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나카 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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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케나카 로는 일본의 르포라이터, 평론가, 작가이다. 1928년 도쿄에서 태어나, 노동 운동에 참여하고 공산당에 입당하는 등 초기에는 사회 운동가로 활동했다. 이후 르포라이터로 전향하여 사회 비판적인 글을 썼으며, 1960년대에는 일본공산당과 갈등을 겪고, 아시아 각지에서 세계 혁명을 지향했다. 부락 해방 동맹과의 갈등, 빈민 혁명론 주장, 영화 제작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으며, 만년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도 했다. 1991년 간암으로 사망했으며, 유작으로 『백괴, 내가 내장에 들어가다 다케나카 에이타로 작품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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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나카 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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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다케나카 쓰토무 |
출생 | 1930년 5월 30일 |
출생지 | 일본 도쿄도도쿄시우시고메구(현재 도쿄도신주쿠구) |
사망 | 1991년 5월 19일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도지요다구 |
국적 | 일본 |
직업 | 르포 작가 아나키스트 요로즈 평론가 |
활동 기간 | 1959년 - 1991년 |
장르 | 해당 사항 없음 |
주제 | 연예 정치 |
사상 | 해당 사항 없음 |
주요 작품 | 해당 사항 없음 |
수상 | 일본 추리 작가 협회상(1991년) |
데뷔 작품 | 단지 일곱 개의 대죄 |
2. 생애
1952년 고후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일본공산당에서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다.[4] 1953년 석방된 후에는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4] 1959년 "르포라이터"를 자칭하며 『여성자신』의 라이터가 되었다.[4] 1961년 당의 내부 변혁을 도모하여 일본공산당에 복당했다.[4]
1964년 지바현 후나바시시의 다카네다이 단지에 거주하며 단지 자치회 회장도 역임했다.[4] 12월 30일, 데뷔작 『단지 일곱 가지 대죄 근대 주택의 꿈과 현실』을 출판했다.[4]
1967년 영화 『기온 축제』 제작을 둘러싸고 일본공산당 교토부 위원회와 대립하여 당에서 제명되었다.[5] 1969년 미군 통치 하의 오키나와에 처음 건너가 류큐 독립당을 지원하고, 많은 섬 노래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이벤트 구성을 했다.[4]
1975년 8월, 신주쿠 코마 극장에서 열린 '논스톱 24시간' 이벤트에서 타이완, 오키나와, 한국 사람들의 전쟁 고발 발언에 호응하여 하마다 코이치와 나카야마 마사테루에게 '배지 아저씨, 부끄럽지 않습니까'라고 야유를 보냈다. 이에 하마다는 '전혀 부끄럽지 않다. 군벌과 자민당은 관계없다! 배지를 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말한 놈, 나와라, 네 놈'이라고 반박했다. 다케나카는 '너라고 불릴 기억은 없다'라고 응수하며 '이봐, 하마코, 할 거야!'라고 하마다에게 다가갔고, 사회자가 제지하여 무사히 끝냈다.[8]
'주간 요미우리'에 게재된 '대단한 사람을 벤다' 코너에서 사토 히로코(사토 에이사쿠 부인)를 '서민 흉내를 내는 고양이 쓰다듬는 목소리의 권세욕 부인'이라고 조롱했다. 사토 측에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하자 '주간 요미우리' 편집부는 1970년 9월 일방적으로 연재를 중단했다. 격노한 다케나카는 사토 히로코 및 무타이 미쓰오 요미우리 신문 사장(당시)을 상대로 500만 엔과 사죄문 게재를 요구하는 소송을 도쿄 지방 법원에 제기했다. 8년 후 요미우리 측이 사죄문(공표하지 않는 조건)과 위자료 지불에 응하여 화해가 성립되었다.[9]
1984년부터 유엔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 임명된 구로야나기 테츠코가 빈부 격차가 심했던 아프리카에 위문 방문했을 때 호화롭게 차려입고 현지에 간 것을 보고 '자선 행위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 엉뚱하기 짝이 없다'라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후에도 다케나카는 구로야나기가 아프리카에 갈 때마다 여러 번 비판했다.
평론가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하여 만년에는 '만사 평판가'라고 자칭했다. 만년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미야케 유지의 멋진 밴드 천국'의 게스트 심사위원을 맡았지만, 출연 밴드 중 타마를 높이 평가하여 밀착 인터뷰를 거듭하여 '「타마」의 책'을 상재했다. 'EX 텔레비전'에 출연했을 때는 '타마는 현대의 비틀즈다'라고 말했다.
1990년 여름, 'EX 텔레비전'의 실험 기획 '저속의 한계'에 출연하여 사회자 시마다 신스케와 가미오카 류타로와 대담을 했다. 3명은 소파에 앉아 각자의 등받이 부분에는 3명의 전라 여성이 앉아 있어 '어깨차기'의 요령으로 머리로 여성의 은부를 가리고 '머리를 전혀 움직일 수 없다'는 설정의 대담이었다.
'소문의 진상'에 익명 작가 '오츠키 엔'의 포르노 소설 삽화로 황족의 합성 포르노 사진이 게재된 '황실 포르노 사건' 때 오츠키의 정체는 다케나카 로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지만, 다케나카의 서생이었던 미야기 겐슈는 다케나카 설을 부정하고 있다.[10]
2. 1. 초기 생애 (1928~1947)
1928년 도쿄시 우시고메구 사카나초(현 도쿄도 신주쿠구 가구라자카 5초메)에서 화가인 다케나카 에이타로와 야에코(구 성: 이즈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재 후 부활한 호적에는 1930년 5월 30일 출생으로 되어 있지만[4], 구제 중학교 재적부에는 1928년 3월 30일 출생으로 되어 있다.1945년 고후 중학교(현 야마나시현립 고후 제1고등학교)에서 교장 퇴진을 요구하며, 하츠카노 히로시 등과 파업을 지휘했다. 야마나시현청에 대한 데모 행진과 학교 점거를 계속하여, 교장이 사의를 표명하기에 이르렀지만 퇴학 권고를 받았다.
1947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그 후, 산야나 요코하마 고토부키초에 거주하며 육체 노동에 종사했다. 각지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하여 여러 번 체포되었다.
2. 2. 노동 운동과 투옥 (1947~1953)
1947년 일본공산당에 입당한 후, 산야나 요코하마 고토부키초에서 거주하며 육체 노동에 종사했다. 각지에서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하여 여러 번 체포되었다.[4]1952년 고후 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일본공산당에서 당원 자격을 박탈당했다.[4]
1953년 석방되었다.[4]
2. 3. 르포라이터 활동과 사회 비판 (1953~1970)
다케나카 로는 1953년 석방 후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1959년에는 "르포라이터"를 자칭하며 『여성자신』의 라이터가 되었다.[4] 1964년에는 데뷔작 『단지 일곱 가지 대죄 근대 주택의 꿈과 현실』을 출판했다.[4]1965년부터는 "세계 혁명"을 지향하며 아시아 각지, 쿠바, 대한민국, 팔레스타인 등을 방문했다.[4] 1968년에는 산야 해방 투쟁을 지원하고, 『탤런트 제국』에서 와타나베 프로덕션의 텔레비전계 지배를 고발했다.[4]
1969년, 『주간 묘조』에 연재한 "쓰여지지 않은 미소라 히바리"에서 부락해방동맹에게 규탄을 받았다. 다케나카는 이에 격분하여 부락해방동맹에 혈투를 신청했다. 그는 슈에이샤에 몰려간 부락해방동맹 대표 중 한 명이 손가락이 여섯 개라고 말한 것과, 흑인처럼 검냐고 말한 것에 대해 혐오감을 느꼈다고 저서에 기록했다.[6]
2. 4. 부락 해방 동맹과의 갈등 (1969)
1969년 주간 묘조에 연재된 "쓰여지지 않은 미소라 히바리"에서 "히바리의 노래는 차별의 토양에서 태어나 하층 사회에 공명의 음파를 퍼뜨린 것, 마치 그것은, 제아미, 이즈모의 오쿠니가 천민 계급에서 일어선 카와라자의 계보를 연상시킨다. ... 히바리가 하층 사회 출신이라고 쓰는 것은 '차별 문서'인가"라는 문구가 부락해방동맹에 문제시되어 규탄을 받았다.[6] 이 규탄 내용에 격분한 다케나카는 부락해방동맹에 혈투를 신청했다.[6]다케나카는 당시 상황을 저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6]
> 슈에이샤에 몰려간 (부락해방동맹의) 대표 중 한 명은, 손바닥을 펼치며, "손가락이 여섯 개나 있어!"라고 연신 말했다. 뭘 바보 같은 소릴, 소생은 혐오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남자는, 부락해방운동 반세기의 역사를, 최저의 차원으로까지 끌어내린 것입니다. 게다가, 얼굴을 쓰다듬으며, "흑인처럼 검은가"라고까지 말한다. 흑인이라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셈인가. 이러한 어리석은 자가 무리를 믿고 출판사를 위협하며 다니는, 대체 이것이 아버지를 감분시켰던 수평사의 최후인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6]
2. 5. 빈민 혁명론과 영화 제작 (1973~1980)
1973년 히라오카 마사아키와의 공저 『수호전 빈민 혁명을 위한 서설』을 간행하였다. 히라오카, 오타 료와 함께 빈민혁명론을 주장하며 "신좌익 삼바보 트리오"로 불렸다.[4]1974년 『키네마 준보』지에 일본 영화의 여명기를 탐구하는 『일본 영화 종단』을 연재하기 시작했다.[4] 1977년, 키네마 준보사의 내부 사정으로 연재가 중단되자, 이를 부당하다고 여겨 "키네마 준보 재판"을 제기했다 (1987년에 화해).[4]
1978년 이츠키 히로유키의 명작 "계엄령의 밤"의 영화화 실현을 위해 자바드 모리 사장과 논의하였고,[4] 1980년 "제작"으로 참여한 영화 "계엄령의 밤 (영화)"이 완성되었다.[4]
2. 6. 창가학회와의 갈등과 만년 (1983~1991)
1983년 창가학회의 초대 회장이었던 마키구치 츠네사부로의 인생을 탐구하는 『문서·서민 열전』을 『시오』지에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창가학회와 대립하여 연재가 종료되었다.[4]1985년 카가미 미츠유키, 타마가와 노부아키, 타마키 스미 등과 함께 "바람의 회·강좌 일본 100년"을 개강했다.[4]
1989년 잊혀져 가던 화가로서의 아버지 다케나카 에이타로를 재평가하기 위해 "다케나카 에이타로 회고전"을 기획 구성했다. 같은 해 7월, NHK 프로그램 『다케나카 에이타로에 대해』에 출연했다.[4]
1990년 1월, NHK 교육 텔레비전 프로그램 『꿈이여 왜 춤추는가/유메노 큐사쿠와 다케나카 에이타로』에 출연했다. 또한 『헤이세이 명물 TV 미야케 유지의 이카스 밴드 천국』의 심사위원을 맡았다.[4]
1991년 간암으로 인해 치요다구의 미쓰이 기념 병원에서 사망했다.[4]
3. 한국과의 관계
주어진 자료에는 다케나카 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섹션에 작성할 내용은 없다.
4. 사상과 평가
다케나카 로는 아버지 다케나카 에이타로의 영향을 받아 반권위주의와 저항 정신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 평론가라 불리는 것을 싫어했으며, 만년에는 '만사 평판가'라고 자칭했다.[9] 주변 인물로는 유메노 큐사쿠, 히라오카 마사아키, 오타 료, 스즈키 구니오, 다카하시 테츠, 오카도메 야스노리, 오시마 나기사, 후카사쿠 킨지, 사와키 코타로 등이 있다.
4. 1. 반권위주의와 저항 정신
다케나카 로는 아버지 다케나카 에이타로의 영향을 받아 반권위주의와 저항 정신을 갖게 되었다. 그의 주변 인물로는 유메노 큐사쿠, 히라오카 마사아키, 오타 료, 스즈키 구니오, 다카하시 테츠, 오카도메 야스노리, 오시마 나기사, 후카사쿠 킨지, 사와키 코타로 등이 있다.4. 2. 비판적 지식인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다케나카 로'에 대한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활동이나 내용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비판적 지식인' 섹션을 작성할 수 없다.4. 3. '만사 평판가'
스스로를 평론가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으며, 만년에는 '만사 평판가'라고 자칭했다.[9]5. 주요 저작
- 棄てられた在韓被爆者-日・韓両政府は彼らを死なせておくのか|기테라레타 자이칸 히바쿠샤 - 니치에이칸 료세이후와 카레라오 시나세테오쿠노카일본어 닛신 보도, 1970년
- 法を裁く-日弁連山根懲戒・抗議運動の記録|호오 사바쿠 - 니치벤렌 야마네 조카이 고기운도노 키로쿠일본어 경색사, 1980년 11월
- 百怪、わが腸に棲む-竹中英太郎作品集|햣카이, 와가 하라와타니 스무 - 다케나카 에이타로 사쿠힌슈일본어 삼일서방, 1990년
- 단지 일곱 가지 대죄(1964년) - 원작
- 처녀 상실(1965년) - 원작
- 일본 '69 섹스 엽기 지대(1969년) - 구성
- 쿠바의 연인(1969년) - 기획 중개
- 재한 피폭자 무고의 26년 왜노에게(1971년) - 기획
- 오키나와 야쿠자 전쟁(1976년) - 류카 지도
- 아시아 참회행(1976년) - 제작
- 대살진 일본 검우 열전(1976년) - 연출, 각본 (유메노 쿄타로 명의)
- 야마가미 이타로 여기에 잠들다(1977년) - 감독, 각본, 제작 (유메노 쿄타로 명의)
- 계엄령의 밤(1980년) - 프로듀스, 각본 (유메노 쿄타로 명의)
- 속물 도감(1982년) - 출연
참조
[1]
웹사이트
Takenaka Rō
http://kotobank.jp/w[...]
Kōdansha
2012-04-21
[2]
웹사이트
Eitaro Takenaka
http://takenaka-kine[...]
10 April 2004 Yukari Kaneko
[3]
서적
『無頼と荊冠』
[4]
서적
『「たま」の本』
[5]
서적
芸能の論理
幸洋出版
1982
[6]
서적
エライ人を斬る
[7]
서적
あかんやつら 東映京都撮影所血風録
文藝春秋
2013
[8]
서적
竹中労・無頼の哀しみ
現代書館
1999
[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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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代書館
1999
[10]
서적
最後の浪人 阿部勉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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