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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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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의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언론인으로, 1871년 고치현에서 태어나 1911년 대역사건으로 사형당했다. 그는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으로 언론 활동을 시작하여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1905년 투옥 후 무정부주의로 전향했다. 미국 체류 중 무정부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고 귀국 후에는 총파업을 주장하며 일본 사회당과 갈등을 겪었다. 1910년 대역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이후 일본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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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슈스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고토쿠 슈스이
본명고토쿠 덴지로
로마자 표기Kōtoku Shūsui
출생일1871년 11월 5일
출생지일본 제국 고치현 하타군 나카무라
사망일1911년 1월 24일
사망지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사망 원인교수형
직업언론인, 아나키스트, 정치 선동가
정치 및 사상
사상사회주의, 아나키즘
활동
사건대역 사건
영향 받은 사상가나카에 초민, 표트르 크로포트킨
교육 및 가족
모교국민영학회
기타
묘지세이후쿠지 (고치현 시만토시)

2. 생애

고치현 하타군 나카무라정(현 시만토시) 출신으로, 본래 음양사 가문이었던 고토쿠 집안은 이 시기에 양조업과 약재업으로 지역 유력자가 되어 있었다. 그의 처 모로오카 지요코는 막말 존왕양이 운동에 가담하여 아시카가 목상효수사건의 주모자가 된 국학자 모로오카 마사타네의 딸이다.

9살 때 유학자 기도 아키라의 수명사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배웠고, 11세 때 구제 나카무라 중학교(현 고치현립 나카무라 중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태풍으로 학교가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아 퇴학했다. 1887년 상경하여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이 되었고, 신문기자를 목표로 『자유신문』(자유당 기관지) 등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반포된 보안조례로 오사카로 옮긴 조민은 스도 사다노리의 연극 공연 기획을 옹호했는데, 그때 스도가 공연한 연극 중 하나인 「근왕미담상야서」(勤王美談上野曙)는 조민이 슈스이에게 집필을 의뢰했다고 한다.[24]

1898년 구로이와 루이코가 창간한 『만조보』 기자가 되었다. 『만조보』는 일본 황색언론의 선구자로, 권력자의 추문 보도를 추구하며 개인정보를 노출하는 기사를 주로 썼다. 1899년 말에는 도쿄의 신문들 중 발행부수 1위에 도달했고, 최대 발행부수는 30만 부를 기록했다. 슈스이는 기자 일을 하면서 국민영학회 등에서 공부하고, 1900년 8월 30일, 구 자유당계 정당인 헌정당번벌 이토 히로부미와 야합해 입헌정우회를 결성한 것을 비판하며 『만조보』에 “오호통재, 자유당 죽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자유당 제문」을 발표했다.[25] 같은 해 5월 황태자(후의 다이쇼 천황)의 결혼 축하 사설을 무기명으로 기고했고,[25] 6월 의화단 운동 제압 당시 일본군청나라의 마제은을 횡령한 혐의를 추궁하여 육군 중장 마나베 아키라를 휴직케 했다(마제은 사건). 이 일로 마나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원한을 샀는데, 이는 후의 대역사건에 연결되었다는 설이 있다.[26]

1901년 사회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같은 해 『이십세기지괴물제국주의』[27]를 간행하여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이는 당시 국제적 기준에서도 수준 높은 제국주의 비판서였다. 또한 같은 해 다나카 쇼조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해 메이지 천황에게 직소했을 때, 슈스이가 상소문 초고를 작성하고 쇼조가 수정했다. 쇼조가 상소문 집필을 의뢰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주저했지만, 슈스이 혼자 거절하지 않고 작성해 주었다.[28] 1902년에는 전해 사망한 조민을 추모하는 「조민 선생」을 발표했다.

1903년 러일전쟁 개전 당시 『만조보』가 비전론에서 개전론으로 전향하자, 슈스이는 사카이 도시히코, 우치무라 간조, 이시카와 산시로와 함께 퇴사했다.[29] 이후 평민사를 개업하고 주간지 『평민신문』을 창간하여 비전론을 이어갔다. 『만조보』 시절 동료였던 사이토 료쿠가 병으로 빈곤해지자, 『평민신문』에 코너를 마련해 원고료를 주기도 했다.[30] 1904년 「여로국사회당서」와 「공산당 선언」을 번역 발표했으나, 「공산당 선언」은 당일 판금되었다.[31]

1905년 신문지조례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표트르 크로폿킨을 알게 되어 무정부주의에 입문했다. 출옥 후 11월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에서 러시아인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며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겪고, 시민들이 자구자족하는 모습에서 무정부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보았다.[32] 같은 해 6월 귀국하여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옹호했다.

1906년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융화정책으로 합법 정당이 된 일본 사회당은 합법주의 노선을 추구하여 슈스이의 직접행동론과 갈등을 빚었다. 보통선거 운동을 주장한 가타야마 센 등은 "의회정책론"을 내세워 슈스이와 대립했고, 결국 결별했다.

1909년 『자유사상』을 발간했으나 당일 판금되었다. 1910년 대역사건 혐의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기독말살론』을 탈고했다. 이 책에서 예수는 천황을 은유하는 것이었다고도 하며, 신지학 협회의 애니 베산트의 기독교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베산트의 영향이 지적된다. 이 책은 슈스이의 유고가 되었다.[33]

1911년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어,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1월 24일 처형되었다. 당국은 사회주의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대역사건을 기회로 삼아, 사건 관여 정도가 얕고 대역죄에 해당하지 않는 슈스이 등까지 죄를 날조하여 처형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황족 암살을 음모한 것은 간노 스가, 니이무라 다다오, 미야시타 다키치,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다. 슈스이는 간노와 불륜 관계로 평민사에서 동거했기에 암살 계획을 알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간노가 주모자였다는 검찰 주장은 무리가 있었다.

슈스이는 감옥에 면회 온 처 지요코의 도시락에 손도 대지 않을 정도로 부부 관계가 냉각되어 있었지만, 사후 고향 시만토시의 절에 지요코의 무덤 곁에 안장되었다. 비문은 고이즈미 사쿠타로가 썼다.

2. 1. 초기 생애 (1871-1887)

고치현 하타군 나카무라정(현 시만토시)에서 태어났다. 고토쿠 집안은 본래 음양사 가문이었으나, 이 시기에 양조업과 약재업으로 지역 유지였다. 9살 때 유학자 기도 아키라의 수명사에 들어가 사서오경을 배웠다. 11세 때 구제 나카무라 중학교(현 고치현립 나카무라 중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태풍으로 학교가 파괴되어 재건되지 않아 퇴학했다.[6] 1887년, 상경하여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이 되었다.

2. 2.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 (1887-1898)

1887년, 고토쿠 슈스이는 상경하여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이 되었다. 그는 신문 기자를 목표로 자유신문(자유당의 기관지) 등에서 근무했다. 같은 해 보안조례가 반포되자 조민은 오사카로 거처를 옮겼다. 조민은 스도 사다노리의 연극 공연 기획을 옹호했는데, 이때 스도가 공연한 연극 중 하나인 「근왕미담상야서」(勤王美談上野曙)는 조민이 슈스이에게 집필을 의뢰했다고 한다.[24]

2. 3. 언론인 활동과 사회주의 입문 (1898-1905)

1898년 구로이와 루이코가 창간한 『만조보』의 기자가 되었다. 『만조보』는 일본 황색언론의 선구자로, 권력자의 추문 보도를 추구했으며, 개인정보를 노출하는 추문기사를 주로 썼다. 1899년 말에는 도쿄의 신문들 중 발행부수 1위에 도달했고, 최대 발행부수는 30만 부를 기록했다.

고토쿠 슈스이는 기자 일을 하면서 국민영학회 등에서 공부하고, 1900년 8월 30일, 구 자유당계 정당인 헌정당이 정적이었던 번벌 이토 히로부미와 야합해 입헌정우회를 결성한 것을 비판하며, 『만조보』에 “오호통재, 자유당 죽다”라는 문장으로 유명한 「자유당 제문」을 발표했다.[25] 같은 해 6월 의화단 운동을 제압할 때 일본군청나라의 마제은을 횡령한 혐의를 『만조보』에서 추궁하여 육군 중장 마나베 아키라를 휴직케 했다(마제은 사건). 이 일로 마나베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원한을 샀는데, 그것이 후의 대역사건에 연결되었다는 설이 있다.[26]

1901년 사회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참여했다. 같은 해 『이십세기지괴물제국주의』[27]를 간행, 제국주의를 비판했다. 이것은 당시 국제적 기준에서도 수준 높은 제국주의 비판서였다. 또 같은 해 다나카 쇼조아시오 광독 사건에 대해 메이지 천황에게 직소했을 때 그 상소문도 고토쿠 슈스이가 초고를 쓰고 쇼조가 손을 본 것이었다. 쇼조가 상소문 집필을 의뢰한 자들은 모두 두려워 주저하는 가운데 고토쿠 슈스이 혼자 거절하지 않고 써 줬다.[28]

1902년에는 전해 사망한 나카에 조민을 추모하는 「조민 선생」을 발표했다.

1903년 러일전쟁 개전 당시 『만조보』가 사론을 비전론에서 개전론으로 전향하자 고토쿠 슈스이는 사카이 도시히코, 우치무라 간조, 이시카와 산시로와 함께 퇴사했다.[29] 고토쿠 슈스이와 도시히코는 비전론을 계속 호소하기 위해 평민사를 개업하고 주간지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만조보』 시절 동료였던 사이토 료쿠가 병으로 빈곤해지자 그를 위해 『평민신문』에 코너를 마련해 원고료를 주었다.[30]

1904년 「여로국사회당서」를 발표, 곧이어 「공산당 선언」을 번역 발표하고 발표한 당일 판금된다.[31]

1905년 신문지조례로 인해 투옥되고 옥중에서 표트르 크로폿킨을 알게 됨으로써 무정부주의에 입문했다.

2. 4. 무정부주의로의 전향과 미국 망명 (1905-1906)

1905년(메이지 38년), 신문지조례로 인해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표트르 크로폿킨을 알게 되면서 무정부주의에 입문했다.[32] 그는 "사실, 저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자로서 [감옥에] 갔고 급진적 아나키스트로 돌아왔습니다."라고 주장했다. 출옥 후 11월 도미하여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미국에 망명해 있던 러시아인 무정부주의자 등과 교류하며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의 영향을 받았다.[32] 그는 산업노동자 세계(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라는 무정부 싱디칼리즘 노동조합과 접촉하여 엠마 골드만의 아나키스트 신문 ''머더 어스''(Mother Earth)를 알게 되었다.

이듬해 1906년 4월 18일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을 경험했다. 지진 복구 과정에서 시민들이 자구자족하는 모습에서 무정부공산주의의 편린을 목격했다.[32] 캘리포니아를 떠나기 전, 일본계 미국인 이민자들 사이에서 사회혁명당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아나키스트 혁명을 위해 테러 전술을 사용하는 쪽으로 빠르게 급진화되었다.

같은 해 6월 23일, 지진 때문에 귀국길에 올랐고, 6월 28일 귀국 환영회가 열렸다. 슈스이는 환영회에서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옹호했다.

2. 5. 일본 사회당과의 갈등과 대역사건 (1906-1911)

1906년(메이지 39년) 제1차 사이온지 내각의 융화정책으로 합법 정당이 된 일본 사회당은 합법주의 노선을 따랐기 때문에, 슈스이의 직접행동론과 갈등을 빚었다.[32] 보통선거 운동을 주장한 가타야마 센 등은 "의회정책론"을 내세워 슈스이의 직접행동론에 반대했고, 결국 둘은 결별했다.

1909년(메이지 42년) 슈스이는 『자유사상』을 발간했으나, 당일 판금되었다.

1910년(메이지 43년) 6월, 슈스이는 대역사건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슈스이는 간노 스가와 함께 온천에 머무르고 있었다. 슈스이는 옥중에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부정하는 『기독말살론』을 탈고했다. 이 책에서 예수는 천황을 은유하는 것이었다고도 한다. 『기독말살론』의 내용은 신지학 협회의 애니 베산트의 기독교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아, 베산트의 영향이 지적되기도 한다. 이 책은 슈스이의 유고가 되었다.[33]

이듬해 슈스이는 유죄 판결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1911년 1월 24일 처형되었다. 이러한 당국의 대응은 이미 국내외 지식인층의 비판을 받고 있었다. 당국은 사회주의자를 일망타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대역사건 발각을 기회로 삼아 사건 관여 정도가 얕고 대역죄에 해당하지 않는 슈스이 등까지 죄를 날조하여 처형했다. 사형수 12명 중 실제로 황족 암살을 음모한 것은 간노 스가, 니이무라 다다오, 미야시타 다키치,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다. 슈스이는 간노와 불륜 관계로 평민사에서 동거하고 있었기 때문에 암살 계획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간노가 주모자였다는 검찰 측 주장은 상당히 무리가 있었다.

3. 사상

고토쿠 슈스이는 나카에 조민의 문하생으로,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사상을 접했다. 1898년 구로이와 루이코가 창간한 『만조보』 기자로 활동하며 권력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1900년에는 입헌정우회 결성을 비판하는 「자유당 제문」을 발표했고, 의화단 운동 당시 일본군의 비리를 폭로하기도 했다.

1901년 사회민주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아시오 광독 사건과 관련하여 다나카 쇼조메이지 천황 직소 상소문 초고를 작성했다. 1903년 러일전쟁에 반대하며 『만조보』에서 퇴사하고, 사카이 도시히코 등과 함께 평민사를 설립하여 주간지 『평민신문』을 창간했다. 1904년에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하여 발표했으나 당일 판금되었다.

1905년 투옥 중 표트르 크로폿킨을 알게 되어 무정부주의에 입문했고, 출옥 후 미국으로 건너가 아나르코생디칼리슴의 영향을 받았다. 1906년 귀국 후에는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옹호하며 일본 사회당과 대립했다. 1909년에는 『자유사상』을 발간했으나 당일 판금되었다.

1910년 대역사건 혐의로 체포된 후, 옥중에서 『기독말살론』을 탈고했다. 이 책에서 예수를 부정하는 내용을 담았으며, 신지학 협회의 애니 베산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 1. 제국주의 비판

고토쿠 슈스이는 1901년에 저서 《20세기 괴물 제국주의(廿世紀之怪物帝国主義)》를 간행하여 제국주의(帝国主義)를 비판했다.[9] 이 책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모두 비판한 선구적인 저작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책에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이며, 전쟁과 빈곤을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제국주의가 피지배 민족의 자유와 권리를 억압하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한다고 비판했다.

3. 2. 무정부주의

고토쿠 슈스이는 표트르 크로폿킨의 영향을 받아 무정부주의에 입문했다.[34] 미국 체류 중 무정부공산주의로 사상이 더욱 급진화되었고, 크로폿킨에게 편지를 써서 그의 저작을 일본어로 번역할 허가를 받았다. 산업노동자 세계(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라는 무정부 생디칼리즘 노동조합과도 접촉하여 엠마 골드만의 아나키스트 신문 ''머더 어스''(Mother Earth)를 알게 되었다.[34]

귀국 후, 고토쿠는 일본 사회당의 의회 전술과 충돌하며 직접 행동을 통한 무정부주의 혁명을 주장했다. 이러한 사상의 확산은 당내 분열을 야기했고, 결국 1907년 일본 사회당은 해산되었다. 직접 행동파의 성장은 일본 근대 무정부주의 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고토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크로폿킨의 무정부 공산주의 책 『빵의 정복』과 미국의 무정부 생디칼리스트 팸플릿 『사회적 총파업』을 번역하고 출판하는 작업을 했다. 그는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옹호했다.

3. 3. 반기독교론

基督抹殺論|기독말살론일본어에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부정했다. 신지학 협회의 애니 베산트의 기독교 이론과 일치하는 부분이 커서 베산트의 영향이 지적된다.[13]

4. 대역사건과 처형

1910년(메이지 43년) 6월, 대역사건 혐의로 체포되었다. 당시 고토쿠 슈스이는 정부(情婦) 간노 스가와 함께 온천에 머물고 있었다.[33] 옥중에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예수를 부정하는 『기독말살론』을 탈고했는데, 이 책에서 예수는 천황을 은유한 것이라고도 한다.[33]

이듬해인 1911년(메이지 44년) 1월 18일, 사형을 판결받고, 1월 24일 다른 사형수들과 함께 처형되었다.[5][19] 이러한 당국의 대응은 국내외 지식인층의 비판을 받았다. 당국은 사회주의자를 일망타진할 목적이었기에, 대역사건 발각을 기회로 삼아 사건 관여 정도가 얕고 대역죄에 해당하지 않는 고토쿠 슈스이 등까지 죄를 날조해 처형했다. 사형수 12명 중 실제로 황족 암살을 음모했던 것은 간노 스가, 니이무라 다다오, 미야시타 다키치,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다.[33] 고토쿠 슈스이는 간노와 불륜 관계였고 평민사 내에서 동거 중이었기에 암살 계획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간노가 주모자였다는 검찰 측 주장에도 상당한 무리가 있었다.[33]

5. 사후 영향

도쿠토미 겐지로는 고토쿠 슈스이 등의 사형을 막기 위해 형 도쿠토미 소호를 통해 가쓰라 다로 총리에게 탄원했지만 소용 없었다.[34] 고토쿠 대역사건은 이시카와 다쿠보쿠 등 문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다쿠보쿠는 사건 전후 표트르 크로폿킨의 책이나 재판 기록을 입수, 연구해 「시대폐색의 상황」, 「A LETTER FROM PRISON」 등을 집필했다.[34]

슈스이는 법정에서 “지금의 천자는 남조의 천자를 암살하고 삼종신기를 빼앗아 취한 북조의 천자가 아닌가”라고 발언했고, 이 발언이 외부에 누설되어 난보쿠초 정통론이 일어났다.[34] 제국의회 중의원에서 국정교과서의 남북조 찬위설을 비난하는 질의서를 제출하고, 2월 4일 의회는 남조를 정통으로 인정하는 결의를 냈다.[34]

슈스이의 유작 『기독말살론』은 무신론 관점에서 쓰여졌고, 작중 말살 대상인 예수가 천황을 은유했다는 설도 있지만, 신사신토를 국교로 삼은 일본 정부는 반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책의 출판을 인정했다.[33] 『기독말살론』은 제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 기독교에 부정적인 우익, 관료, 군인, 신관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며 기독교 압박에 이용되었다.[33]

6. 한국과의 관계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은 한국의 초기 사회주의 운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그의 반제국주의, 반전 사상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3.1 운동 이후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고토쿠 슈스이의 사상이 재조명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그의 사상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중요한 지적 자원으로 평가받고 있다.

7. 평가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이자, 제국주의와 전쟁에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또한 무정부주의 사상가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27]

샌프란시스코 대지진 복구 과정에서 시민들이 자구자족하는 모습에서 무정부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보았고,[32] 표트르 크로폿킨의 저술을 통해 무정부주의에 입문했다.[29] 귀국 후에는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옹호하며, 보통선거 운동을 주장한 가타야마 센 등의 “의회정책론”과 대립했다.

그러나 대역사건으로 인해 오랫동안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다.[26] 당시 일본 당국은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날조하여 고토쿠 슈스이를 처형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황족 암살을 음모했던 것은 간노 스가, 니이무라 다다오, 미야시타 다키치, 후루카와 리키사쿠 4명뿐이었고, 고토쿠 슈스이는 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연루되어 처형되었다.[33]

최근에는 고토쿠 슈스이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에 영감을 주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8. 저작


  • 이십세기지괴물제국주의(1901년)[27]
  • 조민선생(1902년)
  • 사회주의신수(1903년)
  • 공산당 선언|공산당 선언한국어 (번역, 1904년)[31]
  • 기독말살론|그리스도 말살론한국어 (1910년, 유고)[33]

참조

[1] 서적 Kotoku Shusui: Portrait of a Japanese Radic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1
[2] 서적 Japan and the High Treason Incident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3] 웹사이트 基督抹殺論 http://www.iwanami.c[...]
[4] 웹아카이브 Full text of "Japanese Thought In The Meiji Era Centenary Culture Council Series" https://archive.org/[...]
[5] 간행물 新聞集成明治編年史 林泉社 1940-06-28
[6] 서적 日本社会主義演劇史 明治大正篇 筑摩書房 1975
[7] 서적 義和団戦争と明治国家 汲古書院 1986
[8] 서적 大正天皇 朝日新聞社 2000
[9] 웹사이트 足尾鉱毒明治天皇直訴文 http://www.japanpen.[...]
[10] 서적 大日本帝国の民主主義 小学館 2006
[11] 서적 夫・幸徳秋水の思い出 東洋堂 1946
[12] 논문 『共産党宣言』邦訳史 http://jshet.net/doc[...] 経済学史学会第75回大会 2011
[13] 기타
[14] 기타
[15] 웹사이트 近代日本における社会運動と高知県 http://oisr-org.ws.h[...] 2018-10-03
[16] 뉴스 【逆説の日本史】獄中で書かれた「イエス抹殺論」に隠された幸徳秋水の「本音」 https://www.news-pos[...] News-ポストセブン 2022-06-24
[17] 논문 幸徳秋水『基督抹殺論』とアニー・ベサントの〈世界教師〉論 https://cir.nii.ac.j[...] 近畿大学文芸学部 2015-09
[18] 웹사이트 死刑の前 https://www.aozora.g[...]
[19] 간행물 官報 1911-01-26
[20] 기타
[21] 방송 シリーズJAPAN 第二回 天皇と憲法 NHKスペシャル 2009-05-03
[22] 서적 余は如何にしてナショナリストになりし乎 光文社
[23] 서적 軍事の日本史 鎌倉・南北朝・室町・戦国時代のリアル 朝日新書
[24] 서적 일본사회주의연극사 메이지다이쇼편 지쿠마쇼보 1975
[25] 서적 다이쇼 천황 아사히 신문사 2000
[26] 서적 義和団戦争と明治国家 汲古書院 1986
[27] 논문 문헌해제: 幸德秋水『卄世紀之怪物帝國主義』 http://has.hallym.ac[...]
[28] 웹인용 足尾鉱毒明治天皇直訴文 https://web.archive.[...] 2018-09-26
[29] 서적 大日本帝国の民主主義 小学館 2006
[30] 서적 夫・幸徳秋水の思い出 東洋堂 1946
[31] 논문 『共産党宣言』邦訳史 http://jshet.net/doc[...] 経済学史学会第75回大会 2011
[32] 기타
[33] 논문 幸徳秋水『基督抹殺論』とアニー・ベサントの〈世界教師〉論 http://ci.nii.ac.jp/[...] 近畿大学文芸学部 2015-09
[34] 기타
[35] 방송 シリーズJAPAN 第二回 天皇と憲法 NHKスペシャル 2009-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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