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시키노미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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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니시키노미하타(錦旗)는 일본에서 천황의 윤지를 받아 제작된 깃발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쇼군 일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며, 적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금기는 제작 과정과 역할, 사건 등을 거치며, 현대에는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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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키노미하타 | |
---|---|
개요 | |
![]() | |
종류 | 의장기 |
사용 시기 | 왕정복고 ~ 메이지 시대 |
소속 | 일본 제국 |
역할 | 신정부군의 상징 |
상세 정보 | |
디자인 | 금색의 태양, 달과 붉은 색 구름 |
의미 | 천황의 권위를 상징 |
역사적 중요성 | 보신 전쟁에서 신정부군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됨 |
제작 | 기타가키 구니미치가 고안 |
현재 | 도쿄 국립 박물관에 보관 |
2. 중세 시대의 금기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는 천황의 치벌 윤지가 있어야 금의 어기(錦の御旗)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 깃발 제작은 윤지를 받은 측, 예를 들어 무로마치 막부가 직접 담당해야 했다.[1]
2. 1. 금기의 형태와 의미
관군을 상징하는 깃발인 금의 어기는 처음부터 정해진 형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도안과 문구가 사용되었다.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오슈 전투에서 사용한 깃발에는 "이세 대신궁(伊勢大神宮)", "하치만 다이보사츠(八幡大菩薩)"라는 신호와 함께 비둘기 도안이 그려져 있었다고 『아즈마카가미』는 전한다. 고다이고 천황이 가사기 산에서 농성할 때에는 해와 달의 도안이 들어간 깃발을 사용했다고 『타헤이키』에 기록되어 있다. 무로마치 막부 초기에는 "이세 대신궁", "하치만 다이보사츠" 신호와 해 도안이 들어간 깃발이 사용되었다고 『바이쇼론』은 전한다.
이후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두 종류의 깃발이 사용되었다. 하나는 해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皇太神)" 신호가 들어간 금의 어기였고, 다른 하나는 아시카가 씨의 가문 문양인 두 개의 히키료(引両)와 "하치만 다이보사츠" 신호가 들어간 무가 어기(막부 깃발)였다.
금의 어기를 사용하려면 천황의 치벌 윤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실제 깃발은 윤지를 받은 측(예: 무로마치 막부)이 직접 제작해야 했다. 이 때문에 금의 어기의 크기나 깃대 길이는 무가 어기의 규격과 함께 무가의 고실(관례)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금의 어기를 내걸 수 있는 대장은 아시카가 씨를 칭할 수 있는 쇼군 일족으로 한정되었고, 무가 어기를 내걸 수 있는 대장은 아시카가 씨의 일문으로 제한되었다.[1]
3. 보신 전쟁과 금기
1868년 (게이오 4년) 정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사쓰마 번의 본영이었던 도지에 금기(錦旗)가 처음으로 게양되었다. 이 금기는 신정부군(관군)의 정당성을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도바・후시미 전투가 시작되자 조정은 정토대장군으로 임명된 닌나지노미야 요시아키 친왕에게 금기와 함께 절도(節刀, 천황이 장군에게 군대의 지휘권을 상징하며 하사하는 칼)를 내려주었다.
신정부(관군)의 상징인 금기의 등장은 아군의 사기를 크게 높이는 동시에, 조적(朝敵, 조정의 적)으로 규정된 구 막부 측 병사들에게는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다.
보신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금기와 각종 군기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육군성의 유슈칸(야스쿠니 신사 내 박물관)이나 궁내성 도서료 등에서 보존하게 되었다. 1888년 (메이지 21년)에는 일본 정부의 의뢰로, 조슈 번 출신의 화가 우키타 가세이가 당시 사용된 금기들을 연구하여 17종 34장의 그림으로 남겼으며, 이는 『보신 소용 금기 및 군기 진도』(戊辰所用錦旗及軍旗真図일본어)라는 제목의 4권짜리 화첩으로 정리되었다.
3. 1. 금기 제작 과정
1868년 (게이오 4년) 정월의 도바・후시미 전투에 앞서, 게이오 3년 10월 6일에 사쓰마 번의 오쿠보 도시미치와 조슈 번의 시나가와 야지로는 아타고 군 이와쿠라 촌에 위치한 나카미카도 쓰네유키의 별저에서 이와쿠라 도모미로부터 금기 제작을 위촉받았다. 금기의 디자인은 이와쿠라의 측근인 타마마쓰 미사오가 맡았다.제작 과정에서 오쿠보는 교토 시내에서 첩 오유를 통해 니시진에서 직물을 짜도록 지시하여 야마토 금과 홍백의 단자를 마련했다. 금기의 절반은 교토에 있는 사쓰마 번의 저택에서 만들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시나가와가 재료를 조슈 번으로 운반하여 완성했다.
금기 제작의 자세한 경위는 시나가와 야지로가 이와쿠라 도모미의 비서였던 야마모토 후쿠이치(마타카즈)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 알려졌다. 이 서간은 이와쿠라의 전기를 편찬하던 야마모토가 제작 경위를 문의하자 시나가와가 답장한 것으로, 1889년(메이지 22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당 서간의 원본은 교토부립 교토학・역사채색관에 기탁된 자료 중에서 발견되었으며, 2023년 12월 교토의 사학자 하라다 료코 씨가 이를 확인했다. 서간에는 금기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전해지는 붉은 천 조각도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2]。
3. 2. 금기의 역할과 영향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신정부(관군)의 상징인 금기(錦旗)가 등장한 것은 전투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금기의 존재는 신정부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하는 동시에, 적군으로 규정된 구 막부 측에는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다.당시 도사 번 출신으로 전투에 참여했던 다나카 미쓰아키 (후일 궁내대신 등을 역임)는 금의 어기(錦の御旗, 금기)가 나타나자마자 전선의 구 막부 병사들이 "이대로 가다가는 조적(朝敵, 조정의 적)이 되고 만다"며 공포에 질려 퇴각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당시 무사 계급이 조정에 적으로 찍히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조적에 대한 공포심은 금기가 효과적인 심리적 무기로 작용할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일각에서는 당시 무사들이 조적을 두려워했던 배경으로, 겐지모노가타리 등 고전 문학에서 나타나는 국화와 관련된 설화(국화에 씌운 비단 솜이 영원한 젊음을 준다는 이야기)가 여전히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과 연관 짓기도 한다. 즉, 천황과 조정의 상징물에 대한 신성함과 권위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4. 금기 관련 사건
니시키노미하타와 관련된 주요 사건으로는 1868년 고베 사건 중 발생한 '''금기 분실 사건'''과 오카와 슈메이가 계획에 참여한 10월 사건을 지칭하는 '''금기혁명 사건''' 등이 있다.
4. 1. 금기 분실 사건
고베 사건의 영향으로 1868년 1월 14일, 도사 번 소속 번사였던 모토야마 시게토가 도사 번으로 금의 어기를 운반하던 중 프랑스 병사에게 이를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금기는 나중에 다시 반환되었다.4. 2. 금기 혁명 사건
오카와 슈메이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항하여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금기혁명'''(|킨키카쿠메이일본어)"을 일으켜 일본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오카와 자신도 계획에 참여한 육군 장교에 의한 쿠데타 계획인 10월 사건을 "금기혁명 사건"이라고도 부른다.5. 현대적 의미와 전용
"금(錦)의 어기(御旗)"라는 말은 본래의 의미를 넘어, 현재는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나타내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5. 1. 대중문화 속 금기
일본 최초의 군가이자 행진곡으로도 불리는 가요 ''미야상 미야상''(1868년)에 '금의 어기'가 등장한다. 1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미야상 미야상, 말 앞에
펄럭이는 것은 무엇인가
토코톤 야레, 토코톤 야레나
저것은 조적을 정벌하라는
'''금의 어기''' 아니던가, 모르겠는가
토코톤 야레, 토코톤 야레나
이 노래는 시나가와 야지로가 작사하고 오무라 마스지로가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증거는 없다.[3]
참조
[1]
서적
室町幕府における錦御旗と武家御旗
思文閣出版
2014
[2]
뉴스
戊辰戦争『錦の御旗』 製作語る書簡
朝日新聞
2024-02-14
[3]
웹사이트
宮さん宮さん(作詞:品川弥二郎、作曲:大村益次郎)
https://ja.wikisourc[...]
[4]
서적
室町幕府における錦御旗と武家御旗
思文閣出版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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