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피 전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남피 전투는 205년 조조가 원담을 격파하고 남피를 점령한 전투이다. 조조는 관도 전투 이후 원소의 아들들 간의 분열을 이용하려 했고, 원담과 동맹을 맺었으나, 원담의 독자적인 행동으로 인해 동맹을 파기했다. 전투는 조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로써 조조는 화북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전투 이후 조조는 지방 세력을 회유하고 사치 금지령을 내리는 등 북방의 안정을 꾀했다.
원소는 200년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후, 202년에 사망했다.[2] 그는 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광대한 영토를 세 아들 및 조카인 원담, 원희, 원상, 고간에게 남겼다.[2] 장남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원상의 지지자들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선언하는 문서를 위조했다.[2] 이에 분개한 원담은 203년 역양 전투에서 조조의 침략을 함께 막아낸 후, 원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2] 원담은 원씨 가문의 본거지인 업현을 차지하려 했으나, 원상은 포위군을 격파하고 300km 떨어진 남피현으로 그들을 쫓아냈다.[2]
원담(袁譚)은 롱초(龍湊)에 진영을 치고 평원과 남피 사이에 위치하여 조조(曹操)에 맞섰다. 그러나 기주(冀州) 북부 지역에서 겨우 몇 주 동안만 세력을 재건했을 뿐 롱초와 남피를 확실하게 지킬 수 없었다.[6]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롱초로 진격하자 원담은 그곳에서 도망쳐 밤에 남피로 후퇴했고, 근처의 청하(淸河)에 진영을 세웠다. 원담의 후퇴로 평원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조조는 도시로 진입하여 그 현들을 장악했다.[7]
2. 배경
202년 가을, 조조는 원씨 형제들이 스스로 지치도록 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그들의 동맹인 유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2] 조조의 부재를 틈타 원상은 군대를 남피로 진격시켜 원담을 격파했고, 원담은 남쪽으로 도망쳐 청주, 평원현으로 갔다.[2] 원담의 핵심 참모인 곽도는 상황을 요약하고 조조와의 동맹을 제안했다.[2] 곽도의 제안은 왕수와 유표의 화해 촉구와는 현저히 달랐으며, 원담은 처음에는 이 조언에 따르는 것을 꺼렸지만, 곧 신비를 보내 아버지의 숙적인 조조와 협상하게 했다.[2]
순욱은 유표가 위협이 될 만큼 야심이 없으므로, 형제들이 재결합하기 전에 원씨 가문의 불화를 이용할 적기라고 조조에게 진언했다.[3] 조조는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원담의 동맹에 대한 진정성을 확신하지 못했다.[3] 이때 신비는 조조가 원씨 형제들이 대립하는 한, 원담의 의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3] 조조는 203년 말까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황하를 건너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켰다.[4]
204년 조조가 업 전투에서 업을 포위했을 때 원상이 1만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조조는 그의 군대를 쉽게 격파하고 그를 북쪽 중산군으로 도망가게 했다.[5] 그리고 9월에 업현은 항복했다.[5] 원담은 평원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감릉(甘陵), 안평(安平), 박해(渤海), 하간(河間) 군을 점령했으며, 마침내 중산에서 공격하여 원상을 기주에서 몰아냈다.[5] 조조는 동맹을 더 이상 활용할 필요가 없어져 원담이 업의 포위에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난했다.[5] 비난 이후 동맹은 파기되었고, 원담의 딸이 반환되었으며, 205년 초에 군대가 원담의 영토로 이동했다.[5]
2. 1. 원소의 죽음과 후계 다툼
원소는 200년 관도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배한 후, 202년에 사망했다.[2] 그는 기주, 청주, 병주, 유주의 광대한 영토를 세 아들 및 조카인 원담, 원희, 원상, 고간에게 남겼다.[2] 장남이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원상의 지지자들은 막내 아들을 후계자로 선언하는 문서를 위조했다.[2] 이에 분개한 원담은 203년 역양 전투에서 조조의 침략을 함께 막아낸 후, 원상에게 반란을 일으켰다.[2] 원담은 원씨 가문의 본거지인 업현을 차지하려 했으나, 원상은 포위군을 격파하고 300km 떨어진 남피현으로 그들을 쫓아냈다.[2]
202년 가을, 조조는 원씨 형제들이 스스로 지치도록 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그들의 동맹인 유표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2] 조조의 부재를 틈타 원상은 군대를 남피로 진격시켜 원담을 격파했고, 원담은 남쪽으로 도망쳐 청주, 평원현으로 갔다.[2] 원담의 핵심 참모인 곽도는 상황을 요약하고 조조와의 동맹을 제안했다.[2] 곽도의 제안은 왕수와 유표의 화해 촉구와는 현저히 달랐으며, 원담은 처음에는 이 조언에 따르는 것을 꺼렸지만, 곧 신비를 보내 아버지의 숙적인 조조와 협상하게 했다.[2]
순욱은 유표가 위협이 될 만큼 야심이 없으므로, 형제들이 재결합하기 전에 원씨 가문의 불화를 이용할 적기라고 조조에게 진언했다.[3] 조조는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원담의 동맹에 대한 진정성을 확신하지 못했다.[3] 이때 신비는 조조가 원씨 형제들이 대립하는 한, 원담의 의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3] 조조는 203년 말까지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황하를 건너고,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켰다.[4]
204년 조조가 업 전투에서 업을 포위했을 때 원상이 1만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왔지만, 조조는 그의 군대를 쉽게 격파하고 그를 북쪽 중산군으로 도망가게 했다.[5] 그리고 9월에 업현은 항복했다.[5] 원담은 평원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감릉(甘陵), 안평(安平), 박해(渤海), 하간(河間) 군을 점령했으며, 마침내 중산에서 공격하여 원상을 기주에서 몰아냈다.[5] 조조는 동맹을 더 이상 활용할 필요가 없어져 원담이 업의 포위에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비난했다.[5] 비난 이후 동맹은 파기되었고, 원담의 딸이 반환되었으며, 205년 초에 군대가 원담의 영토로 이동했다.[5]
2. 2. 조조의 개입과 원담과의 동맹
원담은 203년, 역양 전투에서 조조의 침략을 함께 막아낸 후 원상에게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배하고 평원현으로 도망쳤다.[2] 상황이 불리해지자 원담의 참모 곽도는 조조에게 동맹을 제안했다.[2] 곽도는 원상이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며, 조조가 업을 공격하면 원상은 돌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원상의 군대가 패배하면 그 부하들을 징발하여 조조에게 대항할 수 있고, 조조는 보급 문제로 결국 물러날 것이므로, 조나라 북쪽을 차지하여 조조와 대적할 수 있다고 하였다.[2]
원담은 처음에는 꺼렸지만, 신비를 조조에게 보내 협상하게 했다. 조조는 순욱의 조언에 따라 원씨 가문의 내분을 이용하기로 하고 동맹을 맺었다.[3] 조조는 원담의 딸과 자신의 아들 조정(曹整)을 결혼시켜 동맹을 강화했다.[4]
204년, 조조는 업 전투를 통해 업을 포위하였고, 원상은 원담을 제압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5] 업현이 함락된 후, 원담은 기주의 여러 군현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하지만 조조는 원담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다고 비난하며 동맹을 파기하고, 원담의 딸을 돌려보냈다.[5]
2. 3. 동맹의 파기
조조는 200년 관도 전투에서 원소에게 승리한 후, 원소 사후 그의 아들들인 원담과 원상 사이의 분열을 이용하고자 했다.[2] 원소의 사망 이후, 원담은 원상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 남피현으로 쫓겨났고, 설상가상으로 부하들의 배신까지 겪게 되었다.[2]
202년 가을, 조조는 유표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원씨 형제들이 스스로 지치도록 하는 전략을 펼쳤다.[2] 그 사이 원상은 남피를 공격하여 원담을 평원현으로 몰아냈고, 원담은 곽도의 제안에 따라 아버지의 숙적인 조조에게 동맹을 제안했다.[2]
순욱은 유표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하여 원씨 가문의 내분을 이용할 적기라고 조조에게 진언했다.[3] 조조는 원담의 진정성을 의심했지만, 신비는 원씨 형제들이 대립하는 한, 조조가 그들을 각개격파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4] 결국 조조는 203년 말, 군대를 북쪽으로 이동시켜 황하를 건너고, 아들 조정(曹整)을 원담의 딸과 결혼시켜 동맹을 맺었다.[4]
그러나 원담은 여광과 여상 형제에게 인장을 주는 등 동맹을 위반하는 행동을 보였다.[4] 204년, 조조가 업 전투에서 업을 포위하자, 원상은 원담을 공격하는 대신 업으로 돌아와 조조에게 패배하고 중산군으로 도망갔다. 이후 원담은 기주의 여러 군현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했다.[5]
조조는 원담이 업 포위전에 소극적이고 자신의 이익만 추구한다고 비난하며 동맹 파기를 선언하고, 원담의 딸을 돌려보냈다. 205년 초, 조조는 군대를 이동시켜 원담의 영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5]
3. 전투의 전개
이때, 원씨 가문의 또 다른 전통적인 동맹인 북쪽의 오환 부족은 소복연(蘇僕延) 아래 5,000명의 기병을 준비하여 원담을 도우려 했다. 조조의 사신 견초는 소복연의 궁정에서 경쟁 사신에 맞서 인상적인 무력을 과시했고, 오환 왕을 설득하여 구원 부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8]
다음 달, 조조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남피를 공격했고 원담이 싸우러 나왔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았고, 조조는 일시적인 휴전을 고려했다. 조순은 조조의 호표기(虎豹騎) 부대의 수장으로, 조조에게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설득했다. 이는 아마도 곽도가 원담에게 지적했던 조조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천 리를 따라 적을 쫓아왔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돌아가면 분명히 체면을 잃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군대는 고립되어 적의 영토 깊숙이 들어와 있으며, 이 위치를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들이 이기면 자만하고, 우리가 지면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을 사용하여 자만에 맞서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입니다."[9]
조조는 이에 동의하여 공격적인 타격을 명령하고, 직접 북을 쳐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했다. 원담의 군대는 재정비할 기회도 없이 패주했다. 원담 자신은 조순의 부하들에게 쫓기다 말에서 떨어졌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추격자에게 돌아서서 간청했다. "멈춰! 날 살려주면, 너를 부유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수당했다고 기록되었다.[10] 원담이 죽자 조조는 남피를 점령했다.
3. 1. 롱초에서의 대치와 원담의 후퇴
원담(袁譚)은 롱초(龍湊)에 진영을 치고 평원(平原)과 남피(南皮) 사이에 위치하여 조조(曹操)에 맞섰다. 그러나 기주(冀州) 북부 지역에서 겨우 몇 주 동안만 세력을 재건했을 뿐 롱초와 남피를 확실하게 지킬 수 없었다.[6]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롱초로 진격하자 원담은 그곳에서 도망쳐 밤에 남피로 후퇴했고, 근처의 청하(清河)에 진영을 세웠다. 원담의 후퇴로 평원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조조는 도시로 진입하여 그 현들을 장악했다.[7]
이때, 원씨 가문의 또 다른 전통적인 동맹인 북쪽의 오환 부족은 소복연(蘇僕延) 아래 5,000명의 기병을 준비하여 원담을 도우려 했다. 조조의 사신 견초(牽招)는 소복연의 궁정에서 경쟁 사신에 맞서 인상적인 무력을 과시했고, 오환 왕을 설득하여 구원 부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8]
3. 2. 평원 함락과 오환족의 개입 좌절
원담(袁譚)은 정복 후 롱초(龍湊)에 진영을 치고 평원과 남피 사이에 위치하여 조조(曹操)에 맞섰으나, 롱초와 남피를 확실하게 지킬 수 없었다.[6]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롱초로 진격하자 원담은 밤에 남피로 후퇴했고, 평원은 무방비 상태가 되어 조조가 도시로 진입하여 현들을 장악했다.[7]
이때, 원씨 가문의 동맹인 북쪽의 오환 부족은 소복연(蘇僕延) 아래 5,000명의 기병을 준비하여 원담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조조의 사신 견초(牽招)가 소복연의 궁정에서 인상적인 무력 과시를 통해 오환 왕을 설득하여 구원 부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8]
3. 3. 남피 공방전과 원담의 죽음
조조(曹操)는 군대를 이끌고 롱초(龍湊)로 진격, 원담(袁譚)은 그곳에서 도망쳐 밤에 남피(南皮)로 후퇴했고 근처의 청하(淸河)에 진영을 세웠다. 원담의 후퇴로 평원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조조는 도시로 진입하여 그 현들을 장악했다.[7] 이때, 오환 부족은 소복연(蘇僕延) 아래 5,000명의 기병을 준비하여 원담을 도우려 했다. 조조의 사신 견초(牽招)는 소복연의 궁정에서 경쟁 사신에 맞서 인상적인 무력을 과시했고, 오환 왕을 설득하여 구원 부대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8]
다음 달, 조조는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남피를 공격했고 원담이 싸우러 나왔다. 양측 모두 사상자가 많았고, 조조는 일시적인 휴전을 고려했으나, 조순은 조조에게 그러한 결정을 하지 않도록 설득했다.[9]
조조는 이에 동의하여 공격적인 타격을 명령하고, 직접 북을 쳐 병사들을 이끌고 공격했다. 원담의 군대는 재정비할 기회도 없이 패주했다. 원담 자신은 조순의 부하들에게 쫓기다 말에서 떨어졌고, 필사적으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추격자에게 돌아서서 간청했다. "멈춰! 날 살려주면, 너를 부유하게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참수당했다고 기록되었다.[10] 원담이 죽자 조조는 남피를 점령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조조가 남피성에 입성하자, 새로 항복한 기주 주부(冀州主簿) 이부의 조언에 따라 성을 약탈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했다. 그러나 조조는 원담의 주요 측근들에게는 자비롭지 않아, 곽도와 다른 지도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즉결 처형되었고, 원담의 가족 또한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6]
남피의 함락은 이전의 업 점령과 함께 원씨 일족을 기주에서 몰아내고, 조조의 화북 평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흑산적의 수장 장연은 대부분의 지방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원씨 일족을 섬겼었지만, 조조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관통은 청주의 낙안군(樂安)에서 저항하며 항복을 거부했고, 조조는 원담을 구하기 위해 너무 늦게 도착하여 조조에게 항복한 왕수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왕수는 관통이 멸망한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기뻐한 조조는 관통을 사면하고 왕수를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11] 기주와 청주 두 주를 장악한 조조는 그의 참모 곽가의 조언에 따라 지방의 유지들을 자신의 행정에 참여하도록 초청했다. 그는 또한 사적인 분쟁과 원한 맺는 행위를 억제하는 한편, 과도한 장례 의식,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무덤 건설, 그리고 비 건립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법을 제정했다.[12]
더 북쪽으로, 원상은 형 원희에게 의탁했고, 원희는 유주 자사였다. 북쪽의 유주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탁군의 왕송과 어양군의 선우보는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원희의 본거지에서는 초촉과 장남의 반란이 일어났다. 초촉은 원씨 형제를 몰아내고 스스로를 유주 자사로 칭하며 많은 지방 관료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했다.[13] 원희와 원상은 동북쪽으로 도망쳐 그들의 동맹인 선비족에게 의탁했고, 선비족은 곧 원씨를 지원하기 위해 광평 (현재의 밀운구 북동쪽)에서 선우보를 공격했다.[14] 조조에 대한 또 다른 반대 세력은 조독과 곽노에게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원씨에게 동정적인 지방 지도자였으며, 탁군의 태수와 유주의 자사를 공격하여 살해했다.[15] 205년 가을, 기주를 안정시킨 조조는 북쪽으로 와서 조독과 곽노를 격파하고 선비족으로부터 선우보를 구출했다. 선비족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조조는 그들을 처리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최근 항복한 병주 자사 고간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며, 아마도 선비족의 지원으로 원씨 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16] 조조는 206년에 고간을 완전히 격파했고, 207년 말에 이르러서야 원씨 일족과 선비족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화북 지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4. 1. 조조의 하북 평원 장악
조조가 남피성에 입성하자, 새로 항복한 기주 주부(冀州主簿) 이부의 조언에 따라 성을 약탈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했다. 그러나 곽도를 비롯한 원담의 주요 측근들과 그 가족들은 즉결 처형되었고, 원담의 가족 또한 같은 운명을 맞았다.[6]남피 함락은 이전의 업 점령과 함께 원씨 일족을 기주에서 몰아내고 조조의 화북 평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흑산적의 수장 장연은 대부분의 지방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원씨 일족을 섬겼었지만, 조조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청주의 낙안군(樂安)에서 저항하던 관통은 왕수의 설득으로 조조에게 사면받고, 왕수는 조조의 참모가 되었다.[11] 기주와 청주를 장악한 조조는 참모 곽가의 조언에 따라 지방 유지들을 행정에 참여시키고, 사적인 분쟁, 원한 맺는 행위, 과도한 장례 의식, 사치스러운 무덤 건설, 비 건립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법을 제정했다.[12]
원상은 형 원희에게 의탁했고, 탁군의 왕송과 어양군의 선우보는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원희의 본거지에서는 초촉과 장남의 반란이 일어나 초촉은 원씨 형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유주 자사로 칭하며 조조에게 귀순했다.[13] 원희와 원상은 선비족에게 의탁했고, 선비족은 광평 (현재의 밀운구 북동쪽)에서 선우보를 공격했다.[14] 조독과 곽노는 탁군 태수와 유주 자사를 공격하여 살해했다.[15] 205년 가을, 조조는 북쪽으로 와서 조독과 곽노를 격파하고 선비족으로부터 선우보를 구출했다. 고간이 반란을 일으켰지만, 206년에 조조는 고간을 격파했고, 207년 말 원씨 일족과 선비족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화북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16]
4. 2. 원가의 몰락과 저항 세력 진압
조조가 남피성에 입성하자, 새로 항복한 기주 주부(冀州主簿) 이부의 조언에 따라 성을 약탈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했다. 그러나 조조는 원담의 주요 측근들에게는 자비롭지 않아, 곽도와 다른 지도자들은 그들의 가족과 함께 즉결 처형되었고, 원담의 가족 또한 같은 운명을 맞았을 것이다.[6]남피 함락은 이전의 업 점령과 함께 원씨 일족을 기주에서 몰아내고, 조조의 화북 평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흑산적의 수장 장연은 대부분의 지방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원씨 일족을 섬겼었지만, 조조에게 완전히 항복했다. 관통은 청주의 낙안군(樂安)에서 저항하며 항복을 거부했고, 조조는 원담을 구하기 위해 너무 늦게 도착하여 조조에게 항복한 왕수에게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왕수는 관통이 멸망한 국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기뻐한 조조는 관통을 사면하고 왕수를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11] 기주와 청주 두 주를 장악한 조조는 그의 참모 곽가의 조언에 따라 지방의 유지들을 자신의 행정에 참여하도록 초청했다. 그는 또한 사적인 분쟁과 원한 맺는 행위를 억제하는 한편, 과도한 장례 의식,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무덤 건설, 그리고 비 건립을 금지하는 사치 금지법을 제정했다.[12]
더 북쪽으로, 원상은 형 원희에게 의탁했고, 원희는 유주 자사였다. 북쪽의 유주에서도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탁군의 왕송과 어양군의 선우보는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원희의 본거지에서는 초촉과 장남의 반란이 일어났다. 초촉은 원씨 형제를 몰아내고 스스로를 유주 자사로 칭하며 많은 지방 관료들을 이끌고 조조에게 귀순했다.[13] 원희와 원상은 동북쪽으로 도망쳐 그들의 동맹인 선비족에게 의탁했고, 선비족은 곧 원씨를 지원하기 위해 광평 (현재의 밀운구 북동쪽)에서 선우보를 공격했다.[14] 조조에 대한 또 다른 반대 세력은 조독과 곽노에게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원씨에게 동정적인 지방 지도자였으며, 탁군의 태수와 유주의 자사를 공격하여 살해했다.[15] 205년 가을, 기주를 안정시킨 조조는 북쪽으로 와서 조독과 곽노를 격파하고 선비족으로부터 선우보를 구출했다. 선비족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조조는 그들을 처리할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최근 항복한 병주 자사 고간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며, 아마도 선비족의 지원으로 원씨 일족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16] 조조는 206년에 고간을 완전히 격파했고, 207년 말에 이르러서야 원씨 일족과 선비족의 연합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고 화북 지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가 되었다.
4. 3. 북방 정세 안정화
조조가 남피성에 입성하자, 새로 항복한 기주 주부(冀州主簿) 이부의 조언에 따라 성을 약탈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평소와 다름없이 생업에 종사하라고 포고했다. 그러나 곽도를 비롯한 원담의 주요 측근들과 그 가족들은 즉결 처형되었다.[6]남피 함락과 업 점령으로 원씨 일족은 기주에서 축출되었고, 조조는 화북 평원에 대한 지배력을 확고히 했다. 흑산적의 수장 장연은 조조에게 항복했고, 청주 낙안군에서 저항하던 관통은 왕수의 설득으로 조조에게 사면받고 참모로 등용되었다.[11] 기주와 청주를 장악한 조조는 곽가의 조언에 따라 지방 유지들을 등용하고, 사치 금지법을 제정했다.[12]
한편, 원상은 형 원희에게 의탁했으나, 탁군의 왕송과 어양군의 선우보는 조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초촉과 장남은 원희를 몰아내고 조조에게 귀순했다.[13] 원희와 원상은 선비족에게 의탁했고, 선비족은 광평 (현재의 밀운구 북동쪽)에서 선우보를 공격했다.[14] 조독과 곽노는 원씨에게 동정적인 지방 지도자로, 탁군 태수와 유주 자사를 공격하여 살해했다.[15] 205년 가을, 조조는 북쪽으로 와서 조독과 곽노를 격파하고 선비족으로부터 선우보를 구출했다. 206년, 조조는 고간의 반란을 진압했고, 207년 백랑산 전투에서 원씨 일족과 선비족 연합군을 격파하여 화북 지역을 완전히 평정했다.[16]
5. 평가 및 의의
5. 1. 군사적 측면
5. 2. 정치적 측면
5.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의 평가
참조
[1]
간행물
Zizhi Tongjian
[2]
간행물
Records of Heroes
[3]
서적
To establish peace : being the chronicle of Later Han for the years 189 to 220 AD as recorded in chapters 59 to 69 of the Zizhi tongjian of Sima Guang
Faculty of Asian Studies, Australian National University
[4]
서적
Imperial warlord : 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Brill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간행물
Biography of Cao Ren, Volume 9, Annotated Records of the Three Kingdoms
[10]
간행물
Biography of Yuan Tan, Volume 74B, Book of Later Han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