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에이 (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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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에이(大映)는 1942년 일본에서 설립된 영화 제작사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화 산업 재편 과정에서 신코 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서가 합병되어 설립되었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기에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옥문》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작품들을 제작하며 전성기를 누렸다. 이후 경영 악화로 1971년 파산하였고, 1974년 도쿠마 쇼텐에 인수되어 영화 제작을 재개했으나, 2002년 가도카와 쇼텐에 매각되었다. 현재는 가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으며, 영화 외에도 애니메이션 제작 지원 및 관련 뉴스, 관련 인물에 대한 정보가 제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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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에이 (기업)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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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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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 주식회사 |
산업 | 영화 산업 |
전신 | 일본 영화 배급 주식회사 |
설립 | 1942년 |
해체 | 2002년 |
본사 위치 | 일본 |
핵심 인물 | 이누마 슌스케 (창립자) 나가타 마사이치 (창립자, 사장) 나가타 히데마사 (부사장) |
모회사 | 도쿠마 쇼텐 |
후신 | 카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 |
2. 역사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정부는 자원 활용을 합리화하고 영화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재편하려 했다.[1] 신코 키네마의 임원 나가타 마사이치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여 세 개의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대안을 추진했다.[1] 1942년 신코 키네마, 다이토 에이가, 닛카츠의 제작 부서가 합병하여 '''다이 니폰 에이가 세이사쿠 가부시키 가이샤'''(大日本映画製作株式会社), 줄여서 다이에이가 설립되었다.[1] 키쿠치 칸이 초대 사장을 맡았고, 나가타는 임원직을 수행했다. 다이에이의 스튜디오는 도쿄 조후와 교토 우즈마사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시 기업 통합이 시작되었고, 내각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영화 업계에서도 1942년(쇼와 17년), 신흥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문을 중심으로 합병이 이루어졌다. 나가타 마사카즈 등 9명이 발기인이 되어, 1942년 1월 27일에 '''다이일본영화제작 주식회사''' (대영)가 탄생하여, 쇼치쿠, 도호와의 3사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보국은 영화 업계를 쇼치쿠와 도호의 2사 체제로 재편하려 했지만, 신흥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 나가타 마사카즈가 "통제 회사"의 가능성을 어필하여 3사 체제를 인정받았다.
같은 해 반도 츠마사부로, 카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칸쥬로, 이치카와 우타에몬의 4대 스타 공동 출연작 『유신의 곡』 (감독 우시하라 키요히코)을 발표했다.
영화 업계가 3사 체제가 되면서, 6개의 촬영소가 대영의 산하가 되었다.
촬영소 이름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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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카츠 우즈마사 촬영소 (대영 교토 촬영소) | (변동 없음) |
닛카츠 타마가와 촬영소 (대영 도쿄 제2 촬영소, 후의 대영 도쿄 촬영소) | 현재의 카도카와 대영 촬영소 |
신흥키네마 교토 우즈마사 촬영소 (대영 제2 촬영소) | 전후의 도요코 영화 촬영소, 현재의 도에이 교토 촬영소 |
신흥키네마 교토 우즈마사 제2 촬영소 (대영 사가노 촬영소) | 곧 폐쇄 |
신흥키네마 오이즈미 촬영소 (대영 도쿄 제1 촬영소) | 곧 폐쇄, 전후의 타이센 스튜디오, 현재의 도에이 도쿄 촬영소 |
대도영화 촬영소 (과거의 천연색 활동 사진 스가모 촬영소) | 곧 폐쇄 |
국내 영화 배급이 "홍계"와 "백계"의 2계통으로 통합되면서 제작 편수가 감소했다. 교토의 대영 교토·대영 제2, 도쿄의 대영 도쿄 제2를 남기고, 사가노·대영 도쿄 제1·대도의 각 촬영소를 폐쇄했으며, 3곳의 스태프와 배우는 대영 교토·대영 제2·대영 도쿄 제2가 승계했다.
1943년(쇼와 18년), 초대 사장에 작가 키쿠치 칸을 내세웠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취임 후 다이에이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이 시기 다이에이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은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다.[6]
이러한 성과는 하세가와 카즈오,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 등 새로운 스타들을 발굴하고,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 외부 인재를 영입하여 가능했다.
다이에이는 영화 제작 외에도 다이에이 스타즈를 시작으로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어지는 프로 야구단을 운영했다.
점령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나가타 데이이치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다이에이의 사장으로 재직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해외에서 상영된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Jokyo)''(1960) 등도 제작했다.[6]
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영화 시리즈로 유명했다. 또한 ''소년 젯''(Shōnen Jet)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도 제작했다.
다이에이는 이치카와 라이조, 가츠 신타로, 하세가와 가즈오,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의 배우와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콘, 마스무라 야스조, 다나카 도쿠조,[7] 미스미 겐지[7] 등의 감독, 미야가와 가즈오, 모리타 후지로 등의 촬영 감독과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950년대에는 다이에이가 자체 프로 야구팀인 다이에이 스타즈를 소유했으며, 이 팀은 나중에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었다.
나가타 마사카즈는 사원들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화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많이 낳았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의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사건 |
---|---|
1947년 | 익찬운동 관여 문제로 GHQ에 의해 사임한 기쿠치 대신 나가타 마사카즈가 사장으로 승진, 가와구치 마쓰타로 전무 초빙. 나가타는 60세 정년제[12] 도입. |
1948년 | 나가타 공직 추방, 마나베 야치요 사장 취임 후 5월에 복귀, 마나베는 회장 취임. 3월 6일 전 사장 키쿠치 사망. 긴세이 스타즈 인수, 다이에이 스타즈 발족, 나가타 구단주 취임. 미마스 아이코 주연 어머니 시리즈 시작. 나가타의 발언에 분노한 시대극 스타들 다수 다이에이 탈퇴.[13] |
1951년 | 나가타 개인 소유 경주마 토키노 미노루 제18회 도쿄 유슌 우승 후 17일 뒤 파상풍으로 급사. 11월 "다이에이 창립 10주년" 기념 축전 거행. 9월, 라쇼몽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
1952년 | 미일 합작 영화 『언제까지나』 제작 결정. 3월, 라쇼몽 아카데미상 수상. |
1953년 | 우게츠 이야기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지옥문 개봉. 5사 협정 조인.[14] |
1954년 | 지옥문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산쇼 대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닛카츠의 스태프 빼가기로 많은 스태프 닛카츠 이적. 이치카와 라이조, 카츠 신타로 입사. |
1955년 | 토키노 미노루 모델 환상의 말 제작, 문부성 선정. |
1956년 | 카노 준코 뉴페이스 입사. |
1957년 | 다카하시 유니온즈 합병, 다이에이 유니온즈 발족, 나가타 오너 유지. "6사 협정서" 나가타 사장 조인. "다이에이 비스타 비전" 첫 작품 『지옥화』 공개. |
1958년 |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 다이마이 오리온즈 발족, 나가타 오너 유지(실질적인 역합병). 다이에이 텔레비전 제작실 설치, 텔레비전 영화 제작 착수. "다이에이 스코프" 도입. |
1959년 | 도호, 쇼치쿠, 분카 방송, 닛폰 방송과 함께 후지 TV 개국. |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했지만, 1971년 12월 파산했다.[8]
연도 | 사건 |
---|---|
1947년(쇼와 22년) | 익찬운동 관여 문제로 GHQ에 의해 사임한 키쿠치 대신 나가타 마사카즈가 사장으로 승진, 가와구치 마쓰타로 전무 초빙. 나가타는 60세 정년제[12] 도입. |
1948년(쇼와 23년) | 1월: 나가타 공직 추방, 마나베 야치요 사장 취임. 5월 나가타 사장 복귀, 마나베 회장 취임. |
3월 6일: 전 사장 키쿠치 사망. | |
긴세이 스타즈 인수, 다이에이 스타즈 발족, 나가타 구단주 취임. 미마스 아이코 주연 어머니 시리즈 시작. | |
나가타의 발언에 분노한 시대극 스타들 다수 다이에이 탈퇴.[13]. | |
스타들의 대량 이탈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하세가와 카즈오를 중역으로 영입,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를 스타로 키웠다.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도 출연. | |
1951년 (쇼와 26년) | 6월 3일: 나가타 소유 경주마 토키노 미노루 도쿄 유슌 우승. 17일 후 파상풍으로 급사. |
11월: "다이에이 창립 10주년" 기념 축전 거행. | |
9월: 『라쇼몽』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 |
1952년 (쇼와 27년) | 2월: 미일 합작 영화 『언제까지나』 제작 결정. |
3월: 『라쇼몽』 아카데미상 수상. | |
1953년 (쇼와 28년) | 『우게츠 이야기』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지옥문』 개봉. 5사 협정 조인.[14] |
1954년 (쇼와 29년) | 『지옥문』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산쇼 대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
닛카츠의 스태프 빼가기로 많은 스태프 닛카츠 이적. 이치카와 라이조, 카츠 신타로 입사. | |
1955년 (쇼와 30년) | 토키노 미노루 모델 『환상의 말』 제작, 문부성 선정. |
1956년 (쇼와 31년) | 카노 준코 뉴페이스 입사. |
1957년 (쇼와 32년) | 다카하시 유니온즈 합병, 다이에이 유니온즈 발족, 나가타 오너 유지. |
5월: "6사 협정서" 나가타 사장 조인. | |
6월: "다이에이 비스타 비전" 첫 작품 『지옥화』 공개. | |
1958년 (쇼와 33년) |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 다이마이 오리온즈 발족(실질적인 역합병), 나가타 오너 유지. 다이에이 텔레비전 제작실 설치, 텔레비전 영화 제작 착수. |
"다이에이 스코프" 도입. | |
도호, 쇼치쿠, 분카 방송, 닛폰 방송과 함께 후지 TV 개국. | |
대만 등 해외 합작 대작 『석가(釈迦)』, 『진・시황제(秦・始皇帝)』 제작, 이후 "대작 노선" 시작. 월트 디즈니 작품 일본 배급권 소유. | |
1961년 (쇼와 36년) | 스가와라 겐지(菅原謙二) 퇴사. 『악명』 시리즈 히트, 카츠 신타로(勝新太郎)와 타미야 지로(田宮二郎) 두각. |
의옥 사건(疑獄事件)・무슈 철도 오염 사건(武州鉄道汚職事件)에 연루, 증뢰 혐의 체포・수감, 불기소 처분. | |
1962년 (쇼와 37년) | 도쿄 스타디움(東京スタジアム) 건설. 라이조(雷蔵)가 나가타의 양녀와 결혼. 카츠 신타로, 나가타 중매로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緒)와 결혼. 카와구치 히로시(川口浩) 퇴사. |
1963년 (쇼와 38년) | 하세가와 카즈오 영화계 은퇴. 야마모토 후지코, 나가타에 의해 해고, 5사 협정으로 타사 출연 불가. |
카노 준코 건강 문제로 은퇴. | |
『대군수 네즈라(大群獣ネズラ)』 제작 중지. | |
1964년 (쇼와 39년) | 전국 영화관 수 5000관 밑. |
1965년 (쇼와 40년) | 『대괴수 가메라(大怪獣ガメラ)』 제작, 대히트. 『더 가드맨(ザ・ガードマン)』 대히트. |
1966년 (쇼와 41년) | 3월: 나가타, "일본 영화는 반드시 부흥한다" 발표. |
『대괴수 결투 가메라 대 바루곤(大怪獣決闘 ガメラ対バルゴン)』, 『대마신(大魔神)』 동시 상영. | |
1967년 (쇼와 42년) | 카츠 신타로, 카츠 프로(勝プロ) 설립. |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 『어떤 살인자(ある殺し屋)』 공개. 마루이 타로(丸井太郎) 가스 자살. | |
영화 사업 적자, 경영난 표면화. | |
1968년 (쇼와 43년) | 이치카와 라이조, 직장암 수술. |
타미야 지로, 나가타에 의해 해고, 5사 협정으로 타사 출연 불가. | |
스가타 미치코(姿美千子) 퇴사. | |
미네기시 토오루(峰岸徹) 입사. | |
1969년 (쇼와 44년) | 이치카와 라이조, 37세로 사망. |
관객 동원 수 하락, 나가타 위광 쇠퇴. |
토쿠마 쇼텐 인수 후, 회사는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 등 소수의 영화를 제작했다.
토쿠마 야스요시 사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카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가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002년 7월 도쿠마 서점은 가도카와 서점에 다이에이가 보유한 모든 영화와 그 배급권 및 비디오 제작권, 조후시의 다이에이 스튜디오(타마가와 촬영소)의 운영 등 모든 사업을 매각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가도카와의 영상 자회사 "주식회사 가도카와 다이에이 영화"가 설립되어 다이에이는 영업권과 직원의 전부를 여기에 이양하여, 60년의 역사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법인 자체는 2003년 1월에 해산, 2007년 4월에 청산 결료되어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2. 1. 설립 배경 (1942-1945)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정부는 자원 활용을 합리화하고 영화 매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영화 산업을 재편하려 했다.[1] 모든 영화 스튜디오를 두 개의 회사로 합병하려는 정부 계획에 반대하여, 신코 키네마의 임원 나가타 마사이치는 세 개의 스튜디오를 설립하는 대안을 강력히 추진했다.[1] 그의 노력으로 1942년 신코 키네마, 다이토 에이가, 닛카츠의 제작 부서(닛카츠 극장은 합병에 참여하지 않음)가 합병하여 '''다이 니폰 에이가 세이사쿠 가부시키 가이샤'''(大日本映画製作株式会社), 줄여서 다이에이가 설립되었다.[1] 키쿠치 칸이 초대 사장을 맡았고, 나가타는 임원직을 계속 수행했다. 다이에이의 스튜디오는 도쿄 조후와 교토 우즈마사에 있었다.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전시 통제의 일환으로 소규모 기업을 정리·통합하는 전시 기업 통합이 시작되었고, 내각 정보국의 지시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업계에서도 1942년(쇼와 17년), 신흥키네마, 대도영화, 닛카츠 제작 부문을 중심으로 합병이 이루어졌다. 나가타 마사카즈 (전무), 카와이 류사이 (전무), 마나베 야치요 (감사역), 하타노 케이조 (상무), 로쿠샤 오사무 (상무), 코모노 나오미 (상무), 요시오카 쥬자부로, 츠루타 손베이, 하야시 히로타카 (도쿄 요시모토)의 9명이 발기인이 되어, 1942년 1월 27일에 '''다이일본영화제작 주식회사''' (대영)가 탄생하여, 쇼치쿠, 도호와의 3사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보국의 당초 안에서는 영화 업계를 쇼치쿠와 도호의 2사 체제로 재편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신흥키네마 교토 촬영소 소장 나가타 마사카즈가 정부 측의 제3세력으로서 "통제 회사"의 가능성을 어필하여, 최종 안에서는 3사 체제로 하는 것을 인정받았다.
신흥키네마는 쇼치쿠 계열이었고, 사실상 쇼치쿠의 자회사였지만, 동사가 주도하여 기업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세상을 놀라게 했고, "신흥키네마에서 정보국 제5부에 돈이 움직인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퍼졌다. 진상은 불명하지만, 대영의 사사(社史)도 이 사실을 숨김없이 게재하고 있다.
같은 해 반도 츠마사부로, 카타오카 치에조, 아라시 칸쥬로, 이치카와 우타에몬의 4대 스타의 공동 출연을 내건 첫 작품 『유신의 곡』 (감독 우시하라 키요히코)을 발표하고, 영화 제작의 첫걸음을 내딛는다.
영화 업계가 3사 체제가 되면서, 6개의 촬영소가 대영의 산하가 되었다.
촬영소 이름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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닛카츠 우즈마사 촬영소 (대영 교토 촬영소) | (변동 없음) |
닛카츠 타마가와 촬영소 (대영 도쿄 제2 촬영소, 후의 대영 도쿄 촬영소) | 현재의 카도카와 대영 촬영소 |
신흥키네마 교토 우즈마사 촬영소 (대영 제2 촬영소) | 전후의 도요코 영화 촬영소, 현재의 도에이 교토 촬영소 |
신흥키네마 교토 우즈마사 제2 촬영소 (대영 사가노 촬영소) | 곧 폐쇄 |
신흥키네마 오이즈미 촬영소 (대영 도쿄 제1 촬영소) | 곧 폐쇄, 전후의 타이센 스튜디오, 현재의 도에이 도쿄 촬영소 |
대도영화 촬영소 (과거의 천연색 활동 사진 스가모 촬영소) | 곧 폐쇄 |
국내 영화의 배급 계통이 "홍계"와 "백계"의 2계통으로 통합되면서, 쇼치쿠와 도호와 배급 틀을 나누는 형태가 된 대영은 제작 편수의 감소를 불가피하게 되었다. 교토의 대영 교토·대영 제2, 도쿄의 대영 도쿄 제2를 남기고, 사가노·대영 도쿄 제1·대도의 각 촬영소를 폐쇄했으며, 3곳의 스태프와 배우는 대영 교토·대영 제2·대영 도쿄 제2가 승계했다.
1943년(쇼와 18년), 초대 사장에 작가 키쿠치 칸을 내세웠다. 당초의 사명 표기는, 대영 마크에 덮이는 듯이 구 사명이 세로 표기로 줌하면서 크레딧되었다.
2. 2. 황금기 (1940년대 후반 - 1960년대)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취임 후 다이에이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황금기를 맞았다. 이 시기 다이에이는 여러 국제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해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3]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은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5]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는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받았다.[6]
이러한 성과는 하세가와 카즈오를 중심으로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 등 새로운 스타들을 발굴하고,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 외부 인재를 영입하여 가능했다.
다이에이는 영화 제작 외에도 다이에이 스타즈를 시작으로 다이에이 유니온스를 거쳐 지바 롯데 마린스로 이어지는 프로 야구단을 운영했다.
2. 2. 1.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
점령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나가타 데이이치는 1947년부터 1971년까지 다이에이의 사장으로 재직했다.[2]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아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렸다.[3] 다이에이는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해외에서 상영된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 또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1953)와 ''산쇼 대부''(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Jokyo)''(1960) 등도 제작했다.[6]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죽음의 졸린 눈'')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성공적인 영화 시리즈로도 유명했다. 또한 ''소년 젯''(Shōnen Jet)과 같은 텔레비전 시리즈도 제작했다.
다이에이는 이치카와 라이조, 가츠 신타로, 하세가와 가즈오, 야마모토 후지코, 쿄 마치코, 와카오 아야코 등의 배우와 미조구치 겐지, 이치카와 콘, 마스무라 야스조, 다나카 도쿠조,[7] 미스미 겐지[7] 등의 감독, 미야가와 가즈오, 모리타 후지로 등의 촬영 감독과 같은 재능있는 인물들을 배출했다.
1950년대에는 다른 몇몇 일본 영화 스튜디오와 마찬가지로, 다이에이는 자체 프로 야구팀인 다이에이 스타즈를 소유했으며, 이 팀은 나중에 다이에이 유니온스가 되었다. 이 팀들은 결국 지바 롯데 마린스가 되었다.
나가타 마사카즈는 여러 회사를 통합하여 오너가 된 후, 사원들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화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많이 낳았다. 다이에이의 사풍은 닛카츠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노에 마츠노스케가 보수적인 교토에 가져온 자유로운 기풍이 하이카라한 전통을 낳았다. 다른 회사뿐만 아니라 동서 촬영소끼리도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배타적인 기풍도 남아 있었다. 기획 회의는 교토 작품도 반드시 도쿄 본사 4층 회의실에서 나가타 사장을 필두로 40명에 달하는 프로듀서 등이 모여, 최종 결정은 반드시 나가타가 내리는 체제를 갖추었다.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는 촬영 설비와 기재를 나가타의 독단으로 최신식으로 갖추었지만, 도산할 때까지 자체 현상소는 갖추지 않았다.
이러한 체제 하에서 다이에이는 한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직영 흥행관이 도호나 쇼치쿠에 비해 수가 훨씬 적어 흥행 수입에 큰 영향을 받았다. 영화 산업의 근대화와 쇠퇴가 진행되면서, 나가타의 전 시대적인 "카츠도우야"의 체질을 남긴 채 엉성한 회계 처리와 공사 혼동의 전형적인 원맨 경영은 다양한 폐해를 낳았고, 결국 다이에이의 파탄에 이르렀다.
나가타 마사이치 사장 시대의 주요 연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주요 사건 |
---|---|
1947년 | 익찬운동에 관여한 문제로 GHQ에 의해 사장 사임을 강요받은 기쿠치 대신 나가타 마사카즈가 사장으로 승진, 가와구치 마쓰타로 전무 초빙. 나가타는 60세 정년제[12] 도입. |
1948년 | 나가타 공직 추방, 마나베 야치요 사장 취임. 나가타는 5월에 복귀, 마나베는 회장 취임. 3월 6일 전 사장 키쿠치 사망. 프로 야구단 긴세이 스타즈 인수, 다이에이 스타즈 발족, 나가타 구단주 취임. 미마스 아이코 주연 어머니 시리즈 시작. 나가타의 발언에 분노한 시대극 스타들 다수 다이에이 탈퇴.[13] |
1951년 | 나가타 개인 소유 경주마 토키노 미노루 제18회 도쿄 유슌 우승. 토키노 미노루는 17일 후 파상풍으로 급사. 11월 "다이에이 창립 10주년" 기념 축전 거행. 9월, 라쇼몽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
1952년 | 미일 합작 영화 『언제까지나』 제작 결정. 3월, 라쇼몽 아카데미상 수상. |
1953년 | 우게츠 이야기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지옥문 개봉. 5사 협정 조인.[14] |
1954년 | 지옥문 칸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산쇼 대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닛카츠의 스태프 빼가기로 많은 스태프 닛카츠 이적. 이치카와 라이조, 카츠 신타로 입사. |
1955년 | 토키노 미노루 모델 환상의 말 제작, 문부성 선정. |
1956년 | 카노 준코 뉴페이스 입사. |
1957년 | 다카하시 유니온즈 합병, 다이에이 유니온즈 발족, 나가타 오너 유지. "6사 협정서" 나가타 사장 조인. "다이에이 비스타 비전" 첫 작품 『지옥화』 공개. |
1958년 |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 다이마이 오리온즈 발족, 나가타 오너 유지(실질적인 역합병). 다이에이 텔레비전 제작실 설치, 텔레비전 영화 제작 착수. "다이에이 스코프" 도입. |
1959년 | 도호, 쇼치쿠, 분카 방송, 닛폰 방송과 함께 후지 TV 개국. |
2. 3. 경영 악화와 파산 (1970년대)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고통받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하여 생존을 시도했지만, 결국 1971년 12월 파산했다.[8]수 개 회사를 통합하여 오너가 된 나가타 마사카즈는 사원을 모두 연고 채용으로 채우는 회사 조직을 만들면서, 자신의 카리스마를 높이고 조직을 강고하게 만들었지만, 조직 내에 근친상간적인 갈등을 다수 낳았다.
사풍은 닛카츠의 전통을 계승하여, 오노에 마츠노스케가 보수적인 교토의 토양에 가져온 자유로운 기풍이 하이카라한 전통을 낳았다. 타사 간뿐만 아니라, 동서 촬영소끼리도 라이벌 의식을 가지는 배타적인 기풍도 남았다. 기획 회의는, 교토 작품도 반드시 도쿄 본사 4층 회의실에 나가타 사장을 필두로 40명에 달하는 프로듀서 등이 모여, 최종 결정은 반드시 나가타가 내리는 체제를 갖추었다. 도쿄와 교토의 촬영소는, 촬영 설비도 기재도 나가타의 독단으로 최신예의 것이 갖춰졌지만, 도산할 때까지 자사 현상소는 갖지 않았다.
이 체제 하에서 다이에이는 한때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직영 흥행관이 도호나 쇼치쿠에 비해 수적으로 훨씬 열세여서, 흥행 수입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영화 산업의 근대화·쇠퇴가 진행됨에 따라, 나가타의 전 시대적인 "카츠도우야"의 체질을 남긴 채의 엉성한 회계 처리와, 공사 혼동한 전형적인 원맨 경영은 다양한 폐해를 낳아, 최종적으로 다이에이의 파탄에 이르렀다.
연도 | 사건 |
---|---|
1947년(쇼와 22년) | 키쿠치는 전시 중의 익찬운동에 관여한 문제로 GHQ에 의해 공직 추방 대상자로 지정되어 사장 사임을 강요받자, 부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카즈가 사장으로 승진하고, 인기 작가 가와구치 마쓰타로가 전무로 초빙된다. 나가타는 타 회사에서는 보기 드문 60세 정년제[12] 를 독단적으로 도입 결정했다. |
1948년(쇼와 23년) | 1월: 나가타가 공직 추방당하면서 이사였던 마나베 야치요가 사장으로 취임한다. 나가타는 5월에 지정 해제되어 사장으로 복귀하고, 마나베는 회장이 된다. |
3월 6일: 전 사장 키쿠치가 공직 추방된 채 사망했다. | |
프로 야구단 긴세이 스타즈를 인수하여 다이에이 스타즈가 발족하고, 나가타가 구단주가 된다. 미마스 아이코 주연의 어머니 시리즈가 시작되어 10년간 이어진 대히트 시리즈가 된다. | |
현대극의 호조에 힘입어 "낡아빠진 시대극 스타는 이제 우리에겐 필요 없다"라고 발언한 나가타에게, 설립 초기부터의 4대 시대극 스타들이 분노하여 다이에이를 탈퇴하고, 다른 스타·배우·스태프들도 다수가 다이에이를 떠났다. 특히 교토 측은 제2 촬영소에 위탁된 도요코 영화로 많이 이동했다[13]. | |
전속 스타들의 대량 이탈로 생긴 공백을 메우기 위해, 베테랑 하세가와 카즈오를 중역으로 영입하여 그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뉴페이스와 다른 곳에서 온 인재를 아낌없이 투입하여, 후에 3대 여배우라고 불리는 쿄 마치코, 야마모토 후지코, 와카오 아야코, 이치카와 라이조를 일본 영화사에 남을 스타로 키워냈다. 타사 전속이나 프리랜서였던 타카미네 히데코, 츠루타 코지, 키시 케이코 등도 출연하여, 명작을 다수 제작했다. | |
1951년 (쇼와 26년) | 6월 3일: 나가타가 개인 소유했던 경주마 토키노 미노루가 10전 10승으로 제18회 도쿄 유슌에서 우승했다. 나가타는 더비마 오너가 되었다. 말 이름 "토키노"는 초대 사장 키쿠치 칸이 소유마에게 붙이던 관명이었다. 토키노 미노루는 17일 후에 파상풍으로 급사했다. |
11월: "다이에이 창립 10주년" 기념 축전을 거행했다. | |
9월: 일본에서는 전년에 개봉한 『라쇼몽』(감독・구로사와 아키라)이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 |
1952년 (쇼와 27년) | 2월: 미일 합작 영화 『언제까지나』 제작을 결정. |
3월: 『라쇼몽』이 아카데미상을 수상. | |
1953년 (쇼와 28년) | 『우게츠 이야기』(감독・미조구치 겐지)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라쇼몽』의 국제적인 성공을 본 나가타가, 사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제작한 『지옥문』(감독・이누에 사다요스케)이 개봉되었다. 한편, 이 해에 5사 협정이 조인되어, 이후, 감독이나 배우의 전속화가 진행되어 타사 출연은 어려워졌다[14]。 |
1954년 (쇼와 29년) | 『지옥문』이 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같은 해의 『산쇼 대부』(감독・미조구치 겐지)도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
하지만 이 무렵, 영화 제작을 재개한 닛카츠가 다이에이의 스태프를 다수 빼가면서, 많은 스태프가 닛카츠로 이적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이에이는 닛카츠의 제작 부문이 합병되었던 경위가 있어, 이적한 스태프의 대부분은 복귀였다. 이 해, 가부키 세계를 떠난 이치카와 라이조와 나가우타샤미센의 키네야 쇼토지의 차남인 카츠 신타로가 입사했다. | |
1955년 (쇼와 30년) | 앞서 언급한 토키노 미노루를 모델로 하여, 『환상의 말』(감독・시마 코지)을 제작하여 문부성 선정 영화가 되었다. |
1956년 (쇼와 31년) | 1954년도 미스 시세이도였던 카노 준코가 뉴페이스로 입사하여, 1957년에 데뷔했다. |
1957년 (쇼와 32년) | 다이에이 스타즈가 다카하시 유니온즈를 합병하여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발족되어 나가타가 오너로 남았다. |
5월: 스타 빼내기 방지를 위한 "6사 협정서"에 나가타 사장이 조인했다. | |
6월: "다이에이 비스타 비전" 첫 작품 『지옥화』를 공개했다. | |
1958년 (쇼와 33년) | 다이에이 유니온즈가 마이니치 오리온즈와 합병하여 다이마이 오리온즈가 발족했지만, 존속된 계보는 마이니치 측이었지만, 조직 운영을 다이에이 측이 장악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역합병이었으므로, 나가타가 오너로 남았다. 사내에 다이에이 텔레비전 제작실을 설치하여, 텔레비전 영화의 제작에 착수했다. |
"다이에이 스코프"를 도입하여, 크레딧 표기가 "구름 끝에서 태양의 빛이 쏟아진다"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흑백, 컬러 공통으로 말기까지 사용되었다. | |
나가타는 도호, 쇼치쿠, 분카 방송, 닛폰 방송과 함께 후지 TV를 개국했다. | |
대만 등 해외와의 합작으로 대작을 제작하고, 70mm 특수 촬영 영화 『석가(釈迦)』, 『진・시황제(秦・始皇帝)』를 제작하여, 이들의 성공을 계기로 이후의 "대작 노선"이 시작되었다. 이때는 월트 디즈니 작품의 일본 배급권을 가지고 있었다. | |
1961년 (쇼와 36년) | 현대극의 톱스타 스가와라 겐지(菅原謙二)가 퇴사했다. 『악명』 시리즈의 히트로, 카츠 신타로(勝新太郎)와 타미야 지로(田宮二郎)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
같은 해, 정계에서 의옥 사건(疑獄事件)・무슈 철도 오염 사건(武州鉄道汚職事件)이 발각되어, 나가타는 문제가 된 도내에서 지치부(秩父)에 이르는 "무슈 철도"라는 신선 건설 계획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렸기 때문에 연루되어, 증뢰 혐의로 체포・수감되었지만, 불기소 처분되었다. | |
1962년 (쇼와 37년) | 도쿄도 아라카와구 미나미센주에 프로 야구 전용 구장・도쿄 스타디움(東京スタジアム) (도쿄 구장)을 건설한다. 라이조(雷蔵)가 나가타의 양녀와 결혼, 나가타와 라이조는 사실상의 인척 관계가 된다. 카츠 신타로도 3월 5일에 나가타의 중매로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緒)와 결혼했다. 한편, 현대극에서 활약하던 인기 젊은 스타 카와구치 히로시(川口浩) (카와구치 마츠타로의 장남)가 퇴사했다. |
1963년 (쇼와 38년) | 전후 다이에이 영화의 대들보였던 하세가와 카즈오가 영화계에서 은퇴. 간판 여배우 야마모토 후지코가 타사 영화 출연 허가와, 이전 체결한 출연 편수를 줄여달라는 약속을 지켜줄 것을 요청했지만, 나가타는 이에 분노하여 야마모토를 일방적으로 해고하고, 5사 협정을 방패 삼아 타사의 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시키지 않았다. |
같은 해, 인기가 상승 중이던 카노 준코가 건강 문제로, 7월 13일 공개된 『풍속 75미터(風速七十五米)』를 마지막으로 27세에 돌연 은퇴했다. 간판 스타를 잇따라 잃은 다이에이의 영화관은, 빈자리가 눈에 띄게 되었다. | |
도호의 『고질라(ゴジラ)』에 대항하여 『대군수 네즈라(大群獣ネズラ)』를 기획, 가을에 촬영을 시작했지만 위생 문제 등으로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여 제작은 중지되었다. | |
1964년 (쇼와 39년) | 전국의 영화관 수가 5000관을 밑돌았다. 타사에 비해 직영관이 적은 다이에이는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다이에이의 제작 원가는 "6000만 엔으로 끝나면 흑자"라는 중견 수준이었다. |
1965년 (쇼와 40년) | 앞서 언급한 『대군수 네즈라』를 대체하는 특수 촬영 기획으로 도쿄 촬영소에서 『대괴수 가메라(大怪獣ガメラ)』를 제작, 대히트작이 되어 다이에이의 특수 촬영 기술의 높이를 안팎으로 알렸다. 아이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객층은, 도산 시까지 안정적인 동원 수를 유지하며, 말기의 다이에이를 지탱하는 몇 안 되는 기둥 중 하나가 되었다. 텔레비전실에서는 『더 가드맨(ザ・ガードマン)』을 시작하여, 대히트를 기록하고 다이에이 텔레비전실의 명성을 높였다. |
1966년 (쇼와 41년) | 3월: 나가타는 "일본 영화는 반드시 부흥한다"라는 문구를 언론에 발표했다. |
같은 해, 도쿄 촬영소 제작의 『대괴수 결투 가메라 대 바루곤(大怪獣決闘 ガメラ対バルゴン)』과, 교토 촬영소 제작의 『대마신(大魔神)』의 2편 동시 상영을 했다. 특수 촬영 작품의 자사 2편 동시 상영은, 국내 특수 촬영 영화의 프론티어이면서 특수 촬영을 담당할 수 있는 감독이 츠부라야 에이지(円谷英二) 1명뿐이었던 도호에서는 실현할 수 없었던 전대미문의 쾌거로 화제가 되었다. | |
1967년 (쇼와 42년) | 이시하라 프로(石原プロ)・미후네 프로(三船プロ) 등 스타에 의한 독립 제작 프로덕션에 자극받은 두 간판 스타 중 한 명인 카츠 신타로가, 카츠 프로(勝プロ)를 설립하여 독립한다. |
4월: 두 간판 스타 중 다른 한 명인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본격적인 일본식 하드보일드 걸작 『어떤 살인자(ある殺し屋)』가 공개된다. 그러나, 그해 9월에 전속 배우인 마루이 타로(丸井太郎)가 가스 자살했다. 원래 단역 배우(大部屋俳優)였던 마루이는 텔레비전실 제작의 『뻔뻔한 녀석(図々しい奴)』의 히트로 안방극장의 인기인이 되었지만, 그것을 본 나가타에 의해 5사 협정을 방패 삼아 억지로 영화계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 후의 감금과 같은 취급에 절망한 것이라고 한다. | |
같은 달, 영화 사업의 적자에 기인하는 거액의 부채와 경영난이 표면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나가타 체제는 파국으로 서서히 향하기 시작한다. | |
1968년 (쇼와 43년) | 이치카와 라이조가 『세키노 야탓페(関の弥太っぺ)』 촬영 기간 중 6월 11일에 장 출혈을 일으켜 입원, 직장암이 판명되어 수술을 받았다. 라이조는 당시, 다이에이의 "의지할 곳"이라고까지 불렸으며, 경영적 위기에 처한 회사와 장인인 나가타를 위해 요양을 중단하고 현장에 복귀해야 했고, 연내에 1969년 1월 공개 예정인 『네무리기요시로 악녀 사냥(眠狂四郎悪女狩り)』를 촬영했지만, 쇠약해진 몸으로 액션 연기를 할 수 없어 대역을 세우는 상태였다. |
6월 29일: 아리요시 사와코(有吉佐和子) 원작의 영화 『불신의 때(不信のとき)』를 공개한다. 주연을 맡은 타미야 지로가 배역의 서열이 4번째인 것에 항의하자, 나가타는 격노하여 타미야를 일방적으로 해고하고 5사 협정을 방패 삼아 타사 제작의 영화・텔레비전 드라마에 출연할 수 없게 한다. 야마모토 후지코, 마루이 타로에 이은 본 건으로, 5사 협정의 존재와 폐해가 언론에 크게 다루어졌다. 나가타는, 스스로 만들어 일본 영화의 황금 시대를 지탱한 "스타 시스템"과, 그 근저를 지탱한 5사 협정의 붕괴를 스스로 초래했다. | |
같은 해, 인기 젊은 여배우 스가타 미치코(姿美千子)도 퇴사했다. | |
1968년에는 젊은 배우인 미네 켄지 개명 미네기시 토오루(峰岸徹)가 입사하여 『강도관 파문장(講道館破門状)』에 등장하는 밝은 화제도 있었고, 나가타는 타미야를 대신할 간판 스타 후보로 큰 기대를 걸었지만, 말기의 다이에이가 처한 환경은 스타 후보로서 미네기시가 양 어깨로 짊어지기에는 가혹했다. | |
1969년 (쇼와 44년) | 연초부터 입원 중이던 라이조가 7월 17일에 37세로 사망했다. 전년 말에 고통을 참으며 촬영을 마친 2월 공개작 『도박사 일대 혈제부동(博徒一代 血祭り不動)』이 유작이 된다. |
간판 스타를 잇따라 잃고, 신인 스타와 젊은 스태프도 육성하지 못하며, 카츠 프로덕션과 공동 제작의 『자토이치』 시리즈도 기세가 없고, 텔레비전 업계의 흥융에 밀려 영화 산업 전체는 쇠퇴하고 있으며, 다이에이는 관객 동원 수도 심각한 하락세를 보인다. 연예계에서 나가타의 위광도 쇠퇴하여, 후에 곤경을 극복하고 저명한 탤런트가 된 타미야와 마주쳤을 때, 타미야에게 호통을 듣고 굴욕적인 응대를 받았다. |
2. 4. 도쿠마 쇼텐 인수와 부활 시도 (1974-2002)
나가타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 생존을 시도했지만 1971년 12월 결국 파산했다. 미술 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를 비롯한 스튜디오 직원들은 ''에이조 교토 프로덕션''을 설립했다.[8] 그러나 노조의 다른 구성원들은 출판사 토쿠마 쇼텐의 사장 토쿠마 야스요시를 설득,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이후 회사는 제작사로서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 등 소수의 영화만을 제작했다.토쿠마 야스요시 사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가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가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 5. 카도카와 쇼텐에 매각 (2002-현재)
나가타 히로시의 방탕과 업계 전반의 관람객 감소로 어려움을 겪던 다이에이는 닛카쓰와 협력하여 다이니치 에이하이를 설립했지만, 결국 1971년 12월 파산했다. 미술 감독 니시오카 요시노부와 스튜디오의 다른 직원들은 '에이조 교토 프로덕션'을 설립했다.[8] 그러나 노조의 다른 구성원들은 출판사 도쿠마 서점의 사장인 도쿠마 야스요시를 설득하여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회사는 제작사로서 소수의 영화만 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국제 합작 영화인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와 같은 예술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회로'' 또는 미이케 다카시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였다.도쿠마 야스요시가 사망한 후, 다이에이 영화는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되었다. 2002년 11월, 카도카와 마이히코 회장은 다이에이 영화가 회사의 영화 부문인 카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하여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한다고 발표했다.[9] 2004년에는 다이에이(Daiei)라는 이름을 버리고 현재는 카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다.
2002년 7월 도쿠마 서점은 가도카와 서점에 다이에이가 보유한 모든 영화와 그 배급권 및 비디오 제작권, 조후시의 다이에이 스튜디오(타마가와 촬영소)의 운영 등 모든 사업을 매각하는 데 합의했다.
같은 해 11월, 가도카와의 영상 자회사 "주식회사 가도카와 다이에이 영화"가 설립되어 다이에이는 영업권과 직원의 전부를 여기에 이양하여, 60년의 역사에 사실상 막을 내렸다. 법인 자체는 2003년 1월에 해산, 2007년 4월에 청산 결료되어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3. 주요 작품
다이에이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주요 작품은 다음과 같다.
종류 | 작품명 | 비고 |
---|---|---|
영화 | 조용한 결투 | |
영화 | 라쇼몽 |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
영화 | 우게쓰 이야기 | |
영화 | 지옥문 |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
영화 | 산쇼다유 | |
영화 | 스페이스피플 어피어 인 도쿄 | |
영화 | 들불 | |
영화 | 자토이치 시리즈 | 자토이치 (1962), 자토이치 2, 자토이치 3 - 신 자토이치, 자토이치 - 흉악한 형상의 나그네 등 |
영화 | 가메라 시리즈 | 가메라 2 - 가메라 대 바루곤, 가메라 3 - 가메라 대 가오스, 가메라 4 - 가메라 대 우주괴물 비라스, 가메라 5 - 가메라 대 지론, 가메라 6 - 가메라 대 자이거, 가메라 7 - 가메라 대 심해 괴물 지그라, 우주괴수 가메라 등 |
영화 | 다이마진 | |
영화 | 눈먼 짐승 | |
영화 | 자토이치와 요짐보 | |
영화 | 돈황 | |
영화 | 으랏차차 스모부 | |
영화 | 마다다요 | |
영화 | 가메라: 대괴수 공중 결전 | |
영화 | 쉘 위 댄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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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회로 (영화) | |
애니메이션 | 라 블루 걸 EX | |
애니메이션 |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
3. 1. 영화
다이에이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1950)을 제작하여 베니스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일본 영화 최초로 국제적인 상을 받았다.[3] 또한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의 지옥문(1953)을 제작하여 최초의 일본 컬러 영화로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5]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쓰 이야기(1953)와 산쇼다유(1954), 제10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여자의 유언(1960)도 다이에이에서 제작한 유명한 영화이다.[6]
대중적인 측면에서 다이에이는 가츠 신타로 주연의 자토이치 시리즈, 이치카와 라이조 주연의 네무리 쿄시로 시리즈, 오리지널 가메라 시리즈, 대마신 3부작, 요괴 대전쟁 3부작과 같은 성공적인 영화 시리즈로도 유명했다.
1971년 12월, 다이에이는 파산했지만, 도쿠마 쇼텐의 사장인 도쿠마 야스요시의 도움으로 1974년에 회사를 부활시켰다.[1] 이후 고(1982), 새로운 가메라 3부작(1995, 1996, 1999), 쉘 위 댄스?(1996),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회로,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데드 오어 얼라이브'' 시리즈와 같은 영화를 제작했다.
카도카와 쇼텐 출판사에 매각된 후, 2002년 11월 다이에이 영화는 회사의 영화 부문인 카도카와 다이에이 스튜디오와 합병하여 카도카와-다이에이 영화 주식회사를 설립했다.[9] 2004년에는 다이에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현재는 카도카와 픽처스로 알려져 있다.
3. 2. 애니메이션
다이에이가 제작에 참여한 애니메이션 작품은 다음과 같다.- 라 블루 걸 EX
- 마법사에게 소중한 것
- ''개그 형사''
- OVA(1989)
- ''라 블루 걸''(1989–1992)
- ''다크 미스''(1990)
- ''다크 워리어''(1991)
- ''마큐 센조 2''(1991)
- ''라 블루 걸 EX''(1994)
- ''호카고의 사무실''(1994)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1994)
- ''트윈 돌스''(1994)
- ''비너스 5''(1994)
- ''레슨 XX''(1995)
- ''트윈 엔젤스''(1995)
- ''코테츠의 모험''(1996–1997)
- ''퓨어 러브''(1998–1999)
- ''테라 스토리''(1998)
- ''썸데이즈 드리머즈''(2003)
4. 다이에이 뉴스
1962년까지 다이에이 작품의 예고편을 공개한 단편 필름으로, 900편 이상이 제작되었다.
주요 작품 |
---|
5. 관련 인물
분류 | 이름 | 설명 |
---|---|---|
경영진 | 나가타 마사카즈 | 다이에이 사장, 다이에이 스타즈 구단주 역임. 점령 당국에 의해 숙청당한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1971년까지 사장직을 유지.[2]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1950)을 제작,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하며 일본 영화를 세계에 알림.[3] |
감독 | 미조구치 겐지 | 우게츠 이야기(1953), 산쇼 대부(1954) 등 감독. |
이치카와 콘 | ||
마스무라 야스조 | ||
다나카 도쿠조[7] | ||
미스미 겐지[7] | ||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 지옥문(1953) 감독. 아카데미 국제장편영화상[4]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5] | |
배우 | 이치카와 라이조 | 네무리 쿄시로 시리즈 주연. |
가츠 신타로 | 자토이치 시리즈 주연. | |
하세가와 가즈오 | ||
야마모토 후지코 | ||
쿄 마치코 | ||
와카오 아야코 | ||
촬영 감독 | 미야가와 가즈오 | |
모리타 후지로 |
6. 한국과의 관계
다이에이는 여러 일본 영화를 제작, 배급하였으며, 이 중에는 한국과 관련된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금환식, 너는 분노의 강을 건너라 등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Daiei: A History of the Greater Japan Motion Picture Company
http://www.historyvo[...]
2017-11-19
[2]
웹사이트
Nagata Masaichi
http://www.jabira.ne[...]
Jabira
2011-12-29
[3]
뉴스
Master director dies
http://news.bbc.co.u[...]
1998-09-06
[4]
간행물
1954: Best Foreign-Language Film
http://www.britannic[...]
Britannica
2011-12-29
[5]
웹사이트
Awards 1954
http://www.festival-[...]
Festival de Cannes
2011-12-29
[6]
웹사이트
IMDB.com: Awards for Jokyo
https://www.imdb.com[...]
2011-12-29
[7]
웹사이트
大映の黄金期を支えた映画監督、死去
https://imidas.jp/ho[...]
imidas Shueisha
2021-11-27
[8]
웹사이트
太秦支えた最後の活動屋、西岡善信美術監督逝く
https://www.nikkei.c[...]
Nikkei
2019-10-23
[9]
웹사이트
Kadokawa Company History 2002(H14)
http://www.kadokawa-[...]
2011-12-30
[10]
서적
『ガメラを創った男 評伝 映画監督・湯浅憲明』
アスペクト (企業)
[11]
서적
『タウンムック増刊 大映特撮コレクション 大魔神』
徳間書店
[12]
문서
他の映画会社は「55歳定年制」である。
[13]
서적
『聞書アラカン一代 - 鞍馬天狗のおじさんは』
白川書院
[14]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15]
웹사이트
波瀾と浪漫の球団。マリーンズの前身、オリオンズ
https://column.sp.ba[...]
週刊ベースボール(2018年5月27日作成)
2020-01-20
[16]
논문
映画界の動き 大映第1回債権者集会
キネマ旬報社
[17]
서적
日本映画発達史5 映像時代の到来
中央公論社
[18]
웹사이트
平成19年(ワ)第11535号著作権侵害差止請求事件
https://web.archive.[...]
裁判所
[19]
뉴스
『日経産業新聞』1977年9月16日付け
日経産業新聞
1977-09-16
[20]
서적
『映画館のある風景 昭和30年代盛り場風土記・関東編』
キネマ旬報社
[21]
문서
単独配給は5月まで。6月からは、ダイニチが大映と日活の2社製作作品の配給を開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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