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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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사고는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지리학자, 예언가로, 어려서부터 독서를 즐겨 학문에 정진했다. 명종 때 관직에 나아가 관상감 교수를 역임했으며, 동서 분당과 임진왜란을 예언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저서로는 『남사고비결』, 『남격암십승지론』 등이 있으며, 이 책들은 『정감록』에 수록되었다. 또한, 백두산맥설을 주장하고 구룡쟁주의 명당을 찾아 부친의 묘를 이장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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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사고 | |
---|---|
기본 정보 | |
본관 | 평산 신씨 |
자 | 해옹(海翁) |
호 | 격암(格庵) |
시호 | 문정(文貞) |
생애 | |
출생 | 1509년 |
사망 | 1571년 |
직업 | 천문학자, 지리학자 |
가족 | |
배우자 | 연일 정씨 |
아버지 | 신헌(申軒) |
저서 | |
주요 저서 | 격암유록 |
기타 | |
영향 | 조선의 천문학, 지리학 발전에 기여 |
2. 생애
어릴 때부터 독서를 좋아하였고, 확고한 뜻을 세워 학문이나 재물을 쉽게 또는 구차하게 얻는 것을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절제된 자세를 견지하였으며, 평생동안 «소학(小學)» 을 책상 위에 두고 보면서 몸소 실천하였다. 명종 19년(1564년)에 효렴(孝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사직서(社稷署) 참봉(參奉)에 제수되었으며, 말년에 관상감 교수(종6품)를 역임하였다. 명종 말기에 이미 1575년(선조 8)의 동서분당(東西分黨)을 예언하였고, 임진년(1592)에 백마를 탄 사람이 남쪽으로부터 나라를 침범하리라 하였는데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백마를 타고 쳐들어왔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사(鄕祠)에 배향되었으며, 후세 사람들이 ‘해동강절(海東康節)’이라 불렀다.
도술이나 신통력에 대한 설화가 여러 설화집에 전해지며, 사후에 임진왜란 발생, 동인과 서인의 분당 싸움, 선조의 즉위 등을 예언하여 맞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더 명성을 얻었다.[2][3]
3. 설화 및 비기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소재한다고 하였는데, 금강산이 봉래산이요, 지리산이 방장산이며,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소개했지만, 이 설을 긍정하지 않고 백두산 중심설로 대체했다. 이수광은 “두시(杜詩)에서 방장산이 삼한(三韓) 바깥에 있다고 하였는데 가히 믿을 만하다”고 하면서 “본래 삼신산설이 서복에서 시작하였던 것으로서, 서복이 일본으로 들어가 죽어서 신이 되었은즉, 삼신산은 응당 동해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신 “우리나라의 산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이 되었다”는 “남사고(南師古)의 백두산맥설”을 내세웠다.
남사고가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明堂) 형국을 발견하고 부친의 묘소를 이장했으나, 이후 아홉 마리 뱀이 개구리를 놓고 다투는 형국, 아홉 마리 뱀이 나무에 걸려 죽은 형국으로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돌리려는 순간 낙상하여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설화는 «지봉유설(芝峰類說)», 《대동기문(大東奇聞)》, 《해동이적(海東異蹟)》,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등에 실려 있다.
남사고의 저서로 알려진 도참서인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에 전해진다.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이른바 재난의 피신처인 열 곳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가 있고, 또 『임광기(林廣記)』와 우주(宇宙)를 그려 벽에 걸어두고 항상 연구해 왔다는 『완역도(玩易圖)』, 『상동유초(床東遺草)』, 『이기도설(理氣圖說)』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남사고비결》, 《남경암산수십승보길지지》는 《정감록》을 통하여 알려졌으며, 18세기 초반 이후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2][3]
『마상록(馬上錄)』은 예언서이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태극도(太極道) 신자가 1951년 정월 초6일에 17쪽을 지었고, 그 뒤에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本) 신도가 포교용으로 22쪽, 1968년에 지은 것이다. 『紅袖志』는 예언서이며,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本) 신도가 포교용으로 1968년에 지은 것이다.
《격암유록》은 예언서이며, 1977년 2월 21일에 공개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토할 가치가 없는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3. 1. 조선왕조실록 기록
선조 재위 기간 동안, 남사고는 풍수(지리) 전문가로 언급되었으며, 1593년 1월 12일 기사나 1600년 7월 26일 기사에 나타난다. 영조 재위 기간 중인 1733년 8월 18일 기사에는 남사고의 저술이 형사 사건과 연관되었으며, 1733년 8월 26일 기사에서는 곽철웅 벽보 사건과 연관되어 금지되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은 승인된 중국의 경전에서 비롯된 풍수와 한국의 토착적이고 정치화된 풍수를 분리하려 했다.
3. 2. 기타 비기
도술이나 신통력에 대한 설화가 여러 설화집에 전해지며, 사후에 임진왜란 발생, 동인과 서인의 분당 싸움, 선조의 즉위 등을 예언하여 맞았다는 평가를 받으며 더 명성을 얻었다.[2][3]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세상에서 일컫기를 삼신산이 우리나라에 소재한다고 하였는데, 금강산이 봉래산이요, 지리산이 방장산이며,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소개했지만, 이 설을 긍정하지 않고 백두산 중심설로 대체했다. 이수광은 “두시(杜詩)에서 방장산이 삼한(三韓) 바깥에 있다고 하였는데 가히 믿을 만하다”고 하면서 “본래 삼신산설이 서복에서 시작하였던 것으로서, 서복이 일본으로 들어가 죽어서 신이 되었은즉, 삼신산은 응당 동해의 동쪽에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대신 “우리나라의 산은 모두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이 되었다”는 “남사고(南師古)의 백두산맥설”을 내세웠다.
남사고가 아홉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놓고 다투는 구룡쟁주(九龍爭珠)의 명당(明堂) 형국을 발견하고 부친의 묘소를 이장했으나, 이후 아홉 마리 뱀이 개구리를 놓고 다투는 형국, 아홉 마리 뱀이 나무에 걸려 죽은 형국으로 잘못 보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돌리려는 순간 낙상하여 죽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이 설화는 «지봉유설(芝峰類說)», 《대동기문(大東奇聞)》, 《해동이적(海東異蹟)》,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등에 실려 있다.
남사고의 저서로 알려진 도참서인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과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에 전해진다.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은 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남격암십승지론(南格庵十勝地論)』에서는 정감록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十勝之地), 이른바 재난의 피신처인 열 곳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편저에 ≪선택기요 選擇紀要≫가 있고, 또 『임광기(林廣記)』와 우주(宇宙)를 그려 벽에 걸어두고 항상 연구해 왔다는 『완역도(玩易圖)』, 『상동유초(床東遺草)』, 『이기도설(理氣圖說)』가 있었다고 하나 전하여지지 않는다.
《남사고비결》, 《남경암산수십승보길지지》는 《정감록》을 통하여 알려졌으며, 18세기 초반 이후로 언급되기 시작하였다.[2][3]
『마상록(馬上錄)』은 예언서이며, 부산광역시 사하구 감천동에 태극도(太極道) 신자가 1951년 정월 초6일에 17쪽을 지었고, 그 뒤에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本) 신도가 포교용으로 22쪽, 1968년에 지은 것이다. 『紅袖志』는 예언서이며, 대순진리회(大巡眞理會本) 신도가 포교용으로 1968년에 지은 것이다.
《격암유록》은 예언서이며, 1977년 2월 21일에 공개되었으나 대한민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검토할 가치가 없는 위서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4. 저서
- 《격암일고(格庵逸稿)》
: 시문집이며, 1964년 간행되었다.
- 《십승기 (十勝基)》
남사고는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과 십승지 "남격암(南格庵)의 풍수지리설에 따른 열 곳의 훌륭한 보호와 행운의 장소"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텍스트는 1600년에서 1650년 사이에 수집된 것으로 보이는 정감록에 포함되었다.
반면에, 이도은이 1977년에 발표한 이른바 격암유록(남사고 예언)은 그가 예측해야 할 사건 이후에 쓰여진 위조본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5. 관련 작품
5. 1. 드라마
참조
[1]
서적
사암집
[2]
간행물
남사고비결
http://100.nate.co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서적
영조실록
1733-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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