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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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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응규는 을미사변과 단발령에 반발하여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이다. 진주를 점령하고 부산 방면으로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해산되었다. 이후 대한제국 시기에는 고종을 보좌했으며, 러일 전쟁 이후 최익현의 의병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단식 끝에 옥사했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

노응규는 조선 말기의 의병장이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에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의병을 일으켰는데, 노응규도 1896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아 진주를 점령하고 진주의병진을 결성하였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김해까지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해산되었다.[1]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 피탈이 가시화되자,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1]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으나, 밀정에 의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2. 1. 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사변 시기 의병 활동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에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의병을 일으켰는데, 노응규도 1896년 경상남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은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진주의병진(총대장 노응규)을 결성하였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격하여 김해까지 점령하였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해산되었다.[1]

그러나 노응규 의병진 일부는 행패를 부려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매천 황현은 '1897년 초 노응규 등이 진주에서 웅거하면서 전 경내를 분탕하니, 주민들은 동학교도들의 행패를 만났다고 말했다. 안동 주변 수십 군에는 난폭한 겁탈이 있었으며 이중으로 경군까지 유린했는데 공사가 도탄에 빠졌다.'고 증언하였다.[1]

2. 2. 러일 전쟁 이후의 항일 투쟁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 피탈이 가시화되자,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1]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다시 거사를 준비하여 그해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3. 사후

1977년 대한민국 정부는 노응규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하였다.

4. 평가

(이전 출력이 없으므로,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와 함께 섹션 제목, 요약 등을 제공해주시면 위키텍스트 형식으로 작성해드리겠습니다.)

5. 관련 사료

(관련 사료 섹션은 별도로 작성할 내용이 없습니다. 하위 섹션에서 이미 충분히 다루고 있습니다.)

5. 1. 대한 광무(光武)1년(1897년) 상소문 대략과 황제의 비답

1895년 을미사변에 대한 울분과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킨 명분이 담긴 상소문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1]

  • "《춘추》의 의리에 따르면, 역적은 모든 사람이 죽여도 된다고 했습니다. 동탁과 안녹산을 친 것은 헌제나 명황의 명령 없이 한 일이지만, 《강목》에는 크게 기록되어 인정받았습니다. 이 의리로 볼 때, 비록 미천한 유생이라도 역적을 칠 수 있습니다. 을미년 8월의 변란은 우리나라 신하들이 만대를 두고 꼭 원수를 갚아야 하는 일입니다. 폐하께서는 자신의 몸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어찌 역적을 치고 복수할 수 있었겠습니까? 감사들은 역적의 앞잡이가 되어 그들을 섬기기에 바빴습니다. 11월에 머리를 깎는 화변은 천하를 오랑캐로 만들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짐승과 같은 처지에 몰아넣었습니다. 다행히 수도의 관리들이 역적을 치자고 제창하자, 각 고을의 유생들이 의를 위해 달려왔습니다. 신은 군신간의 의리와 중화와 오랑캐 간의 큰 법을 알고 있습니다. 역량도 헤아리지 않고 진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밀봉한 상소와 격문으로 선비와 백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서울로 올라가 폐하의 명령을 기다려 역적의 머리를 베고 죄를 청하려 했으나, 일이 잘못되어 군사들이 먼저 무너졌습니다. 아버지와 형은 변란에 억울하게 죽고, 어머니와 아내는 난리 중에 흩어졌습니다. 국모의 원수는 잠시도 살려둘 수 없지만, 군부의 명 또한 엄중합니다. 폐하의 명령 후 의병을 해산하고, 원한을 품고 나라에서 역적을 쳐서 복수하는 날을 바랐습니다."
  •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다 집안의 화를 당해, 폐하께 충성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효성하지 못한 것이 첫째 죄입니다. 군사들이 내려올 때 한 대의 화살도 쏘지 않았으나, 잡혀 처분을 기다리지 않고 도망친 것이 둘째 죄입니다. 아버지와 형의 시체를 거두지 못하고 상복도 입지 못해 자식의 의리를 상실한 것이 셋째 죄입니다. 옛날 임금과 부모의 원수를 갚는 사람들은 칼날, 끓는 물, 불속이라도 뛰어들었는데, 신은 구차하게 살아오면서 대책이나 꾀도 내놓지 못하고 보통 사람처럼 살아가니 이것이 넷째 죄입니다. 이처럼 네 가지 큰 죄가 있으나 아직 살아있으니, 나라의 법으로 처단하여 충성스럽지 못하고 효성스럽지 못한 사람들에게 경계가 된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이에 대한 고종의 비답은 다음과 같았다.[1]

  • "네가 자신의 죄를 잘 알고 있으니, 그것이 가상하다. 깨닫고 개진하는 것이 너의 도리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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