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야마 다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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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메이지 천황의 외삼촌으로, 막부 타도와 존왕양이를 주장한 일본의 무사이다. 그는 19세에 조슈 번으로 도망쳐 시모노세키 전쟁에 참여하고, 덴추구미를 결성하여 테러 활동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이후 조슈 번에서 은신하던 중 암살당했으며, 그의 묘는 일본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존왕양이 운동의 과격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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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히로는 고노에 모토사키의 장남으로 좌대신, 관백을 역임했으나 안세이 대옥으로 실각하고 복귀 후 다시 관백을 지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사망하여 정1위가 추서되었다.
나카야마 다다미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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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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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나카야마 다다미쓰 |
다른 이름 | 모리 슌사이 |
출생 | 1845년 5월 18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 | 1864년 12월 13일 |
사망지 | 시모노세키, 야마구치, 일본 |
국적 | 일본 |
가문 | |
씨족 | 우림가 나카야마가 |
아버지 | 나카야마 다다야스 |
어머니 | 나카야마 아이코(마쓰라 기요시의 딸) |
형제 | 나카야마 다다나루(형), 요시코(누나), 오기마치 긴타다(正親町公董, 형) |
양아버지 | 나카야마 다다나루 |
혼인 | |
첩 | 온치 도미 |
자녀 | 나카(후의 사가 긴토 후작의 부인) |
관직 | |
관위 | 종4위하 시종, 증정4위 |
주군 | 고메이 천황 |
기타 정보 | |
묘소 | 야마구치현시모노세키시의 나카야마 신사 경내 |
개명 | 다다미쓰 → 모리 슌사이 |
2. 생애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난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어머니가 히라도 번의 9대 다이묘이자 검객인 마쓰라 기요시의 딸 마쓰라 아이코였다. 메이지 천황의 생모 나카야마 요시코는 그의 이복 누나로, 다다미쓰는 메이지 천황의 삼촌이었다. 어린 천황은 5세까지 나카야마 가문에서 자랐고, 7살 위였던 다다미쓰는 황태자의 학업과 놀이를 돕는 시종 역할을 했다. 나카야마 가문과 황실 모두 가난했기에, 다다미쓰는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증오와 존왕양이 운동을 옹호하게 되었다.
19세에 교토를 떠나 조슈 번으로 간 그는 "모리 슌사이"로 개명하고, 구사카 겐즈이 지휘 아래 시모노세키 전쟁에 참여했다. 이후 미토 번 가신들과 교류하며 미토 학파의 영향을 받았고, 고조의 야마토국을 기반으로 한 ''덴추구미''의 창립 멤버이자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8월 18일의 정변으로 덴추구미는 히코네 번, 기이 번 군대에 의해 반역자로 몰려 전멸 위기에 처했지만, 다다미쓰는 오사카를 거쳐 조슈로 탈출했다.
초후 번에 위탁된 다다미쓰는 신분을 숨긴 채 은신 생활을 했다. 1864년 긴몬 사건과 제1차 조슈 정벌 이후, 조슈 번 내 교준 파벌에 의해 암살당했다(19세 6개월). 초후 번은 병사로 발표했다.[2]
시모노세키시 나카야마 신사 경내에 그의 묘가 있다. 원래 암살 장소에 묻혔으나, 막부의 명령으로 히로시마로 이송 중 시신을 탈취하여 현재 위치에 매장했다. 1934년 세워진 묘비는 "후지와라 다다미쓰"라고 적혀있고, 194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JR 서일본 산인 본선 아야라기역에서 도보 10분 거리다.[2]
사후, 아내 토미는 딸 나카를 낳았다. 그녀는 사가 가문에 시집갔고, 손녀 사가 히로는 만주국 황제 푸제와 결혼했다.
2. 1. 가계와 성장 배경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라도 번의 번주였던 마쓰라 기요시의 딸 마쓰라 아이코였다. 고메이 천황의 덴지(궁녀)였던 나카야마 요시코는 그의 누나였고, 메이지 천황은 다다미쓰의 조카였다.[2] 어린 천황은 5세까지 나카야마 가문에서 자랐으며, 다다미쓰는 어린 천황의 측근 중 한 명이었다.나카야마 가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이는 다다미쓰가 존왕양이 사상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2. 2. 존왕양이 운동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도쿠가와 막부에 대한 증오와 왕실의 권력 회복을 바라는 존왕양이 운동을 옹호하였다. 그는 다케치 한페이타, 구사카 겐즈이, 마키 야스오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분큐 3년(1863년) 2월, 조정에 국사 기인이 신설되자 19세의 나이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와쿠라 도모미와 지구사 유키후미의 암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다케치 즈이잔은 두 사람은 이미 견책을 받은 몸이니 암살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반대했다.
3월 19일, 다다미쓰는 몰래 교토를 탈출하여 조슈 번에 몸을 의탁했다. 이 때문에 3월 30일에는 관위와 국사 기인의 직을 반납하게 되었다. 조슈에서는 모리 슌사이(슈사이)로 개명하고, 구사카 겐즈이가 이끄는 광명사당의 당주로서 시모노세키 전쟁에 참가했다.
8월 13일에 야마토 행행의 조(미코토노리)가 내려지자, 攘夷(양이) 선봉의 칙명을 받드는 조직으로서 교토에서 덴추구미를 결성하고, 야마토국 고조 다이칸쇼에 쳐들어가 거병했다(덴추구미의 변).[2]
그러나 8월 18일의 정변으로 교토의 존양 과격파는 일소되었고, 막부에 의해 진압을 명받은 히코네 번이나 기이 번 병사들에게 반역자로 추토당하게 되었다. 덴추구미 사건에서 덴추구미는 결국 궁지에 몰려 거의 전멸했지만, 다다미쓰는 탈출에 성공하여 오사카를 거쳐 조슈로 돌아갔다.[2]
2. 3. 덴추구미의 변
분큐 3년(1863년)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교토를 몰래 빠져나가 조슈 번으로 가서, 구사카 겐즈이가 이끄는 광명사당에 가담하여 시모노세키 전쟁에 참여했다.[2] 이후 교토로 돌아와 덴추구미를 결성, 야마토국 고조의 다이칸쇼를 습격하고 거병했다(덴추구미의 변).[2] 그러나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존왕양이파가 실각하면서 덴추구미는 막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다다미쓰는 오사카를 거쳐 조슈 번으로 피신했다.[2]2. 4. 죽음
조슈 번은 다다미쓰를 초후 번에 위탁하여 보호했다. 1864년 금문의 변, 제1차 조슈 정벌 이후 조슈 번 내에서 속론파(俗論派)가 대두되면서, 다다미쓰는 11월 15일 밤에 5명의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초후 번은 다다미쓰가 병사했다고 발표했다.[2]3. 사후
나카야마 다다미쓰의 묘는 현재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나카야마 신사 경내에 있다.[2] 그는 처음에 암살된 장소에 묻혔지만, 도쿠가와 막부는 그를 발굴하여 부검을 위해 히로시마로 가져가라고 명령했다. 시신은 시모노세키까지 갔고, 그곳에서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훔쳐져 현재 위치에 묻혔다. 현재의 묘비는 1934년 10월에 세워졌으며, 나카무라 가문이 후지와라 씨의 방계 가문이었으므로 그의 이름을 "후지와라 다다미쓰"라고 적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1.7m 높이의 기념비는 3.6m 사각형 울타리로 둘러싸여 있다. 묘는 1941년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3] JR 서일본 산인 본선의 아야라기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2]
1870년 10월 29일, 모리 다카치카・모리 모토노리 부자의 주청에 의해 다다미쓰는 생전의 관위를 회복하고 정사위가 추증되었다. 또한 제사 비용으로 300냥이 하사되었다.[4]
그의 아내 토미는 다다미쓰가 사망한 후 딸 나카야마 나카를 낳았다. 그녀는 나카야마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던 사가 가문에 시집을 갔다. 그녀의 손녀는 1937년 푸이의 동생이자 청나라의 마지막 군주이자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국의 황제였던 푸제와 결혼한 사가 히로였다.
4. 인물
나카야마 다다야스의 일곱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히라도 번의 9대 다이묘였던 마쓰라 기요시의 딸 아이코였다. 메이지 천황의 생모인 나카야마 요시코는 그의 이복 누나였고, 다다미쓰는 메이지 천황의 삼촌이었다.
다다미쓰는 근골이 튼튼한 미청년이었다고 전해진다. 덴추구미의 수장으로서 눈썹을 밀고 검은 이를 칠한 화장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시라이시 쇼이치로의 일기에 따르면, 다다미쓰는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단식하고, 화를 내면 집을 뛰쳐나가는 격정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2]
5. 가족 및 후손
나카야마 다다미쓰의 아내 온치 도미(お温智富)는 다다미쓰 사후 그의 유일한 자식인 딸 나카야마 미나미카(中山南加)를 낳았다.[2] 미나미카는 나카야마 가문과 인연이 깊은 사가 가문에 시집갔다.[2] 미나미카의 손녀이자 다다미쓰의 증손녀인 사가 히로(嵯峨浩)는 1937년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 황제였던 푸이(溥儀)의 동생 푸제(溥傑)와 결혼했다.[2]
6. 평가
나카야마 다다미쓰는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존왕양이 운동의 과격성을 보여주는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황실 권력 회복을 열망하며 다케치 한페이타, 구사카 겐즈이, 마키 야스오미 등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2] 19세에 교토를 떠나 조슈 번으로 간 그는 시모노세키 전쟁에 참여했고, 이후 테러리스트 준군사 조직인 ''덴추구미''를 창설하여 도쿠가와 막부에 대항했다. 그러나 덴추구미 사건으로 조직이 와해된 후 암살자들에게 살해당했다.[2]
그의 사상과 행동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에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의 손녀 사가 히로는 만주국 황제 푸제와 결혼하여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적 인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한국의 입장에서, 특히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나카야마 다다미쓰를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역사적 맥락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조
[1]
서적
The Emperors of Modern Japan
2008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웹사이트
中山忠光墓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1-08-20
[4]
간행물
従四位中山忠光ノ官位ヲ復シ又正四位ヲ贈リ祭粢賜フ
A150702794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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