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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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수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이연경의 사위가 되어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성리학 학통을 계승했다. 1543년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으나,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겪었다. 선조 즉위 후 복귀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기축옥사로 파직되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복되었으며, 문장과 서예에도 능했고 양명학을 연구했다. 저서로 《소재집》 등이 있으며, 사후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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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수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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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글 이름 | 노수신 |
한자 이름 | 盧守愼 |
가나 이름 | ノ・スシン |
로마자 표기 | No Su-sin |
일본어 읽기 | ろ しゅしん |
가문 | |
종가 | 상주 소재 종가 |
2. 생애
정암 조광조의 학통을 이은 탄수 이연경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사위가 되어 성리학 학맥을 계승하였다. 이황, 김인후, 이이 등 당대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1543년(중종 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나, 1545년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파직되고 1547년부터 진도 등지에서 19년간 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 중에도 학문 연구에 매진하여 이황 등과 학문적 논쟁을 벌이고 《대학장구》(大學章句) 등을 주석하였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하여 대사헌, 이조판서 등 요직을 거쳐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1588년 영의정에서 물러났으나, 이듬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과거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받고 파직되었다. 1590년 한성 교외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영의정으로 복권되었으며, 1591년 종계변무 성사에 따른 공로로 광국공신 원종공신 1등에 추서되었다. 문장과 서예에 능했으며 양명학 연구에도 조예가 깊었다. 사후 충주의 팔봉서원, 상주의 도남서원 등 여러 서원에 배향되었다.
2. 1. 초기 생애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탄수 이연경(李延慶)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그의 딸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었다. 이를 통해 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연경으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퇴계 이황, 하서 김인후 등 당대의 학자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율곡 이이와도 가깝게 지냈다.1534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이곳에서 김인후와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543년(중종 38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이듬해인 1544년에는 시강원(侍講院) 사서가 되어 동궁(훗날의 인종)의 강관(講官)을 맡아 학문을 가르쳤고, 사가독서(賜暇讀書)의 기회를 얻어 학문에 정진했다. 이때 동기인 이황과 교류하며 직무를 수행하고 도의를 강론하며 서로 학문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大尹) 세력에 가담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당시 권력자였던 이기를 공격하고 논핵하여 파직시켰다. 그러나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인 윤원형이 이기와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노수신은 을사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조좌랑에서 파직당했다.
1547년(명종 2년)에는 순천으로 유배되었으나, 곧이어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연루되어 형이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었다. 이후 진도에서 19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1565년에는 유배지가 괴산으로 옮겨졌다. 긴 유배 기간 동안에도 학문 연구를 멈추지 않아, 이황, 김인후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했다. 특히 이황과는 인심도심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담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기도 했고, 《대학장구》(大學章句)와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에 주석을 다는 학문 활동을 이어갔다.
2. 2. 학문적 교류와 성장
정암 조광조의 문하에서 수학한 탄수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그의 딸과 혼인하여 사위가 되었다. 이를 통해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이연경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학맥을 이었다.1534년 과거의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고, 이곳에서 하서 김인후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퇴계 이황 · 하서 김인후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했으며, 율곡 이이와도 친하게 지냈다.
1543년(중종 38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과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이듬해인 1544년에는 시강원 사서가 되어 학문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사가독서의 기회를 얻었으며, 왕세자(인종)의 강관을 맡아 동기인 이황과 함께 직무를 수행하며 도의를 강론하고 서로 학문을 연마했다.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 세력에 가담하여 사간원 정언으로서 이기 등 소윤 세력을 비판했다. 그러나 1545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아래 소윤의 윤원형과 이기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노수신은 이 사화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년)에는 순천으로 유배되었고, 이후 양재역 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죄가 가중되어 진도로 이배되어 19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1565년에는 유배지가 괴산으로 옮겨졌다.
긴 유배 기간 동안에도 학문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이황, 김인후 등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토론했고, 특히 이황과는 인심도심설을 두고 논쟁하며 자신의 견해를 담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했다. 이는 기존 주자학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펼친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 《동몽수지(童蒙須知)》 등을 주석하는 등 꾸준히 학문적 성과를 쌓았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마침내 오랜 유배에서 풀려나 홍문관 교리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사간원 대사간, 부제학,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1573년(선조 6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는 좌의정에 올랐으며, 1585년에는 마침내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1588년 영의정에서 물러나 영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이듬해인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0년 한성 교외의 거처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후에 영의정으로 관작이 회복(추복)되었으며, 1591년(선조 24년)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노수신은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양명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이기도 했다. 저서로는 《시강록》(侍講錄), 《소재집》(蘇齋集) 등이 전해진다.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려 사후에는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과 봉산서원(鳳山書院),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등 여러 곳에 배향되었다.
2. 3. 을사사화와 유배 생활
인종 즉위 후 정언(正言)이 되어 이기를 비판하여 파직시키는 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545년 어린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정치 상황은 급변했다. 소윤(小尹)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원형이 이기와 손잡고 을사사화를 일으켰는데, 이때 노수신은 대윤(大尹)에 가담하여 사화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이조좌랑에서 파직되었다.1547년(명종 2)에는 순천으로 유배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양재역 벽서 사건이 터지면서 연루되어 형이 가중되었다. 결국 더 외딴 섬인 진도로 이배되어 무려 1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고된 귀양살이를 해야 했다. 1565년에는 유배지가 내륙인 괴산으로 옮겨졌다. 유배 기간 동안 노수신은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이황, 김인후 등 당대의 저명한 학자들과 서신을 통해 학문을 논했으며, 특히 이황과는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에 관한 논쟁을 벌이며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를 담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기도 했다. 또한 《대학장구(大學章句)》, 《동몽수지(童蒙須知)》와 같은 유학 서적에 주석을 다는 등 학문 연구를 이어갔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면서 마침내 기나긴 유배 생활을 마치고 풀려나 교리(校理)에 기용되어 조정에 복귀했다.
2. 4. 선조 시대의 활동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19년간의 긴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홍문관 교리(校理)에 기용되었다. 1568년 이후로는 사간원 대사간, 부제학, 이조 참판, 대사헌, 호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1573년(선조 6)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1578년에는 좌의정,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1588년 영의정에서 사임하고 영중추부사로 물러났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 정여립을 조정에 천거했던 일로 인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90년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한성 교외의 거처에서 사망하였다.
사후에는 영의정으로 관직이 회복(추복)되었으며, 1591년(선조 24) 종계변무가 성사되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광국원종공신 1등에 특별히 추서되었다. 그는 문장과 서예에도 뛰어났으며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기도 했다.
2. 5. 사망
1590년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한성 교외의 거처에서 사망하였다.3. 사상과 평가
노수신은 주자학이 사회의 중심 사상이었던 조선 중기에 양명학을 연구하고 불교 인사들과 교류하는 등 비교적 폭넓은 학문적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는 당시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3. 1. 주자학 비판과 양명학 수용
양명학을 연구하여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휴정, 선수 등과 교제하며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는데, 불교도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 역시 성리학자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3. 2. 불교와의 교류
서산대사이나 부휴선수 같은 불교 승려들과도 교류하며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1] 이러한 교류는 당시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4. 저서
- 《소재집》(蘇齋集)
5. 가족 관계
손자 : 노도형(盧道亨)
- * 후첩 : 측실
6. 기타
양명학을 연구하여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휴정, 선수 등과 교제하며 불교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는데, 불교 신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점 때문에 성리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참조
[1]
웹사이트
종가 25. 상주 소재 종가
http://www.kyongbuk.[...]
2023-02-11
[2]
서적
소재집
[3]
서적
창석집
[4]
서적
소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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