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산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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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석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초기인 1597년 8월에 일본군이 황석산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전투이다. 황석산성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지로, 안음현감 곽준이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와 함께 수천 명의 군민을 이끌고 성을 지켰다. 일본군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부대를 선봉으로 하여 공격을 시작했고, 백사린의 도주와 곽준의 전사로 인해 황석산성은 함락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전주를 점령하고 북상했으며, 이 전투는 정유재란의 전개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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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정보 | |
전투 이름 | 황석산성 전투 |
전역 | 문록·경장의 역 |
시기 | 게이초 2년 8월 14, 5일경 ~ 16일 (1597년 9월 25, 6일경 ~ 27일) |
장소 | 조선국 경상도 함양군 |
결과 | 일본군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일본 |
지휘관 및 지도자 | |
조선 지휘관 | 곽준 (전사), 안음 현감 |
조선 지휘관 | 조종도 (전사), 함양 군수 |
조선 지휘관 | 백사림, 김해부사 |
조선 지휘관 | 곽재우, 경상도 조방장 |
일본 지휘관 | 가토 기요마사 |
일본 지휘관 | 구로다 나가마사 |
일본 지휘관 | 모리 히데모토 |
일본 지휘관 | 나베시마 나오시게 |
병력 규모 | |
일본군 병력 | 64,300여 명 |
사상자 규모 | |
조선군 사상자 | 350명 이상 전사 |
2. 정유재란 초기 일본군의 침공 경로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은 조선을 재침략하면서 육군과 수군으로 나누어 진격하였다. 육군은 다시 좌군과 우군으로 편성되었는데, 우군은 가토 기요마사를 선봉장으로 하여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진격하였다.
일본군 우군은 창녕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초계, 합천을 지나 안음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군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않고 모두 도망쳤다. 일본군이 안음에 도착했을 때, 황석산성만이 홀로 굳건히 성을 지키며 저항했다.[1]
이후 우군은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전주에 이르러 좌군과 합류하였다. 양군은 며칠 동안 전주에 주둔하다가 24일에 전주성을 파괴하였다. 이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성명 미상)가 와서 양군의 보고를 청취하였다.[1]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이하의 여러 장수들은 회의를 열어 향후 전략을 결정하였다. 그 결과,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등 제외),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의 3개 부대 약 4만 명은 메츠케인 오타 가즈요시, 다케나카 시게토시 2명의 감시를 받으며 북상하여 공주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깃카와 히로이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등은 좌군에 소속되어 충청도와 전라도 두 지역을 토벌하는 임무를 맡았다.[1]
2. 1. 우군 선봉 가토 기요마사의 진격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우군 선봉 부대는 7월 25일 서생포를 출발하여 양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주장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에 속함) 및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과 합류하여 전군 집결을 마쳤다.[1] 이후 영산을 거쳐 창녕에 도착하였다. 창녕 동쪽 약 1리에 화왕산성이 있었고 곽재우 등이 방어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계속 진격했다.[1]2. 2. 일본군 주력 부대의 집결 및 이동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우군 선봉 부대는 7월 25일 서생포왜성을 출발하여 양산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주장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소속됨)와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과 합류하여 전군이 집결했다.[1]이후 일본군은 영산을 거쳐 창녕에 도착했다. 창녕 동쪽 약 1리에 화왕산성이 있었고 곽재우 등이 방어하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진군했다.[1]
일본군 우군은 창녕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초계, 합천을 지나 안음으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않고 조선군은 모두 도망쳤다. 일본군이 안음에 도착했을 때, 황석산성만이 홀로 굳건히 성을 지키며 저항했다.[1]
3. 황석산성 전투 (1597년 8월)
일본군 우군 선봉 가토 기요마사는 7월 25일 서생포왜성을 출발하여 양산에 이르러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속함),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과 합류하여 전군을 집결한 뒤 영산을 거쳐 창녕에 도착한다. 이곳 동쪽 약 1km에 화왕산성이 있었고 곽재우 등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으나, 일본군은 이를 무시하고 전진한다.[1]
창녕에서 서쪽으로 꺾여 초계, 합천을 거쳐 안음으로 향하던 일본군은 황석산성이 홀로 굳게 지키고 있음을 알게 된다.[1]
3. 1. 황석산성의 지리적, 군사적 중요성
황석산성은 안음 서북쪽 약 2리에 위치하며 사방이 절벽으로 매우 험준하여 경상과 전라 두 도의 요충지였다.[1]3. 2. 조선군의 방어 태세
황석산성은 안음의 서북쪽 약 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방이 절벽으로 매우 험준하여 경상도와 전라도 두 도의 요충지였다.[1] 안음현감 곽준이 이 곳을 지키고,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군사를 이끌고 와서 안음, 거창, 함양 3개 군현의 군민 수천 명을 모집하여 성의 각 곳에 배치하였다.[1]조선군의 방어 태세는 다음과 같았다.[1]
담당 구역 | 지휘관 |
---|---|
서남 양면 | 곽준 (안음현감) |
동북 양면 | 백사린 (김해부사) |
유격대 | 조종도 (전 함양군수) |
백사린은 무관 출신이었기 때문에 성의 병사들은 그를 의지하였다.[1]
3. 3. 일본군의 공격과 황석산성 함락
加藤清正일본어가 이끄는 일본군 우군 선봉대는 7월 25일 서생포왜성을 출발, 양산에서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등이 속함),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과 합류했다. 이들은 영산을 거쳐 창녕에 도착, 화왕산성을 무시하고 초계, 합천을 지나 안음으로 향했다. 안음에 있던 조선군은 모두 도망쳤으나, 황석산성은 홀로 굳게 지켰다.[1]황석산성은 안음 서북쪽 약 2리에 위치, 사방이 절벽으로 경상과 전라의 요충지였다. 안음현감 곽준이 성을 지켰고,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군사를 이끌고 와 안음, 거창, 함양 3군현 군민 수천 명을 모아 성을 지켰다. 서남 양면은 곽준, 동북 양면은 백사린, 조종도는 유격대를 맡았다.[1]
8월 중순(14, 15일경), 일본군은 여러 부대를 배치, 가토 기요마사는 남면,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는 서면,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동면에서 황석산성을 포위했다. 이들은 죽창 방패를 세우고 책을 묶어 성에 육박하며, 16일 밤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때 백사린은 도주했고, 곽준은 자리를 지키며 싸웠으나 모리모토 요시타유 등이 남문에 먼저 올라 간다 쓰시마가 곽준을 죽였다. 곽준의 아들 곽이상, 곽이후 및 조종도 등도 전사했다. 일본군은 350여 명을 죽이고 황석산성을 함락시켰으며, 산골짜기까지 추격하여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학살했다. 다음 날, 일본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승리를 보고했다.[1]
4. 황석산성 전투 이후
황석산성 함락 이후, 일본군 우군은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전주에 이르러 좌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며칠 동안 전주에 주둔하다가 전주성을 파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와서 양군의 보고를 받았다.[1]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등 여러 장수들은 회의를 열어 앞으로의 전략을 결정했다. 모리 히데모토(깃카와 히로이에 등은 제외),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3개 부대 약 4만 명은 오타 가즈요시, 다케나카 시게토시 두 명의 감시를 받으며 공주 방면으로 북상하기로 했다.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깃카와 히로이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등은 좌군에 남아 충청과 전라 지역을 공격하기로 했다.[1]
4. 1. 일본군의 전주 점령 및 북상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우군은 7월 25일 서생포왜성을 출발해 모리 히데모토,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과 합류하여 창녕에 도착했다. 이들은 곽재우 등이 지키는 화왕산성을 무시하고 초계, 합천을 거쳐 안음으로 향했다.[1]안음에 있던 조선군은 모두 도망갔으나, 황석산성만은 굳게 버텼다. 황석산성은 경상와 전라를 잇는 중요한 길목에 있었고, 안음현감 곽준,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 등이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 지키고 있었다.[1]
8월 중순, 일본군은 황석산성을 포위하고 총공격을 시작했다. 백사린은 도주했고, 곽준은 끝까지 싸웠으나 결국 전사했다. 황석산성은 함락되었고, 일본군은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다음 날 일본군은 이 승리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1]
이후 일본군 우군은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전주에서 좌군과 합류했다. 이들은 며칠 후 전주성을 파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자가 와서 보고를 들었고, 우키타 히데이에, 모리 히데모토 등 여러 장수들은 회의를 열어 앞으로의 계획을 세웠다. 모리 히데모토,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의 3개 부대 약 4만 명은 공주 방면으로 북상하고, 나머지는 충청과 전라도를 공격하기로 했다.[1]
4. 2. 일본군과 조선군의 재편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 우군은 서생포왜성을 출발해 양산에서 주력 부대와 합류한 후 창녕을 거쳐 안음으로 향했다. 화왕산성의 곽재우 부대를 무시하고 진격한 일본군은 안음에 도착했을 때, 황석산성이 저항하는 것을 확인했다.[1]황석산성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요충지로, 안음현감 곽준,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군사를 이끌고 3개 군현의 백성 수천 명과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곽준은 서남쪽, 백사린은 동북쪽을 지휘하고 조종도는 유격대를 맡았다.[1]
8월 중순(14, 15일경), 일본군은 여러 부대를 배치하여 황석산성을 포위하고, 16일 밤 총공격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백사린은 도주했고, 곽준은 모리모토 요시타유 등에게 전사했다. 곽준의 아들들과 조종도 등도 전사하고, 일본군은 350여 명의 목을 베어 황석산성을 함락시켰다.[1]
이후 일본군은 육십령을 넘어 진안을 거쳐 전주에서 좌군과 합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회의를 통해 병력을 나누어, 모리 히데모토,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4만 명의 병력은 북상하여 공주 방면으로 진격하고, 나머지는 충청과 전라 지역 토벌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1]
조선 조정은 이러한 일본군의 진격에 맞서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항쟁을 이어갔다. (자세한 내용은 임진왜란 관련 문서 참조)
5. 양측 군대 구성
황석산성을 지키기 위해 안음현감 곽준, 김해부사 백사린, 전 함양군수 조종도가 군사를 이끌고 왔다. 이들은 안음, 거창, 함양 3군현의 군민 수천 명을 모집하여 성을 방어했다. 곽준은 서남 양면을, 백사린은 동북 양면을 지휘했으며, 조종도는 유격대를 맡았다.[2]
일본군은 모리 히데모토를 주축으로 하여, 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이 참여하였다. 가토 기요마사는 별도로 서생포왜성을 출발하여 이들과 합류하였다.[1]
5. 1. 조선군
- 곽준 (안음현감)
- 백사린 (김해부사)
- 조종도 (전 함양군수)[2]
5. 2. 일본군
모리 히데모토를 주장으로, 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가 이에 속했다. 구로다 나가마사,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 이케다 히데우지, 나카가와 히데나리, 초소카베 모리치카 부자 등이 있었다.[1] 가토 기요마사는 7월 25일 서생포왜성을 출발하여 양산에 이르러 이들과 합류하였다.8월 중순(날짜 미상, 아마도 14, 15일경), 일본군은 여러 부대를 배치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남면에서, 나베시마 나오시게 부자는 서면에서, 구로다 나가마사 등은 동면에서 황석산성을 포위하였다.
지휘관 | 병력 | 비고 |
---|---|---|
모리 히데모토, 깃카와 히로이에, 안코쿠지 에케이 | 30,000 | |
초소카베 모토치카, 모리치카 | 3,000 | |
나베시마 나오시게, 가쓰시게 | 12,000 | |
이케다 히데오 | 2,800 | |
나카가와 히데나리 | 1,500 | |
구로다 나가마사 | 5,000 | |
가토 기요마사 | 10,000 | |
군 감찰 | 하야카와 나가마사, 가키미 가즈나오, 구마가이 나오모리 |
참조
[1]
논문
慶長の役(丁酉再乱)における長宗我部元親の動向
岩田書院
2004
[2]
서적
豊臣秀吉の朝鮮侵略
吉川弘文館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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