이 근처를 지나다가 신립의 묘소를 찾아가 지나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더니 큰 천둥과 함께 벼락이 바위를 내리쳐서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지고 바위 주변에 큰 연못이 생겼다. 그 후로는 괴이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큰-연못-바위라는 뜻을 가진 '곤지암(昆池岩)'이라고 불렀다.[12]

5. 평가

신립은 22세에 무과에 합격하여 니탕개() 등 유목민을 몰아내며 명성을 얻었다. 여진족으로부터 국경을 보호한 공로로도 유명했다. 임진왜란 초기 부산이 함락되자, 신립은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충주로 파견되어 기병 중심의 8,000명 군대를 모았다.

경상도 관찰사 김수는 한성에서 장군이 파견되기를 기다리며 대구에서 대규모 병력을 모았으나, 일본군 진격 소식에 병력이 흩어졌다. 신립은 이일이 상주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에게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병 활용을 위해 충주에 남아 평지에서 일본군과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요충지인 조령(초령)이 방어되지 않아 고니시 군대의 진격을 용이하게 했다.

신립은 탄금대를 전투 장소로 선택했다. 이곳은 산과 강이 굽이치는 자연적인 지형으로, 접근로는 양쪽 끝의 좁은 길뿐이었다. 신립은 보병 위주의 일본군에 맞서 기병을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병사들이 필사적으로 싸우도록 사생결단의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신립은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은 신립이 경험하지 못한 총기인 아르케부스(arquebus)로 무장했고, 병력도 일본군(18,700명)이 조선 기병(8,000명)보다 2배 이상 많았으며, 신립의 기병은 훈련이 부족한 신병과 패잔병이 섞여 있었다.

1592년 6월 6일, 고니시의 군대는 신립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진격했다. 일본군은 좁은 길을 봉쇄하고 총탄과 화살을 퍼부었다. 전술적 불리함을 깨달은 조선군은 흩어져 도망치려 했지만, 일본군에게 죽거나 강에 빠져 죽었다. 일부는 일본군 방어선을 돌파해 도망쳤다. 신립과 장교들은 탈출했지만, 자결하였다.

6. 신립이 등장한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신립(申砬) http://encykorea.aks[...] 2020-07-02
[2] 서적 경암집 (권6, 고조 증 순충적덕 병의 보조공신 영의정 평양부원군 행 판윤부군가장 - 출판사 및 권 정보 추정)
[3] 간행물 계갑일록 http://db.itkc.or.kr[...] 1584
[4] 서적 영변지
[5] 웹사이트 신립 (한국민속문학사전(설화 편)) https://terms.naver.[...]
[6] 웹사이트 「신립 장군 설화」 [申砬將軍說話]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 부천시사편찬위원회 1988
[7] 웹사이트 곤지암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https://terms.naver.[...]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8] 웹사이트 곤지암 [昆池岩, Gonjiam] (한국지명유래집 중부편 지명, 2008) 김기혁, 옥한석, 성효현, 양보경, 전종한, 권선정, 김용상, 박경호, 손승호, 신종원, 이기봉, 이영희, 정부매, 조영국, 김정인, 박승규, 손용택, 심보경, 정암 2008-12
[9] 웹사이트 신립 장군 묘 [申砬 將軍 墓] (두산백과) https://terms.naver.[...]
[10] 웹사이트 경기도 문화재자료, 곤지암 (昆池岩, Gonjiam Rock) https://www.heritage[...]
[11] 웹사이트 곤지암 (문화원형백과 한강 생활문화, 2006.)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12] 웹사이트 곤지암 [昆池岩]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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