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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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광현은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할 무렵 고려로 귀화한 발해의 세자이다. 925년 12월, 많은 왕족과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귀부하여 태조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과 계(繼)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백주(황해도 배천)를 하사받아 조상의 제사를 받들었다. 발해 멸망 후 고려는 대광현에게 백주를 하사하고 실질적인 통치자로 임명했지만, 왕실과의 혼인이나 관료 임용 등 실질적인 우대는 없었다. 대광현은 고려에 귀화한 후 안융진 전투에서 요나라에 맞서 고려를 승리로 이끈 대도수를 비롯한 아들을 두었으며, 협계 및 영순 태씨, 밀양 대씨의 시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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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광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대광현 |
원어 이름 | 大光顯 |
로마자 표기 | Dae Gwanghyeon |
한자 표기 | 大光顯 |
생몰년도 | 10세기 활동 |
직위 | |
목록 | 발해의 세자 |
부왕 | 발해 대인선 |
고려에서의 작위 | 고려의 원보 |
군주 | 고려 태조 |
영지 | 고려 백주 |
재임 기간 | 926년 ~ ? |
기타 정보 | |
다른 이름 | 왕계(王繼) |
성별 | 남성 |
국적 | 발해 → 고려 |
아버지 | 대인선 |
2. 생애
발해의 마지막 태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926년 발해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의해 멸망하자, 대광현은 많은 발해 유민들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그의 망명 시기에 대해서는 925년, 926년, 934년 등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대광현과 그 일행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왕건은 대광현에게 왕씨 성과 '계(繼)'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의 종적(宗籍)에 포함시켰으며,[7] 원보(元甫) 벼슬과 함께 황해도 백주(白州)를 식읍으로 주어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8] 함께 망명한 신료들에게도 작위를 내려주었다. 이러한 조치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또 다른 고구려 계승국인 발해의 유민을 받아들여 통합을 이루려 한 노력으로 평가받는다.[1]
대광현에게는 아들 대도수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고려-거란 전쟁 중 안융진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대광현은 오늘날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 그리고 밀양 대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2. 1. 발해 멸망과 부흥 운동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자, 발해의 태자였던 대광현(大光顯)은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발해 멸망 후 대인선의 동생 대씨(성명 미상, 대봉예(大封裔)로 추정)가 먼저 수도를 탈환하고 후발해를 세웠다. 대광현은 서남쪽 압록부(현 지린성 린장시) 방면에 있었기에 초기 대응이 늦었으나, 이후 현재의 함경도 일대에서 왕을 자칭하며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나 숙부와 결탁한 함경도 지역 호족 열씨(烈氏) 세력과의 경쟁에서 밀려났다.결국 대광현은 휘하의 발해 유민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였다. 그의 망명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하는데, 고려사 태조 세가에는 934년 7월로, 고려사 연표와 고려사절요에는 925년으로, 동국통감에는 926년 1월로 기록되어 차이를 보인다. 이는 발해 멸망 직후 망명했다는 기록과, 부흥 운동을 시도하다가 934년에 최종적으로 망명했다는 해석의 차이로 볼 수 있다.
대광현이 고려로 귀부할 때,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禮部卿) 대화균(大和鈞), 균로사정(均老司政) 대원균(大元鈞), 공부경(工部卿) 대복예(大福譽), 좌우위장군(左右衛將軍) 대심리(大審理), 소장(小將) 모두간(冒豆干), 검교개국남(檢校開國男) 박어(朴漁), 공부경(工部卿) 오흥(吳興) 등 많은 발해 관료와 유민들이 함께 하였다.
고려의 왕건은 대광현 일행을 후대하며 그에게 왕계(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의 종적(宗籍)에 포함시켰다.[7] 또한 원보(元甫) 벼슬을 주고 황해도 백주(白州)를 식읍으로 하사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8] 함께 온 신료들에게도 작위를 내려주었다. 왕건의 이러한 조치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또 다른 고구려 계승국인 발해 유민을 받아들여 통합을 이루었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1]
대광현에게는 아들 대도수가 있었는데, 그는 훗날 고려-거란 전쟁 중 안융진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대광현은 현재 대한민국에 주로 거주하는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및 밀양 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그러나 고려가 대광현에게 제공한 대우는 실질적인 우대 조치라기보다는, 귀순한 이민족 수장을 예우하는 일반적인 수준에 머물렀다는 평가도 있다. 왕씨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편입시킨 것은 상징적인 조치였으며, 백주를 맡긴 것은 망명한 발해 유민들을 그 지역에 정착시키고 대광현을 통해 관리하려는 목적이 컸다. 이는 당시 고려가 귀순한 호족에게 그 지역의 통치를 위임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실제로 신라 왕실과의 혼인이나 중앙 관료로의 등용과 같은 실질적인 혜택은 없었다.[5] 신라가 670년 망명해 온 고구려 왕족 안승을 금마저(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보덕국 왕으로 책봉하고[2], 680년 왕의 여동생과 혼인시키고 683년에는 김씨 성을 하사하며 경주에 거주하게 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킨 사례[2]와 비교된다. 또한 당시 고려에서 망명한 발해 유민들을 '실토인(失土人)'[3]이나 '원인(元人)'[4] 등으로 부르며 이방인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5]
2. 2. 고려 망명과 정착
926년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자, 발해국의 세자였던 대광현은 많은 발해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을 모색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여러 기록에 따르면, 그의 망명 시점에 대해서는 925년 12월, 926년 1월, 934년 7월 등 다양한 기록이 존재한다.대광현의 망명 시기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태조 세가의 934년 기록은 발해 멸망(926년) 후 8년이 지난 시점으로, 대광현이 발해 멸망 직후 바로 망명한 것이 아니라 압록강 유역(현 지린성 린장시 부근) 등지에서 발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다가 934년에 이르러 고려로 귀부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1] 이 과정에서 후발해를 세운 숙부 세력이나 함경도 지역 호족 열씨 세력과의 경쟁에서 밀려나 망명을 선택했을 수 있다.
대광현이 고려로 귀부할 때, 장군 신덕, 예부경 대화균, 균로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예, 좌우위장군 대심리, 소장 모두간, 검교개국남 박어, 공부경 오흥 등 많은 발해 관료와 수만 호의 유민이 함께하였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대광현 일행을 후하게 대우하였다. 대광현에게는 왕씨 성과 '계(繼)'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의 종적(宗籍)에 포함시켰다.[7] 또한 원보(元甫) 벼슬을 주고 황해도 백주(白州)를 식읍으로 하사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하였다.[8] 함께 온 신료들에게도 작위를 내려주었다. 이는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고려가 발해 유민을 포용하여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조치로 해석된다.[1]
그러나 일각에서는 고려의 대우가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도 있다. 신라가 고구려 왕족 안승을 받아들여 금마저(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에 보덕국을 세워주고 왕으로 책봉하며 신라 왕족과 혼인시키고 김씨 성을 하사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킨 사례[2]와 비교할 때, 대광현에게는 왕실과의 혼인이나 중앙 관료 임용과 같은 실질적인 우대가 부족했다는 지적이다.[5] 또한 당시 고려에서 망명한 발해인들을 '실토인(失土人)'[3]이나 '원인(遠人)'[4]으로 부르며 이역(異域)의 백성으로 간주했던 기록[5]도 존재한다. 대광현에게 백주를 맡긴 것 역시, 귀순한 지방 호족을 그 지역의 통치자로 임명하는 고려의 일반적인 정책 범주 내의 조치로 해석될 수 있다.
대광현은 대인선 국왕의 장남이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고려에서 아들 대도수를 두었는데, 대도수는 훗날 고려-거란 전쟁 당시 안융진 전투에서 활약하여 거란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웠다. 대광현은 오늘날 협계 태씨와 영순 태씨, 그리고 밀양 대씨의 시조로 여겨진다. 이들 중 일부는 13세기 경 성씨를 대(大)씨에서 태(太)씨로 변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2. 3. 고려의 발해 유민 정책 비판
고려는 망명한 발해 왕자 대광현에게 왕건이 직접 왕계(王繼)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왕실 호적에 편입시켰으며, 수도 개경과 가까운 백주(白州, 현 황해남도 백천군)의 장관으로 임명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이는 당시 고려가 귀순한 호족을 해당 지역의 책임자로 임명하여 지배를 위임하던 일반적인 정책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즉, 망명한 발해 유민들을 백주로 이주시키고 대광현을 그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삼은 수준이었다.[5]실제로 신라 왕실과의 혼인이나 고려 중앙 관료로의 임용과 같은 실질적인 우대는 없었다.[5] 이는 과거 신라의 사례와 비교된다. 신라는 670년에 망명해 온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 이후 보덕왕으로 책봉하고 금마저(현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땅을 내주어 고구려 부흥 운동의 거점으로 삼고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이도록 했다.[2] 나아가 680년에는 신라 왕족 여성을 안승과 혼인시켜 고구려 왕가와 신라 왕가의 결합을 도모했으며, 683년에는 신라 왕족과 같은 김씨 성을 하사하고 수도 경주에 거주하게 하여 신라 귀족으로 편입시키는 등, 고구려 왕통을 신라 체제 내에서 유지시키려는 노력을 보였다.[2]
반면 고려는 대광현을 비롯한 망명 발해인들을 "실토인(失土人)"[3] 또는 "원인(遠人)"[4] 등으로 부르며 이역(異域)의 백성, 즉 외부인으로 간주했음을 보여주는 기록도 확인된다.[5] 이는 고려가 발해 유민들을 완전한 동족으로 포용하는 데 소극적이었음을 시사한다.
3. 가계
- 부왕 : 대인선(大諲譔) - 발해 말왕(末王, 재위 : 906년~926년)[9]
- 모후 : 미상
- 손자 : 대도수(大道秀)[10][11][12]
- 친족
- * 대복모(大福謨)
- * 대복예(大福譽)
- * 대화균(太和鈞)
- * 대원균(太元鈞)
대광현은 대인선 국왕의 장남이자 발해의 마지막 태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아들 대도수를 두었는데, 대도수는 훗날 고려-거란 전쟁 중 안융진 전투에서 요나라에 맞서 고려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했다.[1] 또한 대광현은 현재 대한민국에 주로 거주하는 협계 태씨, 영순 태씨 및 밀양 대씨의 시조이다.
4. 대광현이 등장하는 작품
참조
[1]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arvard University Press
1984
[2]
서적
渤海国とは何か
吉川弘文館
2017-12
[3]
인용
[4]
인용
[5]
서적
渤海国とは何か
吉川弘文館
2017-12
[6]
문서
고려사에 "대광현은 발해국의 세자"라 했으니 말왕(末王)인 대인선의 아들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7]
문서
협계 태씨, 영순 태씨의 족보에서는 태조가 그에게 태씨(太氏) 성을 하사했다고 전한다. 남원 태씨, 나주 태씨, 밀양 대씨 모두 그에게서 분파된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8]
문서
대한민국의 태씨(太氏)와 대씨(大氏)는 대광현을 시조(始祖)로 본다.
[9]
문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대광현이 발해의 세자라고만 전하고 그 부왕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0]
문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성종과 현종 시기에 대도수(大道秀)의 기록이 보이는데, 한국의 태씨 족보에서는 대도수가 대광현의 아들이라 한다.
[11]
문서
대광현의 고려 귀부(925년 또는 934년)와 대도수의 활동(993년 안융진전투 때 중랑장으로 참전) 시기를 보면 60년의 차이가 나므로 부자간이 아니라 조손간으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12]
문서
정약용은 저서 발해속고(渤海續考)에서 대광현은 대인선의 세자가 아니고 발해국 멸망 후 유민과 함께 약 10년간 항거하다가 소식이 끊긴 그의 아우일 수도 있지 않느냐는 주장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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